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경쟁은 남과 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벽을 가득 채운 커다란 화면에서는 삼선전자의 주가와 국내선물 그리고 근외가 콜과 풋 각 5종목이 화면에 떠 있었다.
차트와 호가 옆에는 HFT 프로그램의 모니터링 화면도 함께 떠 있었다.
“이번에는 240 콜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최석영은 말을 하고 간단하게 손짓했다.
박도하는 최석영의 신호에 맞춰 실행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240 콜 움직임에 맞춰 프로그램 모니터링 속의 화면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오~”
사람들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들은 빠르게 모니터링 화면과 240콜의 틱차트를 확인했다.
그리고 바쁘게 움직였다.
곁에 함께 온 사람과 무언가를 이야기 나는 사람.
가지고 온 작은 노트에 열심히 적는 사람.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이상한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화면을 노려보는 사람.
서른 명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HFT 프로그램을 받아들였다.
“유동성이 풍부한 옵션이 저희가 매매할 때 가장 좋은 곳이었습니다. 물론 국내선물에 적용하기도 좋습니다.”
최석영이 손가락을 튕기자 HFT 프로그램 모니터링 화면이 국내선물로 전환됐다.
최석영은 바뀐 화면을 응시하며 계속 이야기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국내선물은 변동성이 작습니다. 어떤 날은 호가 폭이 20개도 안 되는 날도 있으니 여기에서는 많이 부러지고는 했지요.”
최석영은 말을 하고 한진영을 슬쩍 쳐다봤다.
한진영은 최석영을 향해 잘했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국내선물에서 손해를 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오히려 이렇게 변동폭이 작은 곳이 손해를 더 작을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걸 모른다는 듯이 최석영이 이야기한 것이었다.
바로 자리한 사람들에게 빈틈을 보여주기 위한 한진영의 지시 때문이었다.
지금 자리는 완벽한 프로그램을 파는 자리가 아니었다.
빈틈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런 한진영의 생각이 맞는다는 듯이 사람들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최석영은 잠시 사람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들에게 지금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한동안의 시간이 흐른 후 최석영은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서 저희가 최근에 집중적으로 공략하려는 곳은 바로 이곳입니다.”
지금까지 국내 증시만 나오던 것이 바뀌었다.
홍콩의 항셍 그중에서도 선물 시장이 화면에 보인 것이었다.
“한때 전세계에서 가장 유동성이 풍부하던 우리나라 옵션시장이 최근에는 많이 죽었습니다. 정부에서 보인 여러 가지 조치로 옵션시장이 쪼그라들었지요. 그 유동성이 바로 홍콩의 항셍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판단했습니다. 1%만 움직여도 200틱이 흔들리는 변동성 장은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인 시장이니까요.”
최석영이 손짓하자 박도하가 실행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항셍 선물시장에서 HFT 프로그램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 국내 선물시장을 실행해서 그런 것인지 두 차이가 더 극명하게 보였다.
최대 초당 5번의 거래를 할 수 있게 세팅되었는데도 불구하고 10초에 한 번 거래가 이루어지던 국내 선물시장과 달리 항셍 선물시장에서는 초당 5번이 풀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보시는 대로 세팅된 그대로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저희는…….”
“질문 좀 해도 괜찮겠습니까?”
지금까지 조용히 지켜보던 이들 중 하나가 손을 들어 질문하고 싶다는 뜻을 보였다.
최석영은 이런 모습을 불쾌해하지 않았다.
이것 또한 한진영이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지금 자리에서 질문이 나올 것이니 이런 대답을 하라는 것까지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최석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든 상대에게 말했다.
“질문하십시오.”
허락을 받은 블랙샌드의 직원은 손가락으로 무섭게 움직이는 항셍 선물의 호가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속도를 더 높일 수는 없는 겁니까? 지금 프로그램이 항셍 선물 시장의 빠르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입니다.”
자리에 있던 이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질문에 공감하는 표정으로 최석영을 바라봤다.
과연 어떤 대답이 최석영의 입을 통해 나올지 모두 궁금해하는 모습이었다.
최석영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한진영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최석영의 시선에 거보라는 듯이 살며시 웃었다.
최석영은 한진영을 바라보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최석영이 곤란하여 고개를 숙인 것으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숙인 것이었다.
한진영이 예상했던 곳에서 예상했던 질문이 나왔기 때문이다.
최석영은 마음을 다스리고 억지로 웃음을 참은 뒤 다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어차피 숨긴다고 하여 숨겨지는 것이 아니니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속도를 올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승률이 확 떨어져 속도를 더는 높일 수 없었습니다.”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말씀인가요?”
“네. 찾지 못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찾을 여력도 없었고요. 그래서 최적의 속도에서 멈추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수익은 충분했으니까요.”
