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나머지는 우리가 감수하겠다
한진영은 이성우가 가지고 온 서류들을 살피며 말했다.
“그래서 얼마를 가지고 왔다고?”
“40억. 이거 진짜 내 주머니에 있는 것까지 탈탈 털어서 가지고 온 거야. 망하면 네가 나 먹여 살려야 한다.”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보고 있던 서류를 들어 이성우를 보고 웃었다.
“내가 살다 살다 재벌집 아들한테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너 제정신이냐? 40억 이까짓 거 너한테는 푼돈도 못되잖아.”
“아니야. 나 진짜 이거 박박 긁어서 온 거야.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부자지. 나는 월급 받아먹는 일반 직장인이나 마찬가지야.”
한진영은 죽는소리를 하는 이성우를 한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더 내놔.”
“어?”
“빨리 주머니에 있는 거 더 꺼내라고 이 쫌생이야.”
“주머니에 뭐? 뭘 내놓으라는 거야?”
이성우가 계속 모르는 척 말을 돌리자 한진영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내가 40억만 들고 왔다는 네 말을 믿을 거로 생각한 거냐?”
“나…… 정말인데?”
“지랄하네. 빨리 더 내놔. 아니면 실버만삭스 사람들한테 차 돌리라고 할 테니까. 40억이면 와도 아무 소용 없으니까.”
“아~ 왜 이래? 알았어. 알았어.”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오른쪽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무언가를 꺼냈다.
“나 이거 정말 혹시 몰라서 가지고 있었던 거거든. 그러니까 이건…….”
한진영이 이성우의 손에서 빼앗듯이 종이를 낚아챘다.
그리고 종이를 내려다본 채 종이가 나온 이성우의 주머니 반대편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더 내놔.”
“어?”
“빨리 그쪽에 들어있는 것도 꺼내라고. 어서.”
“이 귀신 같은 놈.”
이성우는 투덜대며 한진영이 꺼내라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한진영은 그것까지 손에 들자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네 이름으로 신용대출을 받았는데 10억이 안 나올 리가 없지.”
“나 진짜 이것까지 망하면…….”
“망하면 우리 집에 들어와 살아. 그럼 되잖아. 하여튼 이 자식도 엄살은 엄청나게 많아. 결국, 다 맡길 거면서 뭘 그렇게 죽는소리를 하는 거냐?”
“진짜 들어가서 살아도 돼?”
한진영은 반색하는 이성우의 목소리에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성우가 가지고 온 서류를 말아 쥐어 이성우를 향해 가리키고는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망하면이야.”
“그냥 지금부터 사는 건 안 될까? 너희 집 방도 많잖아.”
“너희 집도 방 많잖아.”
“망하면 그 집 날아가 버리니까 방이 아무리 많아 봤자. 소용없지. 그런 의미에서…… 너희 집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들어가 사는 건 어떨까? 어? 어차피 같은 아파트에 사니까 짐 옮기는 것도 금방일 것 같은데…….”
이성우가 한진영을 향해 느물거리며 다가오자 한진영은 이성우가 가지고 온 서류로 이성우의 머리를 때리고는 말했다.
“60억 만들어오는 거로 끝이 아니야. 이제 시작이니까 긴장해. 실버만삭스 놈들이 이상한 거로 꼬투리 잡을 수 있다.”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는 웃는 것을 멈추고 한진영에게 맞은 자리를 손으로 문질렀다.
세이지 자산운용의 회의실에서 한진영과 이성우가 기다린 지 30여 분이 흘렀을 무렵 몇 명의 외국인이 세이지 자산운용으로 찾아왔다.
“대표님. 실버만삭스 분들이 도착하셨습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지훈이 손님이 찾아온 것을 알리자 한진영과 이성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금발의 외국인을 향해 다가가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이야기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실버만삭스 아태지역 본부장을 맡은 조지 개리입니다. 그냥 조지라고 불러주십시오.”
조지 개리 아태지역 본부장의 말에 한진영은 웃으며 악수를 했다.
“이렇게 본부장님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새로 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바쁘지 않으십니까?”
“바쁘긴요. 아무리 바빠도 세이지에서 보자고 하는데 제가 직접 와야지요. 만나 뵙고 인사도 드릴 겸해서 찾아왔으니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아닙니다. 이상하긴요. 오히려 너무 별일 아닌데 본부장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니 이해해주십시오. 그럼 앉으시겠습니까?”
이성우는 한진영과 조지 개리 실버만삭스 아태지역 본부장을 번갈아 바라봤다.
극도로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 곁에 있는 사람마저 불편하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한진영은 조금 전과 달리 잔뜩 굳은 얼굴로 앉아 있는 이성우를 조지 개리 본부장에게 소개했다.
