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한진영은 팔짱을 낀 채로 현황판을 바라봤다.
한진영의 좌우에는 조정실의 실장인 홍대민과 부실장인 최수찬이 자리하고 서서 포지션에 관한 설명을 이어갔다.
“현재 세이지 자산운용이 움직일 수 있는 자금의 80%가 모두 들어가 있는 상황입니다.”
“잘했습니다. 그럼 투입된 자금이 토탈 얼마나 되는 거죠?”
“약 2조가량의 자금이 세팅되어 들어가 있고 예비 자금으로 4,000억 정도가 대기 중에 있습니다.”
한진영은 각 팀이 운용하고 있는 자금들을 훑어봤다.
이번에 새롭게 출시한 펀드의 성공적인 자금 유치로 세이지의 운용 금액에 1조가 더 늘어난 상태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2조 4,000억의 자금이 세이지의 주머니에서 나와 국내와 해외 주식을 마구마구 긁어모아 갔다.
한진영은 여러 개로 쪼개진 팀의 상황을 살폈다.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을 위해 팀을 여러 개로 쪼갠 세이지였다.
그리고 각각의 팀은 최대 2,000억이 넘지 않는 자금만을 나눠주어 사고가 터지더라도 최소한이 되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나누어진 시스템 속에서 리스크관리 팀장인 이진경이 설계한 관리 프로그램으로 만약에 만약의 경우도 걸러지게 만들었다.
거대한 성이 한 사람에 의해 무너지는 경우를 너무도 많이 봤기에 한진영은 돈을 버는 것보다 지키는 쪽에 더 신경을 많이 쓴 것이었다.
홍대민은 한진영의 곁에서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느새 우리가 움직이는 돈이 조 단위를 훌쩍 넘겼습니다.”
“네. 저도 감회가 새롭습니다.”
한진영이 처음 고객에게 일임매매를 의뢰받았을 때의 금액이 300만 원이었다.
그랬던 금액이 지금은 2조가 넘는 돈으로 불어난 것에 한진영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홍대민은 뿌듯해하는 한진영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본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괜찮을까요?”
“무엇이 말입니까?”
“지금 상황 말입니다.”
홍대민이 슬쩍 현황판을 향해 눈을 돌렸다.
지수는 북양그룹 사태를 기점으로 하여 1,700을 깬 것도 모자라 1,650선의 이탈도 준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나스닥을 비롯한 해외 시장도 좋지 못했다.
더블딥 이야기 속에 나스닥은 1,040선도 이제는 자신을 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좋을 것이라고는 눈에 하나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한진영의 지시를 따라 매수 포지션으로 시장에 접근했던 세이지였다.
예비 자금 4,000억을 제외하고 세이지가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자금이 집행된 시점에 홍대민은 이대로 지수가 무너져 내려간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홍대민은 지지부진하기만 한 상황을 지켜보며 말했다.
“어제 긍정적인 경제 지표들이 나왔지만, 연방공개시장위원회가 경기 둔화를 우려한다는 의사록 내용이 공개되면서 시장이 갈팡질팡하는 모습 아닙니까? 나스닥과 S&P500 모두 지난주 내내 하락하는 모습을 보였고 다우지수도 1만 선이 깨져나가면서 불편한 모습을 보이는 데다 우리나라는…….”
“북양그룹 사태로 인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자리에 와있기는 하죠.”
“그뿐이 아닙니다. 분위기가…….”
한진영은 고개를 돌려 홍대민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분위기가 안 좋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외국인들이 슬금슬금 발을 빼고 있고 기관이라고 부르는 동료들도 지금은 관망만 하고 있다는 것도 말입니다. 아마 최근이 조 단위 자금을 집행한 곳은 우리가 유일할 겁니다.”
“네. 그래서 저도 그게 걱정되어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연락이 자주 와서요.”
홍대민은 머쓱한 듯이 말을 하고 한진영의 눈치를 살폈다.
한진영은 그런 홍대민을 슬쩍 돌아보고 다시 현황판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경기침체가 불안해 보이고 나아질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버냉키 아저씨는 또 다른 양적완화는 없다면서 못을 박아 버렸으니 좋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겠죠.”
“네. 맞습니다. 지금은…… 호의적인 게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중국 쪽에서 보여주는 제조업지수도 3개월 연속하락하기도 했으니까요.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한진영은 홍대민의 말에 고개를 돌려 웃고는 최수찬과 홍대민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바쁘지 않으면 함께 제 사무실로 오시지요.”
“사무실이요? 지금이요?”
“아니요. 조금 뒤. 업무가 끝난 뒤 오시면 됩니다.”
“업무가 끝난 뒤요?”
