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앞서 나가는 인물
한진영과 김교철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한진영은 김교철의 눈빛에서 이상한 낌새라도 느껴진다면 지금 하려는 것을 멈추려 했다.
음흉한 노인네 앞에서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교철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로 한진영을 바라보기만 할 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한진영은 그런 김교철을 가만히 바라봤다.
두 사람이 허공에서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사이 안혁규가 한진영을 불렀다.
“한 대표님.”
“네?”
“아직 대답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의전팀이 수하물을 운반해준다는 게 무슨 상황을 만든다는 겁니까?”
안혁규의 질문에 한진영은 김교철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뒀다.
그때까지도 김교철은 희미하게 웃기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김교철의 모습에서 무언의 동의를 느낄 수 있었다.
‘해도 된다 이거지?’
김교철이 동의를 한 것으로 간주한 한진영은 안혁규에게 문동우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의전팀이 수화물을 운반해주는 A3 등급의 의전은 원칙적으로 받아야 하는 신원확인과 신체수색, 검역, 수하물 확인 등에서도 모두 자유롭습니다. 항공사가 제공하는 최상의 의전으로 원칙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여러 가지 검사에서도 A3 등급만큼은 프리패스로 세관검사를 통과할 수 있지요.”
자리에 있던 사람 중 A3 등급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세관검사를 무검사로 통과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도 몰랐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A3 등급으로 자유롭게 출입국을 이용하던 사람들은 한진영이 맞는다는 뜻을 곁에 사람들에게 전한 채영석이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항공사가 A3 등급을 부여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비행기 출국 때는 비행기 좌석까지, 입국 때는 비행기에서 내려 차에 탈 때까지 한 번도 걸음을 멈추지 않게 하겠다는 뭐 관행과도 같은 행위를 지원하기 위해 그들이 만든 등급인데…… 그게 도대체 서준일보의 문 본부장과 무슨 상관이란 말씀입니까?”
“다음 말을 들으시면 제가 한 이야기가 모두 한 번에 이해가 될 겁니다.”
한진영은 안혁규 의원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문동우가 마약을 하고 있습니다.”
“어?”
“뭐라고요?”
“마약?”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김교철만은 놀란 기색 없이 처음과 마찬가지로 자리에 앉아 한진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한진영은 그런 김교철의 반응을 슬쩍 살핀 뒤 입을 열었다.
“문동우가 A3 등급인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국내로 마약을 가지고 오고 있습니다.”
“그걸 어찌 아십니까?”
자리에 있던 채영석 경제수석이 크게 놀란 얼굴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한진영의 말대로라면 단순한 마약사범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방법 또한 일반 국민들이 혐오할만한 방법을 사용했다.
일반인들이 받지 못하는 특별한 혜택을 이용한 위법행위.
이런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그 파장은 상당할 것이 분명했다.
한진영은 채영석의 질문에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저와 친한 친구가 기풍에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기풍의 이성우 미래전략팀 팀장과 막역한 사이인 건 모르지 않습니다. 그것과…… 아~ 기풍.”
채영석은 말을 하다 말고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풍과 서준일보가 혼인 관계를 맺으려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말했다.
“문동우 본부장이 미래의 매제가 되려는 제 친구인 이성우 팀장에게 제안한 모양입니다. 그걸 이성우 팀장이 저에게 이야기한 것이고요.”
“그렇다면 거짓이 아니겠군요. 허 참. 이런 방법을 악용하고 있었다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서주한 변호사가 안혁규 의원을 돌아보고 말했다.
“안 의원님.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분명 시선이 북양그룹에서 옮겨갈 것이 확실합니다.”
안혁규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서주한 변호사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안혁규 의원은 채영석 경제수석을 돌아봤다.
채영석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안혁규는 그런 채영석을 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채 수석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안혁규의 말에 생각하던 채영석이 고개를 들고 안혁규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때 채영석보다 지금까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김교철이 안혁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말을 하려던 채영석과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 모두 이야기를 한 김교철에게로 급히 고개를 돌렸다.
김교철은 앉아있는 자세 그대로 또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채 수석님?”
김교철의 말에 채영석은 우물쭈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살핀 뒤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지요. 문제없을 겁니다.”
채영석의 대답을 들은 김교철은 짙게 웃으며 등받이에 댔던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어차피 임기 말입니다. 이 정도 이야기가 나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잘 포장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일탈일 수도 있고 시스템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번 일은 개인의 일탈 같아 보이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교철의 말에 채영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 대표님의 말씀을 들으니 저도 개인의 일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니. 이건 분명 개인의 일탈입니다. 마약중독자가 시스템의 허점…… 아니요. 시스템이라는 말 자체가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으니 그 말은 빼고…….”
