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회 지옥의 늪에 빠트린다
종합주가지수는 7거래일 연속 상승이라는 기록을 써 내려갔다.
1,600대가 당장에라도 깨질 것 같은 모습에서 벗어나 1,700대에 올라선 것도 모자라 1,800대 코앞에까지 지수를 끌어 올려다 놓은 것이었다.
기관들의 미칠듯한 매수와 함께 외국인의 매수까지 이어지며 지수의 상승세는 탄력을 받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상승 탄력을 받은 코스피보다 더 큰 상승을 보인 곳이 있었다.
바로 엉덩이 무겁기로는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운 뉴욕증시가 코스피보다 더 큰 상승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우리나라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보이는 나스닥이 1,040대에서 1,100대를 넘어 1,200대까지 단숨에 치고 올라갔다.
그것도 모자라 우리나라의 7거래일 연속 상승을 비웃기라도 하다는 듯이 10거래일 연속 상승이라는 흔치 않은 모습을 보이며 전 세계 시장에서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뉴욕증시가 큰 폭으로 상승함과 동시에 세이지도 같이 주목받았다.
-최 차장님. 우선 축하부터 드리겠습니다. 이번 주에도 주간 평가로 세이지 자산운용의 펀드가 각각 상승률 1위와 2위에 올라섰습니다. 벌써 한 달 내내 1, 2위를 나란히 차지한 것인데요. 기분이 어떻습니까?
대경TV에 나온 최석영을 향해 아나운서가 활짝 웃으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최석영은 그런 아나운서의 말에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다 보니 이런 날도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해 투자자분들께 더 큰 행복을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도 세이지 자산운용의 펀드에 가입했다는 말 기억하십니까?
-네.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재미 좀 보셨나요?
최석영이 부드러운 눈으로 아나운서를 바라보자 아나운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지난 북양그룹의 손해를 모두 메우고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국내 투자를 주로 진행하는 2호 펀드에 가입했는데도 이 정도입니다. 해외 투자를 주로 하는 1호 펀드에 투자했다면 수익률이 어마어마했을 것 같습니다. 1호 펀드의 경우에는 설정 후 수익률이 벌써 20%에 육박한다고요?
-운이 좋았습니다. 하하하.
최석영이 쑥스러운 듯이 이야기했지만 웃는 얼굴에서는 자부심이 카메라를 통해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나운서도 이런 최석영의 자부심 넘치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아직 집계가 끝나지 않았지만 이번 주에도 이변이 없으면 세이지의 펀드들이 수익률 1, 2위를 나란히 차지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벌써 한 달이 넘는 기간을 독주하고 있는 것인데요. 어떻습니까? 올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수익률 1위의 자리가 욕심나지 않으십니까?
아나운서의 말에 최석영이 절대 그렇지 않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희는 그야말로 운이 좋았을 따름입니다. 하락장에 개설되어 운이 좋게 최저점에 물량을 실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다른 곳에 비해 수익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저희가 잘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닙니다.
겸양을 떠는 최석영의 말에 아나운서가 최석영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리고 웃음 띤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의 최 차장님의 모습이 아니어서 그런지 지금의 모습이 속마음을 들킬까 봐 괜한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솔직히 말씀해보십시오. 욕심이 나지 않으십니까?
-하하하하. 저를 너무 잘 아셔서 속일 수가 없네요. 맞습니다. 욕심이 납니다. 그리고 운도 실력 아니겠습니까? 저희가 잘나가는 건 모두 저희의 실력이 좋아서입니다.
최석영이 시원하다는 듯이 소리를 지르자 아나운서도 즐거운 듯이 크게 웃었다.
화면 속의 두 사람은 유쾌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웃고 있었다.
화면을 가만히 지켜보던 안혁규는 화면을 바라본 채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연말 시상식에 왜 연연하십니까? 어차피 1등을 한다고 해 봤자 상금이라고 나오는 것이 한 대표님의 눈에 차지 않을 게 분명한데 말입니다.”
안혁규의 말에 한진영은 리모컨을 든 채로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대답했다.
“말씀대로 상금 같은 것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른 게 중요하다는 말씀입니까?”
“네. 맞습니다. 1등을 획득하면 중요한 걸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명예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안혁규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물었다.
“한 대표님도 타이틀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셨습니까? 저는 한 대표님은 그런 사소한 것보다 실리를 추구하시는 분인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타이틀이 실리를 뛰어넘는다면 당연히 실리를 뒤편으로 밀어둬야 하는 게 맞겠지요.”
“그 정도입니까?”
