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이야기를 다뤄줬으면 한다
한숨을 내쉰 문서영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이성우를 모른 척했다.
보면 괜히 화가 날 것 같아 차라리 시선을 주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다고요?”
문서영은 맞은 편에 앉아있는 한진영에게 물었다.
집안을 다 둘러본 한진영이 문서영을 찾아와 할 말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문서영은 자기와 할 말이 무엇인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중요한 일인가요?”
“네. 중요한 일입니다.”
“저한테요?”
“아니요. 서준일보에 중요한 일입니다.”
“서준일보예요?”
문서영은 놀란 표정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싱글벙글 웃고 있던 이성우도 웃는 것을 멈추고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본 후 먼저 문서영을 향해 물었다.
“서준일보는 현 정권과 관계가 어떻습니까?”
뜬금없는 한진영의 질문에 문서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관계라고 하면 뭐…… 나쁘지 않아요. 아무래도 현 정권과는 오래전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정권이 위태로워지거나 무너지는 걸 원하지는 않겠군요.”
“그건 또 다른 문제예요. 어차피 영원한 권력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럼 반대편이 정권을 잡으면 어떻습니까?”
한진영의 질문에 문서영은 도대체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질문을 계속하시는지 모르겠네요. 그게 지금 우리 대화에 필요한 질문인가요?”
“필요합니다. 제가 우선 알아야 어디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지 판단이 되니까요.”
“그럼 제 대답에 따라서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네. 맞습니다. 달라집니다.”
문서영은 이성우를 돌아봤다.
자기보다 한진영이라는 사람을 이성우가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사람이 하는 말을 당신은 알 수 있냐는 듯한 문서영의 눈빛에 이성우는 문서영을 대신해서 나섰다.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이길래 그래?”
“어…… 정권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이야기야.”
“뭐?”
“네?”
한진영의 대답에 문서영과 이성우 모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문서영은 다급한 표정으로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이야기라니요? 도대체 그게 무슨…….”
문서영은 얼마나 놀랐는지 말도 채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이성우는 문서영의 등을 문질러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문서영을 대신하여 한진영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이길래 정권이 무너진다는 이야기야? 그리고 반대쪽 이야기를 물어보는 거로 봐서는 이거로 현 정권의 집권이 사실상 날아갈 수도 있다는 뜻처럼 받아들여지는데…… 두 번 연속 집권하며 완벽하게 여당 입지를 확고히 한 정권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말이야?”
이성우의 말에 문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방개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지금처럼 오랜만에 시원한 모습을 보여준 것에 문서영은 따뜻한 눈으로 이성우를 올려다봤다.
한진영은 놀란 표정의 두 사람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내 말을 오해하는 거 같은데 나는 무너뜨릴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어.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그게 그거 아니야?”
“엄연히 다르지. 무너뜨릴 정도로 강력한 타격을 받겠지만 무너지지는 않는 것과 무너지는 것은 천지 차이니까.”
문서영은 이성우를 바라보던 것을 멈추고 한진영에게 말했다.
“저는 그런 말장난 같은 건 모르겠고…… 도대체 어떤 이야기길래 그러시는 거예요? 그냥 속 시원하게 말씀해보세요.”
“저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대답해야지만 이야기해주신다는 말씀이세요?”
“네. 대답에 따라 제가 이야기하는 게 달라질 테니까요.”
고집스러운 한진영의 모습에 잠시 주저하던 문서영은 가만히 생각한 뒤 한진영의 질문에 대답했다.
“솔직히 반대쪽이 집권하는 건 불편해요. 언론과 별로 친한 편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 여당과 비교했을 때이고…… 저희 입장에서는 상관없어요.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 같은 놈이니까요.”
“정말 상관없으십니까?”
“네. 정말 상관없어요. 그러니 말씀해보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건데요?”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어디 가서 이야기하지 않으실 거로 믿겠습니다.”
문서영과 이성우는 한진영을 향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과 같은 뜻을 보여줬다.
한진영은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진영의 이야기를 듣던 두 사람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다음에는 그럴 리가 있냐는 의심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문서영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한진영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현 정권의 높으신 분들은 물론이고 대통령실까지 엮인 폰지 사기 사건이 터진다는 말씀이세요?”
“네.”
“그 폰지 사기는 경기증권의 펀드가 될 테고요?”
“맞습니다.”
문서영이 여전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자 이성우가 이번에도 문서영을 대신해서 질문했다.
