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기다리던 움직임이 나타났다
세이지 자산운용은 하방 베팅을 착실히 준비해 나갔다.
파생팀은 약 1,000억에 가까운 금액을 유가 선물에 집어넣을 준비를 마쳤다.
근월물과 차월물은 물론이고 1년 내 결제가 이루어질 모든 월물의 매도 포지션을 잡기 위해 적절히 투자금을 배분해 놓은 상태였다.
최근 급격한 상승으로 스프레드가 벌어져 있지만, 오히려 이런 모습이 세이지 자산운용에는 도움이 됐다.
상승으로 벌어져 있었기에 더 높은 가격에서 매도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홍대민 팀장의 주식운용 팀도 하락 베팅에 관련된 포지션을 잡을 준비에 들어갔다.
120달러의 타겟 가격에서 한진영이 이야기한 30달러대까지 유가가 하락한다면 하락으로 인해 수혜를 받는 업종이 상당한 이득을 받을 게 분명했다.
작게는 원자재 가격의 하락으로 인한 영업이익도 있을 테고, 크게는 업종에 대한 트렌드 변화까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홍대민 팀장은 산업 전반에 걸쳐 받을 수혜주를 선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선별에 박도하 팀장이 설계한 프로그램이 도움을 주었다.
“화성해운보다는 PM해운이 더 낫습니다.”
“정말요? 화성해운의 재무제표가 더 좋은 것 같은데요.”
“당장 지난 재무제표상으로는 화성해운이 낫기는 하지만 오너 리스크가 존재하는 관계로 주가에 탄력을 받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오너 리스크요?”
홍대민은 그런 것이 있냐는 표정으로 가지고 온 서류를 훑었다.
그러나 자기는 물론이고 운용팀에서 준비한 자료에는 오너리스크로 볼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홍대민이 고개를 들어 박도하를 향해 어떤 오너리스크를 말하는 것이냐는 듯이 쳐다보자 박도하는 모니터를 보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화성해운의 둘째 아들이 SNS상에 올려놓은 사진과 내용이 미래에 문제가 될 부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SNS상의 사진과 내용이요? 둘째 아들은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고 이야기 들었는데요?”
“네. 그렇긴 한데 문제는 이 둘째 아들 명의로 차와 집이 최근에 화성해운의 회장인 아버지에게서 증여를 받은 사실이 증거로 남아있는 SNS가 발견되었습니다.”
박도하는 말을 하다말고 잠시 한진영을 돌아봤다.
계속 이야기를 해도 괜찮으냐는 것을 눈으로 한진영에게 물은 것이었다.
한진영은 자기를 쳐다보는 박도하를 향해 웃으며 이야기했다.
“계속하세요. 전혀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것을 이야기해달라고 하여 박 팀장을 부른 것입니다. 박 팀장님께서 알려주시는 내용은 절대 작은 것이 아닙니다.”
“네. 알겠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박도하가 자신 있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홍대민은 이런 한진영과 박도하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식으로 투자 종목을 선별하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박도하는 한진영의 허락이 떨어지자 계속 프로그램을 통해 선별해온 정보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증여가 현재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이 컴퓨터의 판단입니다.”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요?”
“네. 국세청 자료에는 화성해운 측에서 증여세를 냈다는 정황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이 찍은 사진 속에 나온 차의 번호판을 대조한 결과 이 차는 화성해운 법인 명의의 차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런 것도 알 수가 있습니까?”
“네. 알 수 있습니다.”
홍대민이 놀란 얼굴로 박도하를 향해 묻자 박도하는 약간 으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계속 프로그램이 수집하여 보여주는 결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또한 집을 넘기며 세금탈루를 한 정황으로 보이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회사에 출근하지 않음에도 둘째 아들에게 월급을 지급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둘째 아들이 직접 올린 사진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홍대민은 사진을 통해 이런 정보를 수집한다는 사실에 놀라 한진영을 돌아봤다.
그러나 한진영은 차분한 표정을 지은 채 별것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했다.
“세무조사에 들어가겠네요.”
“네. 국세청도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예상됩니다. 조만간 세무조사에 들어갈 게 분명합니다.”
“둘째 아들이 저 정도라면 횡령으로 의심받을 만한 정황도 드러날 가능성이 높고요.”
“현재 프로그램이 예측한 횡령 가능성은 70%를 넘기고 있습니다.”
“그렇겠지요. 둘째 아들이 저 정도라면 첫째 아들은 물론이고 처와 다른 가족들까지 회사에 기생해서 돈을 뽑아먹었을 게 분명하니까요.”
한진영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앞에 놓인 서류에서 화성해운에 X 표를 그었다.
“아무리 수혜를 받더라도 오너가 횡령의혹을 받게 된다면 주가에 탄력을 받기 어렵습니다. PM해운 쪽을 매집하는 것으로 합시다.”
