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베일에 싸인 인물
사명을 바꾸며 여러 가지 이슈에 몸살을 겪을 것 같았던 기풍증권은 외부의 시각과 달리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내부의 반발도 없었으며 임원급에서도 혼란이 일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혼란보다는 새로운 사업 아이템들을 연달아 보여주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수수료율 파격 인하. 3달간 수수료 무료 진행]
개인 투자자들이 좋아할 만한 뉴스로 기풍증권은 단번에 사람들에게 사명을 머리에 박아 넣을 수 있게 됐다.
“이번에 새롭게 진행한 이벤트로 인해 현재 일간 신규 가입 계좌 건수가 1만 건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고무적인 일이군요.”
“네. 예상했던 2~3천 계좌의 신규 가입을 훌쩍 뛰어넘는 성과로 신규 가입자의 폭발적인 성장이 차후에 우리 회사의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회의 자리에 참석했던 임원들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사장 자리에 앉아있는 이성우를 바라봤다.
그가 내놓은 수수료 무료 정책이 시행하자마자 바로 성과를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 수수료 무료 정책을 들고 나왔을 때 임원들에게서 큰 저항을 받았었다.
아무리 한시적으로 진행되는 일이더라도 무료 정책은 큰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번 일로 신규고객을 유치하지도 못할 것이며 오히려 기존 고객들에게 받던 수수료도 받지 못해 증권사의 수익에 커다란 마이너스를 안겨줄지도 모른다는 것이 임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임원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대성공을 거뒀다.
아직은 수익이 실현되지 않아 주머니에 돈이 직접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예상을 크게 넘기는 신규 계좌 유입에 미래가 밝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성우는 이렇게 들어온 계좌를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새롭게 유치한 계좌들이 빠져나가기 전에 확실한 고객으로 만들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새롭게 유치한 고객이 이벤트가 끝난 뒤까지 머무를 걸 기다리기 전에 새로운 이벤트를 또 열어 확실한 우리의 고객으로 만들도록 합시다. PEF(사모펀드)에 가입을 유도하세요. 펀드 가입 시에 여러 가지 특전을 주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혹은 선착순에 따라 상품을 지급하는 것도 좋고요. 어쨌든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고객을 가만히 두고 보고만 있지 마십시오. 그게 핵심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성우의 지시에 곁에 있던 최준호 본부장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누구도 이성우가 사장 자리에 앉은 것을 불평할 수 없게 됐다.
오히려 이렇게 자리에 앉자마자 올리는 성과에 내부에서는 이성우에 대한 평가가 크게 올라갔다.
외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불안하게 바라보던 기풍증권이 내부에서부터 단단하게 힘을 모으는 것이 생각보다 인수에 대한 타격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기풍증권을 장악해 나가는 이성우의 모습에 외부에서는 새로운 시각으로 이성우를 바라봤다.
생각보다 능력 있는 기풍의 후계자.
이제 겨우 사장 자리에 앉은 지 한 달이 채 안 된 시간이건만 그 한 달 만에 만들어낸 성과에 이성우에 대한 평가가 한 번에 바뀌고 만 것이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합시다.”
이성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진영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손짓했다.
먼저 나가지 말고 자기와 함께 나가자는 뜻이었다.
한진영은 이성우의 손짓을 알아보고 잠시 자리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안 가?”
장근수 본부장이 그런 한진영의 곁에 다가와 한진영의 옆구리를 찌르며 담배를 피우러 갈 것을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한진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은밀히 보낸 이성우의 손짓 속에서 그동안 기다리던 것이 드디어 한진영의 손에 들어올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고개를 갸웃하던 장근수까지 회의실을 나가자 이제 이성우와 한진영만이 자리에 남게 됐다.
한진영이 앉아있는 곳에서 일어나 이성우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자 이성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내 사무실로 가면서 이야기하자.”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이성우의 뒤를 따랐다.
이성우는 잠시 주변을 살피며 자기를 따르는 이가 없는지 확인했다.
한진영은 이렇게 조심하는 이성우의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찾은 거냐?”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찾았어.”
“오래 걸렸네.”