홍대민과 최수찬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봤다.
한진영이 업무가 끝난 뒤 자기들을 부르는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그런 그들에게 조금 뒤에 만날 것을 이야기하고 자리를 떠났다.
***
대부분의 직원이 퇴근한 세이지는 한가하기만 했다.
그런 세이지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한진영의 사무실에 한진영과 홍대민 그리고 최수찬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홍대민과 최수찬은 한진영이 자기들을 부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저기 대표님. 어쩐 일로 저희를 부르셨습니까? 혹시 아까 제가 지금 상황에서 매수 포지션을 잡은 것이 불안하다고 말씀드려서 그런 것인가요?”
홍대민이 조심스럽게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한진영이라면 이 정도 이야기쯤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하고 한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겪은 한진영이라면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이야기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진영의 사무실로 불려오고 나니 한진영이 기분 나빠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홍대민이었다.
한진영은 불안한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홍대민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조금 뒤에 발표될 내용을 함께 보고 싶어서 함께 하자고 한 겁니다.”
“조금 뒤에 발표될 내용이요? 조금 뒤에 뭐가 발표되나요?”
“네. 제가 풀매수를 주문한 이유가 될만한 발표가 조금 뒤에 있을 예정입니다.”
홍대민이 도대체 조금 뒤에 무엇이 발표된다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최수찬을 바라봤다.
그러나 최수찬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늘 발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던 최수찬은 홍대민을 향해 아는 것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홍대민은 최수찬까지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한진영에게 이유를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런 홍대민보다 한진영이 먼저였다.
“잠시만 기다리면 나올 겁니다. 오늘 장전에 발표된다고 알고 있으니…….”
한진영은 시계를 바라보고 말했다.
“얼추 다 됐네요. 벌써 9시니 아마 30분 내로 발표가 나올 겁니다.”
홍대민은 도대체 무슨 발표가 나온다는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어차피 30분 뒤면 기다리던 발표가 나온다고 하니 굳이 지금 한진영을 닦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셋은 기다리는 동안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한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약 20여 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속보가 나왔다.
[벤 버냉키 FRB 의장 긴급 발표 예정]
막 새로 구입한 차 이야기하던 홍대민은 화면에 뜬 속보 내용을 바라보고 그대로 몸이 굳었다.
최수찬도 굳어버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화면에서 시선을 거두고 서로를 허공에서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한진영에게 물었다.
“저거입니까?”
“긴급 발표를 말씀하신 겁니까?”
두 사람의 반응에 한진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긴급 발표가 나온다고 확정이 됐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죠.”
한진영의 말에 홍대민과 최수찬은 침을 꿀꺽 삼켰다.
FRB 의장이 모습을 드러내고 긴급 발표를 한다는 게 작은 이야기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미리 알고 있었던 한진영.
두 사람은 알면 알수록 대단하게 느껴지는 한진영을 향해 조용히 귀를 세웠다.
“지난 시장 하락의 시초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북양그룹…… 아~ 그건 하락의 정점에서 나온 쇼크와 같은 것이었지요. 그렇다면 시초는…….”
홍대민이 최수찬을 바라보자 최수찬이 홍대민을 대신해서 대답했다.
“양적완화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졌다는 것이 하락의 시초 아니었나요?”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최수찬과 홍대민의 대답에 한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 이야기가 나오며 시장을 하락으로 이끌었지요.”
한진영은 긴급 속보 뒤에 버냉키 FRB 의장이 발표하려는 곳을 비추는 화면을 바라보고 말했다.
“당시에 굉장히 생뚱맞은 이야기라며 사람들은 어리둥절했습니다. 기억하고 계시죠?”
“네. 그걸 어떻게 기억하지 못하겠습니까? 2,000에서 빠져 내려오는 이유로 양적완화가 없다는 이야기를 사용할 줄은 정말 몰랐으니까요. 분명 작년 잭슨홀 회의 때 버냉키 의장이 더 이상의 양적완화는 없다고 확실히 못 박았는데 이제 와 그걸 끄집어내서 하락의 소스로 사용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써먹을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왜 하시는 겁니까? 다 써먹었는지 지금은 이야기가 쏙 들어가 버린 이야기 아닙니까?”
홍대민과 최수찬은 한진영이 양적완화를 꺼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락의 트리거로 사용한 뒤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끗이 시장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영문을 몰라 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본 후 말했다.
“그 이야기가 저기서 곧 버냉키의 입을 통해 발표될 겁니다.”
“네?”
“뭐라고요?”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한 한진영의 모습에 두 사람은 자기가 이야기를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홍대민이 먼저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버냉키 입을 통해 양적완화가 발표된다는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새로운 양적완화가 시행될 겁니다.”
