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의심 한 조각을 심다
기풍그룹 회장실에 오랜만에 모인 세 사람은 근황을 물을 것도 없이 바로 한진영이 들고 온 서류를 내려다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걸 한 달 만에 다 만들어 놓은 거라고?”
이정훈 회장은 한진영이 LZ그룹과 대한정유를 통해 받아온 확인서를 내려다보고 어이없어했다.
“너만 다른 시간을 사는 거냐? 어떻게 이걸 한 달 만에 다 해왔어? 석 달 안에만 해오면 잘해왔다고 생각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회장님께서는 석 달을 기다리실 수 있으시겠지만, 신성그룹은 석 달을 기다리지 못하니까요.”
“들었다. 사고를 크게 쳤다며?”
이정훈 회장은 아쉬워하며 말했다.
“그 양반들 무리한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위태위태하다고 생각했지. 아쉬워.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두어 달 더 기다려볼 걸 그랬어. 그랬다면 7,000억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낮은 가격에서 너희 신성증권을 손에 넣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랬다면 이걸 가지지 못하셨겠죠.”
한진영은 가지고 온 서류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정훈 회장은 한진영이 가리킨 서류들을 보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래. 그렇게 따지면 나도 손해 본 건 아니야. 이건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의 것들이니까.”
이정훈 회장은 한진영이 가지고 온 서류를 손으로 들어 올린 후 한진영을 향해 휘저으며 말했다.
“네가 내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게 말입니다. 다음 생에는 꼭 회장님 아들로 태어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그래그래. 꼭 그렇게 해야 한다. 저 모자란 놈보다는 네가 내 아들로 더 어울리니 말이야.”
처음보다 한진영을 대하는 게 편해진 모습의 이정훈 회장이었다.
아무래도 조금 뒤면 자기 회사의 직원 된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편한 모습으로 한진영을 대했다.
이성우가 기분이 안 좋을 만한 이야기를 이정훈 회장과 한진영이 나누었다.
그러나 이성우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에게는 그런 하찮은 농담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정훈 회장이 가지고 온 서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지금 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자기의 미래가 바뀐다고 생각했다.
자리에 있는 세 사람 중에 이성우가 가장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이정훈 회장은 한진영을 향해 농담을 건넨 후 서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꼼꼼히 서류를 훑어 보던 이정훈 회장은 대한정유 측 서류를 다시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대한정유 윤 회장님께서 연락을 주시기는 했다. 우리 쪽에서 생산된 리튬을 공급받고 싶다고 말이야. 호주에서 채광된 리튬 원석들로 가공된 원료를 공급받고 싶다는데…… 연간 1만 톤 규모를 원하더구나.”
이정훈 회장은 고개를 들어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걸 10년. 독점으로 말이다.”
한진영은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훈 회장은 그런 한진영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알고 있었던 것이냐?”
“예상했던 일이었습니다.”
“예상했다고?”
“네. 제가 LZ쪽과 대한정유를 10년 동안 묶어 놓았으니까요. 아마 윤길영 회장님은 기풍철강과도 10년 동안 묶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세 곳이 함께 10년 동안 동지로 성장하기를 바라시는 거 같습니다.”
“10년 동안…….”
이정훈 회장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에 한진영을 바라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날렸다.
“그럼 10년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거냐?”
한진영은 자기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이정훈 회장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대답했다.
“10년이면 충분합니다.”
“10년이면 충분해? 뭐가 말이냐?”
“세 곳의 유대가 단단해지는 데 필요한 시간 말입니다. 10년이 지난 뒤에는 떨어지라고 해도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이미 단맛을 충분히 봐서 그 맛을 포기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이정훈 회장의 입가 미소가 짙어졌다.
“뭘 믿고 그렇게 자신하지? 네 생각에는 지금 이 사업이 그만큼 큰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이느냐?”
“네. 그러니 이렇게 발 벗고 제가 나서는 것 아니겠습니까? 가치 그 이상을 품고 있는 게 이 분야입니다.”
이정훈 회장은 한진영을 지긋이 바라본 채 물었다.
“대한에너지 유증에 참여한다고 하고…… LZ에서는 LZ신소재 주식을 받기로 했다며?”
“소문이 빠르네요.”
“소문이 아니라 두 곳의 회장님들이 나에게 물어보더구나. 나는 뭘 주는 거냐고 말이야. 그런데……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너에게 주는 게 없는데…… 뭘 줘야 할까? 원하는 게 있느냐? 있으면 말해봐라. 내가 웬만한 건 들어줄 테니 말이야.”