“거기에 동우까지 연관되어 있다는 거지?”
“중심에 동우가 있는 거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왜 사기 사건에 연루가 됐다는 거야? 동우가…… 그럴 이유가 없잖아.”
이성우의 말에 문서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동우라면 한해 1,000억에 가까운 돈을 벌어들인다고 알려진 로펌이었다.
국내 최대규모였으며 가진 힘은 돈 이상이었다.
현 정권조차 동우의 눈치를 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한민국의 거대한 힘의 결정체가 동우였다.
그런데 그런 곳이 다른 것도 아니라 폰지 사기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는 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성우는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보고 물었다.
“근데 너도 동우 멤버 아니었냐?”
“나왔어.”
“나왔다고? 왜?”
“같이 있으면 엮일 테니까.”
“하긴 그게 진짜라면 나오는 게 맞기는 하는 건데…….”
이성우는 문서영을 돌아봤다.
두 사람은 허공에 시선을 잠시 교환했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단숨에 헛소리하지 말라고 하고도 남았을 이야기였다.
하지만 말한 상대가 한진영이라는 것에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한진영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야 할 존재기 때문이다.
“진짜예요?”
“진짜입니다.”
“이유는요?”
“폰지 사기에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돈 때문이지요.”
“동우가 돈이 급하다는 말씀이세요?”
“돈도 급하고…… 동우조차 유혹할 정도로 돈의 단위가 크기도 하니까요.”
문서영은 한진영의 말에 잠시 눈을 감고 고민했다.
그렇게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눈을 뜨고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서준일보에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게 있다면서 지금과 같은 정보를 주신 걸 보면…… 서준일보에서 이 이야기를 다뤄달라는 거지요?”
한진영은 문서영의 말에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역시 제수씨와는 이야기가 잘 통합니다. 맞습니다. 서준일보에서 다뤄주기를 바라서 드린 정보입니다.”
“하지만 증거가 없잖아요.”
“지금 당장은 증거가 부족하겠지요. 보이는 것도 없고 그들의 움직임도 제한적이니까요. 하지만 지금부터 유심히 살피고 조심스럽게 증거를 모아간다면 나중에는 누구도 벗어나지 못할 증거를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저쪽도 이제 시작인 단계라 증거를 찾는 게 지금이 더 수월한 면도 있고요.”
문서영은 한진영의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진영의 말대로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기에 파고들기가 더 편했다.
그리고 파고든 뒤 자리 잡고 앉아있다 보면 알아서 증거가 쏟아져 들어올 게 분명했다.
타이밍만 보자면 지금이 모든 것이 확실해진 나중보다 나은 상황이었다.
문서영은 생각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가 깊이 생각할 때 자주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그만큼 문서영은 깊게 고민했고 한동안 생각을 정리한 뒤 한진영을 향해 우선 질문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이야기가 세이지에는 어떤 도움이 되죠?”
“저는 폰지 사기로 날아가 버린 경기증권을 흡수할 생각입니다.”
이성우가 한진영의 말에 깜짝 놀라 물었다.
“너 증권사 간판을 노리고 있던 거야?”
“조금 더 사업을 확장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증권사 간판이 필요한 게 사실이니까. 그리고 이렇게 기회가 왔으니 잡으려 하는 거고…….”
문서영은 한진영의 대답이 충분히 납득이 되었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명성을 얻게 되겠네요.”
“명성과 함께 서먹한 저쪽과 유대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쌓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요. 여당에는 만년 하수인이라는 시각에서 벗겨낼 수도 있고요.”
“만년 하수인이요?”
기분이 나쁜 듯이 물은 문서영이었지만 한진영은 모른 척 계속 이야기했다.
“그뿐이 아닙니다. 국민들에게도 긍정적인 시각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대중은 서준일보를 좋은 시각으로 바라보지는 않았으니까요.”
“뭐…… 그게 사실이긴 하죠.”
문서영은 한진영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한진영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좋아요. 뭐 저희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 없죠. 당장은 진영 씨의 말이 사실인지 취재하는 단계에 불과하니까요.”
문서영의 긍정적인 말에 한진영은 만족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진영은 이제 동우를 찌를 칼끝도 마련되었다고 생각했다.
***
약 보름간의 미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나창운은 혼자 한국에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오셨습니까?”
“대표님께서는 안녕하시죠?”
“나 팀장님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럼 바로 가실까요?”
“바로요?”