“생각하시는 것 이상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안혁규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식시장은 돈을 좇는 곳이었다.
돈이 권력이고 정의인 곳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타이틀이 돈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외부인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진영은 안혁규를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
“대한민국 1등. 사실 우리나라에서만 장사하려 한다면 뭐 필요가 없는 타이틀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해외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이 1등이라는 타이틀이 꼭 필요합니다. 복잡한 설명 없이 단 한 줄로 모든 이를 매료시킬 수 있는 좋은 조건이니까요.”
“해외시장까지 염두에 두고 계시는 겁니까?”
“진출했으니 그곳에서도 장사해야지요. 제가 미국에 발을 들인 것이 단순히 투자하기 위함만은 아니었습니다. 자본 세계의 끝판왕인 곳에서 제대로 한번 해보기 위해 우선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한진영의 포부를 들은 안혁규는 놀란 얼굴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한진영의 목표는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슬쩍 화면을 돌아본 후 여전히 놀란 얼굴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안혁규를 향해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지금쯤이면 한창 바쁘실 때 아닙니까?”
각 정당은 내년 대선 후보 선정을 위한 경선이 지금 한창 진행 중이었다.
특히, 안혁규가 모시고 있는 의원은 현재 좋은 쪽으로든 안 좋은 쪽으로든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만큼 화제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후보를 모시고 있으니 바빠야 하는 게 당연했다.
후보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안혁규를 필히 거쳐야 하는 만큼 이렇게 여유 있게 TV를 바라볼 시간조차 없는 게 당연했다.
지금도 안혁규의 전화기가 쉴 새 없이 울리는 것이 바로 이런 안혁규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특별히 시간을 내서 직접 찾아와 한진영 앞에 앉아 있었다.
한진영은 안혁규가 어떤 의도로 자기를 찾아왔는지 알고 있었다.
‘돈 때문이겠지.’
한진영을 찾는 이유는 돈이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 만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한진영의 생각이 맞았는지 안혁규는 한진영을 향해 천천히 자기가 온 이유를 이야기했다.
“서준일보의 일은 잘 처리가 됐습니다.”
“네. 저도 잘 봤습니다. 경선 다음으로 방송과 신문에서 가장 크게 떠들어댔으니까요. 서준일보가 아주 곤욕을 치른 것으로 보였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서준일보의 자식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라도 본부장이 긴급체포로 잡혀 들어간 것인데 말입니다.”
서준일보 문동우의 체포 소식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서준일보와 경쟁 관계를 이루고 있는 매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문동우의 체포 소식을 대서특필하며 서준일보의 몰락을 즐거워하는 것만 같았다.
방계가 아닌 직계 그것도 언론재벌 자식의 몰락은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경쟁 업체의 몰락을 바라는 경쟁적인 보도 속에 북양그룹 사건은 어느새 물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안혁규는 이렇게 변한 분위기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제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한진영을 찾아온 것이었다.
“이제 분위기도 어느 정도 바뀌었으니…… 한 대표님. 지난번 만남 때 찾아오라는 말씀하신 걸 기억하시죠?”
“네. 기억합니다.”
“그럼 말 돌리지 않고 바로 이야기하겠습니다. 한 대표님. 도와주십시오.”
안혁규를 아는 사람이라면 놀랄 정도로 안혁규가 한진영을 향해 바짝 엎드렸다.
“손해가 1,500억 정도 됩니다. 북양그룹에서 잃은 돈은 그야말로 한 푼도 건지지 못하게 됐습니다.”
“이해합니다. 손해를 만회하겠다고 소송을 불사할 수도 없으니까요.”
“맞습니다. 그 돈은 이미 제 손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안혁규는 고개를 들어 올려 한진영을 똑바로 바라본 채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복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렇게만 한다면 한 대표님의 앞날을 제가 틔워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기를 어렵게 만난 사람들이 하던 행동을 오히려 한진영 앞에서 한 안혁규였다.
그만큼 지금 안혁규는 절실하다는 뜻이었다.
안혁규는 기대에 찬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이 정도 했다면 한진영도 모르는 척 안혁규가 내민 손을 잡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혁규의 예상은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이거 참…… 뭐라고 드릴 말이 없습니다. 조금만 더 일찍 오셨다면 괜찮았을 텐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한진영의 반응에 숙였던 안혁규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그 말씀은 저를 도와주시지 못하다는 말씀인가요?”
