142화 지금이 적기다
김정대는 자꾸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장근수를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나잇살이나 먹고 계속 받아먹기만 할래? 너도 진영이 덕분에 짭짤한 정보 많이 받았으니까 이제 좀 풀어내. 계속 그렇게 받아먹지만 말고.”
“그래서 나도 열심히 강선건설에서 받아온 투자금 얘네 사업부에 몰아줬잖아.”
“그건 내가 다 했지. 거기다 오늘 너는 나만큼 중요한 정보 얻었잖아.”
“정보? 내가? 내가 무슨 정보를 얻었다고 그래?”
장근수는 계속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정대는 그런 장근수를 내려다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2,100까지만 보라는 거. 너도 지금 나하고 이야기 같이 들어서 눈치챘을 거 아냐? 거기가 고점이라는 거 말이야. 유가가 이렇게 움직이는데 코스피라고 해서 멀쩡하겠어? 왜 알만한 사람이 모르는 척 그러고 있어? 나까지 창피하게…….”
장근수는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김정대의 말에 계속 모르는 척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연기를 더 하지 못해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는 한진영을 돌아봤다.
“이 녀석이 나까지 끌고 들어가네. 에이. 진영아. 나한테 뭐 필요한 거 있어? 그럼 이야기해. 내가 웬만하면 들어줄 테니까. 얘 말대로 나도 받아먹은 게 있으니 빚을 갚아야 할 테니까. 빨리 생각해서 이야기해야 해. 나는 빚을 묵혀놨다가 갚으라는 사람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장근수가 자리를 털고 김정대가 나갈 때 같이 나가려 일어났다.
한진영의 부탁이 지금 당장은 나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한진영은 지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미 이야기를 꺼낸 상황에서 다음을 기약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금방이라도 몸을 돌리려는 장근수를 잡았다.
“안 그래도 마침 본부장님께 부탁드릴 게 있었습니다.”
장근수는 김정대와 함께 나가기 위해 몸을 돌리던 것을 멈추고 한진영을 내려다봤다.
“벌써 생각났어? 곰곰이 생각한 거 맞아? 충분히 생각해보고 말해. 시간 많으니까.”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부탁할 게 있다는 한진영의 말에 장근수가 슬쩍 발을 빼는 모습을 보였다.
김정대는 그런 장근수의 등을 살며시 밀어 도망치지 못하게 막고는 웃는 얼굴로 장근수에게 말했다.
“생각해 놓은 게 있나 보네. 어서 이야기해보라고 해.”
김정대의 흥미롭다는 표정에 장근수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도대체 한진영의 입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기대하면서 한진영의 입술을 바라봤다.
“어. 그래. 이야기해 봐. 뭘 부탁하고 싶었는데?”
“회사에서 관리하는 큰손들을 초대해서 투자설명회를 한번 개최하고 싶습니다.”
“어? 뭘 한다고? 큰손을 뭐? 초대해서 투자설명회를 한다고? 이게 무슨 말이야?”
장근수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게 아니냐는 표정으로 김정대를 돌아봤다.
김정대도 이런 식의 이야기가 나올 거로 생각하지 못했는지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뭘 한다고?”
김정대도 장근수와 똑같은 말로 한진영에게 되묻기만 할 뿐이었다.
한진영은 놀란 두 사람을 향해 다시 천천히 이야기했다.
“큰손들에게 상반기 시장 전망에 대한 설명회를 하고 싶습니다. 호텔 컨벤션룸을 하나 빌려 조촐하게 말입니다.”
“컨벤션룸을 빌린다면 몇 명이나 초대해서 할 생각인데?”
“많아야 스물? 열댓 명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진영은 정확하게 신성증권에서 관리하는 VIP 숫자를 장근수 앞에서 이야기했다.
장근수는 놀란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VIP들에게 투자 권유를 하겠다는 말이야?”
“그거는 아니죠. 투자 권유를 하는 것은 그야말로 본부장님의 라인을 제가 마음대로 건드린다는 이야기인데…… 저는 그 정도로 파렴치하지 않습니다.”
“파렴치하지 않다고? 지분매각 건을 건드린 것만 봐도 내 쪽도 건드리지 말란 법이 없을 것 같은데?”
“오해입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대한정유의 윤 회장님이 저를 선택하셔서 그런 건데…… 제 마음대로 어떻게 그렇게 하겠습니까?”
오해라며 한진영이 손을 연신 휘둘렀지만, 장근수의 눈은 한진영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장근수가 관리하는 VIP들은 그야말로 신성증권을 튼튼히 지켜주는 큰 기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자금을 운용함으로써 WM 본부가 굴러간다고 말해도 비약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 그들을 모으고 싶다는 한진영의 말에 장근수는 선뜻 그러라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자네를 믿어. 그런데 VIP들은 자네를 몰라. 아니. 어쩌면 알 수도 있겠지. 나보다 우리 회사를 더 잘 아는 분들이니까. 뭐 그건 그렇다고 쳐도 모아서 자네가 하는 말을 듣는다는 보장이 없어. 그분들은…….”
