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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휴일이었으면 좋겠다.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물론 아카데미에 가고 싶지 않다는 건 아니다.
그냥 마음이 그랬다. 휴일이어서 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데다, 늦은 시간이라서 어떻게 잔다고 해도 제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새벽 2시가 넘어가는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던 미유키는 고개를 쓰윽 돌렸다.
그러자,
“.... 끄아... 씨...”
마츠다가 오만상을 다 쓰며 험한 말을 내뱉으려다 말았다.
그런 그를 쳐다본 미유키는 순간적으로 웃음이 터져나오려던 것을 간신히 참아내었다.
마츠다가 저러는 이유를, 자신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히...’
속으로 음흉한 웃음를 터뜨린 미유키의 눈에 호선이 그려졌다.
그녀는 손을 위로 올려, 자신이 베고 있는 마츠다의 팔뚝을 만지작거렸다.
“끄으...”
또 다시 터져 나온 마츠다의 앓는 소리.
오랜 시간동안 팔베개를 해주느라 피가 통하지 않아 저린 게 분명했다.
더 괴롭히고 싶다.
깨우고 싶다.
마츠다가 잠에 취한 목소리로 팔이 저리니 잠깐만 나와 보라고 말하는 걸 듣고 싶다.
그러한 욕심이 새록새록 피어났지만, 미유키는 얌전히 마츠다의 팔에서 머리를 떼어냈다.
자신의 팔을 다리 사이에 쏙 넣은 채로 몸을 웅크리는 마츠다를 보며 조용히 깔깔거린 미유키가 베개를 가져와 머리에 벴다.
그리고는 생전 처음 느껴보았던 오르가즘을 되새겼다.
기억이 드문드문 끊길 정도로 강렬한 자극.
정말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아니, 실제로 잠시 미쳤었다.
그때 느꼈던 쾌감을 생각해보니 다시 몸이 뜨거워지려고 한다.
사실 자려고 했을 때부터 이랬다.
몸과 마음이 다 지쳐있어 잠을 청하려고 해봐도, 그 쾌감이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 수면을 방해했다.
“하아...”
연신 한숨을 뱉어내며 흥분을 식힌 미유키는 마츠다를 흘끗 바라보았다.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는 그.
저린 게 꽤나 가셨나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든 미유키는 입맛을 다시며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행여나 마츠다가 깰까봐 화면 밝기를 최대한으로 낮춘 그녀는, 메시지가 두 개 와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신의 언니, 카나가 자정 즈음 보낸 것이었다.
[너 친구 집에 간 거 아니지?]
의미심장한 질문 밑에, 입꼬리를 올린 채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새침한 고양이 캐릭터의 이모티콘이 있다.
마치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고만 있는 것 같은 느낌.
헛웃음을 켠 미유키는 이걸 말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했다.
상담을 받아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지만...
남자친구 한 명 사귀어본 적 없는 언니가 뭘 알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자신을 향해 질문 공세를 퍼부을 게 뻔하다.
이렇게 생각하니 매번 콧대 높게 아는 척을 하던 언니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자세한 묘사에 벙 쪄버리는 카나를 상상해보니 뭔가 웃기다.
답장을 할까 말까 하다가 고민하던 미유키는,
“자라... 뭐하냐...?”
졸음이 잔뜩 묻어나오는 마츠다의 목소리를 듣고 재빨리 몸을 돌렸다.
“아... 일어났어...?”
“어...”
자신의 팔을 주물럭거리며 기다란 콧바람을 내쉬는 마츠다.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본 미유키가 걱정스레 물었다.
“팔 많이 아프지...? 아직도 저려?”
“그냥저냥... 지금 비와?”
마츠다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지만, 졸린 상태에서 말을 할 때가 가장 좋다.
과장 좀 보태서 귀가 황홀해지는 느낌. 최고다.
창밖을 바라본 미유키가 대답했다.
“응... 오고 있어.”
“아직까지 안 잤냐...?”
“잠이 안 와서...”
“그럼 애초에 팔베개를 하지 말든가...”
익살스러움이 섞여있는, 진심이 아닌 말투로 투덜거린 마츠다는 자신의 팔을 미유키가 벤 베개 밑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그 팔을 그대로 꺾어 미유키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러면 괜찮네... 이대로 자라.”
“잠이 안 온다니까...?”
“그래도 자려고 노력해봐. 내일 힘들기 싫으면...”
말은 저렇게 해놓고 노골적으로 자신의 허리를 만지는 마츠다가 어이없다.
물론 싫다는 건 절대 아니다. 마츠다의 손길은 좋았다. 여느 때처럼.
“자기 싫은데...”
마츠다의 단단하고 포근한 가슴에 손을 올린 미유키는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다.
그건 바로 이런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시간대에, 자신의 어리광이 아주 많아진다는 거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츠다와 관계를 가진 이후 새벽에 이랬다.
근데 뭐 어떡하는가. 이러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는데.
마츠다 또한 싫어하는 눈치도 아니고.
콕. 콕.
“찌르지 마라... 혼난다.”
마츠다의 엄한 목소리를 들은 미유키는 검지를 더욱 뻣뻣하게 세워, 마츠다의 가슴을 마구 찔러댔다.
청개구리보다 더욱 악랄한 모습으로 응석을 부리는 그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한 마츠다가 말했다.
“너 때문에 잠 다 깨겠다... 그만해.”
“.... 싫어.”
“그만하라고.”
“싫다구...”
“하... 애도 아니고...”
혀를 찬 마츠다는 미유키가 움직일 수 없도록 그녀의 몸을 완전히 끌어안았다.
그리고 미유키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진짜 자라...”
“응...”
그제야 얌전히 대답한 미유키는, 마츠다에게 안기자마자 졸음이 솔솔 쏟아지면서 눈꺼풀이 무거워져옴을 느꼈다.