“여기 있는 이분이 기풍증권의 사장인 이성우 사장님이십니다. 개인적으로 저와 친구이기도 하며 고객이기도 한 분입니다.”
“이성우 사장님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아. 네.”
이성우는 상대방과 예의를 차리며 이야기하는 자리가 불편하여 차라리 조용히 있는 것을 택했다.
어차피 지금 자리에 자기는 고객으로 온 것인 만큼 크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이성우가 간단하게 이야기만 할 뿐 조용히 있는 것을 확인하고 마음에 들어 했다.
그리고 눈치가 빠른 이성우를 향해 만족스럽게 웃으며 조지 개리 본부장에게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늘 이렇게 실버만삭스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길 원한 것은 CFD(contract for difference) 때문입니다.”
“네. 오기 전에 이야기 들었습니다. 저희 쪽에서 진행하는 CFD 계좌를 열고 싶다고요?”
“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공식적으로 시행되지 않는 상품이라 이렇게 실버만삭스를 통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지 개리 본부장은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드문 일도 아닙니다. 저희 쪽에서도 대한민국 국적의 투자자분들과 CFD관련 계약을 몇 번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행절차에 대해 잘 알고 계시겠군요.”
“절차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계약을 마치고 입금을 해주신 다음 원하는 종목을 이야기해주시면 저희 쪽에서 바로 매수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간단한 절차에 이성우가 당황했다.
그러나 이런 일에 익숙한 한진영에게는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지난 시절 암암리에 CFD를 많이 체결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주식을 보유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 때문에 대주주 요건을 불편하게 느끼던 투자자들이 많이 이용했던 방법이었다.
게다가 투자를 했다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신분을 속이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애용하기도 했다.
양도세를 비롯하여 세금만 제대로 낸다면 문제 될 것이 하나 없는 아주 유용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금감원도 계속 막기보다 풀어주어 제도권에 속하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공식적으로 국내 증권사를 통해서는 할 방법이 없었다.
하려면 해외 증권사를 통해야만 했기 때문에 한진영은 이번에 업무협약을 맺은 실버만삭스를 통해 일을 진행하려 했다.
한진영은 조지 개리 본부장의 말에 슬쩍 이성우를 돌아보고 말했다.
“준비됐지? 바로 보내도록 해.”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자기가 연락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은행에 전화를 건 것이었다.
한진영은 이성우가 연락하는 것을 확인하고 조지 개리에게 말했다.
“매수할 종목은 국내 주식이 아닙니다.”
“코스피에 올라가 있는 주식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지금까지 별일 아니라고 이야기하던 조지 개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뭘 매수하실 생각이십니까?”
조지 개리의 질문에 한진영은 빙긋이 웃고는 이성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성우는 돈이 들어갔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이성우는 만족해하며 조지개리 본부장을 향해 말했다.
“돈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확인해보시죠.”
어떤 종목인지 말하지 않는 한진영의 말에 조지 개리는 답을 듣기 위해서는 돈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에 함께 온 직원에게 입금 사실을 확인하게 했다.
그리고 곧바로 돈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인받은 뒤 한진영에게 대답했다.
“들어왔다고 하는군요.”
“좋습니다. 그럼 계약하실까요?”
“종목은…….”
“어차피 계약서에 종목 명도 써야 하니 마지막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뭐…… 그렇게 하시죠.”
끝까지 대답을 해주지 않는 한진영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조지 개리 본부장은 개의치 않았다.
사실 지금 자리는 계약보다 한진영이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제프리 존스 COO에게 한진영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조지 개리였다.
그래서 한진영이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한번 보고 싶었다.
자기들이 만든 HFT 프로그램보다 월등히 좋은 것을 만들었으면서도 과감하게 판다는 결정을 한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세이지 자산운용에서 만든 HFT 프로그램은 현재 미국에서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속도를 올리고 매매 패턴에 손을 조금 본 HFT 프로그램은 미칠듯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공동 소유를 하는 바람에 조금 충돌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렸었다.
하지만 충돌은 업체 간의 충돌이 아닌 프로그램 간의 충돌이었기에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2억 달러라는 거금을 쓰고 프로그램을 구입한 만큼 본전을 뽑기 위해 미칠 듯이 프로그램을 돌린다는 이야기가 미국 시장에 파다하게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조지 개리는 세이지 자산운용이 이런 것을 모르고 팔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알면서도 팔았을 것으로 생각했고, 2억 달러가 가소로워 보이기까지 한 프로그램을 어떤 이유에서 판 것인지 흥미로운 마음에 세이지 자산운용을 찾은 것이었다.
조지 개리는 한진영이 어떤 사람인지 은근히 살피며 계약을 계속 진행해 나갔다.
