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73화 (73/313)

자리를 재배치하는 날이어서 그런지, 아침임에도 교실 안이 왁자지껄하다.

학생들의 면면에 묻어있는 감정은 각자 다양했다.

몇몇은 설레어했고, 몇몇은 그러려니 했으며, 또 몇몇은 귀찮아하고 있었다.

미유키의 경우, 교탁에 서서 떠드는 학생들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얘들아, 그만 떠들어줄래? 교수님 오실 거야.”

노트 끄트머리로 교탁을 가볍게 두드리는 그녀.

소란이 일부 잦아들자 만족스런 표정을 지은 그녀는, 눈으로 교실 안을 훑다가 껄렁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날 쳐다보았다.

“마츠다 군. 다리.”

기다란 검지를 뻗고 아래로 까딱거리는데, 왠지 도발적으로 보인다.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있던 나는 심드렁하게 콧바람을 내쉬었다.

“신발 안 닿았잖아.”

“책상에 다리를 올려놓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야.”

“이거 편한데, 너도 해볼래?”

“얼른 내려.”

귀찮음이 잔뜩 서려있는 표정으로 작게 투덜거린 나는 순순히 다리를 내렸다.

이후 의자를 당기고 얌전히 책상에 앉자, 미유키가 학급생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드르륵.

머리가 벗겨진 교수가 들어오더니 교실 안을 둘러보았다.

미유키와 짧게 대화를 나눈 그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키 175 이상은 뒤에 서있어라.”

나를 비롯한 다섯 명의 남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갔다.

그중엔 신장 제한에 간신히 턱걸이한 테츠야도 있었다.

기대감이 묻어나오는 눈빛을 한 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그.

미유키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기를 바라는 건가? 꿈도 크다.

“일단... 마츠다.”

“예.”

“넌 창가 쪽 맨 뒤로.”

교수의 말을 들은 난 입가를 씰룩거렸다.

한 면이 막혀있는 창가 구석은, 짝꿍과 함께 다양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다.

나는 잽싸게 창가 쪽으로 갔다.

진짜 구석이라 할 수 있는 창가 바로 옆에서 한 칸 띄워 앉은 내가 낄낄거리고 있자, 교수가 헛웃음을 켰다.

“그렇게 좋냐?”

“예, 뭐... 좋네요.”

“뒷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예전처럼 졸지 마라. 안 그러면 앞자리로 옮긴다?”

어디 한 번 옮겨보세요.

안방에 있는 결혼사진에 허여멀건한 내 씨앗들이 뿌려지는 걸 보고 싶다면.

“저 요즘 열심히 하잖아요. 가끔 졸아도 봐주십쇼.”

교실 안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대놓고 딴 짓을 하겠다 하니 웃긴 모양.

이런 내 당당한 반응에 벙 쪄있던 교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너답다, 너다워. 이가라시랑 미우라는 중앙에, 다케다와 오자와는 복도 쪽으로 가라.”

한 칸 건너 내 옆에 앉은 테츠야가 히죽 웃었다.

“그 자리 괜찮더라.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마츠다.”

그러고 보니 테츠야와 나는 위치만 바뀌게 된 셈이구나.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내가 앉은 책상을 가리켰다.

“이거 1교시 끝나고 바꾸자.”

“책상? 굳이 바꿔야 되나? 네 거나 내 거나 똑같이 깨끗한데.”

네가 책상 밑에 코딱지를 묻혔을 줄 누가 알아 씨발아.

“난 내 책상이 좋다. 정들었어.”

“정까지 들었어...?”

“어. 그러니까 바꿔.”

“그래... 알았어. 근데 네 책상에서 이상한 냄새 같은 거 나는데...”

“뭔 냄새 이 새끼야.”

“아니... 잠깐만...”

사설 탐정마냥 한손을 들어올린 테츠야가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이거 살구 향인가...? 아니, 복숭아인가?”

놈의 추측을 듣던 난 속으로 콧방귀를 꼈다.

테츠야는 지금 미유키의 자두 향을 맡고 있었다.

우리 집 옷장 안에 있는 미유키의 옷이 걸려있던 제복으로 옮겨지면서, 약간 희미해져 새콤달콤한 향만 남은 상태.

놈은 용케도 그것을 알아차린 거다.

정확하게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너 지금 네 모습이 얼마나 이상한지 알고 있긴 하냐?”

한심함이 묻어나오는 내 말투에, 테츠야가 찔끔하더니 뒷머리를 긁었다.