안혁규의 말에 한진영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것이 제한적입니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안혁규는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하지 못한다면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한진영을 향해 납작 엎드렸던 이유는 한진영이 자기를 살려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기대가 사라져 버린 상황에서 더는 자기를 농락하듯이 데리고 논 한진영을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안혁규는 어서 이야기해보라는 식으로 한진영을 바라봤고 한진영은 그런 안혁규를 향해 여전히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선 직접적으로 제가 안 의원님의 계좌를 건드릴 수는 없습니다.”
“지난번처럼 인원이 부족해서 할 수 없다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제가 알아본 바로는 인원을 충분히 확충한 것으로 아니 말입니다.”
“맞습니다. 말씀대로 운용팀 인원을 많이 늘렸기 때문에 지난번과 같이 사람이 부족한 상황은 아닙니다. 다만…….”
“다만?”
“이번에 저희가 펀드를 새롭게 출시하여 많은 고객을 유치한 것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펀드의 수익률이 상당히 높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안혁규가 한진영에게 기대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세이지 자산운용에서 출시한 펀드가 이룬 성과를 봤을 때 자기가 손해 본 금액은 물론이고 원하는 수익 또한 올려줄 것으로 기대가 됐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안혁규의 시꺼먼 속내가 들여다보이는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그 펀드로 인해 현재 금감원에서 모니터링을 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모니터링을 당한다고요?”
“네. 아무래도 단기간에 큰 자금을 모은 데다 저희가 신생 업체라는 것이 걱정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매주 보고서를 비롯하여 매매 상황과 보유 종목 그리고 장부상에 쓰여있는 것과 실제 계좌 상에 움직이는 것까지 모든 것을 금감원이 모니터링하는 중입니다.”
한진영은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만 일찍 오셨다면 안 의원님의 자금까지 묻어서 함께 보고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미 보고가 들어간 상황이라 지금 안 의원님이 맡기시려는 금액과 같이 큰 금액이 유입되면…….”
안혁규는 한진영의 말에 허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진영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이유 때문이라면 자기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의원님. 혹시 금감원 측에 연락이 가능하십니까? 가능하시다면…….”
한진영이 은근한 눈으로 안혁규를 바라봤다.
그러나 안혁규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진 채로 고개를 저었다.
“저도 거기까지는 힘듭니다.”
“그렇군요. 기대하기는 했지만 힘들 거로 생각하기는 했습니다. 아무래도 정권이 바뀌기 전이니까요.”
한진영이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안혁규를 바라봤다.
사실 이런 상황을 모두 예상하였던 한진영이었다.
안혁규에게 한번 찾아오라고 말한 것도 금감원에서 모니터링을 들어올 거라는 것을 알고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상황은 안혁규의 잘못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일찍 왔으면 괜찮았을 상황을 늦게 오는 바람에 망치게 만들며 지난번의 일까지 더해 안혁규의 멘탈을 흔들어 버린 것이었다.
안혁규는 모든 것이 자기 잘못이 되어 버린 것에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안 의원님 이렇게 하시죠.”
멍하게 죽어있는 눈빛을 하고 있던 안혁규는 한진영의 말에 희망을 찾은 듯이 눈을 반짝였다.
“방법이 있습니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요?”
점차 생기가 도는 안혁규를 향해 한진영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물론이고 세이지 자산운용이 직접 계좌를 운용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힘이 듭니다. 가뜩이나 집중 모니터링 조사 대상에 들어있는 입장에서 무시하고 운용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저도 그렇게까지는 원하지 않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저희 쪽 계좌도 들통날 수 있으니까요.”
“이해하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한진영이 안혁규를 향해 몸을 굽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직접적으로 하지는 못하지만, 간접적으로 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간접적이요?”
“네. 제가 조언하고 그걸 듣고 의원님께서 운용하시는 방법 말입니다.”
안혁규는 한진영의 말에 잠시 눈을 끔벅이기만 했다.
지금까지 주식을 사고파는 매매를 해본 적이 없었던 안혁규였다.
돈을 맡기고 알아서 하라고 하던가 자산관리인이 정해준 금융상품에 가입하는 일이 전부였다.
그런데 직접 매매를 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한진영의 말에 안혁규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한진영은 그런 안혁규를 향해 웃으며 다시 제안했다.
“어려운 것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제가 삼선전자를 200만 원에 매수해서 220만 원에 매도하라고 신호를 주면 거기에 맞춰 의원님께서는 그대로 하시면 되는 겁니다. 마우스로 클릭만 할 줄 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안혁규는 간단해 보이는 한진영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의 말대로라면 어려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안혁규가 지옥의 늪에 발을 담그는 순간을 바라보며 말없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