“자 다 됐습니다. 60억 입금 확인도 했으니 레버리지는 몇 배로 하실 생각이십니까? 저희는 최대 20배…….”
“20배로 하겠습니다.”
“20배요?”
“네. 최대 20배까지 되지 않습니까?”
“아니. 그렇기는 한데…… 그렇게 되면…….”
조지 개리는 한진영을 말리려다 생각을 바꿨다.
“어떤 종목에 투자할지 듣지도 않은 상태에서 말리는 것은 아니니 그럼 종목까지 듣도록 하겠습니다. 어디에 투자하시겠습니까?”
조지 개리의 말에 이성우도 고개를 돌려 한진영을 바라봤다.
모든 것을 한진영에게 맡기며 그도 한진영이 어떤 종목에 투자를 할 예정인지 모르는 상태였다.
한진영은 자기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실버만삭스의 사람들과 이성우를 향해 종목 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CrudeOil Index 3X inverse를 매수하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주가가…….”
“잠시만요.”
조지 개리가 급히 손을 들어 한진영이 말하는 것을 막아 세웠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잠시 심호흡을 한 뒤에 입을 열었다.
“뭘 매수하시겠다고요?”
“크루드 오일 인덱스 펀드를 매수하려 합니다.”
“네. 거기까지는 알겠습니다. 거기까지는 알겠는데…… 후우~”
조지개리는 몇 번이나 숨을 몰아쉬고는 겨우 한진영을 향해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몇 배짜리를 매수하시겠다고요?”
“3배짜리를 매수하려 합니다.”
“3배짜리요? 정말입니까? 3배짜리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왜 그러십니까?”
영문을 모르겠다는 한진영의 모습에 조지 개리는 열불이 터질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우리가 뭘 했습니까? 무슨 계약을 하기 위해 여기 자리에 모여있는지 잊으신 건 아니시죠?”
“왜 잊겠습니까? CFD 계약을 맺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요. 그건 몇 배를 하겠다고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자꾸 되묻는 조지 개리 아태지역 본부장의 모습에 한진영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조금 놀라신 것 같습니다.”
“조금이요? 지금 조금이라고 말씀하신 겁니까?”
“하긴 의외의 계약이기는 할 겁니다. 이런 경우는 잘 없었겠지요.”
“잘 없는 정도가 아닙니다. 20배짜리 CFD 계약을 체결해서 매수하겠다는 것이 3배짜리 인덱스 펀드를 매수하겠다니요? 그것도 인버스로 말입니다. 단순 계산으로 3,600억을 유가 하락에 베팅하겠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무슨 이런 계약이 다 있단 말입니까?”
조지 개리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할 말이 없어 말문이 막힌 게 아니라 너무 많아 무엇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힌 것이었다.
조지 개리 본부장은 진정하기 위해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후우~ 좋습니다. 뭐 방향을 어디에 잡고 투자를 하시겠다는 것인지 까지 저희가 상관할 이야기가 아니지요. 인버스를 하든 레버리지를 하든 그건 고객의 판단이니 저희가 왈가왈부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로스컷 위치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 알고 하시는 겁니까? 저희가 아무리 넉넉히 자리를 드린다고 해도 투자금이 20억 이하로 자리하게 되면 강제청산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지 개리는 이성우를 돌아보고 말했다.
돈을 집어넣는 사람이 이성우였기 때문이다.
“즉, 3,600억에서 40억만 손실을 봐도 강제청산이라는 말입니다. 1% 이상 손실을 보면 방향을 아무리 잘 봤다고 하더라도 저희는 청산을 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1%입니다. 1%. 그것도 3배짜리 종목의 1%…….”
조지 개리는 손가락까지 들어 올려 몇 번이나 1%라는 숫자를 강조했다.
그만큼 청산자리가 타이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우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진영을 바라보기만 할 뿐 그는 1%가 주는 압박감을 전혀 받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조지 개리는 이성우가 바라보고 있는 한진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진영은 흐트러짐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당황한 표정의 조지 개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현재 기준 3달러에 거래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이곳에 오기 전에 확인했습니다. 2달러에 매입하려 하니 그렇게 진행해주십시오.”
“2달러요?”
“정확하게 2달러까지는 아닙니다. 다만 2달러에 최대한 붙여서 매수하도록 해주십시오.”
“강제청산 당하는 자리는…….”
“그냥 실버만삭스는 실버만삭스의 규정에 따라 진행해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저희가 감수하도록 할 테니 말입니다.”
조지 개리는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도 모든 것을 감수하겠다고 하는 한진영의 말에 더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돌아가 뉴욕에 있는 본사에 뭐라고 보고를 해야 할지 고민을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