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데이트 이벤트 #2
* * *
“니들끼리 먼저 들어가.”
주차장에 차를 대어놓은 내 말에, 미유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다.
“왜?”
“1교시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 봉사시간 좀 채워보려고.”
“의외로 기특한 생각을 했네?”
모기를 치우듯 손을 휘휘 젓자, 킥킥거린 미유키가 테츠야와 함께 멀어졌다.
정문으로 간 나는, 기다란 빗자루로 근처를 쓸고 있는 경비원을 보았다.
주말에 화장실 청소를 하러 올 당시 있었던 그 사람이었다.
그에게 다가간 내가 물었다.
“아저씨. 그거 내가 해도 돼요?”
“응...? 마츠다구나. 봉사시간 때문이냐?”
“그걸 어떻게 알아요?”
“게시판에 붙은 오래된 벽보를 떼어내다가 봤다. 직전 학기 주말에도 화장실 청소를 하러 오더니... 많이 성실해졌구나.”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 네 스스로 바뀌려는 의지가 있다면, 주변 사람들도 네 진가를 알고 다가오기 시작할 거다.”
덕담을 건넨 경비원이 빗자루를 내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교문 근처만 깨끗하게 쓸어다오. 부탁하마.”
“예.”
빗자루를 질질 끌며 교문 앞으로 간 나는,
“아, 안녕. 마츠다 군.”
같은 반 여학생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자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어제 바친 펜 세트와 노트 뇌물이 잘 먹혔나보군.
“날씨 한 번 더럽게 덥다. 그치 않냐?”
“응... 많이 덥네...?”
“손에 들고 있는 빵 봉지 내놔.”
“어...?”
“대신 버려줄 테니까 내놓으라고.”
“그, 그래... 알았어...”
빵 봉지를 내게 내미는 여학생의 손이 떨리고 있다.
미래에 ‘과격하지만 친절해...! 멋져...!’ 같은 소릴 듣고 싶어서 일부러 이런 말투로 말한 건데.
마음씨가 너무 여린 애라서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나보다.
케첩이 묻어있는 봉지를 받아든 나는 여학생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맛있냐?”
“.... 콜록!”
무서웠는지 사레가 들린 여학생.
혀를 끌끌 찬 나는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팡! 팡!
“케헥! 콜록!”
더 심해졌네. 그냥 청소나 해야겠다.
나는 빗자루를 안쪽으로 휘저으며 눈을 부라렸다.
“가라.”
“응... 콜록! 갈게...!”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부리나케 내게서 멀어졌다.
나중에 매점에서 우유 사줄게.
너무 날 안 좋게 보지는 마.
묵묵히 교문 근처에 있는 자그마한 쓰레기들과 나뭇잎들을 치우고 있는데,
“어? 마츠다 후배님!”
치나미의 상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옆엔 렌카가 무심한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이래서 내가 정문 청소를 자처한 거다.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호감도가 거의 바닥에서 시작하는데, 저번 학기 주말에 미유키를 만날 시도를 했을 때처럼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두 사람에게 어제 치나미에게 잠깐 배웠던 검도식 입례를 했다.
빗자루를 문기둥에 딱 세우고 차렷 자세에서 30도 정도로 상체를 기울이자, 두 사람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인사를 제법 잘 하니까 놀랐지?
그럴 거다.
상체를 다시 꼿꼿이 세운 내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열심히 연습한 티가 나는 입례였어요. 잘했습니다, 마츠다 후배님!”
치나미의 칭찬은 뭔가 힘이 난다는 말이지.
씨익 웃은 내가 가벼운 목례를 했다.
“감사합니다, 나나세 선배님.”
“근데 왜 교문을 쓸고 있는 건가요? 봉사시간 채우려고?”
“예.”
“그렇구나...! 열심히 하시고, 수업 다 끝나고 뵈어요!”
“예, 들어가세요.”
밝게 손을 흔드는 치나미.