“마약중독자가 오히려 위법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몰아가면 될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그겁니다. 마약쟁이가 법을 한두 가지 어기다 못해 출입국 관련하여 위법행위를 또 저지른 것으로 가시지요. 그렇게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채영석은 김교철의 말을 받아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둘러보고 동의를 구했다.
채영석은 현 정권과 함께하는 사람이었다.
임기 말이라고 하더라도 정권에 타격을 받으면 채영석 또한 아플 것이 분명했다.
채영석은 그걸 염려하여 지금의 사건이 정권 말기 벌어지는 여러 가지 레임덕 중 하나로까지 번지는 것을 견제한 것이었다.
그런 걱정을 알았는지 김교철이 정확히 선을 그어 현 정권에까지 불이 붙는 것을 막아주었다.
채영석은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급히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의를 구했다.
이야기를 이쯤에서 정리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 채영석이었다.
채영석이 동의하자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검찰은 저희 쪽에서 정리하도록 하지요.”
김교철은 말을 하고 한쪽 편에 앉아있는 주기문을 향해 눈짓했다.
주기문 고문변호사가 김교철의 눈짓에 입을 열었다.
“조만간 후배들에게 전화 넣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문동우는 바로 긴급 구속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마약 사건 몇 개를 같이 묶어 들어가면…… 이야기를 쉽게 풀어갈 수 있을 겁니다.”
전 법무부 장관인 주기문까지 나서자 채영석은 잘됐다고 생각했다.
안혁규 또한 일이 잘 진행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김교철이 나선 이상 잘 안 되는 일이란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여론의 시선을 문동우에게로 돌리기로 합의한 사람들은 각자 맡은 일을 진행하기로 약속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대표 말대로 지금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니까 그걸 다른 쪽으로 돌리고…… 여유가 생기면 손해 본 돈 좀 메우는 일 좀 도와줘요. 지금…… 상황이 좋지가 못해서 도와줄 사람이 꼭 필요해요.”
“알겠습니다.”
한진영은 안혁규의 부탁에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안혁규는 그런 한진영의 태도에 반가워했다.
“그래요. 그럼 나중에 찾아가도록 할 테니까 그때 만나서 자세히 이야기하도록 해요.”
“네. 알겠습니다. 제가 하지 못하더라도 돈을 메울 수 있는 길 정도는 알려드리도록 할 테니 편하실 때 찾아오도록 하십시오.”
시원스러운 한진영의 대답에 안혁규는 반가운 표정으로 한진영의 손을 잡았다 놓았다.
안혁규에게 있어 오늘 자리에서 지금의 대답이 가장 큰 수확인 것처럼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모두 인사를 나누고 방을 나가려 할 때 김교철이 한진영을 잠시 불렀다.
“한 대표.”
마침 나가려던 한진영은 김교철의 부름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내켜 하지 않던 한진영의 표정이 몸을 돌리며 바뀌어 김교철을 마주했을 때는 얼굴에 궁금증만 남게 됐다.
“잠시만 와서 이리 앉아보게.”
한진영을 따로 부르는 김교철의 모습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나가려던 것을 멈추고 한진영과 김교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박경진이 문을 연 채로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나갈 것을 권했다.
“그럼 이리로…….”
사람들은 박경진의 모습에 지금의 자리가 예정되어 있던 것임을 깨닫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룸을 나섰다.
한진영은 김교철의 곁에 앉아 나가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눈인사를 건넸다.
***
북양그룹 사태는 코스피 시장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북양그룹은 업력이 50년이 넘는 곳이었다.
해방 이후 세워진 1세대 회사로 소비재를 팔며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곳이었다.
게다가 회사에 대한 평가도 역사 속에 사라진 다른 기업들과 달리 탄탄한 바탕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었다.
그런 북양그룹이 일반인을 상대로 사기를 쳤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시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런 형태의 일이 다른 곳에서도 나타나지 말란 법이 없다며 상장 회사 모두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이런 투자자들의 태도는 코스피와 코스닥 모두를 하락세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직 옥석이 가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회사가 어떤 일을 벌일지 몰랐기 때문이다.
1,750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지수가 떨어져 내렸다.
1,700대에서는 상장기업의 총 PBR이 1.0대를 하회하는 자리라며 절대 깨질 일이 없다고 이야기하던 것이 무색하게 1,600대로 쉽게 무너져 내렸다.
전저점까지 무너뜨린 것이 어쩌면 더 깊은 하락을 준비하는 것처럼 시장은 힘없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어떻게 됐어?”
홍대민이 최수찬 부실장에게 질문했다.
최수찬 부실장은 들고 있는 태블릿으로 속속 들어오는 각 팀의 정보를 받아 홍대민에게 보고했다.