“선강그룹 쪽에 닿아있는 줄이 없다 보니까. 게다가 얼마나 정체를 꼭꼭 숨기던지 말도 꺼내지 못할 정도였어.”
“그래도 뭐 결국 찾기는 찾았잖아.”
이성우가 한진영을 돌아보고 주먹으로 한진영을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네 부탁이니까 찾은 거야. 그리고 이 사람이 앞으로 우리가 하려는 일에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는데 내가 안 할 수가 있어야지. 너 내가 엄청나게 고생한 줄이나 알아라.”
“알았어. 네가 한 고생이 헛되지 않게 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응접용 소파에 자연스럽게 앉자 뒤를 이어 한진영 또한 소파에 앉았다.
이성우는 한진영이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근데 문제가 하나 있어.”
“문제?”
“어. 찾기는 찾았는데…….”
“왜? 약속을 잡지 못하겠어?”
“어떻게 알았냐?”
“그냥. 느낌이 그랬어.”
한진영이 경험했던 지난 시절에도 그는 베일에 싸인 존재였다.
선강그룹의 몇 가지 큰 사건과 함께 존재가 알려졌지만, 그 이후에도 이름과 얼굴만큼은 철저하게 가려져 관리됐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지금은 존재 자체를 찾아내기가 쉽지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약속은 고사하고 어떤 사람인지까지 알아낸 것도 이성우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성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선강그룹이 무속인을 이용해서 그룹의 큰일을 결정한다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어렴풋이 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야. 기업 오너도 사람이기 때문에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미신에 기대고는 한다고…… 그 이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이번에 네 부탁으로 이 사람을 찾으면서 희한한 이야기 많이 들었다.”
이성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공장 부지를 정할 때도 이 사람과 함께 나가 본 뒤에 결정하고 심지어 착공식에서 굿판을 벌인다는 이야기까지 있더라. 이 사람에 대해서 알아보면서 그 이야기 듣고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뭐 그만큼 의지하고 믿는 존재라는 뜻이겠지. 그래서 그런지 선강그룹 내에서는 숨겨진 이인자라는 이야기까지 도는 모양이야.”
“그럴 거야. 그래서 선강그룹에서 특별관리를 하는 바람에 더 알아보기 어려웠을 거고…… 맞지?”
이성우는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한진영을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알고 있었냐? 나도 아버지한테 어렴풋이 들은 게 전부였는데.”
“내가 아는 게 신기했어?”
“그렇잖아. 이런 존재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웬만한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일 텐데…….”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웃으며 말했다.
“선강만 그럴 거 같아?”
“어? 그게 무슨 소리야?”
“무속인에게 의지하는 게 선강그룹만 그럴 거 같으냐는 말이야.”
“그럼…… 다른 곳도 있다는 말이야?”
이성우의 질문에 한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구보다 큰 권력의 무게는 말처럼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래서 미신에라도 기대고 싶어하지. 내가 한 결정에 수많은 사람의 생사가 달린 만큼 내 결정이 아니라 하늘의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건 본능이나 마찬가지니까.”
“무조건 맞추라는 법이 없잖아. 틀릴 수도 있는데 미신에 기댄다고?”
이성우는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한진영에게 말했다.
하지만 한진영은 이성우의 질문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틀리면 다른 사람 찾아가면 되지. 그렇게 여기저기 알아보다 선강그룹의 그 상무라는 사람처럼 잘 맞추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룹에 자리 하나 내어주고 옆에 끼고 있는 거야. 중요한 일을 잘 맞추면 그 사람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아마 지금 선강그룹 회장이 그런 상태일 거다.”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선강그룹 회장이 그 무속인에게 의지하고 있다고?”
이성우가 말이 안 된다며 웃었지만, 한진영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말이 안 될 것 같아? 회장 직속 비서실의 상무야. 너도 알아봤겠지만, 그 사람의 업무는 통상적인 비서 업무하고는 동떨어져 있어. 안 그래?”
“어…… 그렇긴 해.”
비서라면 회장의 곁에 머물러야 했다.
그 무속인도 회장 곁에 함께 머물렀다.