너는 날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구나.
상으로 들박 해줄게.
치나미에게 양해를 구한 렌카가 내게 말했다.
“네가 닦아놓은 호구 상태는 괜찮지만, 호완 깊숙한 부분이 잘 닦이지 않았어. 냄새가 나기 가장 쉬운 부위인 만큼 다른 곳보다 더 신경 써.”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어제에 비해서 말투가 순해졌다.
앞으로 꾸준히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면 빠르게 정식 부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지.
“예.”
“수고하고, 부활동 시간에 보자.”
“들어가세요.”
초반부터 껄렁한 태도를 보이면서 렌카를 서서히 조교하고 싶지만, 지금은 호감도 단계가 최하니까 참는다.
얌전히 다시 입례를 한 나는,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빗자루를 들었다.
**
1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터지려는 머리를 달래고 있는데, 아까 빵을 먹던 여학생이 내게 다가오더니 책상 위에 사탕을 하나 올려놓았다.
“이, 이거 먹어... 아까 봉지 대신 버려줘서 고마워...”
소심한 투로 그리 말하고는 후다닥 자리로 돌아가는 그녀.
잠깐 벙 쪄있던 나는, 그녀가 내려놓은 사탕 봉지를 깠다.
내 선행을 알아줬구나.
아까는 그냥 놀라기만 했던 거였지?
고맙다, 빵녀.
사과 맛 사탕을 입에 쏙 넣고 굴리고 있으니, 미유키가 다가와 묻는다.
“뭐야? 마사코한테 뭐 받았어?”
저 여학생 이름이 마사코인가보다.
미유키의 눈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질투를 느끼고 있는 건가?
나는 사탕으로 인해 볼록 튀어나온 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사탕.”
“마사코가 마츠다 군한테 사탕을 왜 줘?”
“아까 일이 좀 있었거든.”
“무슨 일인데?”
“뭐가 이렇게 궁금한 게 많아? 듣고 싶으면 귀 내놔봐.”
미유키를 향해 손짓한 나는,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책상에 손을 대고 귀를 가까이 가져오자 테츠야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데려다줄 때, 가방 내려놓고 나올래?”
그에 미유키의 고개가 내 쪽으로 홱 돌아갔다.
천천히 바깥쪽으로 빠지는 눈동자.
자신의 뒤에 있는 테츠야를 신경 쓰고 있나보다.
얼마간 그러고 있던 미유키가 입을 움직였다.
입모양을 보니 ‘왜?’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펼쳐놓은 노트에 펜을 휘적거리고, 미유키에게 살짝 보여주었다.
[놀러 갈 데 있어.]
그것을 본 미유키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흐흠...”
헛기침을 한 그녀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진다.
승낙을 받아낸 내 입가가 위로 올라가자, 미유키가 과장스럽게 헛웃음을 켜더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감정표현 한 번 어색하네.
“마츠다, 미유키한테 야한 농담했어?”
미유키의 표정을 살핀 테츠야의 물음이었다.
정말이지 눈치없는 새끼가 아닐 수 없다.
너한테 이입했던 내가 후회된다.
계속 그렇게 살아라.
“뭐, 비슷해.”
“미유키는 그런 거 싫어해. 앞으로는 자제해봐.”
자꾸 업보 스택을 쌓는데, 너 그러다 펑펑 운다?
미유키가 야한 농담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나중에 같이 확인해보자고.
**
“우리 어디 갈 거야?”
방과 후, 집에 가방을 놓고 잽싸게 다시 내려온 미유키의 물음.
조수석에 탄 그녀가 안전벨트를 매는 것을 바라보던 나는, 브레이크에서 발을 천천히 떼며 대답했다.
“놀이공원.”
“놀이공원...? 갑자기...? 이 시간에?”
“어.”
미유키의 동네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낡은 회전목마가 덩그러니 남아있는 공터가 있다.