“미안하다. 좀 변태 같았지?”

“말 걸지 마. 더럽다.”

“너무하네.”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쯤, 학급생들이 교탁 앞으로 우르르 몰려가 줄을 섰다.

교수가 준비한 주머니에서 종이를 하나씩 가져간 그들.

앞자리에 앉게 된 학생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는 게 퍽 재미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앞자리에 앉을 학생들이 다가왔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

정체는 빵녀와 부반장이었다.

“아, 안녕... 마츠다 군...”

“잘 부탁해. 마츠다 군.”

면식이 있는 지인들이 주인공 주변에 오는 건 러브 코미디를 포함한 모든 학원물의 클리셰이긴 하지.

만족스런 웃음을 흘린 내가 말했다.

“잘 부탁한다, 빵녀.”

“으, 으응...”

“안경녀, 너도.”

호칭을 들은 부반장이 기가 찬 듯 말했다.

“안경녀라니... 내 이름은 호노카야. 나츠메 호노카.”

예쁜 이름이네.

어차피 10분 뒤엔 까먹겠지만, 그때까지 기억해줄게.

대충 한손을 들어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한 나는, 추첨이 거의 끝날 때까지 교수의 옆에 멀뚱히 서있던 미유키를 바라보았다.

반장이라서 제일 마지막에 뽑는 건가?

아직까지 내 옆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보면, 미유키가 올 것 같긴 한데...

남아있는 사람들이 몇 마리... 아니, 몇 명 있어서 조금 불안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교수와 눈을 마주친 미유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가방을 챙기고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가 앉아있는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이거 옆으로 옮겨줘.”

무덤덤한 말투, 그 속에 약간의 애교가 섞여있다.

이를 드러내며 웃은 내가 물었다.

“같이 앉게 됐네?”

“.... 응. 교수님한테 말씀드렸어. 요즘 많이 좋아지고 있으니까... 옆에서 사고 못 치게 잘 지켜보겠다고.”

저건 저번에 내가 했던 말이었다.

개입하면 부정행위가 된다더니... 나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그 죄책감과 부담감을 훨씬 뛰어넘었나보다.

미유키의 가방을 옆으로 옮겨놓자, 그녀가 빵녀와 안경녀에게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조신하게 자리에 앉았다.

확 퍼지는 자두 향. 앞으로 정말 재미있어질 것 같다.

“안녕, 테츠야 군.”

고개를 쏙 내빼고 테츠야를 향해 밝은 인사를 건네는 미유키.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보인 테츠야가 마주 인사했다.

“안녕, 미유키.”

놈의 얼굴은 미유키처럼 밝았다.

그녀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좋은 모양.

다만 눈빛이 조금 죽어있었는데, 미유키가 자신의 옆이 아니어서 실망한 게 분명했다.

특히 내 옆이라 신경이 쓰일 테지.

“마츠다 군, 수업시간에 딴 짓 하면 혼날 줄 알아.”

내게 검지를 들어올리며 당부를 하는 미유키.

상념에서 벗아난 나는 뒤통수에 손을 대고 깍지를 꼈다.

“벌써부터 피곤해지네.”

“같이 열심히 공부하자.”

“귀찮게 굴지만 마라.”

“엄청 귀찮게 할 건데... 싫으면 교수님한테 앞자리로 옮겨달라고 말해. 같이 가줄게.”

서로가 껄끄러운 척 웃기지도 않는 연기를 한 나와 미유키는, 남들 몰래 눈을 마주치고는 조용히 킥킥거렸다.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미유키도 아마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겠지.

이제부터 여기서 온갖 일이 다 일어날 텐데, 부디 좋아해줬으면 좋겠다.

“칠판 보기 불편한 사람들은 없지?”

교수의 말에 몇몇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그들의 의견을 들어주어 배치를 따로 조정한 교수는, 더 이상의 불만사항이 접수되지 않자 엄한 투로 말했다.

“다들 책 꺼내. 수업 시작한다.”

의자를 바짝 당겨 미유키를 가리다시피 한 나는,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책을 펴는 그녀의 허벅지에 손을 슬쩍 올려놓았다.

“.... 흐흠...!”

작게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어깨로 내 몸을 툭 미는 미유키.

벌써부터 이러는 내가 어처구니없는 듯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어보인 나는 교과서 위에 작게 글씨를 써서, 미유키의 책상으로 밀었다.

[앞으로 계속 이럴 건데, 싫으면 교수님한테 옮겨달라고 해.]

방금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내가 얄미웠을까?

