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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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오늘은 드디어 죽도의 파지법을 알려드릴 거예요!”
넌 언제 봐도 발랄하구나.
나랑 떡칠 때는 조금 자제해줬으면 좋겠어.
“죽도 파지법? 전 예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죽도를 잡을 수 없다고 했는데요?”
“그 얘긴 감독님께 들어서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다른 1학년 후배님들이 파지법과 자세를 익히고, 발동작까지 배우고 있는데 마츠다 후배님만 뒤쳐진다면 나중에 힘들어질 거예요. 그래서 몰래 가르쳐드리려고 해요.”
치나미...! 어쩜 이렇게 착하니?
감동했어. 내가 한 번 빨아줄까?
“그래도 될까요? 들키기라도 하면...”
“들켜도 앞에선 뭐라고 하시겠지만, 뒤에서는 눈감아주실 걸요? 감독님께서도 분명 원하실 거예요. 마츠다 후배님이 제게 가르침을 받는 것을요.”
“그런가요?”
“물론이죠. 검도를 배우고 싶어서 온 신입부원에게 매니저 일만 가르친다면 금세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 테니까요. 그래도 감독님께서 당부를 하시긴 했으니까, 다른 부원들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배워보도록 해요. 그래도 신나죠?”
다른 부원들이 볼 수 없는 곳이라...
왠지 야하게 들린다.
“예, 신나네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이는데요?”
치나미의 미심쩍은 말에, 내 얼굴 근육이 쫘아악 늘어났다.
과장을 섞은 환희.
이 표정을 본 치나미가 움찔하더니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무, 뭔가요? 그 사악한 표정은...?”
네 말대로 기뻐한 건데 사악하다니. 너무하네.
“기뻐서요.”
“그런... 거죠...?”
“그렇다니까요.”
“흐흠... 좋아요... 일단...”
몇 차례 헛기침을 한 그녀가 죽도 보관함으로 날 데리고 갔다.
“죽도는 호구처럼 오래 쓰는 물건이 아니에요. 쓰다 보면 대나무가 휘어져 파손이 되는데, 그럴 경우 바로 새 죽도로 교체해줘야 한답니다. 대련을 하다가 부러진 대나무 살이 박히기라도 하면 큰일이 나거든요. 여기 있는 죽도들은 부원들이 공유하기도 하니까, 소모품처럼 생각하세요.”
“알겠습니다.”
“일단은 죽도의 구조부터 설명해드릴게요. 죽도의 칼자루에 둘러진 가죽을 병혁이라고 하는데, 보통은 병혁이라고 하면 칼자루를 칭하는 거니까 알아두세요. 그리고...”
치나미는 죽도 군데군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구조를 하나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병혁, 코등이, 등줄, 중혁, 선혁 등...
부위마다 명칭이 달랐고, 심지어는 죽도의 형태에 따른 종류도 있었다.
“다 외우셨나요?”
꼼꼼하게 설명을 끝낸 치나미의 물음.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대답했다.
“그런 것 같네요.”
그에 치나미가 죽도의 칼날부 아랫부분의, 다소 뚱뚱한 마디를 가리켜며 물었다.
“그러면 여긴 어디일까요?”
“동장이요.”
“여기 가죽이랑, 이 밑에 동그란 건?”
“중혁, 코등이.”
“그럼 이 부위는?”
“격자부.”
“잘했어요. 앞으로 매일 테스트를 할 테니 꼭 잘 외워두셔야 해요.”
“예, 스승님.”
그리 말하고는 스승에게 하는 입례를 하자, 치나미의 눈이 둥그렇게 뜨였다.
“스승...? 저는 스승이 아니라 마츠다 후배님과 같은 부원인데요?”
“절 가르쳐주는 분이니까 스승님이 맞죠.”
“오호...”
감탄을 터뜨리더니 이내 만족스런 웃음을 흘리는 치나미.
내 태도가 마음에 들었나보다.
“저는 언제나 스승님만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와아아...! 그 기세... 아주 좋아요...! 앞으로 제가 마츠다 후배님을 열심히 지도하겠어요! 빠르고 완벽하게 실력을 늘려서 추계... 는 조금 그렇고, 동계 대회를 노려보도록 해요! 자, 이제 뒷문으로 나가서, 파지법을 배워볼까요?”
아니, 이건 그냥 사탕발림인데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어떡해.
그래도 의욕적인 모습은 보기 좋네.
**
“마츠다 군, 손이 왜 그래? 엄청 빨개...”
