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미유키의 정성
* * *
“다 왔다. 내려라.”
“.....”
멍하니 앞만 보고 있는 미유키.
거의 5분 가까이 손을 잡고 있었으니 맹할 만도 하겠지.
나도 지금 긴장한 상태인데, 넌 오죽하겠니.
미유키의 손은 몇 번 잡아봤다.
가령 사모야마에게 맞고 병원에 갈 때나, 옥상에서 점심을 먹고 일어날 때.
다만 그땐 그저 가볍게 잡았을 뿐, 오늘처럼 서로의 온기를 공유하고, 식은땀이 맺히는 것까지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 내 심정은...
두근거린다.
이 한 마디로밖에는 표현이 안 된다.
잠시 미유키를 쳐다보며 북받치는 마음을 달랜 나는, 그녀의 앞에 손을 가져가 손가락을 튕겼다.
딱!
“어...?”
그러자 미유키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마치 최면에서 풀린 사람 같다.
그럼 손가락을 튕긴 난 최면술사인가? 괜찮은 상황극이네.
가벼운 웃음을 터뜨린 내가 말했다.
“다 왔다고.”
“벌써...?”
“왜? 아쉬워?”
“아, 아쉽긴 누가...!”
과할 정도로 발끈한 미유키가 자신의 핸드백을 챙겼다.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린 그녀가 날 돌아보았다.
“.... 마츠다 군. 그...”
“왜.”
“아, 아냐... 조심히 들어가...”
머뭇거리면서 싱거운 말을 하는데, 너 뭔가 꾸미고 있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좋으면 좋았지, 나쁜 건 절대 아닐 거야. 그치?
미유키에게 씨익 웃어준 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차 안에서는 살구 향이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미유키의 손을 맞잡았던 오른손에서 나는 냄새였다.
우리... 핸드크림 공유했네?
변태마냥 혼자 낄낄댄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미유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 거리는 신호음이 두세 번 지나가고 얼마 뒤,
응. 마츠다 군. 왜?
미유키가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가 울리는 걸 보니 욕실 안인가?
혹시 샤워를 하려는 거라면... 알몸사진 보내줄 수 있니?
“뭘 왜야. 그냥 전화했지.”
아... 집이야?
“어. 너 뭐하냐?”
나 씻으려구... 마츠다 군은 잘 들어갔어?
역시 욕실이었구나.
오늘따라 미유키의 목소리가 무척 조신하다.
부끄러워 미칠 것 같은 모양인데, 저런 반응도 나쁘지 않네.
“방금 도착했다.”
그렇구나... 근데 우리 밥 먹는 거... 잊어버리진 않았지?
“너희 부모님이 초대해주신 거?”
응.
“기억하고 있지.”
그러면 이번 주말에 우리 집에 올래...?
추진력 살벌한 거 봐라.
목마에서 손을 내밀길 정말 잘했다.
“아저씨랑 아주머니한테 먼저 여쭤봐.”
아무 때나 괜찮댔어.
“그래? 토요일? 아니면 일요일?”
음... 토요일이 좋을 것 같아.
“알았어. 시간 비워놓을게.”
마츠다 군은 원래 한가하잖아. 왜 바쁜 척해...?
슬슬 농담에 시동을 거는 미유키.
쯧 하며 못마땅한 소리를 낸 내가 말했다.
“또 까분다. 혼날래?”
휴대폰 너머에서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긴장이 풀렸나본데, 침대에 누우게 되면 손을 잡았던 일이 생각날 거다.
더 나아가 회전목마와 비스무리한 것을 보기만 해도 오늘의 사건을 상상하게 되겠지.
예를 들자면... 놀이터에 있는 회전무대, 속칭 뺑뺑이 같은 것 말이다.
미안해. 나 샤워해야하니까 나중에 연락할게.
“그러든가.”
맨날 틱틱대... 바보 같아.
“뭐? 야 이...”
뚝.
내가 무어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미유키가 전화를 끊어버렸다.
새침한 것. 이것도 달아놓는다.
**
“미유키.”
“응...?”
“오늘따라 왜 이렇게 비실비실해? 어제 늦게까지 공부했어?”
테츠야의 걱정이 담긴 질문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걷던 미유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생각할 게 많아서...”
미유키는 집에서 나올 때부터 눈 밑이 퀭했다.
제대로 못 잤다는 방증.
아마 혼자 망상에 빠져 새벽까지 밤잠을 설쳤겠지.
