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손으로 부른 이름
* * *
딩동! 디디디디딩동!
연속으로 눌리는 초인종.
미유키가 분명했다.
잽싸게 대문으로 간 내가 문을 열자, 팔짱을 끼고 있는 미유키가 보였다.
화가 나 보이는 표정.
그러나 애써 그 화를 숨기고 있다.
“왜 그냥 갔어?”
낮게 가라앉은 그녀의 물음에, 갓 말린 머리를 벅벅 긁은 내가 대답했다.
“한 시간이 지나도 네가 내려올 생각을 안 하길래, 자고 있는 줄 알았지.”
“안 자고 있었어. 그리고 깨우면 되잖아.”
“굳이 깨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
“왜?”
“깨워도 멍때릴 테니까.”
그 말에 미유키의 몸이 작게 달싹였다.
키스 직후 보여주었던 자신의 맹한 모습을 상기한 듯한 그녀가 눈을 사선으로 내리깔았다.
“그, 그래도... 놀러가자고 했는데...”
“네가 일어나면 연락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어차피 차도 있어서 금방 가잖아.”
“.... 그렇긴 한데... 아무튼... 마츠다 군, 혹시 우리 언니한테 연락처 줬어?”
“연락처? 줬지.”
“왜?”
미유키의 언성이 약간 높아졌다.
연락처라는 대목에서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데, 키스를 하고 무드 없이 그냥 가서 삐친 게 아닌 건가?
고개를 갸웃한 채 생각에 잠겨있자, 미유키가 날 쏘아붙였다.
“우리 언니한테 관심 있어? 어떻게 해볼 생각이야? 막... 갖고 놀 거야?”
저 황당한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렴풋이나마 알아차렸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구나.
대충 느낌이 온다... 느낌이 와.
카나가 제대로 설명을 안 해서 미유키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뭔 소리야... 네 식대로라면 나는 아주머니랑 아저씨도 어떻게 해볼 생각인 변태냐?”
“.... 뭐? 여기서 엄마랑 아빠는 왜 언급하는데?”
“그 두 사람한테도 연락처 줬으니까.”
미유키의 얼굴 근육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이해를 잘 못하겠다는 표정.
코웃음을 친 내가 말을 이었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너네 언니가 우리 가족들과 친하게 지내자면서 연락처를 교환하자고 했어. 아주머니, 아저씨도 좋은 생각이라고 하셔서 교환한 건데 왜 화를 내고 난리지?”
“....?”
눈만 끔벅거리는 미유키.
머리를 굴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내 말을 곰곰이 곱씹어보던 그녀는, 이내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그, 그런 거야...?”
확 낮아진 목소리 톤을 듣자하니 오해를 푼 것 같다.
“그런 거지.”
“.... 아하...”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리는 그녀.
귀엽다. 계속 놀려주고 싶을 정도로.
“아하는 무슨... 대체 뭔 소릴 듣고 이렇게 성을 내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멍청한 표정은 그만 짓고 사과부터 해라.”
“사과...?”
“날 멋대로 오해한 거. 너 저번에도 그렇고 나한테 이상한 선입견을 갖는데, 상당히 기분 나쁘다? 이런 건 네가 싫어하는 것들 중 하나 아니었냐?”
“.... 그... 미안해... 진짜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순순히 사과를 하는 걸 보니,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 듯하다.
피식한 나는 미유키의 방에서처럼 그녀의 이마에 약한 딱밤을 때렸다.
툭.
그러자 미유키가 자신의 이마를 막아 가렸다.
아프지도 않을 텐데 울상을 짓는 건, 날 향한 미안함 때문이리라.
대문 옆에 있는 벽에 팔꿈치를 기댄 채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던 내가 물었다.
“너 근데 여기 걸어서 왔냐?”
“응... 걸어서...”
“더운데 잘하는 짓이다.”
“그, 금방 왔는데...”
혀를 끌끌 찬 나는 곧바로 대문 밖을 나와 스마트키 버튼을 눌렀다.
삑!
짤막한 소음을 내며 잠금이 풀린 자동차.
운전석 문을 연 나는, 멍하니 서있는 미유키를 향해 말했다.
