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사람 하나 찾아주라
이성우는 조금 전 자기 행동이 후회됐던지 인상을 찌푸렸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왜 그렇게 심하게 했어.”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는 억울한 듯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가 그렇게 하라고 그랬잖아.”
“내가 압박을 주라고 했지 누가 그렇게까지 하라고 했냐?”
“야아~”
이성우는 한진영이 발뺌하는 듯한 모습에 손가락으로 한진영을 가리키고 최석영을 돌아봤다.
“여기 과장님 안 계셨으면 사람 잡았겠다. 야 인마. 네가 그러라고 했잖아. 과장님. 그쵸?”
“나는…… 모르겠는데.”
“와~ 둘이 짰어요? 분명 네가 그렇게 하라고 했잖아.”
이성우는 억울했던지 가슴까지 두드렸다.
사장이 되었음에도 스스럼없이 예전처럼 대하는 이성우와 한진영이었다.
최석영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 듯이 자리가 사람을 바꾸기도 했다.
특히 높은 자리는 그 사람의 본성을 더욱 끌어내기 쉬웠었다.
그런 의미에서 최석영은 이성우가 사장 자리에 앉으며 사람이 바뀌면 어쩌나 걱정했다.
하지만 여전한 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 최석영은 이성우를 사장이 아닌 이성우로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한진영은 한참을 억울해하는 이성우를 달랬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응?”
억울해하던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화를 내던 것을 참았다.
그리고 한진영의 다음 말을 가만히 들었다.
“장 본부장이 모르고 받아주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네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받아줄 만한 존재라서 내가 장근수 본부장을 목표로 화를 내라고 한 거였어.”
“그럼 내가 일부러 화를 냈다는 것 또한 알 거란 이야기야?”
“알지. WM본부 본부장이라는 직함을 고스톱으로 땄을 거로 생각해? 그러니 걱정하지 마. 상대의 자존심만 건드리지 않으면 다 받아줄 거야. 장 본부장도 지금은 자기가 받아주는 역할을 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게스츠름하게 눈을 뜨고는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너는 그새 장근수 본부장이 맡은 곳이 어디인지 잊은 거냐?”
“잊기는? 잘 알고 있어. WM본부잖아.”
“그래 WM본부가 뭐 하는 곳이야?”
“뭐 하는 곳?”
이성우는 슬쩍 최석영을 돌아봤다.
최석영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최석영도 한진영의 말뜻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이성우와 같은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있는 최석영 과장이었다.
이성우는 최석영에게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한진영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으음…… 장 본부장님이 맡은 WM본부는…… 고객들을 상대하지.”
“그래. 잘 아네. 고객들을 상대해. 고객이 어떤 사람들이야? 수많은 생각을 각기 다르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야. 원하는 것이 다 제각기 달라. 그런 고객들을 상대하는데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 네까짓 거 생각하나 못 읽겠냐?”
“그래?”
이성우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조금 전 회의실에서 있었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런데 보기엔 진짜로 긴장한 모습처럼 보이던데?”
“맞장구쳐준 거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그것 하나 못 맞추겠어?”
“그래?”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의 말이 일리가 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내가 너무 심하게 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서…… 심장이 얼마나 두근댔는지 몰라.”
이성우는 가슴을 쓸어내린 후 한진영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한진영은 이성우의 모습에 살며시 미소 지었다.
“막상 임원들에게 위엄을 세우려고 하다 보니까 내가 먼저 심장 떨려서 죽을 것 같아. 그리고 친했던 사람들에게 이러는 것도 해보니까 별로인 것 같고…… 아무리 알고 있다고 하기로서니…… 좀 그렇잖아. 내가 놀리는 것하고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그러는 것하고는 차이가 있는 것 같아서…….”
“그래. 이 정도면 됐다. 아까 보니까 확실히 네가 가진 배경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이었으면 몇 차례 더 칼춤을 춰야 기가 죽었을 텐데, 회장 아들이라는 배경에 몇 번의 위협만으로도 다들 납작 엎드린 것처럼 보이더라.”
“나도 그렇게 느꼈어.”
“그럼 이 정도에서 유지하는 거로 해. 그렇다고 여기서 또 풀어주면 오히려 너를 더 우습게 볼 수 있으니까.”
한진영의 말에 한결 개운해진 표정을 이성우가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이성우에게도 이런 상황이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잠시 한숨을 돌린 이성우가 한진영을 향해 다른 문제를 물었다.
“그런데 개인 고객 계좌 해지하는 거 정말 괜찮을까?”
“걱정돼?”