아랫입술을 잘근 깨문 미유키가 샤프를 든 손을 책상 아래로 내리더니, 허벅지 위에 올라가있는 내 손등을 약하게 콕 찍었다.

이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수업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자리를 바꾸기 전까지만 해도, 미유키나 렌카, 치나미를 보기 위해 아카데미에 억지로 오는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어쩌면 오늘부터는 매일, 즐겁게 등교할지도 모르겠다.

**

“마츠다 군...! 시도 때도 없이 만지지 좀 마...!”

오후수업이 모두 끝나고 부활동을 앞둔 시간.

옥상으로 가는 계단 앞에서, 미유키가 날 나무랐다.

그녀의 얼굴은 상기되어있었다.

수업시간에 틈틈이 허벅지 안쪽이나 허리를 만진 결과.

약간 달아오른 상태가 된 그녀를 보며 순박한 표정을 지은 내가 말했다.

“좋아서 그러는 건데 왜.”

“좋아서는 무슨...! 내 반응이 재미있어서 계속 해놓고선...”

“그럼 하지 마?”

“.... 하지 마.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만약 교수님의 귀에 들어가면 무조건 벌점이야... 사유는 충분해...”

“진짜 하지 마?”

상체를 수그려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 내가 재차 능글맞게 묻자, 미유키가 눈을 굴리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내가 하라면 해... 그때까진 하지 마...”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내 손길이 좋긴 했나보다.

아마 짜릿한 기분도 조금이나마 느꼈겠지?

초반엔 지금처럼 민감해하겠지만, 약한 터치부터 시작해 적응을 시키고, 경계심을 서서히 무뎌지게 하면 오히려 미유키가 먼저 날 만지거나 할 거다.

특히 두꺼운 외투를 입는 겨울이 오면 더욱 대담해질 테고.

“허락 맡고 하는 건 너무 잔인한데.”

“잔인하다니... 내가 나쁜 사람이야?”

“내가 못 참을 걸 뻔히 알면서도 하지 말라는데, 그럼 아니냐?”

“마츠다 군이 못 참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말하지도 않았으면서...”

“그걸 꼭 말해야 아나? 어쨌든 자제해볼게.”

“꼭 자제해... 나 엄청 힘들었어...”

“어디가 어떻게 힘들었는데?”

“.... 어이없어...”

살포시 웃음을 지은 미유키가 구겨진 내 제복 소매를 살살 펴며 화제를 돌렸다.

“내일 금요일엔 마츠다 군의 집에 못갈 것 같아. 가족여행 간대.”

이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지?

가족여행 이벤트는 겨울 때나 있을 텐데?

“가족여행?”

“응. 어제 아빠가 갑자기 닛코에 가고 싶다면서, 다 같이 가자고 했어. 그래도 금요일에 가서 토요일 저녁에 돌아오니까... 그때 들를게.”

장인어른, 요새 좋게 보고 있었는데 왜 엇나가려고 하는 거죠?

이러면 저, 나쁜 마음을 먹어버릴지도 몰라요?

닛코라면 가까운 거리긴 하지만, 이런 돌발 상황은 원치 않았는데... 아쉽다.

아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건 치나미와의 이벤트를 챙기라는 계시다.

매번 미유키와 붙어있느라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갈 타이밍을 못 잡고 있었는데, 이참에 치나미와 만나야겠다.

“어쩔 수 없네. 잘 다녀와. 시간 날 때 톡하고, 자기 전에 영상통화 걸어.”

“알았어... 이제 부활동 가... 늦겠다.”

미유키가 내 손을 끌어당기더니, 손가락 사이사이를 만지작거렸다.

이대로 헤어지기 싫은 모습.

말은 저렇게 해놓고 꼭 행동은 다르게 하는 것이 마치 사춘기를 겪고 있는 철부지 소녀 같다.

잠자코 미유키의 마사지를 빙자한 애정표현을 느끼던 나는, 반대쪽 손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가리켰다.

“머리카락 몇 가닥 붕 떴다. 정전기 오른 것처럼 보여.”

“.... 그럼 정리해줘...”

한걸음 다가오며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날 올려다보는 그녀.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건가? 홀릴 것 같다.

조심스럽게 미유키의 머리를 정리해준 내가 말했다.

“여행 갔다가 돌아오면 바로 연락해. 데리러 갈게.”

“.... 응. 선물 사갈게...”

선물이라... 팔찌 같은 거면 좋겠다.

테츠야의 앞에서 대놓고 자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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