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적임자를 찾다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으로 경제 분야에서는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됐다.
환율이 요동쳤으며 국채 가격이 들썩였다.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른다는 시각이 해외에 퍼져나가며 국가 신뢰도가 흔들리기도 했다.
특히 남북관계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물밑에서 진행하던 협상이 모두 백지로 돌아가 버리며 관계됐던 곳이 핵폭탄을 맞은 것처럼 터져나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위험을 회피한 것만으로도 이득을 봤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득을 봤다고 볼 수 있는 프라임리츠의 정병선 회장이 한진영 앞에 앉아있었다.
“휴우~ 큰일 날 뻔했습니다.”
정병선 회장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한진영의 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대표님 덕분입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아닙니다. 은혜라니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섭섭합니다.”
“은혜 맞습니다. 섭섭해하셔도 저는 은혜라고 생각하고 항상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대표님을 만나겠습니다.”
평소에도 한진영을 대할 때 예의를 차리던 정병선이었는데, 지금은 예의를 넘어 스스로를 낮추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곁에서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정병선의 비서인 김영철은 정병선의 행동을 이해했다.
한진영이 말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프라임리츠는 공중분해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라임리츠가 야심 차게 진행했던 게 바로 북한 투자였다.
호텔을 인수하고 관광이 재개하는 시점에 평양 관광까지도 계획했었다.
여러 곳과 손을 잡고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북한에 과감한 투자를 하려고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정부의 지원 약속도 받았었다.
그래서 믿고 과감한 투자를 진행하려 한 것인데…… 사달이 나고 만 것이었다.
만약 한진영의 만류에 잠시 프로젝트가 딜레이 되어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면 지금쯤 프라임리츠는 공중분해 되는 사태를 피할 수가 없었을지 몰랐다.
정병선 회장은 감동한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잠시 기다려보라고 말씀을 하지 않았으면 아마 지금쯤 저는 산속 깊은 곳에 올라갔을지도 모릅니다.”
“산속에는 왜요?”
한진영이 여전히 손을 잡고 있는 정병선을 바라보고 웃으며 손등을 두드려줬다.
정병선은 그런 한진영을 향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으로 대답했다.
“끈을 가지고…….”
“회장님. 무슨 말씀을 하셔도……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북한에 투자하기 위해 모은 8,000억에 가까운 자금이 북한에 쓸려 들어가 찾을 길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생각만으로도 오싹한 느낌을 받은 정병선은 한진영을 향해 큰 소리로 다짐했다.
“앞으로 대표님께서 하시는 말이라면 다 들을 테니 어떤 말이든 하십시오. 죽으라면 죽는시늉도 하겠습니다.”
“회장님. 그러지 마세요. 우리는 좋은 친구 아닙니까? 친구끼리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부담스럽습니다.”
한진영이 가볍게 정병선을 다독이자 정병선은 더욱 감동한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대표님. 정말 고맙습니다. 아무 대가 없이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스스럼없이 건네주시다니…… 좋습니다. 그럼 대표님.”
“네. 회장님.”
“나중에 저에게 시간 한번 내주세요.”
“시간이요?”
“네. 제가 이렇게 받기만 하고 보답 하나 없으면 저를 아는 사람들이 다 저를 손가락질할 겁니다. 제가 보답 한번 할 수 있게 기회를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하하. 약속하셨습니다.”
보답을 하게 해준다는 말에 오히려 개운해진 모습의 정병선이었다.
때론 상대에게 건넨 과한 친절이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한진영이었다.
그래서 적절히 보답할 기회를 준 것이었고, 정병선은 기회를 잡음으로써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됐다.
정병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에 나와 잘 꾸며진 사무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써보시니 마음에 드시던가요?”
“네. 아주 마음에 듭니다.”
“다행입니다. 그럼 내년까지도 그냥 마음껏 사용하시도록 하세요. 아 참.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고 보답은 따로 있습니다. 이 정도 보답으로 입을 닦으려 하는 게 아니냐고 욕하지 말아 주세요.”
“이것만으로 충분한데요.”
1년이면 임대료만으로도 수억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보증금까지 받지 않은 것을 생각한다면 돈의 크기는 더욱 커지게 됐다.
그런데도 정병선 회장은 이걸 보답으로 한진영이 여길까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가볍게 웃으며 정병선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리고 보답으로 준비하는 것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래도 되지요?”
“그럼요. 그러셔도 됩니다. 제가 자리 한번 제대로 마련해 보겠습니다.”
정병선은 큰소리를 잔뜩 치고는 한진영의 사무실을 나섰다.
김영철도 그런 정병선을 따라 떠나며 한진영을 향해 인사했다.
한진영은 떠나는 두 사람을 배웅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최석영이 한진영을 향해 울상을 한 채 다가왔다.
“진영아. 아니. 대표님.”
한진영은 고개를 돌려 자기 곁에 다가온 최석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왜 그러세요?”