“걱정되지. 한두 개가 아니잖아. 보고 받기에는 이대로 가다가는 2~3만 계좌까지 손실을 볼 가능성이 높다는데…….”
아직까지 기풍증권 매출의 큰 부분을 개인 고객들의 수수료로 충당하고 있었다.
그런 곳이 무너지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이성우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기풍증권의 한 축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진영은 다르게 생각했다.
“일시적인 현상이야. 특히 이런 식으로 빠져나간 고객들은 수수료를 낮추면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어.”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깜짝 놀랐다.
“고객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수수료를 낮추는 건 제 살 파먹는 것밖에 안 되잖아.”
“수수료는 앞으로 크게 의미가 없어질 거야. 오히려 수수료 인하를 미끼로 새롭게 유치한 고객들을 이용하여 다른 상품을 파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도움이 되는 세상이 펼쳐져. 그런 의미에서 지금이 오히려 잘됐어. 수수료를 더 낮출 명분이 생겼으니까.”
“고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수수료를 더 낮출 명분이 생겼다고? 여기서 더 낮춰야 해?”
“그래. 그냥 수수료 인하하겠다고 하면 반대하는 의견이 있을 텐데 잘 됐어. 지금 상황에서 새로운 고객을 유치해야 하니 수수료를 낮추겠다고 한다면 반대하는 사람 없을 거야.”
이미 인터넷 등을 이용하여 거래하는 개인들의 거래 수수료는 0.1%대에 접어든 상태였다.
여기서 더 낮춘다는 것은 제로 수준의 수수료를 받겠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았다.
이성우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자기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이성우를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우리가 새롭게 뚫으려는 곳이 어디야? 회장님이 숙제를 내주신 곳.”
“IB 파트?”
“그래. 그쪽으로 나아가려면 돈이 무지하게 많이 들어. 그런 돈을 어디서 충당하겠어?”
“어디서 충당하는데?”
이성우의 질문에 한진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새롭게 유치하는 고객들. 무료에 가까운 수수료율로 불러들인 고객들. 그들에게 새로운 상품을 팔아 돈을 마련해야지.”
“수수료보고 넘어온 고객들이 무슨 상품에 가입해?”
“아니지. 오히려 그들이 더 상품 가입에 적극적일 거다.”
“왜?”
“직접 투자해보고 어려움을 몸으로 체득한 고객들이니까. 그들이 우리 상품의 고객이 될 거야. 우리가 꾸준히 올리는 실적을 보게 된다면 직접투자에 수수료 제로인 것보다 차라리 20% 혹은 30%의 수수료를 내고라도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는 것을 원할 테니까. 그렇게 많은 고객이 직접투자에서 간접투자로 선회하게 될 거야. 내가 장담해.”
한진영이 하는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는 이성우였지만 이번만큼은 쉽게 믿지 못했다.
직접 투자자들이 그렇게 쉽게 간접 투자자로 변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진영은 예상이 아니라 직접 보고 경험 속에서 한 말이었기에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식의 투자 형태가 규모를 키울 거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지난 시절 경험했던 흐름이 바로 이렇게 흘러갔기 때문이다.
잠시 눈을 끔벅이던 이성우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급히 지웠다.
어쨌건 이야기의 골자는 지금 떨어져 나간 계좌들은 돌아올 거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더 중요한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바로크 호텔 인수 건은 어떻게 할 셈이야?”
“안 그래도 어제 전화 왔더라 대충 투자자들 섭외는 끝났다고 말이야. 그리고 프라임리츠와 함께 손을 잡을 부동산 투자 전문회사도 준비해 놓고 있고……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돼.”
“기다린다고? 투자자들까지 다 준비되어 있는데 시작하지 않고?”
“투자자들까지 다 준비되어 있으니까 이제 두리은행이 안달 낼 때까지 기다려야지. 투자자들이 다 준비되어 있다고 덤벼들면 두리은행이 싼 가격에 바로크 호텔을 넘기겠어?”
한진영의 말이 이해가 된 이성우였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되는 일이 남아있었다.
“아버지 숙제도 해야 하는데…… 생각해 놓은 거 있어?”
이성우의 말에 한진영이 웃었다.
“생각해 놓은 게 있으니까 내가 스스로 시험을 보겠다고 나선 것 아닐까?”
“그래.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너야 뭐 그런 것까지 다 생각해 놓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시간이 괜찮겠어? 아버지가 인내심이 강한 분이 아니야. 바로크 호텔 인수 건을 마무리 짓고 새로운 일을 진행하고…… 이러면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돼서…….”
“그건 걱정하지 마. 바로크 호텔하고 내가 생각해 놓은 일 하고는 연결이 되어 있으니까. 같이 진행해 나가면 돼.”