이정훈 회장의 말에 이성우의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이정훈 회장은 그런 이성우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진영이에게 선물을 준다는 데 왜 네가 좋아해?”
이성우는 이정훈 회장의 비아냥 섞인 말에도 주눅이 드는 모습 하나 없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회장님께서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시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요.”
“회장님?”
“네. 앞으로 공적인 자리에서는 회장님이라고 호칭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며칠이나 가는지 보자.”
이정훈 회장은 이성우의 말에 가시 돋친 말을 건넸지만, 이성우는 그 말이 아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겉으로만 가시가 보일 뿐이지 말 속에는 날카로움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정훈 회장은 빙글빙글 웃고 있는 이성우의 모습에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리고 웃는 것을 멈추지 않은 채 다시 한진영을 향해 조금 전 나누던 이야기를 계속이었다.
“그래. 뭘 줄까? 돈? 돈은 두 곳에서 충분히 받은 것 같고…… 어떠냐? 내 사위가 되는 건?”
“사양하겠습니다.”
“사양한다고? 왜? 자네가 내 딸 옆에 있어주면 도움이 더 될 것 같은데 말이야. 가족으로서…….”
이정훈 회장의 말에 웃던 이성우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지고 말았다.
도움이 된다는 말의 뜻 속에 감추어져 있는 의미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성우는 급히 한진영의 옆 얼굴을 살폈다.
조금 전 분명 사양한다는 말을 건네기는 했지만,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걱정된 마음이 일어난 이성우였다.
이성우의 걱정과 달리 한진영의 마음은 고요하기만 했다.
이정훈 회장의 제안이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으며, 그러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에게 기풍의 사위라는 자리는 독이 가득 든 성배나 마찬가지였다.
한진영은 자기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이정훈 회장을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 저는 욕심 내지 않습니다.”
“왜? 자네라면 충분히 자격이 될 텐데.”
“결혼은 비슷한 사람끼리 해야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살아온 환경 속에서 정립된 가치관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 것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저와 이유정 본부장님은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그건 다른 쪽 이야기도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 유정이가 자네를 마음에 들어 할지도 모를 일 아닌가?”
거절을 하는 한진영을 이정훈 회장이 끈질기게 붙잡았다.
이성우는 그런 이정훈 회장을 보며 얼굴이 사색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한진영에게 마음 속으로 흔들리지 말라는 말을 큰소리로 외쳤다.
한진영이 이유정 쪽에 붙는 일만은 막고 싶은 이성우였다.
자기를 기풍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혀주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던 한진영이었지만, 동생인 이유정과 결혼하는 순간 어떻게 변할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우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듯이 한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정훈 회장은 그런 이성우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웃으며 한진영을 향해 제안한 후 답을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 속에는 이성우도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정훈이 이성우의 표정 변화를 살피듯이 한진영도 이정훈의 표정 변화를 살폈다.
그리고 이정훈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확인하고 살며시 웃었다.
‘마음속에 의심 한 조각을 심는 데는 성공했구나.’
이정훈 회장의 마음속에 이성우에 대한 신뢰를 쌓는 데 노력했던 한진영이었다.
그리고 이성우의 위치가 이정훈 회장의 마음속에서 올라가며 자연스레 자기의 위치도 올라갔음을 알고 있던 한진영이었다.
그러나 일이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에 더는 자기의 위치가 높아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나중에 독립해 나갔을 때 조금 더 편안한 분위기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정훈 회장의 마음속에 의심 한 조각을 심기를 원했고, 지금 그 의심 조각이 이정훈 마음속에 깊이 박히는 것을 확인했다.
한진영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정훈에게 말했다.
“회장님. 저에게 무언가를 주시려 하신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셨으면 합니다.”
“더 좋은 것? 내 사위가 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는 말인가?”
“네. 있습니다.”
명확히 다시 한번 거절하는 모습을 보인 후 한진영은 이정훈 회장을 향해 원하는 것을 이야기했다.
“회사 이름을 바꾸어 단 뒤에 저에게 조금 더 많은 자유를 주십시오.”
“많은 자유라니?”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는 권한 말입니다. 저는 그게 가지고 싶습니다.”
“그게 내 사위가 되는 것보다도 더 가지고 싶다는 말인가?”
“네. 저는 절실하게 가지고 싶습니다.”
한진영은 이정훈이 알고 있을 것을 전제로 하여 이야기했다.
