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화 내 손으로 일으켜 세울 자신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식당은 양철 테이블에 보기에도 불편해 보이는 의자들이 놓여 있는 곳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곳 입구에 서서 둘러본 한진영은 김교철이 앉아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김교철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는 이미 고기와 소주가 놓여 있었다.
“일찍 오셨습니다.”
“왔나? 앉아. 내가 먼저 시켰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고기 거의 다 됐으니까.”
김교철은 고기를 굽다 잠시 한진영을 올려다본 후 다시 집게를 들어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한진영은 그런 김교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맞은편에 앉았다.
치익~.
고기 굽는 소리만이 잠시 둘 사이에 이어졌다.
그렇게 한동안 시간이 흐른 뒤 김교철이 집게로 고기를 들어 한진영 앞에 놓인 접시 위에 놓았다.
“잘 익었네. 한번 먹어봐. 여기 갈매기살이 아주 일품이니까.”
“잘 먹겠습니다.”
“잠깐.”
김교철은 젓가락을 들어 고기를 먹으려던 한진영을 막았다.
“고기는 술과 함께 먹어야지.”
김교철은 소주병을 들어 가볍게 흔든 후 한진영을 향해 내밀었다.
한진영은 소주잔을 양손으로 들어 김교철을 향해 내밀었고, 김교철은 한진영의 비어있는 잔에 소주를 따라줬다.
“자 이제 먹어보게.”
자기 잔에도 소주를 따른 김교철은 소주잔을 들어 한진영을 향해 내밀었다.
한진영의 잔과 김교철의 잔이 가볍게 부딪친 후 한진영은 소주잔을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김교철이 열심히 구운 고기를 들어 맛을 봤다.
김교철은 한진영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맛있네요.”
“그렇지? 맛있다니까.”
김교철은 한진영의 입에서 원하는 대답이 나와서 그런지 기분 좋은 얼굴로 나머지 고기를 다시 굽기 시작했다.
한진영은 입에 남아있는 소주 맛과 고기를 음미하며 그런 김교철을 말없이 바라봤다.
김교철은 충분히 구워진 고기를 자기 접시와 한진영 접시로 옮겨 담았다.
그리고 다시 한진영의 잔에 소주를 따라 담으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사시 공부를 할 때부터 오던 곳이야.”
“그렇게나 오래된 곳입니까?”
“어. 아주 오래됐어.”
김교철은 감회에 젖은 눈으로 술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사시 공부를 하는 우리가 돈이 어디 있겠나? 그때는 장부에 외상을 달면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달에 한 번 정도 부모님이 와서 정리해주는 방식으로 술을 마시고는 했어. 참 오래된 일이지. 반백 년은 된 일이니까.”
김교철은 자리에 앉아 주변을 살폈다.
마치 그때의 모습이 아직 남아 있는 곳을 찾으려는 듯이 아련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눈에 과거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 듯했다.
김교철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소주잔을 들어 올렸다.
“세월이 흘러서 그런가 더는 그때의 모습이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네. 분명 당시와 다른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말이야.”
김교철은 소주잔을 꺾어 소주를 들이켠 후 잔을 양철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곳은 변하지 않았는데 내가 변한 건가? 그래서 내 눈에 간절하던 그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가?”
한진영은 김교철의 질문에 말없이 소주잔을 들어 마셨다.
김교철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피식 웃고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 대한민국에서 날고 기니 세상을 너무 쉽게 본 거야. 세상에서 나라는 놈은 자그마한 존재에 불과했는데 말이야.”
“힘내십시오. 분명 길이 나올 겁니다.”
용기를 북돋으려는 한진영의 말에 김교철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그만하게. 이렇게 된 마당에 장난은 그만두게. 자네와 그러고 싶은 마음도 이제는 없으니 말이야.”
김교철의 말에 한진영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난번의 만남이 마지막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를 보자는 말씀을 하셨다는 걸 듣고 알게 됐습니다. 대표님께서도 눈치를 채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찌 모르겠나? 상대를 향한 적의는 숨긴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야.”
“왜 가만히 보고만 계셨습니까? 아셨다면 막을 수도 있으셨을 텐데요.”
“막았지. 그래서 자네를 내보낸 거 아닌가?”
“늦으셨군요.”
“그래. 늦었지. 그게 내가 지금 제일 아쉽게 생각하는 거라네.”
김교철의 말에 한진영은 웃지 않았다.
