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미유키의 방
* * *
“마츠다 군은 내 옆자리에 앉으면 돼.”
미유키의 안내에 따라 주뼛대며 자리에 앉은 나는 식탁을 보았다.
진수성찬이 펼쳐져있다. 메인 요리는 스키야키인가?
슬슬 끓어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인덕션을 켠 것 같다.
고등어를 된장에 졸인 사바미소니도 있다.
반찬은 시금치와 연근을 비롯한 가정식이 대부분이지만, 플레이팅이 제대로 되어있어 정성이 들어간 게 한눈에 보였다.
미유키가 말했구나.
내가 제대로 안 먹고 다닌다고.
그래서 이렇게 준비했나보다.
모두 자리에 앉자, 상석에 앉은 와타루가 말했다.
“우리 미유키를 구해준 은인에게, 먼저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갑작스레 진중해진 분위기.
여기선 ‘아닙니다.’ 하며 난색을 표하면 안 된다고 본다.
나는 와타루를 바라보며 상체만을 약간 숙였다.
“저야말로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본식 인사법인 오지기에서, 가장 가벼운 인사인 에샤쿠.
인사는 현관에서 몇 번이나 했으니, 지금은 이정도만 해도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
예상대로, 와타루를 비롯한 미유키 가족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이왕 온 건데, 점수 제대로 따고 가야지.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으면 지루할 테니까, 이제 먹을까?”
와타루의 그 말에, 미도리와 미유키, 그리고 카나가 이구동성으로 잘 먹겠다며 인사를 했다.
나는 그녀들의 말이 끝날 타이밍에 맞춰, 오버하는 기색 따윈 전혀 없는 담백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와아... 목소리 좋은 거 봐...”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린 카나의 말이었다.
그녀를 엄한 눈으로 흘겨본 와타루가 날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많이 먹어라.”
“예, 아저씨.”
미유키의 집 식사 예절은 어떻게 될까.
도키아카를 플레이하면서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스키야키가 나온 건 처음이니까 파악해보자.
밥그릇은 당연히 들고 먹는다.
스키야키를 뜰 땐 각자 그릇에 양껏 담는다.
스키야키 안에 있는 소고기는 건져내자마자 날계란에 찍어먹는 게 아니라, 물기부터 빼는구나.
밑반찬을 먹을 땐, 올라가있는 양파 같은 플레이팅을 조금씩 같이 집는다.
물은 빌 때마다 미도리가 채워주고 있다.
내가 나서서 물잔을 들면 오지랖을 부리게 되는 거고, 미도리가 부담스러워할 수 있으니 손님답게 주는 것만 받아먹자.
나는 표정으로, 그리고 반찬을 끊임없이 집어먹는 것으로 맛있다는 말을 대신했다.
그러자 미도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밥은 입에 맞아?”
나는 조용히 입 안에 있는 음식물을 씹어 삼킨 뒤 대답했다.
“네. 여기서 살고 싶을 정도에요.”
미도리를 비롯한 미유키 가족들이 가볍지만 진심이 서려있는 웃음을 터뜨렸다.
앞선 식사자리에서 좋은 평가를 받아서 그런지, 농담이 곁들어진 극찬을 잘 받아주고 있다.
“배고프면 언제든 오렴. 아, 생선 껍질은 벗겨서 먹어. 물렁해서 느끼할 거야.”
미도리의 좋은 어시스트.
나는 곧장 젓가락으로 고등어의 껍질을 벗겼다.
“네, 아주머니.”
그 말을 기점으로,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마츠다, 혹시 술 마시냐?”
와타루의 물음에,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좋아하는 편인가?”
“솔직히 좋아합니다. 최근엔 잘 마시지 않지만요.”
미유키의 입이 오물거렸다.
입 안에 음식물도 없는데 저러는 것으로 보아, 내 옛날 모습을 말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나보다.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척 손을 밑으로 내린 뒤, 미유키의 골반 부근을 몰래 콕 찔렀다.
그에 움찔한 미유키가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고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더니 날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말라는 제스처를 알아들은 것이다.
우리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한 와타루가 재차 물었다.
“그러면 오늘 간단하게 한 잔 하고 갈래?”
“여보, 마츠다 군은 오늘 운전하고 왔잖아.”
미도리의 나무람에 아차 한 와타루가 말했다.
“아, 그렇지...”
술까지 권하려는 걸 보니 날 아주 좋게 보고 있나보다.
티 나지 않게 눈치를 살피느라 정신이 지치긴 하지만, 보람만큼은 충분히 있다.
앞으로 자주 올 수 있겠어.
**
“흐흠... 마츠다 군. 과일 먹어.”
거실 소파에 앉아 와타루와 담소를 나누고 있던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미유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과일? 잘 먹을...”
그러다가 기겁을 하고 말았다.
카나가 방긋 웃은 채 과일 접시를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잇시키 해수욕장에서처럼 미유키의 목소리를 흉내 냈구나.