“어려움을 겪는 신성그룹 밑에서 여러 가지 많은 제약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투자금을 뺏기기도 했고요.”
“흐음~”
이정훈 회장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진영이 말도 안 되는 결과들을 내놓고 있지만, 그게 얼마나 많은 제약을 뚫고 내놓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진영의 말이 이정훈의 귀에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것으로 들렸다.
그도 능력 있는 자가 마음대로 날개를 펴지 못했을 때의 답답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시험해볼 것도 많습니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제 권한이 높아져야겠지요. 저는 그 높아진 권한이 필요합니다. 그걸 보장해 주십시오.”
“그것뿐인가?”
“회장님. 저에게는 지금 그게 돈보다 더 중요합니다.”
“좋아. 그렇게 하세. 그리고 가족이 되는 이야기는 차차 시간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것으로 해. 그건 그렇게 급한 게 아니니 말이야.”
마지막까지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정훈 회장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이정훈 회장이 어떤 의미로 그런 제안을 건넸는지 알고 있었다.
아들인 이성우가 휘둘릴 것 같으니 차라리 가족으로 묶어두는 편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에서 한진영에게 미련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진영은 이런 식의 제안은 오래가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저 이정훈의 말에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계속 줄다리기하듯이 고집을 부리며 감정 소모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기풍철강의 신성증권 인수는 확정됐다.
한진영은 계획했던 하나의 계획이 마무리되는 것을 직접 확인하며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자리를 마무리했다.
***
시장에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갑작스러운 신성증권의 매각 소식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함을 감추지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인수회사가 기풍철강이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다시 한번 놀랐다.
기풍철강과 신성그룹은 신성증권을 놓고 한차례 매각이 무산되는 아픔을 겪었던 사이였기 때문이다.
인수협상이 깨지게 되면 두 곳은 좋은 감정이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게 어떤 이유에 의해서든 서로 좋게 볼 수가 없었다.
누구의 잘못이건 마찬가지였다.
앙금이 남을 수밖에 없으며 두 번째 협상은 없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일반적인 현상을 모두 거스른 채 이루어진 합의를 이루어내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이 무엇인지 찾으려 노력했고, 결국 그들은 이유를 찾아냈다.
총액 7,000억.
현금 인수.
너무나 놀라운 인수협상 결과에 사람들은 당황하기까지 했다.
분명 지난 협상에서 실패했던 가격이 4,000억대였음을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었는지 기풍철강은 7,000억에 그것도 전액 현금으로 지급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신성증권을 인수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기풍철강이 무리하는 게 아니냐는 시각으로 이번 인수협상을 바라봤다.
외부가 혼란스러워하는 것 이상으로 신성증권 내부도 혼란스러워했다.
당장에 회사 이름이 바뀌는 것에 직원들은 자기 자리를 보존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이어진 소문에 직원들의 혼란은 더욱 커졌다.
“정말이에요?”
“네?”
자리에 앉아 잡지를 뒤적이던 이성우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조수아와 그녀를 앞세운 다른 사업부 직원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뭐가요?”
“정말…… 대리님이 그 기풍철강의…….”
“아~ 네. 맞아요.”
“어떻게요?”
말도 안 된다는 듯한 조수아의 표정에 이성우가 오히려 당황해서 물었다.
“뭘 어떻게라는 말씀이세요?”
“아니. 왜 대리님이 기풍철강 회장님의 아들이냐고요.”
“제가 왜 우리 아버지 아들이 아니어야 하는데요?”
어이가 없다는 이성우와 그런 그보다 더 어이없어하는 조수아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조수아는 앉아있는 이성우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납득할 수 없어요.”
“뭐가요?”
“대리님이 기풍철강 회장님 아들이라는 거요. 이건 받아들일 수 없어요.”
“아니. 수아 씨가 받아들이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니요. 그래도 이건 인정할 수가 없어요. 차라리 우리 한 부부문장님이 기풍철강의 아들이라는 게 더 어울려요.”
이성우는 팔짱까지 끼고 지금 상황을 인정할 수 없다는 조수아를 향해 말했다.
“저기…… 조수아 씨. 그…… 기풍철강 회장님의 성이 뭔지는 아시죠? 이씨를 쓰고 있는데 어떻게 한 부부문장이 아들이 될 수 있겠어요.”
“숨겨놓은 아들 뭐 이런 거요. 하여튼…… 그게 더 어울려요. 대리님이 기풍철강의 아들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가 없어요.”
“저기요. 조수아 씨. 이건 인정하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이성우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사업부 직원들을 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