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악화된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지는 말자
“오셨습니까? 어르신들께서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동우 법률사무소 건물 앞에까지 나온 박경진은 한진영을 향해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는 인사 외에도 한진영을 향해 호감 섞인 눈빛을 보내는 박경진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그를 향해 살며시 웃으며 인사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네. 저야 잘 지냈습니다. 하지만…….”
박경진은 고개를 돌려 법률사무소 꼭대기를 슬쩍 돌아봤다.
그리고 고개를 잠시 흔들고는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혹시 제가 뭐 잘못을 한 건가요?”
한진영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박경진을 바라봤다.
박경진은 전혀 모르는 듯한 한진영의 모습에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올라가시면…… 안 의원께서 화를 많이 내실지도 모릅니다.”
“안 의원께서요? 왜 그러신다는 겁니까? 제가 안 의원님께 뭔 잘못이라도 했나요?”
“그건…… 직접 여쭤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가실까요?”
박경진은 자기가 이야기하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사자도 아니었으며 일개 비서로서 이런 부류의 이야기를 직접 입에 올리기는 불편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직접 내려와 한진영에게 주의를 준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감사합니다.”
건물로 들어가기 전에 박경진은 한진영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한진영은 그런 박경진의 모습에 살며시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잘 정리하셨나 봅니다.”
“네.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정리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던졌으니 조금 시간을 두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타이밍은…….”
“타이밍까지 알려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그냥 대표님이 운용하시는 펀드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그러시겠습니까? 수수료 때문에 추천해 드리지 않았는데 그편이 더 나으시기는 할 겁니다. 신경을 안 써도 되니까요.”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신경 쓰는 것 말입니다. 아주 마음고생 하느라 잠을 편히 못 잤습니다. 그리고 다 던진 뒤 손해를 보기는 했지만, 마음 편히 잠이 드는 것을 보고 알게 됐습니다. 전문가에게 맡기는 편이 낫다는 것을 말입니다.”
한진영은 박경진의 말에 말없이 웃어 보였다.
지난번 박경진이 은밀히 연락을 해와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조언을 구했었다.
그때 한진영은 짧은 말로 정리할 것을 추천했다.
박경진은 이것저것 더 많은 것을 묻고 싶었지만 바쁘다는 한진영을 더는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10% 이상 손해를 본 종목을 과감하게 잘라냈다.
한진영을 믿고 내린 결정이었다.
박경진이 던진 주식은 던진 곳에서부터 -30%가 더 빠져 내려갔다.
한진영이 단호하게 정리할 것을 추천하지 않았다면 반 토막이 난 종목을 부여잡고 지금도 가슴 아파하고 있을 게 분명했던 박경진이었다.
그래서 박경진은 이렇게 밖에까지 쫓아 나와 한진영에게 미리 언질을 준 것이었다.
심각한 분위기에 대응할 시간을 마련해주기 위해 발걸음까지 늦춘 박경진은 한진영을 향해 조심스러운 말로 다시 주의를 줬다.
“혹시 안 의원님께서 화를 내더라도 참으십시오. 지금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저에게 화내실 일이 뭐 있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박경진은 한진영의 말에 걷던 것을 멈추고 한진영을 돌아봤다.
진심으로 몰라서 묻느냐는 뜻이 담긴 눈빛으로 한진영을 바라본 박경진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박경진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것인지 걷던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법률사무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한진영이 몰라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안혁규를 이렇게 만든 것은 한진영 본인이었기에 누구보다 안혁규가 화를 내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한진영이 걱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안혁규가 화를 내더라도 무마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진영이 건물 맨 위층으로 올라간 뒤 안으로 들어갔다.
바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도 이제는 한진영을 궁금해하는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한진영이 누구이고 왜 오는 것인지 이제 사람들도 어느 정도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들어가시지요.”
박경진이 문을 열어주고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박경진을 향해 고맙다는 뜻을 전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룸 안에서 밝게 빛나는 눈빛이 한진영을 찌르듯이 쏘아왔다.
한진영은 눈빛의 주인이 누구인지 들어가자마자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한진영이 제일 먼저 안혁규 의원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뒤이어 곁에 앉아 있는 김교철에게도 인사했다.