눈만 감으면 곧바로 잠에 들 것 같다.
푹신한 침대보다 더 포근한 그의 품 안에 있으니 행복한 기분마저 든다.
‘근데 내일 어떻게 일어나지...?’
요새 비가 계속 와서 바깥 기온이 낮아져있는데, 이렇게 쌀쌀한 날은 이불 밖으로 나가기가 싫어진다.
이런 날엔 두꺼운 이불 안에서 독서를 하며 쉬는 게 최고인데... 졸면서 수업을 들어야한다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막막하다.
“몰라...”
아주 자그맣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미유키는, 마츠다가 자신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자 모든 상념을 날려버렸다.
어떻게든 되겠지.
세상 편하게 생각하기로 다짐한 그녀는 눈을 감았다.
오늘은 단 하나만 빼고 모두 좋았던 날이었다.
마츠다가 사정을 못했던 일이 그 하나였고, 그게 못내 아쉬웠다.
다음번엔 자신도 마츠다도 동시에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좋겠다가 아니라, 자신이 꼭 그렇게 만들 것이다.
**
“마츠다.”
거슬리기 짝이 없는 음색이 들린다.
아침 일찍 일어나 미유키와 함께 비몽사몽 키스를 하고, 기분 좋게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저 칠판을 긁는 소리보다 더욱 듣기 싫은 소리가 귀에 꽂히자 그 기분이 다운되는 느낌이다.
“.....”
“마츠다. 일어나봐.”
아니 근데 이 새낀 사람이 자고 있는 걸 못 보나?
요새 조금 풀어줬더니 설설 기어오르기 시작하는데, 동서남북으로 벽딸이나 치고 싶지 않으면 가만 놔둬라.
자꾸 짜증나게 하면 너희 집에 자택경비원으로 들어가버린다?
스르륵 상체를 일으킨 나는 테츠야를 돌아보며 미간을 구겼다.
“뭔데.”
“아... 미안. 미유키가 이거 너 주래.”
테츠야가 내게 초코우유를 내밀었다.
이건 또 언제 사왔나 싶어 미유키를 보니, 책상에 엎드린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아마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지는 저 상태로 부족한 수면시간을 채우겠지.
초코우유를 받아 책상 위에 올려놓은 내가 물었다.
“매점은 언제 갔다 온 건데?”
“너 자고 있을 때.”
“그랬냐?”
“오늘 너희 둘 상태가 왜 그래?”
“뭐가.”
“엄청 피곤해보이잖아. 미유키는 어제 잠을 못 잤다고 하던데... 너도 마찬가지야?”
따로 온 데다, 우리가 이 정도까지 헤롱거리고 있으면 이제 좀 눈치채줘라.
이 우유부단하고 적당히 못생긴 새끼야.
이 정도까지 둔감한 네게 대단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구나.
혹시 매점에 가면서 미유키한테 안 물어봤나? 어제 뭘 했길래 이렇게 골골대는지?
지금의 그녀라면 솔직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와 늦게까지 있었다는 말 정도는 할 텐데... 아깝구나.
귀찮은 파리를 날려버리듯 한손을 휘저은 나는 책상 위에 다시 엎드렸다.
그러자 이런 내 모습이 재미있는 듯 음산하게 큭큭거린 테츠야가 말했다.
“이번 주에 자리 바꾸는 거, 알고 있어?”
슬슬 얕은 잠에 빠지려고 하던 나는 귀를 쫑긋할 수밖에 없었다.
자리 바꾸기 이벤트는 러브 코미디의 필수 클리셰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자주 나오는 클리셰다.
히로인과 주인공의 관계가 크게 발전했을 때, 그걸 확인시켜줄 겸 몰래 꽁냥거리는 그림을 쉽게 만들기 위한 장치.
그리고 도키아카엔 이런 이벤트가... 있을 것 같지만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이 자리 바꾸기는 나와 미유키를 위한 단독 이벤트라는 거다.
그것도 새로 생긴 이벤트.
졸음이 확 달아난 나는 엎드린 채로 테츠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뜬금없이 자리를 바꾼다고? 확실해?”
“문화제가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분위기도 환기시킬 겸 바꾼대.”
“그래...? 그건 누구한테 들었는데?”
“방금 부반장한테 들었어.”
훌륭한 정보다.
고맙다, 테츠야야. 넌 설명충이나 정보꾼 역할이 제일 잘 어울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라.
비아냥대는 게 아니라 진심어린 칭찬이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건가?”
“그건 모르겠어.”
학생들끼리 정할 수 있는 거라면 좋겠지만, 추첨이어도 걱정하진 않는다.
왜? 나에겐 수호천사... 가 아니라, 수호신이 있으니까.
테츠야 같은 놈보다 훨씬 강력한 주인공 버프를 두른 나인데다 단독 이벤트까지 계획되어있는데, 자리 바꾸기 정도는 무조건 내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게 될 거다.
그렇다고 해도, 오늘 신사에 들러서 새전을 하긴 해야겠다.
요즘 소홀해서 죄송하다고, 한 번 제대로 모시겠다고 말이다.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테츠야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슬쩍 미유키를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체구가 규칙적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모습을 보니 벌써 잠에 들었나보다.
그녀와 나란히 앉아 하고 싶은 일은 수두룩했다.
공부하기, 노트로 대화를 하거나 끝말잇기를 하기, 서로의 교과서에 낙서하기.
이런 유치하지만 달콤한 일부터 시작해서, 성적이고 대담한 일까지...
벌써부터 기대감에 어깨가 들썩거리는데... 참자.
지금까지 그래왔듯, 섣부른 설레발은 금물이다.
저런 건 자리를 다 바꾸고 나서 생각해봐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