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174화 (174/650)

174화 좌절 속에 찾은 기대

떠나는 장근수와 김정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성우가 걱정되는 듯한 눈으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괜찮을까?”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 이미 분위기는 잡혀 있어서 크게 소문내려 하지 않아도 돼. 적당히만 이야기해도 알아서 소문이 커질 거다.”

“그래도…….”

이성우는 여전히 걱정이 가시지 않는 모습으로 한진영에게 말했다.

“우리가 굳이 그런 소문을 낼 필요가 있어?”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야. 그리고 우리가 어디서 일하는 지 잊지마. 우리는 정보가 생명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에게 빠르게 정보를 알리는 건 오히려 그들을 위한 일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묘하게 설득이 되는 말이었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더는 직원들이 받을 혼란을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 남의 걱정을 하기에는 자기 코가 석 자였기 때문이다.

“뭐 그거야 네가 괜찮다니까 하니까 괜찮겠지. 그럼 이제…… 나는 어떡하냐?”

“너?”

“그래. 나. 나도 해결해 줘야지.”

“뭘 해결하는데?”

“아버지한테 가서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말이야.”

이성우는 혹시 다른 사람들이 자기 말을 들을까 걱정이 되는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고 말했다.

“아버지 성격에 가만히 놔두실 양반이 아니야. 정리 싹 해서 자기 사람들 앉히려고 할 거라고. 그런데 거기다 대고 내가 안 된다고 말해봐. 아버지가 뭐라고 하겠어? 겨우 올려놓은 좋은 이미지 한 방에 다 날려버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정말로 걱정이 됐는지 이성우는 한숨을 한 가득 내쉬었다.

“혹시 노조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고용승계를 약속하는 것도 너무 믿지 마. 길어야 2~3년? 그것조차도 아마 별의별 이유를 들어서 그 전에 자르려고 하실 양반이야.”

이성우는 뻔히 보이는 미래에 걱정됐는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난 못 해. 난 할 수 없어.”

“뭘 그렇게 자꾸 겁을 먹고 못한다고 그러는 거야?”

“아버지가 계획한 일 트는 거 말이야. 나 그거 못한다고.”

이성우는 말을 할수록 걱정이 됐던지 표정을 굳히고 양손을 들어 머리를 가리켰다.

“너는 보지 못해서 몰라. 머릿속으로 그린 일이 틀어졌을 때 무섭게 변하는 양반이야. 그런데 내가 나서서 그 양반이 하려는 일을 막으라고? 난 못해. 난 할 수 없어.”

“알아. 아버지에게 밉보이기 싫다는 거. 하지만 명심해. 지금 밉보이지 않으면 다음은 없다는 걸 말이야.”

“다음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안 된다고 세차게 흔들던 이성우의 고개가 멈췄다.

그리고 한진영을 바라본 채 한진영의 말뜻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양어깨를 잡고 말했다.

“지금밖에 없어. 기회는 이번 딱 한 번뿐이야.”

“기회라니? 아버지를 막는 게 기회라는 말이야?”

“네 사람으로 주변을 채우는 거 말이야. 시작할 때 밖에 가질 수 없는 기회라는 거 모르겠어? 지금 기회를 놓치면 너는 계속 회장님의 꼭두각시 그 이상을 할 수가 없게 돼. 그러니 회장님이 사람들을 심기 전에 네 사람으로 주변을 채워야 해. 그래야 네가 뭘 하려 하건 네 뜻대로 할 수 있어.”

“내 뜻대로?”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잠시 한진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한 번도 자기 뜻대로 무얼 해본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이성우였다.

아버지의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신성증권이자 미래의 기풍증권의 사장 자리에 앉게 되는 것 이상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한진영의 말을 듣고 다른 마음이 생겨났다.

“정말로…… 내 뜻대로 할 수가 있어?”

“그러려고 하는 일이야. 그게 아니면 뭐 하러 회장님의 뜻을 거스르려 하겠어?”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의 눈이 흔들렸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눈빛 속에서 욕망을 발견하고 다시 한번 이성우의 마음을 흔들었다.

“네 회사가 될 곳이야. 그렇다면 네가 직접 이끌어야지. 안 그래?”

“내 회사…….”

“그래. 그리고 이 회사를 이용해서 기풍그룹까지 다 장악해 나아가야 해. 그러려면 네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어?”

“맞아. 내 사람이 필요해.”

“그러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 절대 기죽지 말고…….”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는 마음을 다잡았는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한진영은 이성우의 자신감을 증폭시키려는 듯이 등을 두드리며 이성우를 뒤에서 밀어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뒤에는 자기가 있다는 뜻을 이성우에게 전한 것이었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뜻을 받아 가슴을 활짝 펴고는 다가올 두려움을 지워나갔다.