“본부장님.”
한진영은 장황하게 말을 하는 장근수의 말을 끊었다.
정확하게 자기의 의중을 전해야 장근수가 자기 말을 알아들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제가 그분들에게 뭘 팔아먹기 위해 모아 달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그저 혼란한 앞으로를 대비할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고자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한 겁니다. 그리고 WM 본부에게 피해가 가진 않을 겁니다.”
“당연히 피해가 오면 안 되지. 그나저나 앞으로가 혼란해?”
장근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진영에게 되물었다.
김정대는 그런 장근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장근수는 한진영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김정대를 돌아봤다.
왜 자기 옆구리를 찌르냐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장근수를 향해 김정대가 말없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어서 좋다고 말하라는 무언의 제스처였다.
김정대는 유가 이후에 또 무언가가 있겠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장근수가 VIP들을 모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장근수에게 어서 좋다고 말하라는 뜻을 전한 것이었다.
장근수도 그런 김정대의 행동을 눈치로 알아챌 수 있었다.
“좋아. 뭐. 그렇다면…… 설 지나고…….”
“설 전에 만나는 것은 어떠십니까?”
“설 전? 야! 설이 뭐 얼마나 남았다고 설 전에 만나? 그분들이 노는 분들이 아니야. 얼마나 바쁜데.”
“그러니 설 전에 만나야지요. 본부장님. 기왕 하기로 마음먹으셨다면 설 전에 한 번 모아주세요. 그럼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풀어놓도록 할 테니 말입니다.”
“이거…….”
장근수는 싫다는 말할 수가 없었다.
한진영이 노골적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놓겠다고 말하는데 자기도 그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곁에 있는 김정대는 유가가 110불까지 오른다는 것도 잊은 채 한진영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장근수를 닦달해서 저녁때 자리를 마련하게 만들고 싶은 김정대였다.
장근수는 그런 김정대의 기운을 느낀 것인지 불편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결국 승낙을 하고 말았다.
“아유. 좋아. 그렇게 해. 대신…….”
장근수는 한진영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너 그분들 모아놓고 이상한 소리 하면 안 된다. 우리 본부의 기둥과도 같은 분들이야. 그분들이 심사가 뒤틀려서 만약 돈을 빼게 되면 우리 본부는 물론이고 회사에도 큰 영향이 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 그럴 일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장근수는 한진영의 대답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다짐을 받았다.
“그리고…… 내 쪽 선 넘어오면 안 된다.”
“그럴 일 절대 없습니다. 제가 그분들에게 종목 상담을 해주거나 아니면 어떤 종목에 투자하라는 권유를 할 일은 없을 겁니다.”
“좋아. 그럼 믿어보지.”
한진영의 대답을 들은 뒤 조금은 안심이 된 장근수가 알았다는 듯이 허락했다.
“자리를 마련해 볼 테니까 그렇게 알아. 대신 모든 분께서 오시지 못할 수 있다는 거 염두에 둬. 너무 시간이 촉박해서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니까.”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자리를 마련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제가 감사해야 하는 입장이니까요.”
시원한 한진영의 대답에 장근수는 더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알겠다는 말하고 몸을 돌려 회의실을 떠났다.
한진영은 두 사람이 나가자 여유로운 표정으로 회의실에 남아 조용해진 시간을 즐겼다.
한진영에게 얻어먹을 게 뭐 없을까 찾아왔다가 오히려 주머니가 털린 장근수가 떠난 문을 한진영은 지긋이 바라봤다.
***
설을 앞두고 투자전략사업부는 다른 곳들과 달리 연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료 준비는 어떻게 됐어?”
“다 해서 과장님 책상 위에 올려놨어요.”
최석영이 조수아에게 이야기하자 조수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최석영은 쌓인 서류 더미 사이에서 조수아가 건넸다는 자료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도대체 어디다 놨다는 거야?”
최석영은 서류 더미를 여기저기 들추고 있었다.
“과장님. 무지하게 바쁘신 것 같네요?”
“말 시키지 마. 오늘은 너하고 농담 따먹기 하면서 보낼 시간 없으니까.”
“그렇게 바쁘세요?”
어디서 났는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이성우가 최석영이 분주하게 찾는 책상 위를 같이 내려다보며 물었다.
“바빠. 정신 못 차릴 만큼 바빠.”
“그 VIP들과의 만찬인가 뭔가 때문에요?”
“그래. 보통 사람들도 아니라 우리 회사에서 특별 관리하는 VIP들이라고 하지 않냐? 그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이야기를 해드리기 위해…… 찾았다. 여기 있는 걸 모르고 한참 찾았네.”
최석영은 조수아가 건네준 서류를 찾아 들고 위를 털어냈다.