차에 탄 미유키의 걱정스런 물음.
어깨를 으쓱인 내가 대답했다.
“세탁기가 중간에 고장 나서, 손빨래를 할 수밖에 없었어. 더운 물로 도복을 세탁하면 색이 빠지고 크기가 줄어서 어쩔 수 없이 찬물로 했지.”
“진짜...? 힘들었겠다...”
“괜찮아. 나나세 선배랑 있으면 재미있거든.”
“나나세...? 내 친구를 얘기하는 거야?”
그러고 보니 미유키의 친구 성씨도 나나세였지.
“선배라고 했잖아. 2학년인데, 나처럼 매니저를 하고 있어.”
“아... 저번에 들어본 것 같은데... 근데 재미있다구?”
“어.”
“어떻게 재미있는데? 서로 막 농담하고 그래?”
말투에 가시가 약간 돋쳐있다.
질투심이 솔솔 올라오고 있다는 방증.
흥이 난다, 흥이 나.
“그냥 뭐...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고, 이것저것 하지.”
“나한테 하는 것처럼 야한 농담도 해?”
“그 정도로 그 선배가 편하지는 않아.”
미유키의 안색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현재의 급 차이를 명확하게 해주니 안심한 모양인데, 고작 이런 것으로 승부욕을 불태우면 어떡하니.
이러면 나중에 3P, 4P을 위한 떡밥을 던져놓을 때, 개고생을 할 것 같잖아.
“그렇지...? 실수하지 않게 조심해...”
마음에도 없는 당부를 하는데, 코웃음이 나온다.
“알았어. 그리고 너 지금 조수석으로 바꿔 타라.”
“조수석? 왜?”
“한 명은 내 옆에서 말동무를 해주는 게 예의인 거 모르냐? 니들이 무슨 상전이냐? 내가 모시고 가야 돼?”
“그럼 테츠야 군을...”
“난 조수석에 남자 안 태운다.”
단호하기 그지없는 내 말에, 미유키가 헛웃음을 켜더니 차에서 내렸다.
조신하게 걸어와 문을 연 그녀가 조수석에 올라 안전벨트를 맸다.
팽팽한 벨트가 가슴 사이에 낀 모습을 보니 성욕이 끓어오른다.
조만간 벨트가 아니라 자지를 끼워야겠다.
“됐어? 만족해?”
“어. 미우라는 쏙 빼놓고 우리끼리 출발할까?”
“농담하는 거지? 이번엔 진지하게 안 받아들일 거야.”
농담 아닌데.
“얘는 왜 이렇게 늦고 난리야... 변기를 만들어서 싸고 오나...”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꿍얼대고 있자, 미유키가 킥킥거리더니 가운데에 있는 콘솔박스 위에 사탕을 하나 올려놓았다.
“이거 먹고 진정해.”
“뭔데 이게.”
“보면 몰라? 사탕이잖아.”
나는 심드렁하게 사탕 포장지를 까서 입 안에 집어넣었다.
“나는 쿠키가 먹고 싶어.”
“내일까지만 참으면 되잖아.”
“네가 오늘 가져온 쿠키를 미우라한테 주지 않았으면 이런 얘긴 꺼내지도 않았어. 맛있게 만들지나 말든가...”
“마츠다 군 말대로 딱 하나만 줬는데, 그게 그렇게나 아까워?”
“어.”
그 간결하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대답에, 미유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제랑 오늘 왜 이렇게 애 같지...? 진짜 유치하다...”
질투하니까 좋아하고 있으면서, 말은 번지르르하네.
미유키와 티격태고 있던 나는, 뒷좌석 문이 열리면서 테츠야가 타자 미간을 좁혔다.
“왜 이제 오고 지...”
“마츠다 군.”
욕이 나올 것 같자마자 곧바로 날 제지하는 미유키.
그녀의 눈치를 살짝 본 내가 말을 바꾸었다.
“왜 이제 오고 난리야?”
“미안, 미안... 배가 너무 아파서... 근데 미유키는 왜 거기 있어?”
그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미유키였다.
“원래 조수석엔 사람 한 명이 타야 예의래. 다음 주부터는 테츠야 군이 조수석에 앉아. 번갈아가면서 타자.”
“그래...? 알았어.”
조수석에 남자 안 태운다고 했지?
저 새낀 특히나, 죽어도 안 돼.
차에 시동을 걸자, 앞좌석 사이로 얼굴을 들이댄 테츠야가 제안을 하나 했다.
“내일 주말인데, 셋이서 어디 놀러 갈래?”