“연결이 돼 있다고?”
“어. 두 일이 모두 두리은행하고 연관이 되어 있으니 일 또한 연결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지.”
한진영은 손바닥으로 회의실 책상을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말 나온 김에 사람 하나만 찾아주라.”
“사람을 찾아달라고?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라 회장님이 내주신 숙제 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사람이야.”
“숙제를 풀기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 누군데?”
이성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한진영에게 물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향해 머릿속의 기억을 되짚어가며 이야기했다.
“선강그룹에 상무 직함을 달고 있는 사람이 있어.”
“선강그룹?”
“어. 그런데 좀 특이한 사람이야.”
“어떻게? 생긴 게 특이해? 아니면 행동이?”
“사람이 특이하기보다는 하는 일이 특이해.”
“하는 일?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야?”
이성우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같은 회사도 아니라 남의 회사에 있는 사람을 찾아달라는 한진영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숙제를 풀기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인 건지 이성우는 알 수가 없었다.
한진영은 의아해하는 이성우를 향해 천천히 기억 속에 잠겨 있던 사람을 떠올렸다.
“회장 비서실 소속으로 되어 있을 거야. 거기서 상무 직함을 달고 있는 사람. 그 사람과 줄을 대봐.”
“그러니까 비서실 소속의 이상한 일을 하는 상무…….”
이성우는 잠시 말을 하다 멈추고 한진영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이성우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의아함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어진 상태였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최석영은 순간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멈춘 이성우를 보고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도대체 뭔데? 성우야. 아는 사람이야?”
선강그룹 비서실 사람이기에 알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었던 최석영 과장이었다.
하지만 이성우의 표정으로 보아 아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성우는 최석영의 질문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는 사람은 아니에요.”
한진영은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에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어떤 사람인지 들어는 봤지?”
“어? 어. 들어는 봤어. 들어는 봤지.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걸…….”
이성우는 어물쩍거리며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최석영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성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런 이성우의 행동을 이해한 듯한 표정의 한진영을 보고 더욱 혼란스러워했다.
한진영은 가만히 이성우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과 만나고 싶어. 그러니 연결해줘. 너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꺼낸 말이야. 할 수 있지?”
“할 수는 있는데…… 할 수는…… 그런데 그 사람을 꼭 만나야겠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지?”
“알지. 아니까 만나려는 거지.”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최석영이 결국 참지 못하고 이성우를 바라보고 물었다.
“도대체 그 상무라는 사람이 누구인데 그래? 회장 직속 비서실 소속이면…… 그룹의 핵심이라는 거 아니냐? 그런데 왜 그래? 뭐 어디가 이상한 사람이야? 들어보니까 사람이 이상하기보다는 하는 일이 이상하다던데. 뭐가 어떻게 하는 일이 이상해?”
최석영의 말에 이성우는 한진영을 바라봤다.
알려줘도 괜찮으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알려 드려. 과장님하고 같이 만날 거니까. 이래 봬도 과장님이 우리 회사의 얼굴 아니냐?”
“과장님도 같이?”
한진영이 이성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이성우가 최석영을 돌아보고 민망한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기 그게…….”
“사람 답답해 미치겠네. 뭔데?”
최석영이 가슴까지 두드리며 답답해하자 이성우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무당이에요.”
“어?”
최석영은 자기가 잘못 들은 게 아니냐는 생각에 다시 물었다.
“뭐라고?”
“무당이요. 무당. 회장 직속 비서실에서 상무직함을 달고 있는 무당이라고요.”
“그게 무슨…….”
최석영은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거냐고 물으려다 한진영이 가만히 있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한진영은 당황해 하는 최석영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잘못들은 게 아니라는 뜻을 전했다.
최석영은 이성우와 한진영을 번갈아 바라보다 지금의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크게 놀랐다.
“회장 직속 비서실에…… 무당이…… 그것도 상무라는 직함을 달고…… 있다고? 다른 곳도 아니라 선강그룹에?”
“네. 바로 그겁니다. 그리고 그룹의 큰일을 그 사람이 많이 결정합니다.”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이성우를 돌아보고 말했다.
“그 사람과 줄을 대줘. 회장님께서 내주신 숙제를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의 인연이 꼭 필요하니까. 만나는 자리만 마련해주면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 뒤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그래. 꼭 필요하다니까. 해보기는 할게.”
만나기가 달가운 사람이 아니었는지 이성우는 얼굴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이내 본래의 표정을 되찾았다.
사장 자리에 앉은 만큼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는 없다는 자각이 머릿속에서 떠올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