날 놀리는 게 그렇게 재밌나?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은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접시를 받았다.
“잘 먹을게요, 하나자와 씨.”
“당황했어?”
“조금요. 근데 왜 이러는 거예요...?”
“재미있잖아. 마츠다 군은 놀리는 맛이 있네?”
넌 따먹고 싶은 맛이 넘치는구나.
똑같은 목소리를 가진 자매 두 명... 이거 못 참는데.
“카나. 넌 맨날 그 장난이냐? 테츠야한테도 그러더니...”
와타루의 타박에, 카나가 방글방글한 미소를 지었다.
“테츠야 군은 반응이 재미없어. 숫기가 워낙 없어서 어쩔 줄 몰라 해.”
“그러면 반응은 테츠야가 마츠다에 비해 훨씬 좋은 거 아닌가?”
“재미는 마츠다 군 쪽이 더 좋아.”
“왜 그렇게 생각하지?”
당사자를 앞에 두고 갑자기 토론을 펼치기 시작하는 부녀.
오렌지로 입가심을 하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어느새 다가온 미유키가 소매를 잡아끌자 조용히 소파에서 벗어났다.
날 데리고 자그마한 화단으로 나온 미유키가 물었다.
“집이 시끄럽지?”
“아니, 활발해서 좋네.”
“다행이야. 소화라도 시킬 겸 산책가고 싶은데...”
말끝을 흐리는 미유키.
같은 동네에 사는 테츠야가 우리들을 발견할까봐 불안한 모양이다.
그렇게 걱정됐으면 내 차도 숨기게 해놨어야지.
아니면 애초에 아예 걸어오라고 하든가.
자꾸 테츠야를 속이려고 하는데, 이러면 나중에 걔가 받을 상처는 더 커질 걸?
물론 나는 네가 이러는 게 좋다.
“난 괜찮아.”
“배부르지 않아? 엄청 많이 먹던데...”
“더 들어갈 자리 있는데? 나 무시하냐?”
가벼운 우스갯소리에, 미유키가 피식하며 화제를 돌렸다.
“바로 돌아갈 거야?”
“오래 있는 건 실례니까... 타카시나 만나러 갈까?”
“걔는 절대 안 돼.”
단호하네.
“왜? 반성하고 있던데.”
“말하는 게 옛날의 마츠다 군보다 훨씬 저렴해. 그래서 진짜 싫어.”
“그럼 다른 친구들한테...”
“그것도 안 돼. 마츠다 군의 친구들은 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많잖아.”
“하지 말라는 게 왜 이렇게 많아? 네가 뭐 내 보호자야? 엄마라도 되냐?”
“병원에서 보호자란에 내 이름 썼잖아. 그리고 저번에 날 엄마라고 불렀었던 거, 기억 안 나?”
의식하고 있었구나.
그땐 우리 관계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전이라 그러려니 했을 줄 알았는데... 의외다.
아니면 사이가 가까워지니 갑자기 생각나 민감해진 것일 수도 있겠지.
어찌됐건 좋은 일이었다. 미유키의 저러한 반응은.
근데 저렇게 나오니까 할 말이 없어지네.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은 나는 담장 밖을 바라보며 미유키를 향해 따졌다.
“그럼 뭐하라고? 명상이라도 해?”
“여기 있어. 오래 있어도 돼.”
고개를 천천히 돌린 나는 미유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투에 부끄럼이 묻어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내 시선이 부담되었을까?
눈을 아래로 내리깐 그녀가 자그맣게 말했다.
“다른 뜻은 없고... 그냥 여기 있다가 나랑 놀러가자...”
미유키가 먼저 데이트를 제안한 건 처음이다.
게다가 ‘나’라고만 했다.
항상 챙기려 했던 테츠야는 쏙 빼놓은 거다.
그것도 망설이는 기색 없이.
웬일로 적극적이지?
낯설기도 한데, 심장이 뛰기도 한다.
잠시 그녀를 지켜보던 내가 물었다.
“어디로 갈 건데?”
“그냥... 아무데나... 마츠다 군이 정해...”
그럼 러브호텔로 가자.
“일단 들어가서 고민해볼까 그럼?”
“응...”
상황을 보아하니, 미유키가 먼저 자신의 방으로 초대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나답게 선수를 치자.
“네 방에서 고민해도 돼?”
“내 방...?”
큼지막한 눈을 데굴 굴리는 미유키.
여러 생각을 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얼마간 고민을 하던 그녀의 대답은...
“더울 텐데...”
나쁘지 않았다.
더 밀어붙이자.
“구경하고 싶은데.”
“뭐 없는데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게 귀엽다.
“그래도 가고 싶은데.”
능청스런 표정으로 저리 말하자, 미유키가 어이가 없다는 듯한 실소를 터뜨렸다.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은 그녀의 입에서 승낙의 말이 떨어졌다.
“그러면... 2층에서 잠깐 기다려...”
“왜? 이불 개려고?”
“아, 아닌데...? 일어나자마자 갰는데...?”
