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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91화 (91/313)

철컥.

뻗어있던 나는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자 눈을 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밖이 부스럭거리더니 끼이익 하는 음침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확 들어오는 찬바람.

미간을 구긴 내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자, 미유키가 내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일어나, 바보야. 벌써 일곱 시야.”

일곱 시?

어쩐지 창문이 열렸을 때 하늘이 고즈넉하더라니.

“왜 이렇게 일찍 오고 난리야...”

“보고 싶으니까 왔지.”

아니, 저런 말을 하면 어떡해.

짜증이 확 녹아내리잖아.

기다란 콧바람을 내쉬며 잠을 일부 날려버린 나는, 머리를 덮은 이불만 쏘옥 걷어냈다.

그리고는 잘 뜨여지지 않는 눈으로 미유키를 올려다보았다.

“이리 와서 누워.”

“냄새나.”

“무슨 냄새.”

“땀 냄새.”

코웃음을 친 나는 미유키의 손목을 덥석 잡고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힉!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 위에 그대로 엎어지는 미유키.

미유키의 허리춤에 손을 올린 나는, 방금 그녀가 내게 했던 것처럼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이후 한손으로 내 입술을 톡톡 건드렸다.

뽀뽀를 하라는 제스처.

잠에 취한 표정으로 그러한 행동을 하는 내가 보기 좋았을까?

미유키가 배시시 웃더니, 선홍색 틴트로 칠해진 자신의 입술을 쭈욱 내밀어 쪽 하는 흡착음을 냈다.

애정을 듬뿍 쏟아부은 그녀를 보며 낮은 웃음을 터뜨린 내가 말했다.

“아주머니한테는 허락 받고 온 거냐?”

“응.”

“이제 좀 나와볼래? 일어나게.”

“싫어.”

“냄새난다고 할 땐 언제고.”

“좋은 냄새니까 괜찮아.”

“땀 냄새라며.”

“땀 냄새가 좋다구.”

말장난을 하며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는데, 자신의 체취를 주인에게 남기려는 고양이 같다.

부스스해진 미유키의 머리를 정리해준 나는 그녀를 옆으로 눕혔다.

그러자 미유키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며 묻는다.

“오늘 뭐할 거야?”

“생각 안 해봤는데. 너 어제 몇 시에 잤냐?”

“글쎄...? 한 새벽 한 시?”

“그때까지 뭐했어.”

“언니랑 영화 봤어.”

“그럼 지금 졸리겠네?”

“별로 안 졸... 아 뭐해애...! 나 씻고 와서 다시 눕기 싫단 말이야...!”

돌연 호들갑을 떨기 시작하는 미유키.

이불을 쫙 펼친 내가 그녀의 몸을 완전히 덮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몸을 버둥거리는 그녀를 팔다리로 막은 내가 나직이 속삭였다.

“또 씻으면 되지. 나 씻을 때 같이 씻으면 되겠네.”

“가, 같이...? 또...?”

“탕에 들어가서 찬바람 맞으면 기분 좋을 것 같지 않아?”

“.....”

순식간에 얌전해진 그녀의 몸.

아무런 말도 없는 것을 보니 혹하나보다.

“맥주도 한 캔 들고 가서 마시자. 어때?”

“집에만 있을 거야? 밖에 안 나가구?”

“씻고 낮잠 좀 잔 다음, 검도 장비나 사러 갈까 생각중인데... 같이 갈래?”

“검도 장비?”

“어. 집에서 혼자 연습하려고.”

발동작 같은 연습은 장비 없이 가능하지만, 이 외엔 죽도나 호구가 있어야 수월하다.

부실에서 장비를 빌려와도 되긴 하지만, 남들이 썼던 걸 공유하는 건 내키지 않는다.

내 몸에 맞게 길들여지지도 않은 터라 귀가 당기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니 이맘때쯤 사는 게 맞다고 본다.

“마츠다 군, 의외로 검도에 진심이네?”

“그럼 금방 그만둘 줄 알았냐?”

“그건 아니지만 장비까지 살 줄은 상상도 못했... 햐아악! 간지러워...!”

짓궂은 말을 하는 미유키의 허리를 손끝으로 살살 긁어주자, 그녀가 몸을 마구 튕기며 간드러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그런 그녀를 괴롭히면서 봉긋하게 솟아있는 티셔츠 위로 입을 가져간 나는, 그곳을 그대로 삼키고 바람을 후 불었다.