조지훈은 나창운과 함께 입국한 사람을 슬쩍 돌아보고 말했다.
“피곤하니 오늘은 쉬시고 내일 함께 회사로 오시는 게 어떠세요? 대표님께서 저를 보낸 것도 모시고 오라는 의미가 아니라 수고하셨다는 의미로 보낸 거라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아닙니다. 오면서 비행기 안에서 이야기 나눴습니다. 이쪽은 당장에라도 대표님을 뵙고 싶어 안달입니다.”
나창운의 말에 조지훈이 정말 괜찮냐는 눈으로 나창운과 함께 온 사람을 바라봤다.
그는 조지훈의 시선이 무얼 말하는지 깨닫고 직접 괜찮다는 뜻을 전했다.
“세이지의 한 대표님을 지금 뵙고 싶습니다.”
조지훈은 이렇게까지 말하는 모습에 알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준비된 차에 미리 준비해놓은 숙소로 가는 것이 아니라 회사로 가자는 말을 전한 후 먼저 차를 타고 세이지가 자리하고 있는 여의도로 떠났다.
나창운은 함께 온 이에게 차에 탈 것을 권한 후 뒤이어 차에 올라탔다.
그는 12시간이 넘는 비행에 피곤해 있는 동행을 안심시켰다.
“대표님에게서 긍정적인 답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나창운이 안심시키려 건넨 말이지만 함께 한국에 온 타일러 버드는 안심이 되지 않는 듯이 보였다.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투자자를 찾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녔습니다.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과 심지어 중국에까지 다녀왔지요. 하지만 모두 흥미가 있다고 말할 뿐, 투자에는 소극적이기만 했습니다.”
타일러 버드는 기대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곁에 앉아 있는 나창운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게 뻔합니다. 나 매니저를 믿고 이곳에 오기는 했지만…… 저는 크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귀사의 성장성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표님께서 저한테 준 믿음을 생각했을 때 대표님께서도 제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실 겁니다. 최소 밀리언 달러 이상의 투자를 약속할 수 있습니다.”
타일러 버드는 나창운의 말에 다시 한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1년 전이었다면 나창운의 제안에 코웃음을 쳤을 게 분명했다.
밀리언 달러의 투자를 받자고 여기까지 온다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소 텐 밀리언, 1,000만 달러이상의 투자가 아니라면 받지 않겠다는 자신에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100만 달러만 해도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동양의 작은 나라로 향했다.
이번 기회가 마지막으로 이번에도 투자유치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회사는 문을 닫아야만 한 상황이었다.
사실 타일러 버드 입장에서는 100만 달러를 투자받아도 잘해야 1년 회사를 더 끌고 나가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나창운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500만 달러 이상의 투자유치를 자신했고, 한진영만 잘 설득한다면 1,000만 달러 혹은 그 이상도 받아낼 수 있다는 말로 타일러 버드를 설득하여 비행기에 태운 것이었다.
“저도 버드 씨만큼이나 이번 일에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무조건 성공시킬 작정으로 버드 씨를 대한민국에 초대한 것이니 저만 믿고 가시지요.”
나창운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타일러 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나 매니저님을 믿어야지요. 알겠습니다.”
타일러 버드는 이미 비행기에서 내린 마당에 더는 물러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든 세이지로부터 투자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여의도로 향하는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인천공항을 나온 차가 여의도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3시 무렵이었다.
시장이 마감에 들어가며 오늘 있었던 결과를 정리하느라 세이지는 북적였다.
“대표님께는 바로 오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조지훈은 잠시 나창운에게 바짝 붙어 나창운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 계시는 동안 집을 구해놓았습니다. 지금 다니는 병원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곳입니다. 어머니를 돌봐주실 분도 섭외를 마쳐놓은 상태이고요.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누시고 바로 보실 수 있도록 준비해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나가 있는 동안 어머니를 돌봐주신 것도 모자라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시니 너무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모두 대표님께서 특별히 팀장님을 신경 쓰라고 하시어 움직인 거니 인사는 대표님께 하시면 됩니다. 저희야 대표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니까요.”
나창운은 조지훈이 아니라고 말하는데도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건넸다.
그리고 한진영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이번 건은 무조건 성공시켜야 해.’
한진영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길수록 나창운은 이번 투자 건을 성공시키고 말겠다는 다짐을 되뇌었다.
나창운이 생각하기에 이것보다 더 좋은 투자처는 앞으로 한동안 나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