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이유가 필요했다
한진영의 지시 아래 모든 팀장들이 자리에 모였다.
현재 우리나라 시장과 해외시장의 특이점을 같이 찾아보자는 뜻에서였다.
홍대민은 우리나라 시장을 요약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재 코스피는 2,000선을 기준으로 하여 등락을 오가고 있습니다. 2,000이라는 지수를 확실하게 장악하기는 했지만, 더 위로 올라가기에는 부담을 느끼는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빠지기에는 특정한 악재가 보이지 않는 것에 시장은 2,000을 기준으로 박스권 장세를 이어가는 모습입니다.”
홍대민은 잠시 입술에 침을 묻힌 후 계속 이야기했다.
“업종별 특이점은 없으며 한동안 이런 모습이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이어진 변동성을 줄여가는 장세로 파악됩니다.”
한진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손을 들어 다음 순서로 넘어가도록 지시했다.
“해외 쪽 분위기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홍대민은 입술이 다시 말라오는지 입술에 침을 다시 묻혔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근 해외시장에서는 악재로까지 번질 만한 이야기가 몇 가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보고를 하는 홍대민을 향해 한진영이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사실 한진영은 무엇이 문제이고 이후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팀장 이상의 직원들을 모은 것이었고, 그들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홍대민은 한진영의 질문에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선 첫 번째로는 그리스의 이상 현상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요?”
아직도 그리스냐는 듯한 말투에 홍대민도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동안 계속 증시를 짓눌러 온 이야기이고, 이제는 식상해져 버린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파괴력은 여전하여 이야기가 한번 나올 때마다 증시의 발목을 잡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가 나올만하죠?”
홍대민은 한진영의 질문에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본 후 대답했다.
“이번 총선에서 유로존 탈퇴와 디폴트 선언을 주장하는 정당이 승리했습니다.”
“유로존 탈퇴와 디폴트 선언?”
최석영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한물간 이슈라서 그랬는지 언론에서는 심각하게 이야기를 다루지 않아서 최석영 같은 업계의 관계자들도 모르고 넘어갔을 만한 이야기였다.
그리스 이야기는 구제금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언론의 입에 잘 오르내리지 않고 있었다.
구제금융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것에 유럽연합은 환호했다.
그리고 이런 환호에 화답하듯이 증시를 비롯한 금융시장은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상승세를 보였다.
이렇게 즐거운 이야기들만이 가득해 보이자 신문과 방송에서는 그리스의 ‘그’자도 언급하지 않은 채 다른 이슈를 찾아 헤매었다.
그러나 실상 그리스에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곪아가는 중이었다.
1,100억 유로의 구제금융에 걸린 연 5.5%라는 금리에 그리스 국민들은 불만을 가진 것이었다.
게다가 구제금융을 핑계로 전 세계의 모든 국가가 그리스를 상대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에도 불만을 품었다.
그리스 국민들은 구제금융을 신청한 정권을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로 칭하며 정부 불신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연합은 1,300억 유로에 달하는 2차 구제금융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리스 국민들은 1차 구제금융의 1,100억에 이어 2차 구제금융인 1,300억 유로는 그리스를 나누어 먹으려는 강대국의 계략이라고 생각했다.
5.5%라는 살인적인 이자율에 그리스를 자기들의 손에 넣으려 한다는 것이 그리스 국민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유럽연합의 수장인 독일 총리를 향해 나치라며 비난했고, 그들이 주장하는 그리스의 긴축 요구는 그리스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방법이라며 적대감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그리스인들은 유럽연합으로부터의 탈퇴만이 생존을 위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그대로 선거에 써먹은 당이 그리스에 나타났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유로존에서 탈퇴한 뒤 디폴트를 선언하여 국부의 유출을 막자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을 하는 정당이 압도적인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승리하게 된 것이었다.
홍대민은 놀란 최석영이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는 모습을 보이자 계속 이야기했다.
“이들은 유로존 탈퇴 및 디폴트 선언을 국민투표에 붙이자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국민투표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 걸로 예상되죠?”
“여론조사 결과 80% 이상이 찬성하고 있다는 것이 그리스 국영방송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80%…… 뭐 투표만 한다면 거의 확실하다는 뜻이겠네요.”