한진영의 판단에 박도하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다음은 철강회사입니다.”
“철강회사는 볼 것 없습니다. 기풍으로 갑니다.”
한진영은 홍대민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조만간 기풍에서는 후계 구도를 놓고 지분 싸움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우리가 선점한다는 생각으로 기풍은 꾸준히 매집해 나가면 좋습니다.”
“안 그래도 벌써 후계 구도에 관련된 기사가 몇 번 나오며 분위기에 불을 지필 가능성이 높다고 컴퓨터가 판단했습니다. 지분 싸움이 나올 확률은 60% 이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진영이 홍대민을 향해 웃자 홍대민은 급히 앞에 놓인 종이에서 기풍에 동그라미를 쳤다.
박도하가 만든 프로그램은 점차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알짜배기 정보들을 찾아 분류하여 알려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홍대민은 이런 모습에 감탄사를 연신 내뱉었다.
기풍의 후계구도는 한진영을 비롯하여 당사자인 이성우가 꾸준히 알려준 덕분에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알 수가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먼저 이야기한 화성해운의 횡령 사실이나 그 전에 중동과 미국의 오일 헤게모니 싸움에 대한 예측 등은 종목 선정은 물론이고 포지션 구축에 엄청난 도움을 주는 것들이었다.
홍대민은 판단에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의 이야기를 들으며 두 시간여 동안 종목 선정을 이어갔다.
한진영은 홍대민이 선별해온 것들을 모두 마무리 지으며 종이를 덮었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박 팀장님의 퀀트 프로그램과 협업하여 포지션을 잡아나가면 됩니다.”
홍대민은 동그라미와 가위표가 쳐진 종이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명확한 이유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횡령과 투자실패와 같은 사실은 공식적인 발표를 통하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것인데, 자료를 조합하여 예측하다니 이건 신세계나 마찬가지를 만난 느낌입니다.”
홍대민은 고개를 들어 박도하 팀장을 바라보고 말했다.
“앞으로도 많은 도움 부탁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께서 처음 말씀하셔서 프로그램을 만들 때는 사실 운용하시는 분들이 저희의 말을 들어주실까 걱정했었습니다. 저도 증권사에서 일해봤지만, 이곳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증거를 가지고 오더라도 본인의 감을 더 중요시하니까요.”
박도하의 말에 홍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오랫동안 함께 일했기 때문에 박도하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었다.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저와 함께 일하며 경험해보셨겠지만 저는 감정적인 판단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명확한 증거가 나타날 때만 믿는 사람이지요. 지금 이것처럼 정보와 증거가 명확하다면 믿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한진영은 홍대민이 박도하의 프로그램을 믿는 모습에 만족해하며 이야기했다.
“아직 개선할 것이 많은 프로그램입니다. 그리고 확장해 나갈 곳도 무궁무진하고요. 수치화하고 공식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만든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니까요. 하지만 완성되지 않은 것만으로 이렇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앞으로도 두 분께서 계속 협업하여 진행해 나가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한진영은 다시 두 사람에게 앞으로도 함께하기를 부탁한 뒤 손뼉을 쳤다.
“종목선정까지 마쳤으니 진행하도록 하죠. 내일이라도 당장 120달러에 도전할 것 같으니 말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저는 돌아가 바로 매집 준비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3,000억부터 시작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때를 기다려 2,000억을 추가 투입하는 것으로 계획을 짜면 됩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합시다.”
한진영이 마무리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날 저녁 미국에서는 유가가 급등하여 120달러 돌파시도에 들어갔다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
한진영은 모니터링 화면을 뒷짐을 진 채 바라봤다.
화면 속에서는 현재 세이지 자산운용의 포지션이 보이고 있었다.
박도하가 만든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매집하기로 결정된 종목들을 한진영은 가만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대표님.”
한진영이 고개를 돌리자 조지훈이 다가와 파생팀의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근월물의 경우에는 매도물량을 모두 채웠다고 합니다. 또한, 100불 언더의 풋옵션 물량도 소량이지만 매집을 완료했다고 합니다.”
“차월물은?”
“목표 수량의 20%를 채운 상태라고 합니다. 그 외의 월물들의 경우에는 목표 수량의 10%를 채운 상태이고요.”
“차분히 가도 된다고 말해도 돼.”
“네. 알겠습니다.”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화면에 시선을 돌렸다.
서부 텍사스유의 가격이 121달러를 가리키고 있었다.
밤사이 120달러 돌파를 시도하던 유가가 아시아시장이 시작하는 것을 기점으로 하여 120 돌파에 성공한 것이었다.
“대표님!”
한진영이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박도하가 갑작스럽게 수집된 정보를 들고 한진영에게 달려오는 중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진영은 박도하가 건넨 종이를 받아 든 뒤 그 위에 쓰인 글을 읽어 내렸다.