평소 같았으면 이곳의 주인인 김교철에게 먼저 인사했겠지만, 오늘은 특별했다.
그러나 오늘의 주인공은 안혁규였다.
한진영은 그런 주인공에게 먼저 인사를 했고, 김교철도 그런 한진영의 모습을 이해한 것인지 기분 나쁜 표정 없이 한진영의 인사를 담담히 받아넘겼다.
안혁규는 가만히 인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렸다 입을 열었다.
“참 보기 어려운 얼굴을 이제야 봅니다.”
“제가 최근에 많이 바빴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이렇게 찾아오게 된 겁니다.”
“그래요? 많이 바쁘셨다고요?”
“네.”
한진영은 안혁규의 비아냥 섞인 말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이야기했다.
“아시는지 모르시겠지만 이번에 새롭게 펀드를 출시하느라 조금 바빴습니다. 그전에는 회사 확장을 좀 진행했고요. 김 대표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직원분들을 지원해주신 덕분에 인사 문제가 쉽게 진행됐습니다.”
한진영은 김교철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김교철은 그런 한진영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한진영의 인사를 받았다.
한진영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안혁규에게 말했다.
“제가 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서서 이야기하려니…….”
“어서 앉으세요.”
가만히 분위기를 살피던 채영석 경제수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진영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안혁규가 기분 나빠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어차피 서서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가벼운 이야기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앉아서 차분히 이야기 나누도록 하시지요.”
한진영은 자리에 앉으며 채영석을 향해 올려다봤다.
“무슨 일 있는 겁니까?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라니요?”
한진영의 말에 채영석은 안혁규의 눈치를 살피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 대표님. 혹시 모르신 겁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저는 당최 무슨 말씀들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안 의원님.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한진영이 정말 모른다는 듯이 안혁규에게 묻자 안혁규는 고개를 돌렸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한진영의 표정으로 보아 정말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진영을 닦달하여 왜 모르는 척하냐고 타박할 수도 없었다.
한진영이 알건 모르건 지금 이야기는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채영석이 안혁규의 얼굴을 살핀 후 한진영의 귀에 살며시 안혁규의 상태에 대해 속삭이듯이 이야기했다.
“뭐라고요?”
한진영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짓자 채영석은 급히 한진영을 다독였다.
“정말 모르셨군요. 그랬으니 지금 안 의원님의 모습이 이상하셨을 테지요. 안 의원님 정말 몰랐나 봅니다.”
채영석이 중간에서 중재하려 하자 안혁규도 그제야 고개를 돌려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자기와 눈을 마주쳐오는 안혁규를 바라보고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정말입니까?”
“모르셨습니까?”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조금 전에도 이야기한 대로 정말 바빴습니다. 제가 얼마나 바빴으면 의원님의 연락을…… 아. 그래서 전화하셨었군요.”
“이제야 기억나십니까? 제가 여러 차례나 전화했는데요?”
“전화 왔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너무 바빠서 제가 다시 연락드릴 정신도 없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한진영이 몰랐다는 말에 이어 진심이 담긴 사과를 건네자 안혁규의 마음이 조금은 풀리기 시작했다.
안혁규가 보기에도 한진영이 거짓으로 몰랐다고 하는 것으로 보이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풀려가는 안혁규의 표정을 보고 아쉬워하며 말했다.
“제가 연락을 못 받았으면 찾아오시기라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랬으면 뵀을 수도 있었는데…….”
“갔었지요. 갔는데…….”
“아~ 사람들이 찾아와서 항의할 때 오셨나 보군요.”
“네. 세이지에서 방송에서 안 좋다고 이야기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마구 찾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해합니다. 오자마자 돌아가셨군요? 하긴 그때 의원님의 모습까지 보였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이상한 상상을 했을지 몰랐을 겁니다. 잘하셨습니다.”
한진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안타깝습니다. 저는 그저 안전한 곳에 투자하셨겠거니 생각했는데 북양그룹이라니요? 하다못해 저희 직원이 방송에 나와서 사기라고 말했을 때만 정리하셨어도…….”
한진영은 안타깝다는 듯이 이야기하다 안혁규의 안색을 살폈다.
안혁규는 당시 물량을 빼지 못한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갔다.