이성우는 그런 최석영의 모습을 가만히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바라봤다.
최석영은 먼지를 털어낸 서류를 들고 이성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노냐?”
“점심시간이잖아요.”
“그래서?”
“식사나 하러 가요.”
“나 바쁘다고 했잖아. 시간 없어.”
“아이참. 과장님도 궁금하지 않으세요?”
이성우는 여전히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채 최석영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최석영은 착 달라붙는 이성우를 떼어내려 했지만, 이성우는 더욱 꽉 최석영의 팔을 끌어안은 채 말했다.
“왜 갑자기 VIP들과 식사 자리를 가지는지 말이에요.”
“그거야 회사에서 VIP들에게 대접하려고 그랬나 보지. 그게 뭐?”
“그러니까요. 그런 건 WM 본부 소관의 일인데 왜 우리가 하냐 이 말이에요. 궁금하죠?”
최석영도 이번 자리가 단순한 자리가 아닐 거라 생각했다.
만남 자리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 게 아니냐는 느낌이 들었던 최석영이었다.
그러나 생각만 할 뿐 바깥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VIP들을 상대로 이야기할 사람으로 내정된 상황에서 그런 생각까지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궁금하긴 한데…… 그게 왜?”
“그럼 물어봐야죠.”
“물어봐? 누구한테?”
“누구긴 누구예요. 저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우리의 부부문장님에게 물어봐야죠. 가요.”
이성우가 최석영을 끌고 김준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한진영은 한참 새롭게 테스트 중인 프로그램 속의 전략을 놓고 김준하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러다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이성우와 최석영을 보고 김준하와 나누던 이야기를 멈췄다.
그리고 자기 앞까지 다가온 이성우를 향해 말했다.
“왜? 무슨 일 있어?”
이성우는 최석영의 팔을 끌어안은 채 한진영을 향해 웃었다.
“점심시간도 됐으니 식사해야지? 가자.”
한진영은 이성우와 최석영을 번갈아 바라봤다.
“특별히 바쁘지 않은 네가 한창 바쁜 과장님을 끌고 온 걸 보니 밥을 먹는 게 이유가 아니라 다른 게 이유인 것 같은데?”
“겸사겸사지. 겸사겸사.”
이성우는 태연한 표정을 하고는 남은 팔로 한진영의 팔을 감쌌다.
양쪽에 최석영과 한진영을 낀 이성우가 김준하를 돌아보고 말했다.
“너도 같이 가자. 오늘 밥은 알밥인데…… 괜찮지? 거기서 알밥 시키면 복어 지리가 나오는데 그게 또 일품이다. 가자.”
이성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한진영의 의사를 묻지도 않은 채 끌고 사무실을 나가기 시작했다.
김준하는 잠시 제자리에 서서 떠나는 세 사람의 등을 바라보다 급히 한진영의 뒤를 따랐다.
아직 한진영과 못다 한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회사를 나간 네 사람은 회사 앞에 자리한 일식집으로 향했다.
일식집까지 한진영의 팔을 끌어안고 있던 이성우는 일식집의 룸에 도착하고 나서야 잡고 있던 한진영의 팔을 풀어줬다.
“자자. 앉자. 음식은 내가 시킨다.”
이성우가 종업원을 불러 주문을 하는 사이 최석영이 이성우를 대신해서 사과했다.
“미안하다. 내가 말렸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마침 잘됐네요. 과장님하고도 이야기를 나눠야 했는데…….”
“나하고 이야기를 나눠?”
최석영이 무슨 말이 있을까 생각하는 사이 주문을 마친 이성우가 급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깐. 나 빼놓고 이야기 하지 마. 내가 먼저 시작할 거니까.”
이성우는 앉아있는 나머지 세 사람의 시선을 모은 후 한진영을 똑바로 바라보고 물었다.
“뭐야? VIP들 모아서 뭐 하려고? 소문에는 투자 권유는 하지 않을 거라는데…… 그럼 괜히 그 사람들 앞에서 입 아프게 떠들기만 하고 끝나는 거 아니야?”
최석영은 가슴속에 품고 있는 말을 이성우가 대신해줘서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에 나올 한진영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진영은 이런 의문이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해해. 이렇게 바쁠 때 갑자기 VIP라는 사람들 모아서 괜한데 힘쓰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어.”
한진영의 말에 김준하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번 일까지 더해지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그런 그들을 한차례 둘러본 후 말했다.
“그런데 지금이 적기라서 그렇다.”
“적기? 어떤 적기?”
“VIP들을 홀릴 수 있는 적기.”
“홀려?”
이성우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한진영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들을 우리에게 홀리게 만들기에 지금이 딱 적기라는 말이야. 우리에게 빠져 허우적대게 만들기 지금이 아주 좋은 타이밍이야.”
한진영의 말에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은 영문을 모르게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