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사용하면 안 될 물건
“여기 바가 괜찮아. 바에 가서 술 한잔하자고.”
최석영이 신난 얼굴로 팀장들에게 이야기하자 다른 팀장들도 최석영의 말에 호응하며 컨퍼런스룸을 나섰다.
“저기…… 대표님.”
“어?”
한진영이 고개를 돌려 자기 옷깃을 슬며시 잡는 김준하를 바라봤다.
김준하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한진영을 잡아당겼다.
한진영은 그런 김준하를 보고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앞서 나가는 최석영을 향해 말했다.
“먼저 가세요. 저는 좀 이따 합류하겠습니다.”
“너무 늦지 마세요.”
최석영은 조금 뒤에 오겠다는 한진영의 말을 가볍게 받아넘기고는 힘차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사람들이 멀어지자 한진영이 김준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저기…….”
김준하는 복도에서 서서 이야기하는 게 불편하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봤다.
한진영은 그런 김준하의 모습을 보고 다시 그를 끌고 컨퍼런스룸으로 향했다.
“죄송합니다만 자리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그리고 괜찮으시면 차 좀 가져다주시고요.”
한진영은 컨퍼런스룸을 정리하던 호텔 직원에게 부탁했다.
한참 세이지 직원들이 나간 컨퍼런스룸을 정리하던 호텔 직원들은 하던 것을 멈추고 한진영에게 물었다.
“차 몇 잔 드릴까요?”
“2잔.”
“아니. 3잔!”
한진영은 말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숨을 헐떡거리는 이성우가 보였다.
“3잔 주세요. 시원한 거로요.”
이성우는 말을 마치고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호텔 직원에게 팁을 건넸다.
호텔 직원은 그런 이성우의 행동에 허리 굽혀 인사하고는 급히 컨퍼런스룸을 떠났다.
“너는 여기 웬일이야?”
예상치 못했던 이성우의 등장에 한진영조차 놀란 눈으로 이성우를 바라봤다.
이성우는 책상에 몸을 기대고 숨을 골랐다.
“후우~”
“뛰어왔냐?”
“어. 뛰어왔어. 오다가 최 과장님. 아니. 이제는 차장님인가. 하여튼 최석영 차장님 만나서 너 여기 있다는 말 듣고 급히 온 거다.”
한동안 숨을 고르던 이성우는 한진영의 멱살을 잡아챘다.
“너 인마.”
“왜 이러세요?”
“준하. 넌 좀 가만히 있어.”
말리려는 김준하를 옆으로 민 이성우는 한진영의 멱살을 잡은 채 소리쳤다.
“알고 있었으면 말을 해줬어야지.”
“잘 대처했지?”
“잘 대처하기는…… 뒤지는 줄 알았다.”
“여기까지 쫓아와서 죽는소리하는 걸 보니 잘 대처했나 보네.”
한진영이 살며시 이성우의 손을 잡아 풀자 이성우도 못 이기는 척 한진영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리고 이성우는 다시 책상에 몸을 기댄 채 오늘 있었던 일을 반추했다.
“네가 점심때 웬만하면 자리 뜨지 말라는 말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어. 그래서 직원들에게도 점심 도시락 시켜줄 테니까 당분간 자리를 뜨지 말라고 했거든.”
“잘했네. 용케도 생각해냈다.”
“이상했으니까.”
이성우는 아직도 조금 전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던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네가 아무 이유 없이 자리를 지키라고 말할 놈이 아니니까. 내가 너하고 같이 지낸 게 하루 이틀이 아니잖아. 그 정도 눈치는 있지. 그래서 직원들한테 며칠만 견뎌 보자고 이야기하고 점심시간에 자리를 지키게 했는데…… 아휴~ 지금 생각해도 심장 떨린다.”
“그래서 덕분에 좋은 구경 했지?”
“좋은 구경? 야 인마.”
이성우는 이마에 솟아난 땀을 손바닥으로 훔쳤다.
그리고 손을 흥건히 적신 땀을 털어내며 말했다.
“말을 좀 해줬어야지. 나 진짜 뉴스 속보 듣다가 먹던 밥 다 토했어. 아니.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직원들 다 입에서 밥 몽땅 튀어나와 회사가 아주 난장판이 됐다.”
“회사가 난장판이 됐는지는 모르겠는데 계좌가 난장판이 되지는 않았잖아. 안 그래?”
“뭐…… 그건…… 인정.”
이성우는 손을 들어 웃으며 한진영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얼굴에 활짝 미소를 띠며 말했다.
“뭐…… 덕분에 큰 위험 잘 회피했다.”
“그래서 그거 고맙다고 말하려고 나한테 득달같이 달려온 거야?”
“뭐…… 그렇다고 하는 게 어울리겠지? 너한테 화를 내는 것보다 말이야. 하하하.”