한진영은 그런 안혁규의 안색을 살피며 급히 말을 돌렸다.
“그런데 그것보다 그 문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무엇 말입니까?”
한진영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한진영이 있는 곳으로 모두 시선을 모았다.
마치 한진영은 문제가 하나 더 있다는 것처럼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냐는 듯이 말했다.
“지금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지 않습니까?”
“돈이 제일 중요하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자리에 함께 앉아있던 서주한 변호사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한진영은 그런 서주한에게 오히려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대로 조사가 들어가고 언론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의원님께서 차명 계좌로 들어간 자금이 세상에 드러날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한진영은 말을 하고 다시 한번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쓸어봤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진영은 그런 그들을 향해 다시 한번 말했다.
“정말 생각들 못 하셨습니까? 특히 20% 이율을 약속하고 모은 VIP급들은 검찰에서 직접 조사를 하려 할 텐데 말입니다.”
한진영은 여전히 굳게 입을 다문 사람들을 향해 계속 이야기했다.
“여론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분명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북양그룹 사태를 좋지 못한 시각으로 바라보려 할 겁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정치권과의 연루설 또한 이야기하겠지요.”
“난 피해자입니다.”
안혁규 의원이 억울하다는 듯이 겨우 입을 열었다.
한진영은 그런 안혁규 의원을 향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을 겁니다. 그저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렇게 이야기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다 보면 자칫 의원님의 이름이 거론될지도 모릅니다. 그뿐이면 다행이지요. 의원님이 모시고 계시는…….”
“그만!”
안혁규는 손을 들어 한진영의 말을 멈춰 세웠다.
이야기 들으면 들을수록 울렁거리는 것이 속이 좋지 못한 안혁규였다.
그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한진영의 말을 막아 세운 후 말했다.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는 더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우선은 악화된 상황을 최악으로는 만들지 말아야 하는 게 먼저가 아닌가 싶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최악으로는 만들지 말자?”
“네. 지금 안 그래도 TV를 틀기만 하면 북양그룹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이 줄곧 쏠려있다가는 귀찮아질 만한 이야기가 나오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말입니까?”
“시선을 돌려야지요.”
“어디로 말입니까?”
“사람들이 더 좋아할 만한 이야기 쪽으로 돌린다면 북양그룹 이야기는 금세 잊혀 버릴 겁니다. 그 뒤에 일을 수습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수습하겠다고 나섰다가는 사람들의 시선에 주목받기 딱 좋으니까요.”
한진영의 말에 안혁규가 그럴싸하다는 듯이 곁에 있는 채영석 경제수석과 서주한 변호사를 돌아봤다.
두 사람도 한진영의 말이 설득력이 있게 느껴졌는지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한진영은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의 김교철을 슬쩍 돌아봤다.
다른 사람이야 어쨌든 상관없었지만 김교철만큼은 신경 쓰였던 한진영이었다.
한진영은 김교철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자 빠르게 안혁규에게 자기가 생각해 온 것을 풀어놓았다.
“서준일보의 장남이자 기획본부의 본부장을 맡은 문동우 본부장 이야기입니다.”
“서준일보? 그래요. 계속 이야기해보세요.”
안혁규가 서준일보라는 것에 흥미를 보였다.
언론사에 관련된 이야기는 어떤 순간에라도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항공사에서는 VIP 등급을 A1부터 A3까지 구분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의원님도 A3이시지요?”
“그렇습니다. 뭐 A3라고 해서 별다른 건 없고 의전에 조금 더 신경 쓰는 정도? 뭐 그 정도입니다. VIP 내에서 등급이 분류되어 봤자 거기서 거기니까요.”
자리에 있던 사람 중 A3 등급을 받지 못한 사람을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안혁규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했다.
한진영은 그런 안혁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바로 그 의전 차이에 의해 재미있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상황?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수하물을 직접 운반하여 세관검사를 통해 게이트를 통과합니다. 하지만 A3만은 특별하게 의전팀이 수하물을 운반해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게 무슨 재미있는 상황을 만든다는 말씀입니까?”
한진영의 말에 안혁규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더 다른 사람에 비해 편의를 받는다는 것인데 이것이 무슨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한진영의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김교철만은 그동안 무표정한 표정을 풀고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