두 본부장이 한진영과 만난 이후 신성증권에는 한 가지 소문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기풍철강이 신성증권을 인수한 이후 대대적인 규모의 감원이 진행될지 모른다는 소문이었다.

신입직원부터 시작하여 임원진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정리해고로 기존 신성그룹의 물을 빼버리겠다는 의도가 담겨있다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신성증권 직원들은 이런 소문에 크게 흔들렸다.

회사가 인수당하는 입장에서 어쩌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언제나 인수하는 쪽에서는 새로운 자기들의 이미지를 심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소문의 강도는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과감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규모라는 말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가는 중이었다.

특히 임원진들의 대규모 감원은 숙청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라고 했다.

신성증권은 일이 안 될 정도로 빠르게 어지러워져 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문에 불을 댕기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기풍철강에서 사람들이 왔다며?”

“살벌해. 아주 살벌해.”

장이 마무리되고 나서 쉬는 시간에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오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제일 먼저 직원들부터 자른다고 하던데?”

“그건 쉽지 않을 거야. 노조에서 가만히 있겠어?”

“이미 노조도 넘어갔다는 말이 있더라.”

“노조가 넘어가?”

이야기를 꺼낸 직원이 주변을 살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회사에 기풍철강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노조와 물밑에서 협상을 마쳤다는 말이 있어.”

“그게 말이 돼?”

“말이 왜 안 돼. 기풍철강이 어디야? 노조가 세기로 유명한 곳 아니야? 그런 곳에서 수십 년 동안 회사를 움직였던 사람들인데 우리 같은 노조는 그냥 아이들 같아 보이지 않겠어? 이런데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그건 맞는 말이야. 내가 듣기로는 기풍철강하면 십 년 전만 해도 매년 사측과 노조가 쇠파이프 들고 싸우기를 밥 먹듯이 한 곳이라고 하더라. 그 때문에 사람도 여럿 죽어 나갔고…… 그런 곳의 노조를 보다가 우리를 보면…… 애들 같겠지.”

옆에서 맞장구를 치자 분위기는 회사에 발을 들이기 전에 이미 노조를 포섭했다는 쪽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럼 어떡해? 나는…… 실적 별로 안 좋은데.”

“너만 그렇겠냐? 나도 마찬가지고 얘도 마찬가지야. 기풍 눈에는 죄다 안 좋게 보일걸? 한 사람만 빼고…….”

“한 사람? 누구? 그 투자전략사업부의 한진영?”

한진영이 아니냐고 대답한 동료의 말에 모두가 다 똑같다고 이야기한 직원이 웃었다.

“그 사람이라고 다를 거 같아? 다 똑같아. 여기 우리랑 같은 사람이야.”

“뭐가 똑같아? 그 사람 실적 장난이 아니라며?”

“실적이 장난 아니면 뭐 해? 어차피 월급 받는 거는 똑같은데.”

“그럼 누구? 누가 우리랑 다른데?”

“있잖아. 한 사람.”

“그러니까 누구?”

“기풍철강 이정훈 회장의 아들. 게다가 그냥 아들이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야. 그리고 회사가 기풍으로 완전히 넘어가면 사장 자리에 앉는다는 이야기가 있고…… 그 사람 빼고는 우린 다 똑같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야. 한진영이나 우리나…….”

이성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똑같다는 말에 힘이 실렸는지 모여 있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인 뒤 고개를 숙였다.

암울한 자기들의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져 그러는 듯했다.

그 모습에 쐐기를 박는 말이 이어서 나왔다.

“오늘 찾아온 기풍철강이 제일 먼저 어디로 갔는지 알아?”

“어디?”

“경영지원본부부터 털고 있다고 하더라.”

“경영지원본부? 거기를 왜?”

“직원들 명단부터 시작해서 인사 고가 같은 것부터 확보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럼…….”

“그래. 제일 먼저 하려는 일이 직원들 정리라는 이야기야.”

말이 끝나자마자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였다.

말을 한 이나 듣는 이나 모두가 같은 처지라는 생각에 같은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직원들의 이야기대로 기풍철강 전략팀은 인수협상 계약이 체결되자마자 득달같이 신성증권으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가장 먼저 확보한 것이 바로 신성증권 직원들에 대한 정보였다.

이름과 부서는 물론이고 실적과 직원들 간의 평가까지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을 싹 긁어모았다.

누가 보더라도 대대적인 인원 정리를 위한 사전 단계로 보일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미래전략팀이 그렇게 직원들의 정보를 모은 다음에 한 일은 일제히 투자전략사업부로 향하는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늦게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기풍철강 미래전략팀을 이끌고 있는 권수형 부사장은 이성우를 향해 깍듯이 인사했다.