김교철이 일찍 알아챘다면 일이 이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았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진영은 지난 시절의 경험을 통해 사물과 상황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은 나아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김교철은 소주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천천히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은 너무 빠른 것 같습니다.”
“천천히…… 나는 시간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자네들처럼 천천히 마시지를 못해. 어쩌면 그래서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도 모르겠군.”
잘못된 결정을 내린 이유 하나를 더 찾았다고 느낀 건지 김교철은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는 소주잔을 꺾었다.
그리고 잔을 바닥에 털어낸 후 젓가락을 들어 갈매기살을 집어 입에 넣었다.
김교철은 오물거리며 갈매기살을 음미하고는 한진영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차라리 노골적으로 나를 노렸다면 더 빠르게 눈치챘을지 몰라. 하지만 자네는 은근히 노렸어. 그래서 내가 눈치채는데 느렸던 거야.”
“다행이군요.”
“자네 입장에서 다행이지. 나를 노렸던 수많은 과거의 파편들은 그걸 못해서 지금은 세상에서 모두 지워져 버렸으니까. 그런데 자네는 성공했어.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지워질 차례인 거 같아.”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뭘 말인가?”
“제가 왜 그랬는지 말입니다.”
“흐음~”
김교철은 잠시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한진영이 묻기 전에 먼저 물어봤을 이야기였지만, 김교철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김교철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궁금하네.”
“궁금하지 않으시다고요?”
“그래. 알고 싶지 않아.”
김교철은 단호하게 말하고는 팔짱을 풀고 젓가락을 들어 고기를 집어 입에 넣었다.
한진영은 그런 김교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저를 이곳에 왜 부르신 겁니까?”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야.”
“다른 게 궁금하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나한테 칼을 왜 들이밀었냐는 건 이제 와서 큰 의미가 없어. 알면 뭐 하겠나? 내가 알게 된다고 해서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한진영은 흥미로운 얼굴로 김교철을 바라봤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과 다른 김교철의 모습에 김교철이 궁금한 게 무엇일지 오히려 한진영이 궁금해져 왔다.
김교철은 가만히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한진영을 향해 계속 이야기했다.
“자네를 제외하고도 나에게 칼을 들이민 사람은 많아. 그리고 그들의 이유는 모두 제각기 달랐지.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던 이유도 있었고, 이해하지 못할만한 이유도 있었다네. 그런데 자네 사연 하나 더해진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결과가 나온 마당에 이유는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럼 뭘 물어보고 싶으십니까?”
“왜 이렇게까지 한 것인지 물어보고 싶어서 자네를 부른 거네.”
김교철은 잠시 한진영을 바라보고는 젓가락을 양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마시던 소주잔도 잠시 밀어놓은 김교철은 한진영 앞에서 허리를 곧추세웠다.
“왜? 어째서? 이렇게까지…… 나란 놈을 잡기 위해 대한민국이라는 곳을 시궁창에 처박게 만든 것인지 나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어서 자네를 부른 거네.”
잠시 억양이 높아진 김교철은 다시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이야기했다.
“내가 애국자라서 그런 건 아니야. 억울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한 명의 국민으로서 이렇게까지 해야 했냐는 의문이 들어서 자네를 부른 거네. 자네에게는 나라라는 개념이 없는 건가?”
한진영은 김교철의 말에 가만히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김교철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에 화가 난 듯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국가와 민족보다는 ‘나’를 먼저 신경 쓴다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나에 대한 원한이 대한민국을 시궁창에 처박을 만큼 강했다는 말인가?”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한진영은 김교철의 말이 멈추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우선 김 대표님께서 잘못 알고 계신 것부터 바로잡고 가겠습니다. 대한민국을 시궁창으로 빠뜨린 건 제가 아닙니다. 신용평가사를 비롯하여 미국의 백악관이 누구를 비난하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그리고 제가 그분에게 그런 말을 하라고 시킨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대한민국을 이렇게 만든 존재는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지 않았나?”
“아는 것과 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니까요. 일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버젓이 있는데 알고 있던 사람에게 왜 막지 않았느냐고 탓을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허허.”
김교철은 말문이 막혀버렸는지 헛웃음만 흘렸다.
한진영은 그런 김교철을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저는 자신이 있습니다.”
“자신이 있다고? 무슨 자신이 있다는 말인가?”
“지금이야 대한민국이 시궁창에 빠져 있는 상태지만 10년 안에 시궁창에서 끄집어내어 모든 국가에 추앙받게 할 자신이 있습니다. 제 손으로 직접이요.”