“현재 1팀과 2팀 그리고 5팀의 경우에는 계획했던 물량을 모두 채운 상태라고 보고 들어왔습니다.”
“3팀과 4팀은?”
“은행과 증권주 그리고 보험주 등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3팀의 경우에는 생각보다 물량이 잘 잡히지 않는 듯한 모습입니다.”
“흐음…… 그렇겠지. 여기서 은행주 같은 것들은 더 내려갈 자리가 없으니까.”
홍대민의 말에 최수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서 더 내려가면 배당이 7%까지 나오는 종목이 속속 생기게 되는 수준입니다. 밑에 자리는 더는 없을 거라는 것이 3팀의 판단인 것 같습니다.”
홍대민은 최수찬의 말에 동의했다.
은행주의 경우에는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배당을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생기더라도 금방 회복하여 다시 배당금을 지급하고는 했다.
배당의 경우에도 들쑥날쑥하여 예상하기 어려운 수준도 아니었다.
정해놓은 배당 성향에 따라 배당이 나왔기 때문에 분기 실적을 보고 충분히 배당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은행주들의 경우에는 바닥이 아니라 근원 자리에 와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기대 배당률이 7%인 상태에서 더 떨어지려야 더 떨어질 자리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은행주들은 시장이 1,650을 뚫고 내려가려 하는 상황에서도 자리를 꼿꼿이 지키고 있었다.
홍대민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현황판을 바라봤다.
“여기서 10% 아니 5%만 더 내려왔으면 딱 좋았을 텐데.”
“실장님. 어떻게 할까요?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자리는 지수상으로 다 오기는 했는데 말입니다.”
“아쉽지만 어쩌겠어? 대표님 말씀대로 진행해. 지금은 저런 사소한 거에 마음이 흔들려 큰 걸 놓치면 안 된다고 하셨으니까.”
한진영은 조정실 실장을 맡은 홍대민에게 전략을 알려준 상태였다.
지수 1,650 이하에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물량을 담아라.
홍대민은 다른 것들은 눈에 밟히지 않았다.
충분히 빠지기도 했고 여기서부터는 받아도 된다고 생각될 자리까지 넉넉히 빠져 내려온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행주를 비롯한 금융주만큼은 속 시원하게 빠져 내려오지 못한 것에 아쉬운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 세이지에서는 한진영의 말이 모든 것을 앞섰다.
홍대민은 최수찬에게 지시했다.
“3팀에 말해서 그냥 다 담으라고 말해. 아쉬운 마음에 시간을 놓치지 말라는 말도 전하고.”
“네. 알겠습니다.”
최수찬은 바로 태블릿을 통해 3팀에 지시를 내렸다.
홍대민은 그런 최수찬의 모습을 흘겨보며 물었다.
“그거 편한가?”
“네. 편합니다. IT팀에서 만들어준 편의성이 생각보다 아주 좋습니다. 각 팀의 상황과 올라오는 보고 그리고 지금처럼 실장님의 지시를 전달하는 것까지 여기 서서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값어치를 충분히 하고 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단번에 각 팀의 상황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까지…… 너무너무 좋습니다.”
최수찬이 말을 하며 태블릿을 터치하자 현황판이 3팀의 현재 상태로 변했다.
화면에서의 3팀은 최수찬에게서 전달받은 것에 따라 은행주를 매수하는 중이었다.
매수 종목과 매수 단가 그리고 대기와 체결까지 모든 상황이 화면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막 SF영화 같은 곳에서나 볼만한 것을 제가 이렇게 조종할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효율이 얼마나 높은지 모릅니다.”
최수찬이 말을 하면서 또다시 태블릿을 터치하자 화면이 팀 단위로 분할하여 나타났다.
각 팀의 보유 상황과 수익률 상황 그리고 각 팀에 내려진 지시까지 화면에 모든 정보가 나왔다.
“대표님은 이런 걸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이런 건 우리나라 대형 증권사에도 없는 거 아닙니까?”
최수찬의 경우에도 한진영이 영입한 인재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가 있었던 삼선증권은 국내 증권사에서는 손에 꼽히는 곳이었다.
최수찬은 자기가 있던 곳에서도 보지 못했으며 이런 게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었던 걸 떠올리며 혀를 내둘렀다.
“모르긴 몰라도 외국에서도 없을 거야.”
“그럴까요?”
“어. 장담해. 이런 게 있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어.”
조정실 실장 자리를 맡은 홍대민은 작게 쪼개진 팀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나 고민했었다.
그런데 그 고민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관리 프로그램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그리고 이런 관리 프로그램을 운용팀이 잘게 쪼개 나가기로 하기 전부터 준비했다는 사실에 홍대민은 한진영이 상상 이상으로 앞서 나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