[사우디 석유장관의 초대로 쿠웨이트 석유장관과 카타르 석유장관 만남 진행예정]
한진영은 박도하가 건넨 종이를 손으로 소리가 나게 내려쳤다.
탁!
“조 비서.”
차분히 해도 된다는 말을 듣고 파생팀에 가려던 조지훈을 한진영이 불렀다.
“네. 대표님.”
“파생팀에 다시 말해. 조금 더 빨리 매집에 들어가라고.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홍 팀장에게도 들려서 내 말 전해. 매집 속도를 높이라고 말이야. 대기하고 있다가 받지 말고 잡아먹으러 들어가라고 해. 대충 다 왔다.”
“네. 알겠습니다.”
“아 참. 잠깐만.”
한진영은 자기의 지시를 알리기 위해 자리를 뜨려는 조지훈을 다시 불러 세웠다.
“네? 또 지시할 게 있으신가요?”
“어. 실버만삭스에도 연락해. 성우 계좌 풀어서 지난번에 계약한 대로 매수해 달라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마지막 지시까지 받고는 떠나는 조지훈을 보며 한진영은 만족해했다.
기다리고 있던 대로 중동이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세이지 자산운용이 유가 하락에 커다란 포지션을 구축하고 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흘러다녔다.
은밀히 숨기듯이 포지션을 잡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기다렸다 타이밍에 맞춰 움직인 만큼 다른 곳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자기의 포지션을 잡아먹겠다고 나와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다.
그래야 주머니에 물량을 담기가 더 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흘 동안 이어진 매집 기간 동안 한진영의 기대대로 세이지 자산운용을 잡아먹겠다고 덤비는 곳들이 나타났다.
“대표님. 차월물을 비롯한 모든 물량이 다 채워졌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좋아. 홍 팀장 쪽은?”
“주신운용 팀도 1차 3,000억에 대한 매집은 완료됐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럼 2차 2,000억도 바로 집행하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한진영의 보고를 받고 조지훈이 자리를 떠나자 한진영의 전화기가 울렸다.
따르릉.
한진영은 전화기에 떠 있는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실버만삭스에서 연락 왔어?”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진영의 질문에 이성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평단가 2.03달러에 다 담았다고 하더라.”
“잘 됐네. 계산 편하겠다. 2달러 깨지면 튕기는 거야.”
“야.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화했어. 지금 시간외에서 2.02 달러야. 이거 잘못하다가 들어가자마자 튕기는 거 아니냐?”
“뭘 그렇게 무서워해. 40억 날릴까 봐 걱정 돼?”
“그냥 말로만 들을 때는 피부로 느끼지 못했는데 너무 무리해서 들어간 게 아닌가 싶어서…… 돈이야 문제가 아닌데 너무 뒤가 없는 포지션이라 걱정이 되기는 한다.”
“그 정도 무리는 해야지 돈을 벌지. 괜찮아. 내가 말했잖아. 망하면 우리 집으로 들어오라고.”
농담처럼 건넨 말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인지 이성우는 걱정을 한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렇지만 너도 많이 무리하고 있다는 소리가 돌아다니더라. 너도 괜찮냐?”
“그러니까 나한테 죽는 소리하지 마. 나는 너와 달리 망하면 도와줄 재벌 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에이. 너 망하면 내가 도와주면 되지. 괜찮아. 재벌 아버지는 없어도 재벌 친구는 있으니까.”
“하하하.”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크게 웃었다.
“그래도 좋은 게 하나 있지 않냐?”
“어떤 거?”
“CFD 덕분에 네가 이렇게 크게 베팅한 사실을 아직 아무도 모른다는 거 말이야. 나중에 정산하면 다들 알게 되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실버만삭스에서 매수한 줄 알 테니까 얼마나 좋으냐? 포지션을 숨길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래. 그건 좋은 것 같더라. 그런데 성공하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잖아.”
“왜 성공을 못 한다고 생각해? 자신감을 가져. 내가 재벌 친구를 뒀듯이 너도 실패를 모르는 친구를 두고 있지 않냐?”
“하여튼 네 자신감은 알아줘야 한다.”
한진영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모니터링 화면에 뜬 긴급속보를 바라보고 말했다.
“자신감이 아니야. 지금 나가서 뉴스 확인해봐라. 그리고 네가 계좌에 넣어둔 인덱스 펀드 가격도 확인해봐.”
“왜? 무슨 변화가 생겼어?”
“생겼으니까 확인하라고 한 거지. 나가 봐봐.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한진영의 눈에 속보 내용이 들어왔다.
[사우디 석유장관의 요청으로 OPEC 임시회의가 열릴 것으로 밝혀]
[회의 주제는 증산과 관련된 것으로 하루 100만 배럴 이상을 요청할 것이라고 사우디 석유장관이 AP통신과의 인터뷰를 통해 발언함]
한진영의 눈에는 뉴스가 나옴과 동시에 120달러를 하향 이탈하는 유가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