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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38화 (38/313)

〈 38화 〉 이벤트 컷 신은 아마도

* * *

집에서 나오는 테츠야가 보인다.

빵 쪼가리를 쳐 물고 있는데, 차에 부스러기 떨어뜨리면 발로 차버린다.

그 정도 눈치는 있는지, 테츠야는 차를 보자마자 빵을 입 안에 우겨넣었다.

뒷좌석 문을 열려던 그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아차 하고는 조수석 문을 열었다.

덜컥.

그리고는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어... 미유키? 오늘은 내가 조수석에 타는 날이지 않아?”

번갈아가면서 타기로 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환한 미소를 지은 미유키가 대답했다.

“마츠다 군이 심심해 보여서, 그냥 탔어.”

“그렇구나... 자리 바꿀까?”

“딱히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얼른 타.”

“아, 알았어. 마츠다, 오늘도 잘 탈게.”

미유키에게서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는지, 테츠야가 머뭇거리다가 뒤에 탔다.

나는 내게 감사인사를 한 놈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오냐.”

테츠야야, 미유키가 조금 달라졌지?

근데 저건 약과란다.

조만간 소꿉친구를 빼앗긴 슬픔에 엉엉 울도록 만들어줄게.

이제 너한테 남은 건 최면어플밖에 없다.

존재하지 않는 그것을 어찌 얻는다고 해도, 나한테 바로 빼앗기겠지만www

그래도 저 새낀 운이 좋다.

아니, 운이 좋다기보다는 여자 복이 터진다.

렌카도, 히요리도 가만히 할 일을 하는 테츠야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니까.

참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존나게 빨빨거리면서 이벤트를 챙겨야하는데,

누가 봐도 내 하위호환인 저놈에겐 여자가 들러붙는다니 말이다.

도키아카 세계관인데다 러브 코미디의 스탠다드형 주인공 같은 놈이 테츠야라 이해는 하지만, 어쨌든 저놈의 마수에서 모든 히로인들을 구원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자 숙명.

그것이 해피엔딩을 위한 길이다.

오늘도 전의를 불태운 나는, 학교에 도착하고 두 사람과 함께 학교 현관으로 향했다.

그렇게 실내화로 갈아 신은 뒤 1학년 복도에 있는 사물함을 열고 책을 꺼내는데, 미유키가 내 뒤에서 조곤조곤한 투로 말을 걸어왔다.

“책 정리 좀 하면 안 될까? 너무 어지러워 보이잖아.”

그 말마따나, 내 사물함 안에는 책이 아무렇게나 올려져있었다.

세워서 잘 정리해둔 것이 아니기에 과목별 교과서를 찾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 정도.

수업용 책을 손에 든 나는 귀찮다는 듯 팔을 휘저었다.

“여기다 책을 놔둔 것만 해도 어디냐? 칭찬을 해도 모자랄 판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기다... 음...”

기다리기 귀찮아... 라고 하려 했던 것 같다.

쑥스러워하기는.

그녀의 손에 사물함 열쇠를 들려준 내가 말했다.

“2교시 쉬는 시간에 네가 대신 정리해줘.”

“싫어. 내가 왜?”

“우리 사이에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친군데... 그치?”

‘친구’라는 단어를 대놓고 강조하면서 묻자, 미유키가 움찔하더니 반걸음 물러났다.

반박하고 싶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 모습.

킥킥거린 나는 그런 미유키의 등을 약하게 툭 건드리고는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 마츠다 군.”

날 향해 어색한 듯 손을 흔드는 동급생.

저번에 정문에서 빵을 먹다가, 나로 인해 사레가 들린 여자였다.

쟤 이름이 뭐였더라... 마사코였나?

그래도 안면을 텄다고, 먼저 인사를 해주는구나.

고마워. 하지만 공략은 안 할 거야.

먼저 벌려주면 넙죽 받아먹긴 하겠지만.

대충 마주 손을 흔들어준 내가 인사했다.

“안녕, 빵녀.”

“빠, 빵녀...?”

“오늘도 빵 먹다가 목 막혔냐?”