최석영은 말을 마치고 모니터링 화면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대화를 나눈 짧은 순간 쌓인 500만 원의 수익이 보이고 있었다.
“저도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다른 증권사의 직원이 최석영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지금 일부러 옵션과 선물 그리고 해외 선물까지 번갈아 가면서 보여주는 겁니까? 아니면 한 번에 하나밖에 실행이 안 되어 번갈아 돌리는 겁니까?”
사람들은 최석영의 얼굴을 노려보듯이 쳐다봤다.
모두 궁금해하는 일이었다.
어째서 하나씩 번갈아 보여주는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최석영은 지금의 질문에 핵심이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최석영의 모습에 한진영 곁에 서 있던 이성우가 과일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저 양반은 여기 있을 게 아니라 영화판에 갔어야 했나 봐. 뭔 연기를 저렇게 신들린 듯이 하냐.”
“재능이지. 재능. 사람 앞에 섰을 때 보여주는 게 우리보다 최 차장님이 더 뛰어난 거다.”
“그런 양반을 운용 팀장에 앉혀 놨었으니 좀이 쑤셨겠지. 어휴. 지금은 뭐 완전히 물 만난 고기 같은데.”
이성우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연신 과일을 입에 넣었다.
이성우의 말대로 최석영은 사람들에게 아프다는 느낌이 전해질 정도의 표현을 보여준 후 천천히 대답했다.
“역시 업계에서 쟁쟁한 분들께서 모이셔서 그런지 뭐 하나 숨길 게 없네요. 네. 생각하신 그대로입니다. 저희 능력이 부족하여 한 번에 돌리지 못한 겁니다.”
“능력이요? 구체적으로 어떤 능력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프로그램을 구동하기 위한 컴퓨터와 빠른 속도로 전송할 수 있는 라인 같은 것들 말입니다. 하드웨어적으로 저희가 따라잡기 어려운 제약에 걸려 한 번에 하나밖에 돌리지 못한 겁니다.”
“그럼 그런 것들이 충분히 갖춰져 있다면…….”
“한 번에 다 돌릴 수 있겠지요. 어차피 같은 프로그램을 여러 개 실행시키면 될 일이니까요.”
너무 단순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 단순한 대답이 주는 파문은 작지 않았다.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항셍 선물시장과 옆에 보이는 모니터링 화면 등을 번갈아 바라보며 함께 온 사람들끼리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자기들이 개선할 수 있는 것과 개선 뒤에 보일 성능을 대략적으로 계산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제 슬슬 돈 이야기를 할 때가 온 것 같다.”
분위기를 살피던 한진영이 들고 있던 잔을 이성우에게 건네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자리에 있던 이들은 세이지 자산운용의 대표인 한진영이 앞에 나서자 모두 하던 것을 멈추고 한진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진영은 최석영에게 마이크를 건네받은 뒤 자리에 있던 서른 명의 사람들을 향해 HFT 프로그램의 매각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 정도면 대략적인 성능에 대한 모습을 확인하셨을 거로 생각됩니다. 단점과 장점 모두 파악이 되셨을 것 같습니다. 승률은 보다시피 70%에 수렴하는 모습입니다. 분명 성능 개선이 뒤를 따른다면 승률의 상승 폭은 비약적으로 오를 거로 생각합니다. 속도 또한 초당 5번의 거래를 수백 번의 거래까지 늘릴 수 있을 거라는 것도 알게 되셨을 겁니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시고 금액을 제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한진영은 질문하고 싶다는 블랙샌드 직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십시오.”
“파시는 범위가 어디까지입니까? 안에 있는 소스 코드까지 모두 파신다는 겁니까?”
블랙샌드 직원의 질문에 한진영이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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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저희가 설계도를 빼돌리고 겉껍데기만 주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두 드리겠습니다. 소스 코드는 물론이고 저희가 작업을 하며 시행착오를 겪었던 시나리오까지 모두 포함하여 건네 드릴 예정입니다. 원하신다면 기술 지원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술 지원까지는 필요 없고…… 모든 권리를 넘긴다는 말씀이시죠?”
“네. 한 톨 남김없이 넘겨 드릴 계획입니다.”
한진영은 블랙샌드의 직원이 급히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것은 블랙샌드 직원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아무런 말 없이 가만히 화면을 지켜보기만 하던 실버만삭스 직원을 포함하여 국내 증권사의 담당자들 모두 한진영의 말에 계산하기 바쁜 모습을 보였다.
한진영이 말한 모든 권리가 그들에게는 달콤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부터 딱 열흘 동안 들어오는 제안을 받은 뒤 선택을 하겠으니 그때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럼 가시는 길 모두 조심해서 가시도록 하십시오.”
한진영이 말을 마치고 손을 들자 박도하가 기다렸다는 듯이 화면을 꺼버렸다.