“그건…… 안 한다고 버냉키가 직접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작년에도 그랬고 얼마 전에도 그랬고…… 최 부실장. 그렇지 않아?”
“
홍대민이 최수찬을 향해 묻자 최수찬도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분명히 기억합니다. 그리고 시장이 하지 않을 것을 걱정하여 떨어진 것 아닙니까? 그걸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기도 했고요.”
“그렇지요. 그런데 지금은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더블딥이요?”
“맞습니다. 지금 상황은 더블딥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경기가 불황 이후 회복하지 못한 채 다시 떨어진다는 더블딥은 모두가 다 걱정해 마지않는 악재였다.
지난 불황을 직접 겪었기에 그 무서움은 더욱 크게 시장 참여자들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블딥이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시장은 발작하듯이 움직이고는 했다.
이런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간이 약일 뿐 특별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 시장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하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잊을만하면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제 와서 새삼스러운 것도 없지 않나요?”
최수찬이 홍대민을 돌아보고 동의를 구하는 표정을 지었다.
홍대민도 최수찬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맞습니다. 더블딥은…… 설마 지표에 나오기 시작한 건가요?”
홍대민이 무언가가 떠올라 한진영을 향해 급히 질문했다.
지금까지의 더블딥과 관련된 이야기는 형체가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라고 치부할만했다.
하지만 실제 눈으로 볼 수 있는 지표에서 더블딥이 드러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홍대민은 바로 이렇게 지표상에 더블딥을 우려할만한 무언가가 드러난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진영은 마이크가 올라가고 자리에 기자들이 착석한 뒤 FRB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고 계속 이야기했다.
“고용시장이 3달 연속으로 바닥을 치고 있고 제조업지수 또한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고 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내일은 실업률이 발표되는 날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러니 선제 대응하는 겁니다.”
“실업률이 나쁠 것을 알고요?”
“그렇겠지요.”
한진영의 말이 끝나자 화면에 벤 버냉키 FRB 의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버냉키가 화면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는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시장은 요동쳤었다.
이번에도 그때와 다를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만약 한진영의 말대로 이번에 양적완화를 발표한다면 그건 시장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줄 게 분명했다.
최수찬은 버냉키 얼굴 우측으로 뉴욕증시의 가격 등이 떠 있는 것을 확인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이번에도 화면에 지수가 함께 떠 있네요.”
최수찬의 말에 홍대민이 맞장구쳤다.
“미국 놈들은 참 대단한 생각이 듭니다. 이런 중요한 발표 자리에서도 주가와 채권가격 그리고 금 가격 등을 연동하여 보여주다니 말입니다. 모든 걸 엔터테인먼트로 생각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저도 지난번에 OPEC 회의 뒤에 증산량 발표하는 자리에서 오일선물 가격 띄워놓는 것 보고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친구 말로는 허리케인 상륙 예상 발표 자리에서도 오일선물 차트를 띄워놓는다고 하더라고요. 허리케인 상륙지점이 석유 시설이 많이 있는 곳으로 가느냐 안 가느냐에 따라 유가가 움직이니까요.”
최수찬과 홍대민의 말에 한진영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더 보는 재미가 있는 거지요. 보세요. 벌써 난리입니다.”
한진영이 버냉키 얼굴 옆으로 보이는 지수선물 움직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화면에 얼굴을 비춘 것만으로 지수선물이 발작하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의 발표 자리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지 지수선물도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위아래로 마구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잠시 마이크 앞에 서서 자세를 고쳐 잡은 버냉키는 오늘 자리를 마련한 이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경제는 암흑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겨우 빠져나온 동굴에서 밝은 햇빛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우리를 둘러싼 여건들이 개선될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고용과 소비의 둔화는…….”
서두에 시장이 어두운 부분을 한참 이야기하던 버냉키는 내려다보던 발표문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본론을 마이크를 통해 발표했다.
“이에 우리는 새로운 양적완화를 시행할 것을 발표합니다. 6개월간 6,000억 달러의 양적완화를 시행할 것이며 이것으로도 시장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그 뒤에도 양적완화를 이어갈 계획입니다.”
벤 버냉키의 발표에 순식간에 나스닥 선물지수가 미친 듯이 하늘을 뚫고 오르기 시작했다.
다우와 S&P도 뒤를 이어 상승했다.
장대 양봉으로 쭉쭉 뽑아 오르는 지수선물의 모습에 홍대민은 환호를 지르고만 싶었다.
그리고 이런 홍대민의 욕구를 알고 대신하여 풀어주겠다는 듯이 사무실에 환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
한진영과 홍대민 그리고 최수찬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환호 소리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