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회사의 첫 번째 고객이 될 기회를 주겠다
천계산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언가가 더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수료율이 수익의 30%에 따로 운용비를 매달 1%씩 받는 수준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천계산이었다.
한진영의 조건은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한진영은 당황해하는 천계산과 천정모의 반응을 이해했다.
이런 식의 조건이 붙는 건 지금 시대에는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례적인 일이라고 하더라도 한진영은 자신이 있었다.
오히려 한진영은 자기와 먼저 알고 친한 이들에게 기회를 주는 거로 생각했다.
천정모는 태연한 표정의 한진영의 모습에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아니. 운용비를 또 따로 받겠다고? 게다가 수익의 30%를 네가 먹겠다고? 이거 완전 날강도 아냐? 아버지. 이거 더 들을 필요도 없겠는데요. 세상에 이런 펀드가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이런 건 가입하는 사람이 바보인 겁니다.”
천정모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천계산은 천정모와 달리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진영의 말을 듣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한진영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돈 걱정을 하지 않았군그래. 1,000억 정도만 모집해도 한 달에 10억씩 운용비로 거둬들일 수 있으니 말이야. 그리고 수익의 30%라면…… 터무니없기는 한데 자네가 지금까지 보여준 수익을 봤을 때 합당해 보이기도 해.”
“운용비를 나쁘게 볼 건 없습니다. 처음 입금액을 기준으로 하니까요. 1,000억이 수익이 나서 2,000억이 되더라도 2,000억에서 1%를 떼는 게 아니라 1,000억에서 1% 떼게 될 겁니다. 즉, 2,000억까지 규모가 커진다면 0.5%의 운용비만 받는다는 것이니까요.”
“생색도 참 별나게 낸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큰 이득이라도 보는 줄 알겠어.”
처음 한진영을 향해 호감을 보이던 천정모였으나 이제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수익의 30%라는 수수료율과 운용비 1%는 큰 충격으로 천정모에게 다가간 것이다.
천정모는 천계산을 향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아버지. 이런데도 내놓으라는 말씀이세요? 이건 뭐 칼만 안 들었지 날강도나 마찬가지 아니에요?”
천정모는 천계산이 자기의 말에 동조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천계산의 모습은 천정모의 예상과는 달랐다.
지금까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천계산이었다.
천계산은 한동안 말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천정모를 항해 손짓했다.
“200억 만들어 봐.”
“아버지!”
“내가 내일 아침에 두리은행에 이야기해 놓을 테니 네 주식을 담보로 200억을 만들어. 그리고 한진영이가 펀드 설계해서 가지고 오거든 거기에 집어넣어.”
“아버지. 200억을 펀드에 넣으라고요?”
“그래. 200억. 내가 모르고 넣으라고 말한 줄 아느냐?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아버지.”
천계산은 천정모를 향해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네 아버지 안 죽었어. 그만 불러.”
“아버지.”
그만 부르라는데도 아버지라는 말 외에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천정모였다.
천계산은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천정모를 한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본 후 한진영에게 말했다.
“한도가 있는 거냐?”
“여전히 한도를 물어보시네요.”
“이번엔 나도 넣을 생각이니까.”
천계산의 말에 천정모가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아버지.”
“시끄러워. 너 자꾸 아버지 찾을 거면 나가라. 네가 여기 있는 게 도움이 되지 않아.”
“아버지.”
“이놈이 그래도…….”
천계산이 자꾸 말리는 천정모의 모습에 화가 난 건지 눈을 부릅뜨고 천정모를 노려봤다.
천정모는 그런 천계산의 모습에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천계산은 천정모가 그제야 수그러든 모습을 보이자 다시 한진영에게 조금 전 하려던 말을 계속 이어 했다.
“한도가 있다면 한도대로 넣을 생각이다. 내가 듣기로는 지난번에는 계좌당 50억으로 한도를 잡았다고 했다는데…… 이번에는 그보다 높겠지?”
“이야기 들으셨군요.”
“나는 자네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이야.”
천계산의 말에 한진영이 방그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이런 천계산이라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도 꺼내지 못한 제안을 해도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만큼 천계산의 의지가 확고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인사를 마치고 천천히 고개를 들며 천계산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장님께 첫 번째가 될 기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가 될 기회?”
“네. 저희 회사의 첫 번째 고객이 될 기회 말입니다.”
“내가 이 녀석에게 돈을 집어넣으라고 말하고 나도 들어가겠다고 말했는데도 첫 번째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다른 게 있나 보군.”