“아, 아니... 오늘은 괜찮았어.”

“다행이네. 수고해라.”

“아, 응... 마츠다 군도 수고해.”

자리에 앉은 나는 테츠야와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미유키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복도에서 갈라지고 나서 시간이 조금 지났는데, 진짜로 내 사물함을 정리해준 건가?

애정 어린 눈으로 날 잠시 노려본 걸 보면 그런 것 같다.

**

[마츠다 군은 잠깐 남아줘.]

[왜.]

[그냥 남아줘.]

몰래 미유키의 메시지를 읽은 나는 책상에 엎드렸다.

그러자 테츠야가 내 어깨를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마츠다, 체육 시간이라서 탈의실로 가야 돼.”

“5분만 자고 갈 테니까 먼저 가라.”

“그래...? 알았어. 늦지 마.”

“어.”

학급 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우르르 이동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얼마 후, 조용해진 교실.

자는 척을 하고 있던 내 정수리를, 무언가가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마츠다 군.”

미유키의 손가락이었다.

상체를 스윽 일으킨 나는 교실 안을 둘러보았다.

전부 탈의실로 간 모양이다.

허리춤에 손을 올린 미유키를 올려다본 내가 물었다.

“왜 남으라고 한 건데?”

“할 말이 있어서.”

“뭔데.”

“친구라는 말로 포장하면서, 동급생을 부하처럼 부려먹으려고 하지 마.”

아까 복도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는 듯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미간을 좁혔다.

“부려먹는다니? 그리고 동급생? 말 서운하게 하네?”

“마, 맞잖아...! 학교 안에서는 같은 학년에다... 난 반장이고...”

“반장? 너 지금 나랑 급 나누기 하냐? 선 그으려고? 진짜 서운해지려고 한다?”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그럼 뭔데?”

정색을 한 채 미유키를 내려다보고 있자, 망설이던 그녀가 갑작스레 내 앞머리를 만졌다.

손가락으로 머리에 붙은 실밥을 떼어낸 그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냥... 왠지 분해서...”

실밥을 손가락으로 말면서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는 미유키.

고개를 푹 수그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무, 물론 마츠다 군이 날 믿으니까 사물함을 정리해달라고 말했던 건 아는데...”

“나한테 당한 걸 갚아주고 싶었다?”

“그렇다기보다는... 장난을 하면서 따지고 싶었던 거지... 그런데 마츠다 군이 심각하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어... 미안...”

쉽게 말하자면, 장난을 치면서 따지려고 했는데 연기를 너무 진지하게 해버렸다 이거구나.

깜빡 속았네. 그리고 다행이다.

난 네가 진심으로 서운해 하는 줄 알았잖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나는 미유키의 머리를 다소 강하게 헝클어뜨렸다.

“하지 마...!”

그러자 미유키가 앙탈 섞인 타박을 하더니 자신의 머리를 정리했다.

윗머리를 누르고, 앞머리까지 꼼꼼하게 정리한 그녀는, 곧 동급생들의 책상이 어긋나있는 것을 똑바로 조절해주기 시작했다.

저런 건 대체 왜 하는 거지?

뻘줌한데다가 그냥 나가긴 싫으니까 아무 일이나 하는 건가?

착한 미유키답다.

창문 옆에 있는 책상의 각도를 맞추고 있는 미유키의 앞으로 간 나는, 책상 위에 양손을 짚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향해 히죽 웃어보였다.

“연기에 진심이 묻어나온 것 같던데...”

“차, 착각하지 마... 그런 거 없었어...”

“그럼 됐고. 사물함 열쇠나 줘.”

“고맙다는 말이 먼저야...”

“싫은데.”

“그럼 나도 안 줘. 오후 수업 때 교과서 없이 잘해봐.”

“안 들어오면 되지. 오랜만에 땡땡이쳐야겠다.”

대수롭지 않은 듯한 내 말에, 미유키가 벙 쪘다.

몇 초간 말없이 날 쳐다보던 그녀가 물었다.

“진심이야...?”

“궁금하면 실험해보든가.”