그러자 미유키가 내 눈치를 흘끔 보더니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아... 그... 미안해. 내일은 약속 있어.”
“저녁에도?”
“아마도 그럴 것 같아... 대신 밤에 산책이라도 같이 가자. 요즘 잘 못 갔잖아.”
미유키야,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말고, 이번엔 솔직하게 대답해야 테츠야가 의심을 접지 않을까?
놈이 어딜 가려고 나왔다가, 네 집에 주차되어있는 내 차를 보면 어떡하니?
나야 뭐 그렇게 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지만.
그나저나 저녁까지라니... 너 설마 나랑 늦게까지 있을 생각인 거야?
“아쉽다. 그러면 산책은 꼭 하자. 아, 그리고 마츠다.”
서운해 하던 테츠야가 날 부른다.
놈의 면상을 보면서 기분이 확 좋아진 내가 대답했다.
“뭐.”
“부활동 쉬는 시간에 렌카 선배와 나나세 선배가 대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는데... 나나세 선배가 널 엄청 좋게 보고 계시더라. 이렇게만 하면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아.”
똥 싸고 오더니 애가 갱생이라도 했나?
오늘 자꾸 나한테 어시스트를 해주네.
지금 한 말이 고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나와 치나미를 엮으려고 하면 미유키가 짜증을 낼 거란다.
지금도 봐. 표정 무섭잖아.
“그러냐? 고맙다.”
진심을 다해 놈에게 감사를 전한 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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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비색 코튼셔츠, 그리고 베이지색 밴드 슬랙스.
이정도면 격식이 적당히 있어 보이되, 캐주얼한 느낌을 풍기기도 할 것이다.
신발은 로퍼로 마무리를 한 나는, 셔츠 소매를 팔뚝까지 접으면서 밖으로 나왔다.
‘덥다.’
도키아카를 통해 알아본 바에 의하면, 미유키의 방 안엔 에어컨이 없다.
하지만 거실은 아니다. 천만다행히도 있다.
오늘 미유키의 방에 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갈 수 있게 될 경우 거실에서 찬바람을 좀 쐬고 가면 버틸 수 있겠지.
심한 뙤약볕을 피해 차에 탄 나는 곧장 미유키의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거의 다 도착했을 즈음, 미유키에게 전화가 왔다.
“어.”
어디야?
“2분이면 도착해. 주차는 어디다 해?”
아빠 차 앞에 평행주차 하면 돼.
“그래도 된대?”
응. 오늘 물어봤어. 마츠다 군한테 차가 있었냐면서 엄청 놀라더라. 나 마중 나갈까?
“어. 나와서 대신 주차해라.”
그냥 집에 있을게. 얼른 와.
명랑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고는 전화를 끊는 미유키.
그녀의 집에 도착한 나는, 집에 있겠다던 그녀가 마중을 나와 있는 것을 보고는 히죽 웃었다.
와타루의 차 앞에 조심히 주차를 마친 내가 시동을 끄고 내리자, 미유키의 시선이 내 전신을 훑는다.
코디가 마음에 드는 눈치다.
“아저씨랑 아주머니는?”
“기다리고 계셔. 근데 지금 긴장한 거야? 얼굴이 약간... 굳어있는데...?”
“식사 초대를 받은 건 처음이라서... 그냥 좀 무섭네.”
그 말에 미유키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했다.
힘내라는 듯 내 등을 툭툭 두드린 그녀가 말했다.
“편하게 있어도 돼.”
“잇시키에서처럼 놀리지 마라. 죽는다.”
“마츠다 군 하는 거 봐서.”
장난스레 날 놀린 그녀는, 나와 나란히 현관문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문을 열었다.
“어서 와, 마츠다 군.”
“어서 와라, 마츠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도리와 와타루의 환영인사.
심지어는 카나까지 두 사람의 뒤에서 내게 손을 흔들고 있다.
이 가족들의 아기맘마 디스펜서는 언제 봐도 크단 말이지.
미도리의 가슴은 내 물건에, 카나의 가슴엔 오일을 발라 전신 마사지...
마지막으로 미유키의 가슴은 내 얼굴에...
세 명의 가슴에 둘러싸인 날 생각해보니 행복해진다.
잠깐 즐거운 망상을 해본 나는 상체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날씨 엄청 덥지? 얼른 들어와.”
감사합니다. 근데 혹시 타락할 생각은 없어요?
조금이라도 있으면 와타루의 물에 수면제 타주세요.
“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한 나는 미유키의 집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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