“네. 다른 게 있습니다. 들으시면 조금 더 관심을 가지실 만한 이야기입니다.”
“호오~ 그래?”
천계산이 흥미가 돈다는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사실 한진영이 이렇게 자기와 인연이 있었던 고객들을 만나러 다닌 것은 다른 의도가 담겨있었다.
기풍증권을 떠난다는 인사 외에 새롭게 출시할 상품을 소개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무조건적인 가입을 원하는 천계산을 보고 드디어 품고 있었던 상품 소개를 천계산 앞에서 풀어놓기 시작한 것이었다.
“제가 하려는 것은 일반 고객들을 모집하여 진행하는 것 외에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일반 고객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일반적이지 않은 고객도 있다는 뜻인 것 같은데?”
“네. 맞습니다. 기존과는 좀 다른 고객을 유치하려 합니다.”
“어떤 고객을 이야기하는 거지?”
“개인이 아닌 기업을 고객으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기업? 기업이야 기존에도 회사 이름으로 들어가는 것이 있지 않나?”
천계산이 한진영을 향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한진영은 그런 천계산의 반응에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기존에도 기업이 펀드에 가입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말하려는 방법은 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다는 말인가?”
“가입하는 돈이 다릅니다.”
“돈?”
천계산의 눈이 가늘어졌다.
돈이라고 할 게 다른 게 무엇이 있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한진영은 그런 천계산에게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회사가 이익을 보아 창고에 쌓아놓고 있는 돈이 있습니다.”
“그래. 유보금 말하는 거 아닌가?”
“네. 그걸 제가 받아 운용하도록 합니다.”
“그거야 뭐 특별할 게 뭐 있나? 자네가 우리 회사에 들어와서 한다면…….”
“아니요. 제가 강선건설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운용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OCIO(Outsourced Chief Investment Officer) 외부위탁운용관리를 하겠다는 겁니다.”
천정모는 한진영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참지 못하고 나서려 했다.
하지만 천계산은 그런 천정모의 행동을 한발 앞서 막았다.
지금은 우선 한진영의 이야기를 들어볼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강선건설의 사내유보금을 가지고 자네가 외부에서 운용하겠다는 건가?”
“네. 바로 그겁니다.”
“내가 뭘 믿고 자네에게 돈을 맡길 거로 생각하나? 사내유보금은 그야말로…….”
“창고에 쌓아놓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이죠.”
천계산의 말에 한발 앞서 이야기한 한진영이었다.
그는 붉으락푸르락한 천정모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천계산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가만히 놔두면 창고에서 먼지만 쌓일 돈을 저에게 맡긴다고 생각하십시오. 국민연금이 저희와 같은 사람에게 위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국가에서도 이렇듯이 돈을 맡기는데 기업이라고 맡기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그리고 이미 외국에서는 흔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외국에서 흔해?”
“흔합니다. 그것도 아주아주 흔합니다. 외국에서는 가만히 돈을 주머니에 가지고 있는 것을 극히 혐오합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돈을 운용하려고 하지요. 그걸 제가 맡아서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걸 해외에서는 많은 기업이 하고 있다는 이야기인가?”
“네. 그렇습니다. 크고 작은 것과 관계없이 모든 기업이 이처럼 창고에 쌓인 돈을 운용하고는 합니다. 들어보지 못하셨지요?”
“듣지 못했다. 너는 들어본 적이 있느냐?”
천계산이 천정모에게 묻자 천정모도 고개를 저었다.
“저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회삿돈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려던 천정모는 한진영의 얼굴을 살피고 하려던 말을 삼켰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생소한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있었던 천정모였다.
대한정유에서도 유보금을 사용하라는 제안을 들었던 한진영이었다.
하지만 그 말뜻이 대한정유에 들어와 유보금을 사용하여 투자하라는 뜻이라는 것을 한진영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대한정유 윤길영 회장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이었다.
아직은 회사의 여유자금을 가지고 투자를 하는 게 어색한 시대였다.
앞으로 10년 뒤에는 외부위탁운용관리 시장이 100조를 넘어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일본과 미국에 비해 100분의 1, 1,00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수준일 정도로 우리나라는 다른 곳보다 한참 늦은 상황이었다.
늦은 만큼 이 시장만 개척한다면 투자금을 유치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진영은 바로 이 시장에 누구보다 먼저 진출하려는 것이었다.
이 일의 가장 큰 걸림돌은 아직 개념이 세워지지 않은 기업 오너들을 어떻게 설득하냐의 싸움이었다.