예전에 있던 놀이공원이 폐쇄되면서 남은 것으로, 이 회전목마는 가을이 되면 철거된다.
이 이벤트는 지금보다 더욱 진한 스킨십과, 서비스 신을 보여준다.
호감도가 오르는 건 덤.
삼박자를 모두 갖춘 기간 한정 이벤트이니, 지금 당장 챙기는 게 맞지.
원래는 테츠야가 미유키와 함께 산책을 가다가 우연히 이곳을 발견하게 돼서 데이트 이벤트가 발생하지만...
내가 이렇게 차를 끌고 가도 괜찮을 것이다.
왜? 여긴 날 위한 장치가 도처에 깔려있는 도키아카의 세계니까.
주인공이 난데, 당연히 발생해야지.
“야간권 끊을 생각이야?”
“조용히 해봐. 다 왔으니까.”
“다 왔다구...? 놀이기구도 안 보이는데...?”
미유키의 말을 무시한 나는, 공터에 차를 대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미간을 좁힌 미유키가 물었다.
“여기가 무슨 놀이공원이야...?”
“놀이기구 있으면 놀이공원이지. 저거 봐.”
내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는 미유키.
공터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회전목마를 발견한 그녀의 입이 약간 벌어졌다.
“회전목마잖아...?”
“저번에 혼자 드라이브하면서 발견한 건데, 타러 가자.”
빨리 내리라고 손짓을 하니, 미유키가 픽 하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휴대폰을 챙기고 차에서 내렸다.
“사진 찍기에는 좋을 것 같네? 어두워지기 전에 찍으면 분위기도 살고 괜찮겠다.”
작동이 안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다 방법이 있단다.
그러니까 나랑 로맨틱한 데이트를 하자꾸나.
미유키와 함께 회전목마에 가까이 다가간 내가 말했다.
“타봐.”
“불법 아닐까...? 소유자 분이 있을 텐데...”
“거 참 피곤하게 산다...”
질린 듯한 내 말에, 미유키가 헤실거리더니 내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잠깐 들고 있어줘.”
휴대폰을 받아든 나는, 미유키가 흰색 말 앞에서 폴짝폴짝 뛰자 피식했다.
“뭐하냐?”
“너, 너무 높아서 못 올라가겠어... 받침대 같은 것도 없어서...”
내가 알던 이벤트가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
안심한 나는 미유키의 뒤로 다가갔다.
“도와줄게.”
그리고는 양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춤을 잡았다.
“햐악...!”
살쾡이 같은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보는 그녀.
삽시간에 빨개진 얼굴엔 민망함이 가득 묻어나와 있다.
“마츠다 군... 소, 손...”
“고개 돌리고 있으면 되냐?”
“고개가 문제가 아닌데...”
“애처럼 굴지 말고 빨리 올라가.”
“.....”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오물거리던 그녀는, 이내 포기했는지 안장에 양손을 짚었다.
그것을 확인한 나는 손에 힘을 잔뜩 주어 그녀를 올렸다.
그러자 손이 미유키의 가슴께까지 올라가면서, 제복 상의가 함께 말려 올라가더니 뽀얀 살결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코앞에서 보는 미유키의 잘록한 허리...
움푹 들어간 기립근이 무척 야하다.
그리고... 상의 안쪽으로 미유키가 입은 속옷이 희미하게 보인다.
커다란 가슴을 가린 베이지색의 풀컵 브라.
밋밋한 디자인이다. 나중에 섹시한 걸로 바꿔줘야지.
“마츠다 군...! 힘 좀 더 써봐...! 왜 이렇게 약해...?”
미유키가 돌연 투정을 부려왔다.
내가 그녀의 몸을 보든 말든, 안장 위에 올라가는 데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미유키의 몸매를 감상하느라 아껴두었던 힘을 쏟아낸 나는, 그녀를 목마에 올려놓고 손을 털며 투덜거렸다.
“더럽게 무겁네.”
그 말에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미유키가 당황해하더니 버럭 화를 냈다.