그리고 차분히 함께 신성증권으로 온 미래전략팀 팀원들을 이성우에게 소개하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부팀장은 이번에 새로 발령받아 합류한 친구입니다. 아마 나중에도 사장님께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사장이라니요? 저 아직 대리예요.”

“회장님께서 이곳에 오기 전에 저에게 사장님 체제로 기풍증권이 나아갈 거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니 저희끼리 있을 때는 먼저 사장님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뭐…….”

갑자기 사장이라 불리어서 쑥스러웠던지 이성우가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주변 직원들의 눈빛이 변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진영이 미리 이성우에게 언급했던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좌절 속에서 찾은 기대.

사람들은 그런 기대에 찬 눈빛으로 이성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

인사를 하느라 뻔질나게 투자전략사업부를 찾던 사람들이 이제는 살려달라며 이성우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자식이 아직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며 애원하는 상무.

아픈 부모님을 부양하고 있다는 전무.

동생의 빚을 아직도 갚고 있다는 부사장.

세상의 모든 짐은 이곳 신성증권 임원들이 지고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애처로운 표정으로 이성우를 찾아와 부탁했다.

이성우는 찾아온 임원들을 향해 아직 인수가 마무리된 것도 아니니 조금 더 지켜보자는 말을 건네고 돌려보냈다.

그렇게 한숨 돌리려 했을 때 이번에는 일반 직원들이 이성우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취직한 것을 여전히 기뻐한다던 신입직원.

차를 새롭게 뽑았다는 대리.

아이가 태어나 방 하나짜리 월세에서 겨우 두 개짜리 전세로 옮겼다는 과장.

모두 제각기 이유를 이야기하며 이성우를 향해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성우는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회사에 들어올 때부터 시작하여 퇴근할 때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에 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한진영이 이야기대로 흘러가는 것에 피곤함보다는 안심이 되는 이성우였다.

그리고 이제 이성우는 직원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기풍철강 본사로 향했다.

“여긴 어쩐 일이냐?”

이정훈 회장은 찾아온 이성우에게 차를 내주며 자기를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이성우는 아버지인 이정훈 회장이 내민 찻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조심스럽게 탁자에 놓으며 대답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혹시 직원들 자르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찾아온 거라면 헛수고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말한 이정훈 회장의 말에 이성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정훈은 그런 이성우를 보고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깟 이야기를 하려고 귀하디 귀한 시간에 여기로 온 거냐?”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기는 내가 모를 거로 생각한 거냐?”

이정훈 회장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지금 신성증권에 가서 일하고 있는 미래전략팀 아이들이 그냥 서류만 보고 있는 줄 알았더냐? 다 회사 분위기도 파악하고 불만과 기대까지 다 파악하기 위해서 거기로 보낸 거야.”

이정훈 회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차에 입을 가져다 대 맛을 봤다.

그리고 천천히 이성우를 향해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주변에서 너를 부추긴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부담감이 생긴 것도 이해하니까 그냥 여기 앉아있다가 돌아가라. 그리고 가서 이야기해. 도저히 설득할 수가 없었다고 말이야. 그 정도면 너를 부추긴 사람들도 충분히 이해할 테니까. 제 놈들이 직접 찾아와 최선을 다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는 이상 네 말을 믿을 수밖에 없을 거다.”

이정훈 회장은 이해한다는 듯이 이성우에게 말하고는 다시 찻물을 마셨다.

그러나 이성우는 몇 번이나 찻물을 마시는 이정훈 회장과 달리 차를 받아 든 이후 전혀 맛을 보지 않았다.

이성우는 빤히 이정훈 회장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정훈 회장은 그런 이성우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왜 그렇게 보는 거냐?”

“저는 회장님께 부탁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겁니다.”

“부탁? 무슨 부탁?”

이성우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가슴을 활짝 펴 이정훈 회장에게 당당히 요구했다.

“직원들 정리하지 말아 주세요.”

“뭐라고?”

이정훈 회장이 얼굴을 찌푸리자 이성우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이곳에 오기 전까지 한진영과 함께 몇 번이나 연습했기에 과거와 달리 그 모습에 얼어붙지는 않았다.

이성우는 다시 한번 이정훈 회장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직원들이요. 정리하지 말고 그대로 승계해서 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승계하라고?”

“네. 그리고 5년 동안 정리해고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시고요.”

“너…….”

이정훈 회장은 자세를 고쳐 앉고 이성우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너…… 뭐 잘못 먹었냐?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이정훈 회장은 화가 난다기보다는 걱정이 된다는 표정으로 이성우를 향해 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