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첫 스타트
조수아가 급히 한진영이 있는 대표실로 찾아왔다.
“대표님.”
“네?”
“왔어요.”
“왔다고요?”
한진영은 다급해 보이는 조수아를 보고 물었다.
조수아는 그런 한진영을 향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왔어요. 웨스트서던에서 3,000만 달러를 제시했어요.”
“시작됐군요.”
100억을 채 넘지 못하던 제시금액이 한번에 300억을 넘겨 들어오자 잔뜩 흥분한 표정을 지은 조수아였다.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뭐라고 할까요?”
“생각해보겠다는 말만 전하시면 충분합니다.”
“그냥 생각해보겠다고만 말하라고요? 약속시간을 잡는 게 아니라요?”
“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약속시간을 잡는 건 아직 이릅니다.”
조수아는 뭔가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한진영 앞에 서 있었다.
3배가 넘게 오른 가격에 기뻐하지도 않고 반응도 미적지근한 한진영의 모습이 성에 안 차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조수아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다른 곳에서는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할 테니 말입니다.”
“네. 알았어요.”
조수아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표실을 나갔다.
그러나 세 시간 뒤 다시 대표실을 찾아왔을 때는 시무룩했던 표정이라고는 얼굴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까보다 더 환한 표정으로 한진영이 있는 대표실로 들어왔다.
“대표님.”
한진영은 보고 있던 것을 덮고 조수아를 올려다봤다.
“조 과장님의 표정이 좋은 것을 보니 아까보다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한 곳이 연락했나 보네요.”
한진영의 말에 조수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더스틴베이에서 5,000만 달러를 제시했어요. 가격을 제시한 뒤 대표님을 한번 뵙고 싶다던데 시간을 잡아볼까요?”
“아니요. 저하고 만나는 건 1억 달러 근처부터입니다. 5,000만 달러부터 만나기 시작하면 사람 만나다가 시간 다 보낼 테니까요. 이번에도 그냥 알았다고만 말씀하시면 됩니다.”
“정말 1,000억 이하로 제시한 곳은 만나보지도 않으시려고요? 그러다 아무도 사지 않겠다고 하면 어떡해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고 기다려보세요.”
조수아는 이번에도 기다리기만 하라는 말에 다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대표실을 나가며 밖에 대기하고 있던 박도하를 비롯한 팀원들을 향해 한숨을 섞은 말을 건넸다.
“그냥 기다리라고 하세요.”
“이번에도요?”
“네. 이번에도요.”
박도하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때 함께 대기하고 있던 김준하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제가 그랬잖아요. 대표님께서 1,000억 이야기하시면 1,000억 이하는 쳐다도 보시지 않을 거라고요.”
“그래도…… 그래도 5,000만 달러잖아. 5,000만 달러면 600억이야.”
“1,000억은 아니잖아요.”
“아니. 그게…….”
김준하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박도하였다.
600억도 엄청나게 큰돈이기는 하지만 1,000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도하는 조수아를 돌아보고 말했다.
“그냥 제가 들어가 볼까요? 들어가서 대표님께 이야기라도 한번 나눠보시라고 말할까요? 그쪽에서 만나고 싶다고 연락했다면서요?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그쪽에서 가격을 올릴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박도하의 말에 조수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들어가서 말씀하셔도 소용없을 거예요.”
“소용없다고요?”
“네. 대표님께서는 1,000억 이하 가격으로 제시한 곳은 만나실 생각이 없으시데요.”
“아니. 왜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조수아는 별수 없다는 듯이 손을 휘저은 뒤 계속 이야기했다.
“저렇게 확고한 생각을 하신 것을 보니 마음을 바꿀 것 같지가 않아요. 그냥 기다리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질 거예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김준하가 벽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대표님이 1,000억이라고 하셨으면 1,000억의 제안이 온다는 이야기니 의심하지 마세요. 의심하는 나만 피곤해지니까요. 언제 대표님 말씀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있었나요?”
김준하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며 한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의심한 나만 힘들어진다는 말이 크게 공감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진영이 말한 열흘에서 8일째가 되는 날까지 1,000억은 고사하고 더스틴베이에서 제시한 5,000만 달러 이상의 금액을 제시한 곳은 없었다.
사람들은 이제라도 만나고 싶다는 더스틴베이와 약속을 잡는 것이 어떠냐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때 뜻밖의 곳에서 연락이 왔다.
“어머!”
메일을 확인하던 조수아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조수아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평소 조수아와 달리 생소한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조수아는 주변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한진영이 있는 대표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지나가며 박도하 등이 있는 IT 부서를 향해 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박도하는 조수아의 손짓이 무얼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보고 박수를 쳤다.