어깨 달싹이는 거 다 봤는데 아니긴 무슨.
정곡 찔렸지?
**
미유키의 안내를 받아 2층 화장실로 향한 나는, 주머니에서 씹는 구강 청결제를 꺼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입술을 꽉 닫은 채 꼭꼭 씹어대자, 고체였던 청결제가 액체가 되어 내 혀를 톡 쏘았다.
아주 꼼꼼히 입 안을 세척한 나는 화장실을 나왔다.
이후 미유키의 방 문 앞으로 가서, 노크를 두 번 하자마자 문고리를 잡고 밀었다.
스으윽...
부드럽게 열리는 문.
침대 커버를 정리하던 미유키가 내 쪽을 바라보며 까무러칠 정도로 놀라는 게 보인다.
“마, 마츠다 군...! 들어오라고 하면 그때 문을 열어야지 뭐하는 거야...!”
“미안. 다시 닫고 물어볼까?”
“.... 됐어. 진짜 바보 같아... 얼른 들어와.”
느릿한 걸음걸이로 들어온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툭. 툭.
그러자 문짝 가운데에서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테츠야가 사주었던 마네키네코 목걸이가 분명했다.
나중에 갖다 버리게 해서, 새로운 걸 달아놔야지.
미유키가 어렸을 때, 테츠야와 함께 붙였던 저기... 저 천장에 붙어있는 별 스티커도 싹 다 갈아버려야겠다.
뿐만 아니라, 이 방 안에 있는 테츠야와의 추억이 깃든 것들을 모조리 바꿔버릴 거다.
의지를 활활 불태운 나는 방을 둘러보았다.
자두 향이 풍겨온다.
내가 화장실에서 가글을 할 동안 방향제를 흔들었는지, 냄새가 좀 강하다.
책장형 책상의 책장엔 다양한 도서들이 빼곡히 꽂혀있고,
책상 위엔 공책 한 권과 필통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상태.
예상했던 전경과 완전히 똑같다. 미유키답다.
“서있지 말구... 이, 일단 저기 앉아...”
책상을 가리킨 미유키의 말에, 방 중앙을 가로지른 나는 조용히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러자 침대에 다소곳하게 걸터앉은 미유키가 물었다.
“엄청 좁지...?”
좁기는 하지만 마음에 드는 방이야.
침대도 싱글이라서, 널 꼭 껴안고 자면 될 것 같아.
“아늑하고 좋네. 이불은 다 갰냐?”
“이, 일어나자마자 갰다니까...?”
“방금 커버 정리는 왜 한 건데?”
“그건... 그냥 휘어져있어서...”
“그래, 그렇다고 치자. 오늘 몇 시에 일어났어.”
“여, 열한 시...”
“늦잠 잤네?”
“주말인데 이러면 안 돼?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뭐라고 하는 게 아닌데 왜 화를 내고 그러냐?”
미유키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능글맞은 내 태도에 삐쳤는지, 날 노려보며 무어라고 웅얼거리고 있다.
저 뽀송해 보이는 볼을 잡은 뒤에 길게 늘리고 싶어진다.
그녀의 시선을 무시한 나는, 책상 위에 올려져있는 노트를 보고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미유키를 불렀다.
“야, 미유키.”
“왜...!”
“너 저번에 학교에서 재미난 일 했더라?”
“재미난 일?”
“노트에 장난쳐놨던데. 그림으로.”
“.... 그게 무... 아...!!”
어리둥절해하다가 눈을 크게 뜨는 그녀.
순식간에 귀까지 빨개진 그녀가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시치미를 뗐다.
“난 잘 모르겠는데...?”
“모르겠다고? 그럼 방금 탄식한 건 뭔데? 그나저나 잘 그렸더라. 그거 혹시 나랑 너냐?”
“글쎄... 무슨 얘기를 하는지 이해가... 혹시 남의 노트를 훔쳐본 거야...? 그래선 안 돼... 나쁜 행동이야...”
손부채질을 시작하면서 눈을 가만 두지 못하고 있는데, 진심으로 언급하기 싫어하는 것 같다.
이쯤에서 넘어가자. 다음에 또 놀리면 되지.
현재 방 안의 공기는 약간 가라앉아있다.
오늘 미유키의 상태 또한 평소와 달랐다.
그녀도 어렴풋이 자각하고 있는 걸까?
오늘 어떤 중요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을?
‘좋아.’
이제부턴 너무 태연하게 행동하면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미유키가 오해를 할 수도 있었다.
내가 자신을 친구처럼 생각해서 이러는 거라고 말이다.
물론 여태 해왔던 일이 있었기에, 미유키는 위처럼 극단적인 생각까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해주면서, 이 모습을 미유키에게 보여주자.
오늘 키스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뽀뽀만큼은 하고 만다.
그 일념 하나로 정성을 들여서 가글을 하고, 방을 구경하겠다고 했던 건데...
그냥 돌아가게 되면 억울해서 잠 못 자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