이성우는 큰소리로 웃으며 한진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 덕분에 살았다. 아니었으면 진짜 죽을 뻔했어. 아주 지금 다른 곳은 난리도 아닌가 봐. 하필이면 점심시간 때 그 일을 발표하는 바람에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했다지 뭐냐? 연말이 코앞이라 별일 없겠지 하고 점심 먹으러 간 사이에 그 난리가 벌어졌으니…….”
이성우는 다시 생각해봐도 끔찍하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는 호텔 직원이 가지고 온 음료수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비어있는 자리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그래서 겸사겸사 고맙다는 말 하려고 너 찾으니까 여기로 놀러 왔다는 거 아니냐? 그래서 내가 단숨에 달려왔지.”
“고마워서 한잔 사려고?”
“아 왜 이래? 다 들었어. 오늘 너희 회사 직원들에게 네가 제대로 쏜다며? 나도 네 덕분에 한잔 마시자. 내가 먹는다고 뭐 티도 안 나게 생겼구먼. 그리고 너 오늘 돈 많이 벌었을 거 아니야?”
“그게 다 내 돈인가? 다 고객님들 돈이지.”
“아 왜 이러셔? 수수료로 30%씩 떼어가는 놈이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지.”
“정확히 이야기해. 남들이 들으면 오해한다. 수익의 30%!”
“그거나 그거나.”
“차이가 커. 수익을 많이 못 내면 그만큼 떼어가는 돈도 없다는 이야기니까.”
“많이 벌면 많이 떼어가는 건 왜 이야기하지 않냐? 그리고 그것만 있냐? 운용비 명목으로 매달 돈 떼어가는 것도 있잖아.”
“억울해? 억울하면 지금이라도 거둬가. 난 분명 너희 돈 받아서 운용하고 싶다고 한 적 없다. 굳이 하기 싫다는데 회장님하고 네가 나한테 맡긴 거지.”
한진영이 웃으며 자리에 앉은 뒤 김준하에게 앉으라고 눈짓했다.
김준하는 한진영의 눈짓에 어색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우물쭈물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어쩔 줄 몰라 했다.
“얘는 또 왜 이래? 야? 어디 아파?”
이성우가 곁에 앉은 김준하의 등을 어루만지며 괜찮은지 묻자 김준하가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괜찮아요.”
잔뜩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의 김준하였다.
이성우는 그런 김준하의 모습을 보고 한진영에게 눈으로 괜찮은 거냐고 물어봤다.
한진영은 그런 김준하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지? 혹시 성우 있어서 불편해서 그래?”
김준하는 한진영의 말에 슬쩍 이성우의 옆얼굴을 쳐다본 뒤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땅을 내려다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우는 김준하의 모습에 김준하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둘러메고 말했다.
“야. 우리 사이에 정말 이러기냐?”
“우리 회사 사람이 아니시잖아요.”
“우와~ 정말 이러기야? 우리 사이에 정말? 와~ 나 섭섭해서 돌아가시겠다. 그럼 갈까? 나 가?”
가냐고 물으면서도 엉덩이는 한 뼘도 떼지 않은 이성우였다.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이성우의 모습에 한진영은 가만히 웃고는 김준하에게 말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대충 알아. 그러니 괜찮으니까 말해도 돼.”
한진영의 말에 김준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대답했다.
“정말 괜찮아요?”
“마침 이 녀석에게도 말해야 했었어. 그런데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오기까지 했으니 오히려 잘 된 거지. 정말 괜찮으니까 말해.”
한진영의 말에 섭섭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던 이성우가 한진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이야기?”
“이야기 다 들은 뒤에 술 마시러 갈 테니까 지금은 조용히 이야기만 들어. 그리고 지금 이야기는 이곳에서 끝낼 거야. 그러니까 집중해.”
“도대체 뭔 이야기인데 그래?”
이성우가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한진영과 김준하를 번갈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에게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
“궁금한 것도 이 자리에서 끝내야 해. 이 이야기를 가지고 회사로까지 끌고 가지 마. 듣고 머리에서 지워버려.”
“뭔 이야기인데 그래? 야. 준하야. 뭔데?”
김준하는 한진영의 반응에 정말로 한진영이 자기가 하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준하는 한진영의 말에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왜 프로그램을 자제하겠다고 하셨어요? 오늘만 해도 계속 돌렸으면 처음 예상했던 300억이 아니라 500억의 수익까지도 가능했었을 정도로 강력한 프로그램인데요. 그런 프로그램을 앞으로 왜 안 쓰겠다고 하신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요.”
“이건 또 뭔 소리야? 너 이번에 500억을 벌었어? 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이성우가 이야기에 끼어들려 하자 한진영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며 조용히 하라는 뜻을 전했다.
이성우는 한진영의 모습에 장난기가 보이지 않음을 알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데 끼어들 만큼 이성우가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김준하는 한진영이 자기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으려는 자세를 보이자 계속 이야기했다.
“저는 아무리 봐도 이상했거든요. 평소의 대표님이라면 그런 자리는 놓치는 분이 아니신데…… 혹시 제가 잘못 생각한 건가요?”