“나…… 너무 힘들어.”
“힘드시다고요? 뭐가요?”
“나 이거 나한테 안 맞아.”
최석영은 들고 있는 종이를 들어 보였다.
종이에는 현재 세이지 자산운용이 보유하고 있는 종목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각 종목에 대한 전략들이 펜으로 적혀있는 것이 아무래도 조금 전까지 한진영이 알려준 방향을 기준으로 하여 전략을 짜다가 나온 것으로 보였다.
최석영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한진영을 향해 애원했다.
“임시로 하라고 했잖아. 어?”
“주신 운용팀이 맞지 않으세요?”
“나하고 정말 안 맞아. 차라리 사람들 앞에서 벌벌 떠는 게 낫지. 이건…… 머리 터져나간다.”
한진영이 최석영의 말을 이해했다.
과거 지점에서 고객의 계좌를 일임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지금은 코스피는 물론이고 코스닥까지 모든 종목을 바라보고 전략을 짜야만 했다.
이런 일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최석영은 죽을힘을 다해 최선을 다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까지는 내가 어떻게든 버텼는데…… 이거 잘못하다가 나 사고 칠 거 같아서 그래. 숫자 하나 잘못 써도 피해가 산더미처럼 불어날지 모르는 상황에 스트레스도 받고…….”
“제가 큰 틀을 잡아주는데도 어려운 거예요?”
“어. 어려워. 막말로 모든 종목의 타점을 잡아주는 건 아니잖아. 반도체가 좋다고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 안에서 어떤 종목을 고르고 어디에서 매수하고 어디에서 매도할지까지 알려주는 건 아니잖아. 뭐 물론 지난 북한 사건 때처럼 네가 잡아주는 날도 있겠지만…… 날마다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잖아.”
한진영은 최석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차장님은 사실 이쪽보다는 미디어 쪽이 더 어울리시죠.”
“그래. 차라리 그게 나아. 슬슬 방송에서 찾는다는 이야기가 들리니까 나는 그쪽에 매진할게. 미안해.”
최석영이 미안한 표정을 잔뜩 짓고 고개를 숙였다.
하는 대로 한 건데 결국 견디지 못하고 포기를 하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아니요.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알고 있었는데 제가 챙기지 못했어요. 며칠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차장님을 대신할 사람을 찾아올게요.”
“며칠로 괜찮겠어?”
“어쩔 수 없죠. 그렇다고 계속 차장님께 부탁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잘못하다 정말 차장님 말씀대로 사고라도 터지면 감당하기 어렵잖아요. 우리 이제 예전에 지점에서 소액으로 짤짤이 하던 규모가 아니니까요.”
“그래. 네 말이 맞아. 나도 그때 생각하고 고객 계좌 굴리듯이 굴리면 되겠지 했다가…… 아으~ 내가 너무 쉽게 봤다.”
최석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한진영이 도와준다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후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해해요. 1,000억이 넘는 돈을 굴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그렇다고 제가 거기에 온전히 붙어있을 수 없으니 잘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죠.”
“그걸 며칠 만에…… 괜찮겠어? 정 안되면 내가 한 달만이라도 어떻게든 해볼까? 마침 연말에 신년 연휴까지 끼어서 거래일도 많지 않으니 말이야.”
“아니요. 마침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서 괜찮아요. 며칠만 더 고생해주세요. 그 안에 제가 사람을 찾아올게요.”
한진영은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진 동문 모임 초대장을 떠올리고는 한 사람을 생각해냈다.
***
“어이구. 이게 누구야?”
“잘들 지냈어?”
한진영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리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진영아. 왔구나.”
한진영이 있는 곳을 양복 차림을 입은 사람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한진영은 그런 그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살핀 뒤 웃음을 터트렸다.
“너 왜 이렇게 날씬해졌어? 반갑다.”
어렸을 때만 해도 땅딸막한 키에 뚱뚱하기만 하던 친구가 지금은 큰 키에 날렵한 몸매를 드러내고 있었다.
한진영은 커다란 중학교 교복에 쌓여있던 친구를 떠올리고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양복을 입은 친구 또한 한진영을 위아래로 살피며 말했다.
“너야말로 엄청나게 컸다. 예전에는 나하고 얼추 차이 안 났었던 것 같았는데.”
“너하고 얼마 차이 안 나기는 뭐가 얼마 차이 안 나. 너하고 나하고 번호가 달랐어. 너는 한 자리 숫자고 나는 그래도 15번이었어.”
“학생 수 60명에 8번이나 15번이나 거기서 거기지. 그런데 지금은 아마 너나 나나 뒤에서 손가락에 들 거다. 그치?”
“그러게. 하여튼 만나서 반갑다.”
“나야말로…… 너 안 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와줘서 고맙다.”
중학교 동문회 홍보부장을 맡고 있는 서영재는 한진영의 방문을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한진영은 그런 서영재에게 별거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한번 두드려주고 주변을 둘러봤다.