“네. 투표가 진행된다면 유로존 탈퇴와 디폴트 선언은 거의 확실시된다고 보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재차 확인해주는 홍대민의 말이었다.
한진영은 알겠다는 뜻을 전한 후 홍대민을 향해 물었다.
“그럼 두 번째 악재는 무엇이죠?”
사람들은 한진영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스 폭탄 이야기를 한참 하느라 이게 첫 번째 악재라는 생각을 까맣게 잊고 만 것이었다.
악재는 이제 시작이었다.
“두 번째는 첫 번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와 연결되어 있다? 결국 그리스 문제라는 건가요?”
“네. 하지만 발생 국가가 조금은 다릅니다.”
“이탈리아라든지 주변국으로 재정위기가 번진 것을 이야기하는 건가요?”
“아닙니다. 문제의 발생지는 프랑스입니다.”
“프랑스요?”
한진영은 의외라는 듯한 목소리로 홍대민에게 질문을 던지고 팀장들을 훑어봤다.
그들은 홍대민과 한진영의 대화에 심취하여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있었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 속에서 다음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한진영은 홍대민에게 이제 이야기하라는 뜻을 건네고 슬쩍 뒤로 물러났다.
홍대민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차분히 두 번째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도 최근에 대선이 치러질 예정입니다. 그런데 현재 여론조사 결과 중도좌파에 해당하는 사회당의 후보가 당선이 유력한 상태입니다. 현재 그리스 사태는 유럽 각국의 중도 우파들이 연합하여 진행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재정 긴축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의 사회당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그리스 사태의 새로운 뇌관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현재 시장 참여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우려하고 있는 반응에는 어떤 것들이 있죠?”
한진영의 질문에 홍대민은 한진영을 바라보고 대답했다.
“그리스의 재정 긴축에 대한 방안을 다시 논의하자는 게 가장 현실적으로 나올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유로존 탈퇴와 디폴트까지는 아니지만, 지원 범위와 지원을 통해 끌어내는 긴축의 범위를 조정하자는 것이군요.”
“맞습니다.”
홍대민은 한진영의 질문과 예상이 매우 날카로운 것을 보며 속으로 깜짝 놀랐다.
한진영이 지시하여 알아본 내용이기는 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한진영이 내용을 파악한 상태에서 더 깊이 파볼 것을 지시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짧은 대화 속에 한진영이 지금 문제를 근원까지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궁금해서 알아 오라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알아 오라고 한 것이구나.’
홍대민은 한진영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지금 상황에 주의를 주는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홍대민만이 느낀 것이 아니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정확히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던지는 한진영을 보며 한진영은 지금 사태를 미리 짐작하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사회당의 후보가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이 되면 본격적으로 그리스 사태가 수면 위로 퍼져나가겠군요.”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아직은 그래도 수면 아래 숨어있기는 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프랑스에 중도좌파 계열의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면 시장 참여자들은 본격적으로 불안에 떨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진영은 홍대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다음 악재를 이야기해보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악재가 또 있다는 것에 경악하고 말았다.
현재 코스피를 비롯한 S&P와 나스닥, 항셍과 니케이 등은 잠잠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조금 전 이야기처럼 악재가 수면 아래 잠자고 있는 바람에 겉으로 보기에만 잠잠해 보이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증시가 악재로 뒤덮여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시장은 견조했으며 안정적이었다.
벌써 세 번째에 달할 만큼 이렇게 악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시장이었다.
그리스에 이어서 또 다른 악재가 될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입을 벌린 채 홍대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홍대민은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알고 계셨군요.”
홍대민의 말에 한진영은 엷게 웃었다.
홍대민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확신을 가지게 됐다.
한진영은 알고 있었다.
홍대민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매번 대표님께 놀라고는 했지만, 오늘은 특히 더 놀랐습니다. 여기까지 알고 계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미국의 고용시장이 많이 어렵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홍대민은 차분히 이번에는 미국 시장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렵다기보다는 혼란하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거 같습니다.”
“혼란이요?”
“네.”
홍대민은 가지고 온 서류를 내려다보며 이야기했다.