“놀러가게 타기나 해라.”
“아, 응...”
반색한 그녀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조수석에 탔다.
그리고는 안전벨트를 매며 물었다.
“어디 가려구...?”
“영화나 한 편 보자.”
“알았어...”
시동을 걸고 에어컨을 최대로 틀자, 미유키의 상체가 송풍구 쪽으로 쏠렸다.
금세 새어나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한 숨 돌렸다는 얼굴로 눈을 감은 그녀는, 이내 내 눈치를 흘끔흘끔 보더니 몰래 자신의 머리카락을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땀 냄새라도 날까봐 걱정되나보지?
그러게 왜 그렇게 흥분한 채로 여기까지 걸어왔어.
일단 전화부터 하지.
그리고 너 노선 확실히 정해라.
이제 그럴 때 됐잖아?
미유키를 못 본 척해준 나는 영화관을 향해 차를 몰았다.
**
“812번 고객님! 싱글 콤보에 콜라 사이즈업 나왔습니다!”
열정적인 영화관 직원의 안내에, 미유키와 담소를 나누고 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츠다 군, 우리 812번 맞아?”
내가 들고 있는 번호표를 확인해보려는 미유키.
그녀의 얼굴엔 의문이 깃들어있었다.
몇 번의 영화관 데이트를 할 때마다 연인 콤보를 시켰었는데, 지금은 싱글을 주문해서 의아한 모양이었다.
“맞아.”
“맞다구...? 812번...?”
“맞다니까.”
심드렁하게 대답한 나는 팝콘과 콜라가 들어있는 박스를 가지고 왔다.
미유키의 표정은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내게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고 착각한 모습이다.
그런 미유키를 바라본 나는, 빨대 두 개를 챙겨 한쪽에 전부 꽂아놓았다.
그리고는 시큰둥하게 콜라를 내밀었다.
“들고 있어.”
“아...”
짤막한 탄성을 터뜨리며 콜라를 받아든 미유키의 낯이 밝아졌다.
앞뒤에 빨대구멍이 따로 있음에도, 한쪽 방향에만 꽂아놓은 빨대를 보고 내 의도와 마음을 눈치챈 것이다.
“.....”
이런 식으로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하며 착각을 하게 만든 다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뒤에 반응을 보는 맛도 쏠쏠하지.
“오늘 밥 많이 먹었으니까 팝콘은 일부러 작은 걸로 샀다. 불만 없지?”
미유키는 빨대를 뚫어지게 주시하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만...? 없어... 괜찮아...”
“들어가자. 시간 다 됐다.”
“응...”
아까보다 더욱 조신해진 미유키를 보며 씨익 웃은 나는, 그녀와 함께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예매를 하지 않고 간데다 주말이라 사람도 많았기에, 우리 자리는 왼쪽 끝 열이었다.
스크린을 보는데 약간 불편하긴 하지만 그뿐, 불편한 점은 없다시피 했다.
미유키 또한 딱히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아주 큰 문제가.
‘이거 왜 지랄이야?’
상영관 의자의 팔걸이가 올라가지 않았던 것이다.
미유키와 딱 달라붙어선 은근한 스킨십을 하고 싶은데, 아주 거지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른 팔걸이는 올라가는 기색이 보이는데, 나와 미유키 사이에 있는 것만 요지부동이다.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뭐 이따위 경우가 다 있지?
나는 사실 이 도키아카의 주인공이 아니었던 건가?
“마츠다 군, 뭐해?”
자세를 바꿔가며 팔걸이를 올려보려는 내게, 미유키가 의아한 눈으로 질문을 건네 왔다.
아무리 낑낑대도 미동조차 없는 팔걸이를 포기한 나는, 허탈한 표정으로 상영관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세상이 날 음해하네.”
“무슨 소리야...? 콜라 마실래?”
“줘봐.”
건들건들한 투로 말했음에도, 미유키는 아무런 내색 없이 콜라를 내 입 앞에 가져다댔다.
오늘은 순하게 말하라고 하지 않는구나.
키스라는 큰일이 있었던 데다, 날 크게 오해해서 오늘만큼은 봐주기로 생각한 것 같았다.