하지만 스케줄을 관리하던가 수행 혹은 서포터 역할로서 머무르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오히려 다른 비서가 무속인의 스케줄을 관리하고 그의 주변에 꼬이는 이들을 정리하는 것이 마치 회장이 두 명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눈을 끔벅거리며 물었다.
“그럼 그 무당? 무속인? 하여튼 그 사람이 선강그룹 회장을 조종한다는 이야기야?”
이성우의 말에 한진영이 크게 웃으며 이성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건 너무 나간 거고…… 그룹의 주요사항을 함께 의논하는 정도? 그 정도일 거야.”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 프로 한진영의 말이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진영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우는 그 무속인에 대한 의문을 품는 것을 그만뒀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다른 그룹의 일이었기에 깊이 생각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은 다른 중요한 일이 있었고, 이성우는 그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품속에 들어있던 종잇조각을 꺼내 한진영에게 내밀었다.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어. 대신에 다음 주 그 사람의 스케줄 하나를 알아낼 수 있었어.”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을 듣고는 종이에 쓰여있는 글자를 확인했다.
“강남 서든 호텔 사우나. 다음주 목요일 오후 2시부터 그곳에 그가 간다고 한다.”
한진영은 가만히 이성우가 건넨 종잇조각을 가슴에 집어넣었다.
이성우는 그런 한진영의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거밖에 못 구했는데 괜찮겠어? 정 그것만으로 안 되겠다면 아버지한테 이야기해서…….”
“아니야. 이것만으로 충분해.”
“충분해? 괜찮아?”
“그래. 어디에 출현하는지 알면 됐어. 그다음은 내 몫이니까. 수고했어.”
겨우 스케줄 하나를 구하는 게 전부였을 정도로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그런 그를 상대로 이 정도면 됐다고 이야기하는 한진영의 모습에 이성우는 걱정됐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데? 정말 괜찮겠어?”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들고 건넨 쪽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어디에 나타나는지 알면 돼. 그다음에는 그가 우리를 찾게 하면 되니까. 괜찮아.”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지 못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어디를 가자고?”
“사우나요.”
“사우나?”
최석영 과장은 한진영이 불러 들어간 부문장실에서 황당한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갑자기 사우나는 뭔 사우나야?”
“몸도 지지고 만날 사람도 만나고…… 겸사겸사 볼일을 보러 가자는 거죠.”
“만날 사람?”
최석영 과장은 한진영의 말을 듣고 진짜 의도가 사람을 만나는 것임을 알게 됐다.
“누굴 만나는데 평일 가장 바쁜 시간에 사우나에서 만나?”
최석영 과장은 이상한 듯이 한진영에게 묻고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설마?”
“네. 맞아요. 생각하신 그 사람 만나러 가는 거예요. 차 막힐 거 생각하면 슬슬 나가야 할 시간이니 가면서 이야기하시죠.”
“지금 바로? 바로 가자고? 어디로 가는데?”
“서든 호텔이요.”
한진영이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최석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진영의 뒤를 따랐다.
평일 점심시간의 호텔 사우나는 한가함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평일 이 시간에 사우나에 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최석영 과장은 한진영의 뒤를 따라 사우나 안으로 들어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목욕 가운을 입은 채 골프스윙을 연습하는 사람.
주스 잔을 들고 서서 서성이는 사람.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하는 사람 등등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사우나를 즐기는 사람들로 사우나 휴식 공간은 북적였다.
“들어가시죠.”
“어? 어. 가야지.”
최석영 과장은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가는 것처럼 주저하는 모습으로 사우나 안으로 들어갔다.
한진영은 최석영과는 다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도 않은 채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최석영은 이런 한진영의 모습에 놀란 듯이 한진영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주 와봤어?”
“뭐…… 가끔이요.”
지금의 한진영은 처음 온 곳이었지만 지난 시절에는 그도 자주 애용했던 곳이었기에 이런 풍경은 한진영에게 익숙하기만 했다.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간 한진영은 익숙한 모습으로 옷을 갈아입고는 탕으로 향했다.
최석영은 그런 한진영을 따라 탕에 들어가면서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탕 안에 들어간 한진영은 수건으로 얼굴까지 가린 채 뜨거운 물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마치 사람을 찾으러 왔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눈까지 감고는 목욕을 즐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