곁에서 이런 박도하의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팀원이 박도하를 향해 물었다.
“왜 그러세요?”
“진짜 1,000억 이상의 제안이 들어왔나 보다. 지금 조 과장님이 지나가면서 신호 줬잖아. 그게 1,000억 이상이 들어왔다는 뜻이야. 가보자. 대표님께서 뭐라고 하시는지 궁금해서 안 되겠다.”
박도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팀원들도 참지 못하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한진영이 있는 대표실 앞으로 달려가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 듣기 위해 귀를 바짝 세웠다.
조수아는 대표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한진영에게 조금 전 연락 온 곳의 이야기를 전했다.
“대표님. 실버만삭스에서 연락이 왔어요.”
한진영은 실버만삭스라는 말에 보고 있던 서류를 덮고 조수아를 올려다봤다.
“드디어 이름에 무게가 있는 곳에서 입질하기 시작했네요. 그리고 조 과장님의 표정을 보니…… 만족할만한 가격으로 제시한 것 같기도 하고요. 얼마를 이야기하던가요?”
“1억 달러요. 드디어 기다리던 가격인 1,000억 이상의 가격이 들어왔어요.”
조수아는 신이 난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에게 이야기했다.
이번에 일이 잘되면 고생을 한 조수아에게도 두둑한 보너스를 약속했기 때문에 조수아로서도 실버만삭스의 1억 달러 제시가 여간 기쁜 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 정도라면 한진영도 분명 놀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한진영의 표정은 침착하기만 했다.
“1억 달러. 첫 스타트치고는 좋은 가격이네요.”
“첫 스타트요? 이거로 계약하실 게 아니고요?”
“이제 처음 마음에 드는 가격이 들어왔는데 바로 계약해서야 되나요? 저는 1,000억 이상에서 계약하겠다는 게 아니라 최소 1,000억 이상에서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1,000억이 넘었다고 냉큼 계약할 수는 없지요. 그런 의미에서…….”
한진영은 조수아에게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밖에 계시는 박 팀장과 팀원들 좀 불러주세요. 아마 제 사무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계실 텐데 들어오라고 하세요. 그리고 김준하 팀장도 함께 불러주시고요.”
조수아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거라는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 앞에서 정말로 기다리고 있는 박도하 등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들어오시래요.”
“아…… 죄송합니다.”
박도하는 얼굴을 붉히고 안으로 들어왔다.
뒤를 이어 팀원들과 김준하 등도 한진영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한진영은 모두 들어오자 조금 전 조수아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들에게 말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1,000억 이상의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실버만삭스에서 1억 달러를 제시했다고 합니다.”
“실버만삭스요? 정말입니까? 실버만삭스가…… 정말로요?”
비록 IT 관련 일을 하지만 증권사에 다니며 익히 실버만삭스의 명성을 들었었던 박도하였다.
그런 실버만삭스가 제안을 한 것도 놀라운 일인데 가격 또한 지금까지 제안한 것 중에서 가장 높은 가격을 제안했다는 것에 박도하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놀란 것은 박도하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심드렁하기만 했던 김준하의 표정도 바뀌어 있었다.
“실버만삭스에서 사겠다고 정말로 그랬어요?”
“왜 그렇게 놀라? 그날 실버만삭스 관계자들도 왔었던 거 알면서…….”
붉게 상기된 표정의 김준하의 모습에 한진영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앞에 있는 직원들을 향해 지시했다.
“조금 더 안달이 나게 해봅시다.”
“안달이 나게요?”
“네. 시연회가 있었던 날 일부러 건너뛴 나스닥 선물 매매를 오늘 해보도록 하지요.”
“나스닥 매매요? 나스닥 매매야 그전에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와 지금은 다르지요. 지금은 모두가 우리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때 임팩트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더 안달이 나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조수아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그럼 진작에 보여주는 편이 좋지 않았었나요?”
“뭐든지 시기라는 게 존재하니까요. 나스닥 매매를 보여줄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오늘 나스닥 매매를 진행하시고…… 조 과장님은 실버만삭스에 내일 보자고 약속을 잡으세요.”
“만나 보시려고요?”
“네. 계획대로 1,000억 이상을 제시한 곳부터 만나기로 했으니 이제 슬슬 만나야겠지요? 내일과 모레는 좀 바쁘실 겁니다.”
조수아는 실버만삭스와 약속을 잡으라는 한진영의 말에 노트에 일정을 적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내일 바쁠 거라고요? 내일은 실버만삭스만 약속을 잡으셨잖아요.”