건네준 콜라를 쪽 빨아들인 나는, 오른팔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에 옆을 바라보았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눈빛을 가라앉힌 채 날 쳐다보고 있다.
내가 팔걸이를 전부 차지하고 있어서임이 분명했다.
만석 영화관의 묘미는 팔걸이 기싸움이긴 하지.
나는 인상을 팍 찌푸리고 험악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내 시선을 슬쩍 피하며 팔을 안으로 집어넣었다.
자신의 주제를 알고 꼬리를 만 남자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어주던 나는,
찰싹!
미유키가 다소 강한 힘으로 왼쪽 팔을 때리자 고개를 홱 돌렸다.
“왜 때려?”
“왜냐니...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남자를 향해 연신 사과를 한 미유키가 조용하지만 엄한 투로 날 나무랐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저 사람이 먼저 시비 걸었어. 팔걸이 내놓으래.”
“팔걸이 좀 양보하면 어때서...?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어. 엄청 어렵지.”
“하아... 진짜...”
못 말리겠다는 듯 기다란 숨을 내뱉은 미유키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날 보며 픽 하는 실소를 터뜨렸다.
“마츠다 군 답네...”
목소리가 무척 온화하다.
화가 난 게 아니라는 방증.
옆머리를 긁으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척한 나는, 오른쪽 팔걸이에 올려놓은 팔을 내렸다.
마치 미유키의 다정한 말에 감화된 것처럼 말이다.
이런 날 보고 있던 미유키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변했다.
내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든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반응에 멋쩍은 듯 목을 가다듬은 나는, 우리 사이에 있는 팔걸이에 왼팔을 올렸다.
“.... 대신 이건 내가 쓴다.”
“응, 마음대로 써.”
생글생글 웃는 미유키.
기분이 좋아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크린에서 비상대피로를 설명해주었고, 상영관 불빛이 소등되며 영화가 시작됐다.
두둥!
액션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웅장한 북소리.
오늘 같은 날엔 달달한 로맨스 영화를 골랐어야 했던 건데...
자리가 없었던 게 천추의 한이다.
의자에 몸을 묻다시피 한 채로 스크린으로 눈을 돌린 미유키를 흘끗 바라본 나는, 오늘 뭔가 아쉽다고 생각하며 영화에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주조연이 나와 간단한 액션을 하며 말장난을 하고 있을 때,
툭. 툭.
미유키의 손가락이 내 왼쪽 손등을 건드렸다.
고개를 돌려 미유키를 쳐다본 나는, 콜라를 한 입 머금고 삼킨 그녀가 팔을 뒤집어보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뜻대로 해주었다.
그러자 미유키가 자신의 검지를 곧게 뻗더니, 내 손바닥을 콕콕 건드렸다.
그러더니 이내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니, 미유키는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글씨를 쓰고 있었다.
검지를 놀리는 속도가 제법 느렸기에, 감각을 집중하니 미유키가 무슨 단어를 쓰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오늘 오해해서 미안해.】
그녀는 손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직도 신경을 쓰고 있구나.
애정표현을 곁들인 귀여운 사과에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려던 나는, 이어지는 미유키의 손글씨에 눈을 부릅떴다.
【켄 군.】
이름이다.
성씨가 아닌, 이름.
그녀는 분명히 내 이름을 썼다.
무언가 아쉬웠던 마음이 일시에 날아간다.
손으로 부른 이름이지만 뭐 어떠한가.
충분히 사랑스러운데.
조만간 저 어여쁜 입에서도 내 이름이 나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 스스로 물꼬를 터뜨린 미유키가 너무 장하다.
모든 문장을 다 쓴 미유키의 손이 천천히 떨어지자마자, 나는 입을 잔뜩 오므렸다.
입꼬리가 자꾸 씰룩거리려 해서였다.
덕분에 얼굴이 괴상하게 변했겠지만... 지금은 그딴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이래도 진정이 잘 안 되자,나는 미유키가 들고 있는 팝콘을 거칠게 한 움큼 집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입 안에 털어 넣어 와그작와그작 씹어댔다.
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환호를 할 것 같았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