“현재 미국의 일자리가 혼란한 상황입니다. 제조업종의 일자리는 날이 갈수록 안 좋아지는 상황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반면 서비스 업종은 증가했는데 이게 비정규직이나 임시직의 상승이 몰려 증가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흠…… 그렇다면 지표상으로는 좋게 나오고 수치로는 안 좋게 나오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겠군요.”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지금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홍대민은 가지고 온 서류를 내려놓고 팀장들에게 직접 확인하게 했다.
이런 류의 데이터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게 제일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홍대민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여 미국 시장에 대한 분위기를 계속 이야기했다.
“이렇게 혼조세에 들어가다 보니 시장이 갈팡질팡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월가의 시각입니다.”
“한 방향으로 시장이 흘러가야 정책을 짜기 쉽다 뭐 그런 주장인가요?”
“네. 그걸 뒷받침하는 게…… QE3입니다.”
“QE3요?”
“QE3?”
홍대민이 가지고 온 고용시장 자료를 살피던 팀장들은 모두 고개를 들어 홍대민을 바라봤다.
“QE3요? 3차 양적완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3차 양적완화에 대한 이야기가 지금 있습니다.”
“제 기억에 따르면 분명 버냉키가 잭슨홀 미팅을 마치고 3차 양적완화는 기대하지 말라는 연설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한진영의 말에 홍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3차 양적완화를 기대하지 말란 말로 시장의 기대를 잠재운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작년까지의 분위기였습니다.”
“올해는 다르다는 말씀인가요?”
“네. 올해는 다릅니다. 제가 가지고 온 자료를 보시면…….”
홍대민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서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말했다.
“현재 미국의 실업률은 8%를 넘어가는 수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아질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가계소득과 자산의 증가가 침체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3차 양적완화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강하게 힘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고용시장의 지표가 혼란한 상황이니 양적완화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군요.”
“네. 맞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시장은 결국 시장 침체를 인정해야 하는 꼴이 되고 말 겁니다. 시장은…… 깊은 하락에 들어갈지도 모릅니다.”
한진영은 고개를 듣고 싶은 말을 다 들었다고 생각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대민 팀장님이 잘 설명해주셔서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진영은 가볍게 홍대민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건넨 후 자리에 있던 팀장들에게 말했다.
“시장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걸 아셨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보수적으로 시장에 대응하려 합니다.”
홍대민은 자리에 앉으며 들은 한진영의 말에 오늘 있었던 자리가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알게 됐다.
‘이유가 필요했구나’
애초에 한진영은 보수적인 접근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유가 필요했고, 그 이유를 만들기 위해 홍대민에게 여러 가지를 찾아오라고 한 것이었다.
홍대민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손안에 쥐고 상황을 끌어가는 한진영의 모습에 기가 질려버렸다.
한진영은 기운이 점차 빠져나가는 듯한 홍대민의 표정을 보고 웃으며 홍대민을 추켜세웠다.
“아마 홍대민 팀장님의 이런 분석이 없었다면 저는 감히 보수적인 접근이라는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겁니다.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려 홍 팀장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한 게 뭐 있다고 그러십니까? 저는 그저 있는 사실을 알아 온 것뿐인데요.”
“그게 분석 아니겠습니까? 아마 이렇게까지 완벽한 분석을 한 곳은 우리나라에는 없을 겁니다.”
한진영이 띄워주는 말에 홍대민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한진영은 그런 홍대민의 얼굴을 확인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시장은 2,000이라는 선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지만, 언제까지나 계속 앉아 있지 못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는 먼저 움직인다는 생각으로 행동합니다. 채권팀?”
“네.”
“조금 전에 들었듯이 유럽 채권은 한동안 손을 대지 마세요.”
“네. 알겠어요.”
조수아가 바로 대답했다.
한진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김석현을 돌아보고 말했다.
“외환 파트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죠?”
“어떤 포지션을 잡아야 할지 알 것 같습니다.”
한진영은 김석현의 시원스러운 대답에 만족한 듯이 웃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돌아가며 지시를 모두 내린 뒤 말했다.
“시장은 녹록지 않습니다. 마냥 좋게 보기에는 악재들이 너무 많습니다. 지뢰를 피해 간다는 생각으로 시장에 최대한 보수적으로 접근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한진영은 말을 마친 후 가벼운 인사와 함께 회의실을 나갔다.
폭풍우가 휘몰아친 회의실 안에서는 각 팀의 팀장들이 앞으로 어떻게 일을 처리해야 할지 고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