“아니야. 제대로 봤어. 평소라면 이런 자리에서 가차 없이 프로그램을 돌렸을 거야.”
김준하는 한진영이 인정하는 말에 안심했다.
자기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이 나온 김준하였다.
“다행이네요. 제가 잘못 생각한 줄 알았어요.”
“뭔데? 지금 뭔 이야기하는데?”
궁금증을 참지 못했던 이성우는 어서 자기에게 설명해달라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물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향해 조금 전 있었던 일을 가볍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진짜로 너 이번 일로 500억을 넘게 번 거야?”
“어떻게 너는 얼마 벌었는지 밖에 귀에 들어오지 않냐?”
“아. 맞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래서…… 그 프로그램을 왜 적극적으로 돌리지 않은 건데? 내가 준하만큼은 아니지만 그 프로그램이 뭔지는 알고 있어서 그런지 나도 궁금하다.”
한진영은 이성우의 질문에 웃으며 팔을 책상 위에 걸쳤다.
그리고 이성우를 향해 슬며시 다가가 말했다.
“이유는 지금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프로그램을 어떻게 하느냐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래서 프로그램을 어떻게 할 건데?”
마치 물어보라는 듯이 말한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는 원하는 질문을 해줬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질문을 받고 웃으며 대답했다.
“프로그램을 팔아먹을 생각이야.”
“뭐?”
“뭐라고요?”
이야기를 듣던 김준하도 놀란 눈으로 한진영을 향해 소리쳤다.
한진영은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자기 계획을 이야기했다.
“들은 대로야. HFT 부분만 떼어내서 팔 생각이야.”
김준하는 한진영의 말에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걸 파신다고요? 설마 제가 이런 말을 해서 그러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다시는 대표님이 하시는 일에 의문을 품지 않도록 할게요.”
“그런 건 아니야.”
“아니에요. 제가 죄송해요. 쓸데없는 의문을 품는 바람에…… 제가 정말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 제발 프로그램을 판다는 말씀은 거둬주세요. 그건 팔면 안 돼요.”
김준하는 자기 잘못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인지 발을 동동 구르기까지 했다.
한진영은 그런 김준하를 진정시켰다.
“네 말이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너 때문은 아니야.”
“거봐요. 저 때문이잖아요. 대표님. 제가 다시는 이상한 생각하지 않을게요. 그건 팔면 안 되는 프로그램이에요. HFT 프로그램은…… 정말 무가지보란 말이에요.”
이성우는 여전히 발을 동동 구르는 이성우를 슬쩍 쳐다본 뒤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왜 갑자기 판다는 거야? 내가 아주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그거 정말 죽이는 프로그램 아니냐? 방금 대화에서도 그 프로그램만 제대로 돌렸어도 오늘 500억 이상을 벌었을 거라는 프로그램인데…… 그걸 왜 팔아?”
한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김준하를 진정시켜 다시 자리에 앉힌 후 이성우의 질문에 대답했다.
“사실 나도 팔 생각은 없었어. 자제하는 선에서 야금야금 써먹기만 하려고 했지. 그런데…… 오늘 경험해보고 이렇게 좋은 건 숨겨놓고 써먹기보다는 팔아먹는 게 더 좋다는 걸 깨달았다.”
“야금야금 안 쓰면 될 일이잖아?”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가만히 웃으며 생각했다.
‘야금야금 안 쓰면 큰일 나니까 그러지.’
HFT 프로그램으로 인해 미국에서 사고가 터질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 야금야금 써먹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쓰던 것을 아예 멈춘 채 숨죽여 지켜보려 했던 한진영이었다.
하지만 김준하의 반응으로 생각을 바꿔먹었다.
김준하조차 이렇게 안달할 정도라면 비싼 값에 팔아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답 없이 웃기만 하는 한진영의 모습에 이성우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네가 팔기로 했다니까 네 생각을 존중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왕이면…… 우리 회사에 파는 건 어때? 네가 다녔던 회사이기도 하고 너하고 나 사이도 다른 곳보다 돈독하니까. 어? 나한테 팔아라. 내가 값 잘 쳐줄게.”
HFT 프로그램이 어떤 것인지 곁에서 직접 지켜본 이성우였다.
한진영이 팔겠다고 나선 이상 마음을 바꾸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기왕이면 팔더라도 기풍증권에 팔라는 말을 한 것이었다.
“네가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이 자리에 너를 앉힌 거다. 너 어떤 일이 있어도 나서지 마. 알았지?”
“나서지 말라고?”
“그래. 내 말만 들어. 나서지 마. 어떤 호들갑 떠는 상황이 나오더라도 말이야.”
한진영은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김준하는 한진영과의 대화를 통해 HFT 프로그램이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사용을 자제하려 한 것이었고, 이제는 팔아서 손에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으려 한다는 생각이 느껴졌다.
HFT 프로그램은 사용하면 안 되는 물건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김준하의 머릿속에서 강하게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