할 말을 잃어버린 듯한 미유키의 입에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몇 번이나 그러고 있던 그녀는,

“너는 근데 안 덥냐?”

내가 소매를 톡 건드리며 저리 묻자 놀라선 몸을 움츠리더니 반문했다.

“뭐가?”

“왜 벌써부터 긴팔을 입고 난리야? 가뜩이나 몸에 열도 많은 게.”

“.... 내, 내가 몸에 열이 많은 건 어떻게 아는데?”

“많이 만져봤으니까 알지.”

“마, 마츠다 군...!”

버럭 화를 낸 미유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텅 빈 교실임에도, 행여나 누가 들을까봐 걱정스러운 것이다.

아무도 없음에 안도한 그녀는, 날 나무라려는 듯 입을 우물거렸다.

하지만...

“어...?”

내가 허리를 뒤로 빼고, 미유키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자 눈을 크게 떴다.

“야.”

“.... 왜...?”

“서로 입술까지 부딪쳐놓고선 화까지 내는 건 너무 오버 아니냐?”

대놓고 주말에 있었던 사건을 언급하자, 거의 경기를 일으키다시피 한 미유키가 시치미를 뗐다.

“우, 우리가...? 그랬었어...? 나는 잘 기억이...”

“기억나게 해줄까? 이리 와봐.”

“.....”

적극적인 추파에, 미유키의 뺨에서부터 홍조가 맺히기 시작했다.

뺨에서 시작한 그것은 곧 얼굴 전체로 퍼져, 귀까지 닿기에 이르렀다.

몸까지 이리저리 돌리며 몸 둘 바를 몰라 하던 그녀가 조신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지, 지금...? 진짜? 진심으로...?”

반쯤은 농담이었는데, 우리 미유키는 뭐든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말이지.

약간 혹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은데, 두 번째 키스가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나보구나?

기회가 찾아왔으니까 빼지 말아야겠다.

“어.”

“체육실... 가야...”

“아직 시간 많아. 나 슬슬 허리 아파지려고 한다? 쬐끄만 애한테 키 맞춰주기 힘들어.”

주머니에 손까지 넣으며 미유키를 도발하자, 발끈한 그녀가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진중하기 그지없는 내 눈빛을 보고는 입을 앙다물었다.

“.....”

고개를 약간 사선으로 돌린 채, 내 눈치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다.

구미가 당긴다는 뜻.

얼마간 그러고 있던 그녀는,

드르륵.

우리 옆에 있는 창문을 닫았다.

썬팅필름으로 되어있는 창문도 아닌데, 웃기는 짓을 하고 있다.

그렇게라도 해서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으려는 미유키의 마음이 다 보인다.

이윽고 그녀가 굳은 결의가 서린 눈빛으로 내 눈을 마주보았다.

팔을 등허리 쪽으로 빼기까지 하는 그녀.

이제 곧 시작할 거라고 예고까지 하는 모습이 웃겨서 미칠 것 같지만 참자.

진지한 상황에서 저래버리면 미유키가 삐쳐서 나갈 수도 있다.

“누, 눈 감아...”

모기만도 못한 작은 목소리.

나는 그녀의 말대로 눈을 감음으로서 주도권을 넘겼다.

그러자 얼마 후, 미유키의 향긋한 냄새가 강해졌다.

그녀의 몸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

얼마 지나지 않아 미유키의 긴장한 듯한 숨소리가 귀를 간지럽힐 때쯤,

톡.

내 입술에 촉촉하고 따뜻한 미유키의 입술이 닿았다.

그 상태로 우린 가만히 있었다.

혀도 넣지 않고, 서로의 몸을 만지지도 않고 가만히.

매앰­! 매앰­!

오감이 민감해지면서 나무에 붙어있는 매미 소리가 창문을 뚫고 들어와 귀로 파고든다.

점심시간을 앞둔 오전, 빈 교실, 고백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는 두 사람간의 풋풋한 키스.

딱 러브 코미디의 한 장면이다.

이벤트 컷 신은 아마도...

이런 느낌이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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