머릿속으로 계산하던 이들은 꺼진 화면에 잠시 술렁이는 모습을 보였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더 많았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운 마음에 조금 더 보여줄 것을 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이지 자산운용은 돌아가 줄 것을 정중히 요청했다.
사람들은 그런 세이지 자산운용의 모습에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기왕이면 오늘 정하는 게 좋지 않았겠냐? 분위기 보니까 경쟁이 뜨거워져서 더 좋은 가격을 받았을 것 같은데 말이야.”
이성우가 돌아온 한진영을 향해 잔을 다시 건넸다.
한진영은 잔을 받아 들고 안에 들어있는 음료수를 마시며 말했다.
“분위기야 지금이 좋기는 하겠지. 그런데 돈은 지금보다 열흘 뒤가 훨씬 많이 벌 수 있어.”
“왜? 과열된 경쟁에 가격이 더 높아지는 거 아니야?”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과열된 경쟁이라고 하더라도 주머니에 들어있는 돈이 한계가 있으면 별수 없는 일이니까.”
“돌아가면 다르고?”
“다르지. 그리고 경쟁은 꼭 남과 해야 하는 것은 아니거든.”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생각해보면 생각할수록 탐나는 물건에 아마 잠 못 들 거다. 우리가 어렸을 때 장난감을 가지고 싶어 잠을 뒤척이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과일을 먹던 것도 멈추고 한진영의 말을 곰곰이 되새겼다.
“그러니까 네 말은…… 돌아가서 생각할수록 가지고 싶어져 스스로 가격을 올릴 거라는 이야기야?”
“그렇지. 게다가 내가 열흘이라는 시간을 주지 않았냐? 아마 자기네들끼리도 그 시간 동안 눈치 보기에 들어갈 거다. 다른 사람이 얼마를 제시했는지 알아보려고 바쁠 거야. 그러니 우리는 차분히 기다리기만 하면 돼.”
한진영은 이성우가 들고 있던 접시에서 과일을 뺏어 먹으며 웃음을 흘렸다.
***
한진영의 예상은 며칠 걸릴 것도 없었다.
시연회가 끝이 난 그날부터 전화기에 불이 나게 연락이 들어왔다.
“대표님. 경부증권에서 80억 제시했어요.”
“80억.”
“그리고 중원증권에서는 90억을 제시했고요.”
“90억.”
조수아는 보고하던 것을 멈추고 한진영을 슬쩍 돌아봤다.
“생각보다 적네요.”
“첫날이니까요. 크게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조수아의 말에 한진영이 신경 안 쓰는 듯이 이야기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한진영이 최소 1,000억을 이야기하던 것과 전혀 다른 분위기에 걱정하는 모습을 박도하와 팀원들이 보인 것이었다.
오직 김준하만이 그러거나 말거나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한진영은 보고하는 조수아를 올려다보고 물었다.
“대부분 국내 증권사네요.”
“대부분이 아니라 전부요.”
“알겠습니다. 예상대로 흘러가네요.”
“예상대로요? 그럼 이럴 거라는 것 알고 계셨어요?”
박도하가 놀란 눈으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한진영의 예상 했다는 말은 괜히 희망을 주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진영은 박도하뿐만 아니라 크게 기대를 하는 다른 팀원들을 향해 이야기했다.
“알고 있었죠. 그러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진짜는 국내 증권사가 아니니까요.”
“그럼 외국계요?”
“네. 해외에 있는 증권사들이 진짜입니다.”
박도하가 자리에 있는 팀원들을 슬쩍 돌아본 뒤 한진영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님. 제가 대표님의 생각에 토를 다는 게 아니라. 그냥 잘 몰라서 여쭙는 건데…… 국내 증권사가 100억이 안 되는 돈을 제시했다면 외국계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뭐 물론 100억만 해도 큰돈이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고요. 그냥 궁금해서…… 여쭙는 겁니다.”
“제가 1,000억을 이야기했는데 100억도 안 되는 돈이 제시되어 들어오니 불안하신가 봅니다.”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궁금해서…… 정말입니다.”
박도하가 아니라고 급히 부정했지만 누가 봐도 한진영이 말한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민망하여 부정한다는 느낌이 드는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박도하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민망해하는 박도하를 향해 친절히 설명했다.
“제가 예전부터 누누이 강조했듯이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이 프로그램이 가지는 힘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100억이라는 돈도 덜덜 떨면서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죠. 혹은 실무자들은 알아도 결재권자가 제대로 승낙을 해주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요. 특히 소프트웨어가 가지는 파괴력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때 더욱 그렇고요. 하지만 해외는 다릅니다. 그들은 알고 있지요. 이 프로그램이 가지는 힘이 어떤지 말입니다. 그러니 기다려보시죠. 해외에서 움직일 때가 진짜이니까요.”
한진영의 말에 박도하를 비롯한 팀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흘 뒤 한진영이 말한 진짜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