“지금이야 그렇죠. 아마 내일 당일날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몰려올 겁니다.”
“에이 그래 봤자 얼마나 오겠어요. 괜찮아요. 그 정도는 익숙하니까요.”
보너스가 눈앞에 보이기 시작하자 그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조수아였다.
그리고 만나겠다는 곳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가격이 오른다는 뜻이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날 조수아는 자기가 너무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
조수아는 넋이 나간 모습으로 탕비실에서 차를 만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생기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기계가 된 것처럼 조수아는 핏기가 없는 얼굴로 차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있는 탕비실로 직원 하나가 전화기를 들고 달려왔다.
“과장님. 전화요.”
조수아는 멍한 눈으로 전화기를 내려다봤다.
직원은 그런 조수아를 향해 다시 전화기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과장님. 전화 받으세요. 중국의 궈닝증권이라고 우리가 팔려고 하는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다고 그래요.”
“우리나라 돈으로 1,700억. 아니다. 이번엔 조금 더 올랐나? 1,800억부터 시작하니까 그 가격 이상 부를 거 아니라면 관심 끄라고 전하세요. 거기 말고도 지금 넘칠 정도로 사겠다는 곳이 많다고요. 저는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
조수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차가 담긴 찻잔을 들고 회의실로 향했다.
“이제는 하다 하다 중국 회사에서도 연락이 오네.”
질렸다는 듯이 혼잣말을 한 조수아는 노크를 하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실 안에는 한진영과 지난번에 찾아왔던 사람이 앉아있었다.
그들은 조수아가 차를 가지고 온 것도 잊은 채 다급한 모습으로 한진영에게 부탁했다.
“한 대표님. 기왕이면 우리나라 회사에 파는 게 좋은 거 아닙니까? 이런 중요한 기술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은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좋은 게 아닙니다. 그러니 저희 남부증권에 넘겨주십시오. 저희가 최대한 가격을 맞춰 드리겠습니다.”
남부증권의 오찬종 실장은 이번에도 함께 온 부회장을 돌아봤다.
부회장은 오찬종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는다는 뜻을 전했다.
오찬종은 부회장의 허락에 힘을 얻어 다시 한진영을 설득하려 했다.
“대표님. 인정에 호소하는 게 정말 어리석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이럴 수밖에 없는 저희를 이해해주십시오. 10% 차이면 저희에게 넘기는 게 나은 것 아닙니까?”
조수아는 찻잔을 모두 내려놓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도대체 남부증권이 얼마를 제시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왔을 때 100억도 안 되는 돈을 제시했던 남부증권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국내 증권사들은 대부분 비슷한 가격을 제시하고는 했다.
그러다 해외 증권사 등에서 1,000억을 훌쩍 넘는 금액이 제시되자 모두 손을 털고 말았다.
인정에 호소하고 말고 할 수준의 금액 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국내 증권사들이 모두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그런데 오직 남부증권만은 남아있었다.
물론 가격이 맞아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한진영이 남부증권만은 남겨 놓고 약속을 잡아 미팅 자리까지 마련한 덕분이었다.
한진영은 간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오찬종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실장님. 10% 차이가 아닙니다.”
“지난번에 말씀하시기로는 100억 언저리가 아니었습니까? 저희가 90억까지 마련했습니다.”
“지난번에는 그랬지요. 지금은 가격이 바뀌었습니다.”
“바뀌었다고요? 얼마로 바뀐 겁니까? 가격을 알려주십시오. 들어보고 이 자리에서 맞출 수 있다면 맞춰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신 있게 말한 오찬종이었다.
90억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회사에서 150억까지 불러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자리에 온 오찬종이었다.
그래서 어떤 가격이 나오더라도 오찬종은 맞출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오찬종의 생각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외국의 모 회사에서 1억 5천만 달러를 제시했습니다.”
“네? 1억 5천만…… 달러요? 달러 맞습니까? 원이 아니라 달러요?”
몇 번이나 묻는 오찬종의 말에 한진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찬종은 놀란 눈으로 사방을 훑어보다 여전히 한쪽에 서 있는 조수아를 올려다봤다.
조수아는 오찬종의 시선에 한진영이 말하지 않은 사실 하나를 더 이야기했다.
“1억 5천만 달러를 제시한 곳이 2곳이 있었어요.”
조수아의 말에 오찬종은 급히 한진영을 돌아보고 물었다.
“정말입니까?”
“정말입니다. 회사 이름을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2억 달러까지 오를지도 모른다는 것이 저희의 예상입니다.”
황당한 금액에 오찬종은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