미유키의 시선이 슬쩍 내 쪽으로 향했다.
지금 내가 짓고 있는 표정을 살피더니 입을 세 치나 내미는 그녀.
자신은 이렇게나 고민이 많은데, 태평한 날 보고 억울함을 느꼈나보다.
“수업 시작하기 전까지만이라도 눈을 붙이는 게 좋을 것 같아.”
친절한 테츠야의 말에, 미유키가 힘없는 미소를 짓더니 대답했다.
“난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래... 그러면 따뜻한 음료수라도 사올까?”
“이 날씨에...?”
“조금 그런가?”
두 사람의 발전 없는 대화를 들으며 잠자코 뒤를 따라가던 나는, 미유키가 멘 가방 앞주머니를 몰래 열어 젤리를 넣어놓았다.
그렇게 복도에 있는 라커로 찢어진 우리.
수업과 관련된 책을 꺼내 교실로 들어간 난, 이미 책상에 앉아있는 미유키의 손에 젤리가 들려있는 것을 보았다.
큼지막한 자두가 그려진 포장지를 손에 쥐고 있던 그녀가 날 발견하고는 배시시 웃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예뻐서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애써 시큰둥한 표정을 지은 채 자리에 앉자,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젤리는 고맙지만, 남의 가방을 함부로 열면 안 돼.]
고지식한 면이 있는 미유키다운 메시지가 와있다.
실소를 내뱉은 나는 키패드를 두드려 답장을 보냈다.
[다시 내놓든가.]
[싫어.]
단호한 거절과 함께 도착한, 귀여운 토끼가 웃고 있는 이모티콘.
고개를 약간 들어 테츠야를 쳐다보니, 아무것도 모른 채 책을 펴고 있다.
왠지 흥분된다. 놈 몰래 비밀연애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런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기지개를 켜던 나는,
“요새 일찍 오는구나, 마츠다.”
어느 샌가 들어온 교수의 말에 어깨를 펴고 대답했다.
“학생이니까요.”
“저번 학기 땐 학생이 아니어서 지각과 결석을 밥 먹듯 한 거냐?”
그땐 제가 개 쓰레기였으니까요.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지만요.
멋쩍은 듯 뒷목을 문지르자, 교실 군데군데에서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른 반이나 2학년, 3학년들에겐 평가가 좋지 않아도, 적어도 이 교실에서만큼은 날 향한 경계심이 상당부분 완화되고 있다.
좋긴 한데, 내 정체성이 사라지는 기분이라 조금 씁쓸하기도 하네.
**
천천히 올라갔다가 확 내려가는 미유키의 머리.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귀엽다.
“깨워야할까? 밥 먹으러 가야하는데...”
그런 미유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테츠야의 말이었다.
“시간 많이 있으니까 조금 자게 두자.”
“알았어. 나 매점 다녀올게. 피로회복제라도 사줘야지 안 되겠어.”
“그래라.”
놈을 보내고 미유키의 앞으로 간 나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녀의 책상 위에 있는 노트의 끄트머리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구쟁이 같아 보이는 남자 캐릭터의 데이트 신청을 새초롬하게 거절하는 여자 캐릭터.
노트 우측 상단에 있는, 날짜와 번호를 표기할 수 있도록 인쇄된 문자를 활용한 귀여운 낙서였다.
가까이에서 그림을 살펴보던 나는 새어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어서였다.
이 두 남녀가 나와 미유키라는 것을.
그린 캐릭터의 헤어스타일이 실제와 다른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깜찍한 그림체를 표현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손재주가 좋네.’
휙휙 그린 것 같은데 퀄리티가 좋다.
3교시 쉬는 시간에 무언가를 끄적이던데, 이걸 그리고 있었구나.
사랑스러워서 미치겠다.
입을 약간 벌린 채 얕은 잠에 빠진 미유키를 지그시 바라보던 나는, 교과서를 당겨와 그림을 가렸다.
“으음...”
이런 내 행동에 인기척을 느꼈을까?
미유키의 눈이 부스스 뜨였다.
자신의 눈가를 비비적거린 그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야아...? 왜 사람들이 없어...?”
“점심시간이니까.”
“뭐...? 진짜...? 수업은...?”
“너 졸았잖아. 기억 안 나?”
“모, 몰랐어... 교수님은 왜 날 그냥 놔두셨지...?”
“수업종료 5분 전부터 졸기 시작했는데, 교수님이 깨우지 말고 그냥 두랬어.”