“자네 손으로 직접 추앙받게 만들 수 있다고? 어떻게?”
“그걸 미리 말씀드리면 재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김교철은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자네는 물건이야. 내가 돈에 눈이 멀지 않고 자네와 함께했다면 참 좋았을 텐데.”
한진영은 그럴 일은 다시 지난 시절로 돌아가 김교철이 자기 앞에 무릎 꿇지 않는 한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하려다 참았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까지 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교철은 한진영에게 이유를 들은 이후 두 번 다시 그에 관한 것들을 묻지 않았다.
그저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잡담만을 나눌 뿐이었다.
한참을 이야기 나누던 두 사람 중 한진영이 먼저 돌아가겠다는 말을 건넸다.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저는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한진영은 양철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소주병과 이제는 식어버린 남은 고기를 한번 살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교철은 풀린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한진영을 올려다보고 웃었다.
“나중에 내 무덤에 꽃이나 하나 들고 와주게.”
“꽃이요? 그런 걸 좋아하셨습니까?”
“좋아하지는 않는데 자네가 꽃을 품고 오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러네.”
한진영은 가만히 서서 김교철을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 대표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네.”
김교철은 홀로 소주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나는 몇 잔 더 마시고 갈 테니 조심히 들어가게.”
“네. 그럼…….”
“잠깐.”
김교철은 이제 막 몸을 돌리던 한진영을 소주잔을 든 채로 불러 세웠다.
“그 말 꼭 지켜야 하네. 자네 손으로 시궁창에 빠진 우리나라를 일으켜 세우겠다는 말 말일세.”
“네. 그럴 테니 잘 지켜보십시오. 괜히 억울하다느니 이렇게 될 줄 몰랐다면서 이상한 선택하지 마시고 말입니다. 10년. 10년 안에 보여드릴 테니 선택하고 싶거든 그것까지 보고 하십시오.”
“흐흐. 그러지.”
김교철은 한진영을 향해 약속을 꼭 지켜달라는 뜻으로 소주잔을 들어 올린 뒤 한입에 털어 넣었다.
한진영은 그런 김교철을 향해 인사한 후 몸을 돌렸다.
가게 앞에서는 조지훈이 노심초사한 표정으로 한진영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장님.”
조지훈은 밖에 나오자 잠시 찬바람에 취기가 올라 휘청이는 한진영을 급히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아.”
한진영은 조지훈의 부축에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우고는 조지훈의 어깨를 두드렸다.
“뭣 좀 먹고 있으라니까.”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십니까?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어. 많이 취했어.”
한진영은 조지훈의 말에 가볍게 웃고는 조지훈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취한 건 취한 거고 할 일은 해야지. 성우한테 말해서 터트리라고 해.”
“이야기가 끝이 난 겁니까?”
한진영이 터트리라고 한 이야기가 무슨 내용인지 알고 있었던 조지훈은 한진영이 조금 전 나온 가게를 급히 돌아봤다.
“이제 마무리해야지. 길고 긴 이 악연은 오늘로 끝이다.”
한진영은 김교철을 처리하기 위해 쉼 없이 달렸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즐거운 듯이 조지훈의 어깨를 몇 차례나 두드렸다.
“내일 조간신문에 나갈 수 있게 터트리라고 해. 이런 건 조간에서 터트리는 게 파괴력이 더 높으니까 말이야.”
한진영은 조지훈에게 지시를 내리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제 홀가분하게 새로운 시대로 도약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에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온 것이었다.
***
아침 식사 전 신문을 보는 사람들의 눈에 깜짝 놀랄만한 기사가 들어왔다.
[동우 로펌과 정부의 검은 커넥션]
소문으로 혹은 속된 말로 현 정부의 내각은 동우 로펌의 회전문 인사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대부분 정부의 무능함을 비꼬는 용도로 사용을 하는 것일 뿐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게 모두 사실이었음이 서준일보의 취재를 통해 세상에 밝혀졌다.
그리고 기사에서는 동우 로펌이 컨소시엄을 구성한 이유와 사인노스에 투자하는 과정이 상세히 적혀있었다.
안혁규 실장이 의원 시절 어떤 돈을 어떻게 잃었는지 그리고 그 잃은 돈을 동우가 대 줬으며 동우 또한 경기증권 최종필의 사기에 걸려들어 큰 손해를 봤다는 이야기까지 모든 것이 다 폭로가 된 기사였다.
사람들은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 기사를 통해 폭로된 것에 분노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