“다른 녀석들은 아직이냐?”
“어. 조금 있으면 올 거야. 아~ 나 진짜 너 와줘서 너무 고마워.”
“뭐가 또 너무 고맙다고까지 하냐?”
“내가 올해 처음으로 홍보부장을 맡았거든. 그래서 선배들이 동문회 홍보도 하고 동문들 좀 끌어오라고 얼마나 닦달을 하던지 말도 못 했다.”
“그래서 좀 끌어모았어?”
“끌어모으기는…….”
서영재는 잠시 듣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한진영만 들을 수 있게 말했다.
“우리끼리 이야기지만 누가 중학교 동문회에 오냐? 초등학교나 고등학교도 아니고…… 그렇잖아. 할 일이 없는 노인네들이나 오는 자리지.”
한진영은 서영재의 말에 웃으며 배를 손등으로 가볍게 쳤다.
“그러는 너는 왜 동문회 홍보부장까지 맡은 건데?”
“나야 뭐 별수 있냐? 제약회사 영업부 직원이 의사인 선배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아유~ 나도 죽을 맛이다. 쉬는 날 나와서 이게 뭔지…….”
깊게 한탄을 한 서영재는 씁쓸하게 웃으며 계속 이야기했다.
“솔직히 동문회나 동창회 나오는 사람은 딱 두 부류 아니겠냐? 자기 잘나간다고 자랑하러 나온 사람이거나 아니면 뭐 하나라도 팔아먹으려고 나온 사람. 너하고 나처럼 말이야.”
서영재의 말을 들으면서 주변을 살피던 한진영은 서영재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나를 거기에 포함하지 마. 나는 네가 불러서 나온 거니까. 나 그냥 갈까?”
“야야. 왜 그래. 농담이지. 농담. 너 가면 내가 섭섭하다. 몇 명 불러오지도 못했는데 너까지 가버리면 큰일나.”
한진영이 도망갈까 서영재는 한진영의 양어깨를 붙잡고 한진영을 안으로 안내했다.
한진영은 서영재의 손에 못 이기는 척 안으로 들어가며 서영재에게 부탁했다.
“안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대신 내 소개는 내가 하도록 할 테니까 너는 가만히 있어.”
“알아. 알아. 업종은 다르지만 같은 영업직 아니냐? 네 소개부터 해서 펀드까지 빌드업하는 과정이 다 있다는 거지? 걱정하지 마. 나도 그 정도는 다 알고 있으니까.”
서영재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한진영의 귀에 속삭였다.
“성공했다고 자신감에 차 있는 사람들은 펀드 같은 건 턱턱 잘 들어주니까 너도 자신 있게 해. 내가 왜 이 귀찮은 동문회 홍보부장을 맡았겠냐? 선배가 시켜서도 있지만…… 알잖아.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쉬는 날 나왔으니 본전은 뽑아야지.”
서영재는 한진영의 옆구리를 찌른 뒤 안으로 한진영을 안내했다.
동문회가 열릴 식당은 벌써 시끌벅적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서로 안부를 물어보며 지난 얘기를 하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학교 다닐 때 이야기를 하는 사람.
그리고 사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까지 약 100여 명이 모인 식당 안은 시끄럽기만 했다.
한진영은 주변을 살핀 뒤에 한 사람을 발견하고는 그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후 말했다.
“나는 저기 가면 되겠다. 저기 앉아서 이야기 나누고 있을 테니까 볼일 봐. 나 간다.”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오늘 목표로 한 사람이 있는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야야. 거기는…….”
서영재는 한진영을 급히 말리려 했다.
그곳에는 소문이 안 좋은 선배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영재가 한진영에게 가려고 할 때 서영재를 부르는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있을 동문회 모임을 깔끔하게 마무리까지 마치면 서영재가 다니는 회사의 약을 써주겠다고 약속한 선배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영재야. 뭐해? 여기 와서 어서 선배님들 안내해야지.”
서영재는 한진영에게 가려던 발걸음을 돌렸다.
‘진영아 내가 올 때까지만 조용히 잘 있어라. 꼬투리 잡히지 말고…….’
“네. 금방 갑니다.”
서영재는 급히 자기를 부른 선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서영재가 걱정하는 선배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간 한진영은 따로 떨어져 있는 한 사람 앞에 앉았다.
바로 오늘 만나기 위해 찾아온 사람이 한진영의 눈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3년 연속 올해의 펀드매니저 수상. 5년 평균 수익률 40%의 불후의 기록 달성한 천재. 블랙샌드에서 거액을 주고 영입한 희대의 전략가. 모두 10년 뒤에 들을 이야기지만 지금은…….’
10년 뒤에는 한해 연봉만 수십억을 받으며 블랙샌드로 화려하게 이직한 인물이 잔뜩 주눅이 든 얼굴로 한진영 앞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