IMF를 넘긴 지 10년밖에 되지 않았으며, 서브프라임 사태를 겪은 지 이제 채 2년이 갓 지난 시점이었다.
곳간에 돈이 쌓여 있어야 안심이 되는 시절에 그 곳간 돈을 남의 손에 맡긴다는 것 자체를 설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천계산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아들 주머니에 있는 돈 200억을 배팅하려 했던 그조차도 회삿돈을 한진영의 손에 맡긴다는 것에 고민이 깊어졌던 것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천계산은 고개를 들어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얼마까지 되지?”
“아버지!”
천계산은 천정모를 돌아봤다.
“조금 전까지 네가 나를 부르던 것은 걱정하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지금부터 나를 부르는 것은 네 자질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니 잘 생각해보고 나를 불러라.”
차가운 천계산의 말투에 천정모는 기겁했다.
천계산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아버지가 하려고 하시는구나.’
천정모는 놀란 눈으로 천계산의 말을 가만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한계가 있을 텐데…… 무턱대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금을 모두 운용할 수는 없을 테니까.”
“네. 당연히 있습니다. 우선 각 기업에 1,000억씩만 받아 운용할 생각입니다. 한 번에 너무 큰 금액을 받는 것도 사실 저희에게는 부담되는 일이니까요.”
“각 기업? 그럼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고?”
“당연하지요. 위탁운용의 장점은 여러 곳에서 맡긴 자금을 모아 운용함으로써 효율과 수익률을 높이는 데 있습니다. 강선건설의 돈만을 받아 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아.”
천계산이 무릎을 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바로 준비하라고 할 테니 자네도 준비해서 계약서 가지고 오게. 우리는 내일이라도 당장 1,000억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한진영도 자리에서 일어나 천계산의 손을 잡았다.
한진영은 악수하며 OCIO의 첫 번째 고객으로 강선건설을 선택한 것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이런 계약은 첫 번째가 중요했다.
남들이 다 꺼리는 일을 누가 끊어내고 첫발을 내디디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리는 것이었다.
만약 제안했는데 제안을 들은 이가 거절하게 되면 앞으로가 더욱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거절 없이 바로 승낙을 할 사람이 필요했고, 그 일을 해줄 기업으로 강선건설을 선택한 것이었다.
첫 번째 주자가 스타트를 끊었으니 이제 다른 곳에서도 연락이 올 게 분명했다.
왜 자기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냐며 오히려 한진영에게 섭섭해할 장면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자신이 처음이 되는 것은 두렵지만,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는 것은 더욱 싫어하는 습성이 오너들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인사를 다니며 첫 번째 주자를 찾은 일이 성공한 것에 기쁜 마음으로 기풍증권을 나갈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
한진영은 조수아가 가지고 온 서류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이렇게 진행하라고 하세요.”
조수아는 한진영이 건넨 서류를 품에 안고 조금 전 들어온 연락을 한진영에게 이야기했다.
“대한정유에서 연락이 왔었어요. 시간이 될 때 방문해달라고요.”
“이야기를 들었나 보군요.”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계약 이야기를 넌지시 물어봤거든요.”
“좋습니다. 대한정유에 건넬 계약서도 준비해주세요. 제가 그걸 들고 직접 들어갈 테니까요.”
“먼저 계약서를 만들어 놓으라는 말씀이세요?”
“네. 이런 일은 빨리빨리 진행해야 하니까 들어간 김에 계약서에 사인까지 받아 오겠습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야기했지만 한 건에 1,000억 단위가 오가는 계약이었다.
조수아는 이런 계약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한진영의 모습에 자기의 그릇도 이제는 좀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우리가 자리 잡을 곳은 어떻게 됐나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프라임리츠의 정 회장님께서 오늘 점심때 오신다고 하셨어요.”
“점심이라면…….”
한진영은 고개를 돌려 시계를 봤다.
“지금이네요?”
“어? 그렇네요.”
한진영의 말에 조수아도 알지 못했는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제가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일정 관리와 미팅 약속 같은 것은 조수아 씨의 일이 아니니까요.”
한진영은 연신 미안하다고 고개 숙이는 조수아를 향해 괜찮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일 먼저 할 건 제 비서부터 뽑는 일 같아 보이네요. 그동안은 필요 없어서 놔뒀었는데 아무래도 그편이 모두에게 좋을 것 같아요.”
한진영은 외투를 입고 죄송하다는 조수아를 향해 다시 한번 괜찮다는 말을 건넨 후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