아... 하는 탄성을 터뜨린 그녀가 물었다.
“테츠야 군은...?”
“너 줄 피로회복제 사러 매점 간다더라.”
“진짜...?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말끝을 흐린 미유키는 자신의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노트 위에 교과서가 덮여져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노트를 가렸는지 가리지 않았는지 헷갈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일단 모른 척하자.
주말에 미유키의 집에서 놀리든가 해야지.
“손은 왜 꼼지락거려?”
내 물음에 흠칫한 미유키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아, 아니... 배고파서...”
“미우라 오면 밥 먹으러 가자.”
“응... 아, 마츠다 군. 이거...”
책상 서랍을 뒤적거린 미유키가 내게 자그마한 포장용기를 꺼내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들고 풀어보니, 쿠키가 세 개 들어있었다.
“웬 쿠키?”
“.... 케이크 받았으니까... 나도 감사선물 주려구... 맨 위에 건 초콜릿이고, 가운데 건 크랜베리, 그리고 아래 건 아무것도 안 들었어.”
“그래...? 잘 먹을게.”
“모자라면 말해... 집에 또 있으니까.”
그러려니 하며 쿠키 하나를 집으려던 내가 멈칫했다.
어떠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집에 또 있다고?’
쿠키를 살펴보니 테두리 군데군데가 뭉툭하게 튀어나와있었다.
나름 예쁘긴 하지만, 잘 만들었다고는 할 수 없어서 가게에서 팔기엔 부적절했다.
그렇다면 이건... 미유키가 직접 만든 쿠키라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야, 미유키.”
“왜...?”
“이거 네가 만든 거냐?”
“응... 못생겼지? 그래도 맛은 있으니까 먹어봐.”
이것 때문에 오늘 심하게 빌빌대고, 수업시간에도 졸았던 거였어?
그리고 어제 차에서 내려 머뭇거렸던 건... 아마 내게 쿠키를 좋아하냐고 물어보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이런 정성까지 보여줄 줄이야... 감격스럽다.
케이크를 사준 보람이 끓어 넘치려고 한다.
기대감으로 빛나는 미유키의 눈을 쓱 바라본 나는, 초콜릿 쿠키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으드득 으드득 씹어 먹기 시작했다.
그에 질겁한 미유키가 물었다.
“그, 그걸 왜 그렇게 전투적으로 먹어...?”
순식간에 쿠키 하나를 없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고팠어. 이거 더럽게 맛있네.”
“칭찬이야?”
“칭찬이지 그럼. 내일 집에 있는 거 하나도 남김없이 다 가져와.”
미유키는 내 삐딱한 말투에 담긴 진심을 알아주었다.
피로했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던 것이다.
“모레가 주말이니까, 마츠다 군이 우리 집에서 밥 먹고 돌아갈 때 줄게.”
“그럼 내일은? 굶으라는 거냐?”
“굶다니... 이건 그냥 간식이야...”
“또 진지하게 받아들일래?”
“마츠다 군 표정이 심각해서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잖아...! 아, 아무튼 맛있었으면 됐어... 테츠야 군한테도 먹여보고 평가받아야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다.
“뭔 소리야? 미우라한테는 왜 줘?”
“왜냐니...? 많이 만들었는데 당연히...”
“너 이거 날 위해서 만든 거 아니야?”
“마, 맞긴 하지만 친한 친구로서 줄 수도 있는 거잖아...”
테츠야는 친구가 아니라 연적이라니까?
인상을 찡그린 채 미유키를 바라보던 나는, 선심 썼다는 투로 말했다.
“그럼 딱 하나만 줘.”
“.... 심보가 왜 이렇게 고약해?”
“한 개.”
“마츠다 군, 지금 엄청 유치한 거 알아?”
“한 개 반. 더 이상은 안 돼.”
“반 개를 줄 거면 차라리 하나만 주는 게 낫지 않을까...? 물론 그러겠다는 건 아니...”
“그럼 됐네. 한 개.”
“진짜 어이없어...”
“근데 토요일 몇 시에 가야 돼?”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자, 미유키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 그거 오늘 아침에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정오면 괜찮을 것 같대. 마츠다 군은 어때?”
“정오? 상관없어. 그럼 그때 맞춰서 갈게.”
“응. 정오는 한 시가 아니라 열두 시인 거 알지?”
방학 때 무식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구나.
임팩트가 강하긴 했나보다.
자포자기한 표정을 지은 나는 말없이 두 번째 쿠키를 먹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