“무, 무겁긴 누가 무겁다고 그래...!”
그 귀여운 행동을 웃음으로 넘긴 나는, 미유키가 휴대폰을 달라며 손을 내미는 것을 무시한 채 회전목마 앞에 우뚝 박혀있는 작동장치로 향했다.
미유키를 향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은 나는, 그녀의 눈이 의아함으로 물드는 틈을 타 장치를 발로 아주 세게 찼다.
콰앙!
굉음을 내며 옆으로 약간 기울어진 장치.
갑작스런 돌발행동에 기겁한 미유키가 날 나무랐다.
“마츠다 군! 뭐해!!”
그러다가 회전목마의 등이 팟! 하며 켜지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를 쳐다본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기계는 때려야 말을 들어.”
“.... 진짜 어이없어... 이거 들키면 신고 감인데...”
“빡빡하게 굴지 말고, 조금만 놀다가 가자.”
“아, 알았어...”
우우웅...!
곧이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회전목마.
말의 옆에 위치한 기둥을 잡은 미유키의 낯이 금세 환해졌다.
“이거 진짜 오랜만이다... 초등학생 이후로 처음 타보는 것 같아. 근데 음악은 안 나와?”
즐길 거면서 틱틱대기는.
코웃음 친 나는 회전하는 속도에 맞추면서, 미유키의 옆 목마에 올라탔다.
그 순간,
“어어어...?”
미유키의 입에서부터 당황스런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회전목마의 속도가 갑작스레 빨라졌던 것이다.
“마, 마츠다 군...! 이거 왜 이렇게 빨라...?”
나 또한 이런 상황에 놀란 상태였다.
‘이게 아닌데...?’
느릿하게 움직이는 목마를 타고 서로의 눈을 맞추며 방긋 웃다가,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이 이벤트의 핵심인데...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설마 내가 너무 강하게 차서 오류가 생긴 건가?
그래서 돌발 이벤트가 발생한 거고?
기존에 있는 이벤트들이 무탈하게 진행되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렇게밖에는 추측할 수가 없다.
“마츠다 군...! 멈춰야 될 것 같은데...? 내, 내려갈 수 있어...?”
미유키의 다급한 물음에 정신을 차린 나는, 잠자코 회전목마가 돌아가는 속도를 느껴보았다.
일정 속도에 도달하고 더 이상 빨라지지 않는다.
이정도면 데이트를 즐기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미유키는 기둥을 양손으로 붙잡고 무서워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서비스 신만 보고 끝나게 되어버리는데... 곤란하다.
어찌해야할까 빠르게 머리를 굴려보던 나는, 저번에 일어났던 추가 이벤트 때처럼 이 상황을 이끌어나가기로 결정했다.
“무섭냐?”
“조금... 무서워...”
“그럼 이거 잡아.”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만든 나는 미유키를 향해 그 손을 뻗었다.
그러자 미유키가 흠칫하더니, 큼지막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
그러길 얼마 후, 그녀가 침을 꼴깍 삼키더니 자신의 손을 뻗어 내 손바닥 위에 포갰다.
자연스럽게 접히는 우리의 손가락.
내 손을 맞잡은 미유키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괜찮지?”
잠시 그 상태로 조용히 있던 내가 인자한 투로 침묵을 깨자,
“.... 응...”
미유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회전목마의 조명이 밝아서 그런지, 미유키의 안색이 선명하게 잘 보인다.
나에 대한 마음이 커진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뺨이 딸기마냥 심하게 붉어져있다.
그래,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해도 내가 극을 주도해나가면 그만이다.
이런 거 여러 번 해봤잖아?
과정은 약간 어긋났을지언정, 결과는 같거나 더 좋다.
그거면 된 거지.
그렇게 우린 아무 말도 없이, 제한시간이 다 끝나고 기계가 작동을 멈출 때까지 음악조차 나오지 않는 회전목마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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