“허어억...!”

온몸을 바짝 세우는 그녀.

내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꽈악 잡아당기는 것이, 후끈한 감각과 함께 무척 야릇한 기분을 느낀 듯했다.

그녀의 가슴에서 입을 떼어낸 내가 나직이 물었다.

“같이 갈 거지?”

“가, 갈 거야... 애초에 안 간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오늘 여기서 자고 가?”

“못 자지... 내일 아카데미 가야 되잖아...”

장모님이 자꾸 우리 사이를 방해하려고 하시네.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 미도리도 나와의 시간을 즐길 수 있도록 꼬셔야겠지?

라는 말을 삼킨 나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미유키의 허리를 한 팔로 감싸 안았다.

“조금만 있다가 씻자.”

“.... 응.”

**

내가 미유키를 데리고 간 곳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검도 용품점이었다.

주변에 몇 군데 있는 샵을 놔두고 굳이 멀찍이 온 이유는, 이곳이 렌카가 오는 샵이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렌카의 집과 가까운 장소라는 뜻이다.

“분위기 되게 좋다...”

왜인지 모르게 약간 헌책방 냄새를 풍기는 자그마한 샵에 들어온 미유키의 감상.

그녀의 등허리에 손을 올린 내가 말했다.

“너 이런 냄새 좋아하지?”

“응. 뭔가 막 사고 싶어. 서적 같은 것도 있으려나?”

“검도에 관한 책은 있겠지.”

호구가 진열되어있는 코너를 지나쳐 데스크로 향한 우리는, 그곳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 마츠다?”

새 죽도를 살피고 있는 렌카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뜻밖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었다.

기대 정도까진 아니지만 왠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다만 그녀에게 일행이 있다는 건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다.

“미유키...? 마츠다?”

순박함과 얼빵함이 동시에 묻어나오는 특유의 목소리.

렌카의 옆에 있는 테츠야를 본 나와 미유키의 눈이 크게 뜨였다.

“테츠야 군...? 테츠야 군이 여긴 왜...”

놀란 미유키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 테츠야가 날 흘끔거리며 대답했다.

“아... 내가 검도 장비를 새로 구매하려고 한다니까, 부장이 봐준다고 하셔서 같이 왔어.”

이 새끼 봐라? 벌써 렌카와 개인적인 연락을 할 정도로 친해졌다고?

연락처는 또 언제 받았대? 용기 없는 놈치고는 제법이라고 할만하다.

아니면 렌카가 먼저 달라고 한 건가?

뭐가 됐든 의외다. 그리고 놈다웠다.

내게 위기감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렌카가 장비를 봐준다니까 헤벌쭉해져선 좋다고 꼬리를 흔들긴...

물론 미유키는 이미 놈의 손을 떠나긴 했지만, 한 우물만 파도 모자랄 마당에 저러다니.

꼴이 가관이야. 역시 세 사람 사이에서 이도저도 못하던 병신답다.

자랑스럽다! 미우라 테츠야!

“정말? 그러면...”

미유키가 테츠야의 옆에서 멀뚱히 서있는 렌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테츠야가 미유키와 렌카의 가운데로 오더니, 웃는 낯으로 렌카에게 미유키를 소개했다.

“응. 여기 내 옆에 계신 분이 부장이셔. 부장, 여긴 제 15년 지기 소꿉친구인 미유키에요. 저번에 말씀드렸었죠?”

‘15년 지기’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 같다고 느껴지는데... 가소롭기 짝이 없다.

나는 묵묵히 세 사람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몇 번 오며가며 뵀었는데 공식적으로 인사를 드리는 건 처음이네요. 안녕하세요, 하나자와 미유키라고 합니다.”

모범생답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하는 미유키.

눈을 지그시 뜨고 있던 렌카가 꽤나 예의바른 태도로 미유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이노오 렌카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미우라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

“아 정말요?”

“응. 1-A반 반장 맞지? 당차고 활기찬 애라고 그러던데... 확실히 맞네. 분위기만 봐도 알겠어.”

평소의 미유키가 그렇긴 하지.

밤엔 다르지만.

입가를 가리고 눈웃음을 지은 미유키가 말했다.

“칭찬해주시는 거죠?”

“물론이야.”

“감사합니다. 테츠야 군도 선배 이야기를 자주 하더라구요. 멋진 부장이라고...”

“그랬니?”

렌카의 시선이 테츠야에게 향한다.

날 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따스한 표정이다.

“네. 테츠야 군을 잘 부탁드려요. 그리구...”

미유키의 시선이 옆으로 향한다.

약간 사고뭉치 아들을 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날 흘겨본 그녀가 말을 이었다.

“마츠다 군도... 고생이 많으시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사고를 많이 칠 텐데, 그럴 때마다 호되게 혼을 내주셔도 돼요.”

[그래도 애는 착해요, 선생님이 잘 지도해주세요.]

같은 말을 하는 엄마 같다.

죽도를 내려놓은 렌카가 팔짱을 꼈다.

나와 미유키를 번갈아 쳐다보던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노력해볼게.”

불필요하게 폭력적이라거나, 대련을 할 때 호승심이 굉장히 강하다거나...

그런 얘기를 하며 날 깎아내리려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스무스하게 넘어가주고 있다.

하긴, 당사자가 코앞에 있는데 앞담을 깔 정도로 렌카는 삐뚤어진 사람이 아니긴 하다.

여기서 렌카가 치나미와의 영화 이야기를 꺼낸다면 곤란해진다.

빠져나갈 방법이야 있긴 하지만, 계획 자체가 내 실수로 인한 게 아닌 3자로 인해 일그러지면 짜증나지.

그러니까 난입해서 상황을 넘겨야겠다.

“부장. 내 호구도 골라줄 수 있어요?”

“너도 장비 사러 왔어?”

“예.”

“.... 좋아. 뭐 사려고?”

“호구랑 죽도요.”

“부실에 있는 걸로 쓰지 왜.”

“호면이 불편해서요. 죽도는 손에 잘 안 맞고.”

“제대로 연습할 마음은 있고?”

아무렴요. 진짜 제대로 조교시키고 싶은 사람이 한 명 있어서요.

“예.”

“알았어. 따라와. 만나서 반가웠어, 하나자와.”

미유키에게 온화한 미소를 짓는 렌카.

상체를 꾸벅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미유키는, 호구가 있는 코너로 가는 렌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내 등을 툭 쳤다.

그리고는 검지를 들어보였다.

“나중에 얘기해.”

확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어보니, 렌카에게 퉁명스레 구는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대충 어깨를 으쓱인 나는, 어느새 저 뒤로 빠져있던 찌질한 테츠야를 턱짓했다.

“둘이 얘기 나누고 있어라.”

“응. 같이 골라줘서 고맙다고 꼭 말해야 해?”

“알아서 할게.”

“그게 기본 예의야. 알았지?”

신신당부를 하는 미유키에게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기다란 다리를 세운 채로 호구를 살피고 있는 렌카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호면을 하나 집어든 렌카가 지나가듯,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조합이 의외네.”

“뭐가요.”

“하나자와랑 너. 미우라한테 세 명이 같이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하나자와 앞에서는 어깨를 잘 못 펴네? 많이 무섭나봐?”

원래는 단둘이 검도 용품점으로 들어온 나와 미유키의 관계를 의심부터 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럼에도 저런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테츠야가 렌카에게 말했나보다.

나와 미유키, 그리고 자신이 자주 함께 어울린다고 말이다.

그래서 친구끼리 같이 다니는 거라고 생각해 의심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꼭 이럴 땐 쏠쏠하게 도움이 되네.

하기사 이용가치마저 없으면 너한테 무슨 쓸모가 있겠니.

“미유키가 화나면 무섭긴 하죠.”

“하나자와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미우라는 성으로 불러?”

“남자를 이름으로 부르는 취미 같은 건 없네요.”

“이상한 고집이네.”

“고집이 아니라 취향입니다.”

“.... 됐으니까 머리나 대봐. 치수부터 재보게.”

한숨을 푸욱 내쉬는 렌카.

그런 렌카에게 고개를 빼꼼 내밀자, 호면을 머리에 씌워준 그녀가 끈을 꽉 조였다.

얼얼해지는 귀와 관자놀이.

괜찮냐고 묻지도 않는 걸 보면, 일부러 힘을 더 주어서 내게 소심한 복수를 하는 것 같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네. 계속 해봐라.

네가 그러면 그럴수록 정복욕이 마구 솟구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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