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서 놀지 말고 셋이서 놀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나한테도 전화하지.”
“미안해. 다음부터는 연락할게.”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미유키와 테츠야.
속닥거리고는 있지만, 테츠야의 찌질한 집착이 담긴 목소리가 다 들린다.
“만나자마자 바로 온 거야?”
그렇게 돌려서 답을 유도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둘이서 뭐했냐고, 무슨 사이냐고 당당하게 물어 새끼야.
이러니까 자꾸 골려먹고 싶잖아.
렌카가 골라준 호구를 계산한 나는, 미유키가 무어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두 사람에게 다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쑥덕쑥덕 뭐해?”
그러자 몸을 달싹인 테츠야가 고개를 돌렸다.
“아, 마츠다... 계산 끝났어?”
“어. 네 건 어디 있냐?”
“여기...”
샵 한켠을 가리키는 테츠야.
거기엔 호구가 들어있는 박스와 함께, 길쭉한 포장 박스가 자리했다.
“죽도도 샀나보네?”
“기회만 된다면 대회도 나갈까 생각 중이라서... 지금부터라도 내 손에 맞게 길들여놓으려고 샀어.”
“그래? 응원한다.”
“고맙다. 너는 호구만 샀어?”
“어. 죽도는 나중에 사게.”
제대로 된 훈련을 한답시고 여기까지 왔으면서,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죽도를 사지 않는다는 건 어폐가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왜? 죽도는 치나미와 함께 살 생각이었으니까.
슬슬 나갈 준비를 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나는, 샵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렌카에게 다가가 목례를 했다.
“골라줘서 고마워요.”
“아냐. 어려운 일도 아닌데. 포단 비스듬히 접어서 길들이는 거, 잊지 마.”
탐탁찮은 후배지만, 부원이라서 선심을 써준 듯싶다.
진심으로 싫어했다면 호구를 골라주지도 않았겠지.
“예. 명심하고 있어요.”
“그래.”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리는 렌카에게 가까이 간 내가 물었다.
“그리고 그때 알려줬던 가게 이름이 뭐였죠?”
“무슨 가게?”
“그 왜 있잖아요. 제가 피규어 샀던 곳.”
“거기? 액... 흐흠... 글쎄... 기억이 잘 안 나네? 액션 마니아였나...?”
자연스럽게 피규어 샵 이름을 알려주려다, 재빨리 얼버무리는 렌카.
방심한 모습이 웃기다.
내가 훅 들어오면 받아칠 수 있게끔 항상 철저히 경계하란 말이야.
“아, 맞네요. 액션 마니아. 이제야 기억이 나네.”
“또 사고 싶은 피규어가 있나봐?”
“구경이나 가볼까 해서. 호구 골라준 보답으로 뭐 하나 사드릴까요?”
“돼, 됐어... 난 괜찮아.”
순간 혹한 표정이었는데?
자꾸 그렇게 업보를 쌓다간... 걸렸을 때 아주 쪽팔릴 거예요.
렌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들은 꿰고 있으니까, 내일이나 모레쯤 들러서 간단한 선물이나 하나 사줘야겠다.
샵 밖으로 나온 나는 차 트렁크에 박스를 실었다.
그리고는 테츠야를 불렀다.
“야, 미우라.”
“어?”
“네가 산 물건은?”
“아예 집으로 배송해달라고 했어.”
“굳이? 그냥 내 트렁크에 싣고 가면 되잖아.”
“그러려고 했는데...”
그러려고 했어?
난 빈말이었는데.
“그랬는데 뭐.”
“부장이 같이 밥이라도 먹고 헤어지자고 하셔서...”
렌카가 성실한 후배를 참 잘 챙겨주네.
저런 새끼가 뭐가 좋다고.
벌로 조교 수위를 높여야지.
“그러냐? 그럼 우린 간다?”
“알았어.”
밥 다 먹고 연락을 하겠다며 질척거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순히 넘어가는구나.
물론 저녁 때 미유키에게 연락해서, 나와 뭘 했냐며 꼬치꼬치 캐묻겠지만.
“잘 가, 테츠야 군. 이노오 선배도 안녕히 가세요. 오늘 만나 뵙게 돼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샵 안에서 인사를 했을 때처럼 공손히 상체를 숙이는 미유키.
그 조신한 작별인사에 따스한 미소를 지은 렌카가 한손을 흔들었다.
“나도 반가웠어. 아카데미에서 마주치면 인사하자.”
“네, 선배님!”
그렇게 렌카와 헤어진 우린 차에 탔다.
이후 집으로 네비를 찍고 출발하려는데, 안전벨트를 맨 미유키가 내 팔에 손을 올렸다.
“왠지 선배가 마츠다 군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것 같은데... 두 사람 혹시 다퉜어?”
“다투긴 뭘 다퉈. 그냥 저 선배가 날 싫어하는 거야.”
“아무 이유도 없이?”
이유가 없지는 않지.
렌카의 앞에선 오만하고 퉁명스럽게 굴었고, 그녀가 가장 아끼는 치나미에게 마수를 뻗으려 하고 있으니까... 그녀로선 불안할 것이다.
다만 렌카가 내 좋지 않은 첫인상을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에 쌀쌀맞게 구는 면도 있긴 하다.
“몰라. 근데 왜 잔소리를 할 것 같은 느낌이지? 너는 내 편인 줄 알았는데?”
“나는 당연히 마츠다 군 편이지... 그래도 오늘 선배는 호의로 호구를 골라줬잖아? 그거에 대해서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러면 자연스럽게 두 사람 사이도 더 좋아질 거야.”
“꼭 사이가 좋아져야하나?”
“이노오 선배는 검도부 부장인데, 친해지면 좋지.”
맞는 말이야.
근데 내 방식대로 친해질게.
“감사인사 했으니까 됐잖아.”
“응, 알아. 잘했어.”
미유키가 마치 사춘기가 온 아이를 다루듯 내 팔을 토닥였다.
헛웃음을 친 내가 말했다.
“집으로 갈래? 아니면 우리도 밥 먹을까?”
“밥 먹자. 비도 오니까 거기 가고 싶어.”
“라멘?”
“응.”
“건강 생각하라더니, 요즘은 네가 기름진 걸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가...? 그러면 마트로 갈래? 재료들 사서 밥 만들어줄게.”
“귀찮게 뭘 만들어. 라멘 가게로 가자.”
속내가 빤히 보이는 말에, 눈가에 호선을 그린 미유키가 말없이 전방을 쳐다보았다.
저 멀리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는 테츠야와 렌카가 보인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가깝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약간 착한 상사와 부하 같은 느낌인데, 저 정도면 넘어가줄만하지.
**
다음날.
지루한 수업을 마치고 검도부실로 간 나는, 호구를 산 일을 치나미에게 말했다.
“개인 호구를 사셨다는 말씀이신가요?”
“예.”
“혼자서?”
“아뇨. 미유키랑 같이 갔는데... 거기서 이노오 선배를 만났습니다.”
“흠... 하나자와 후배님과 같이 검도 장비를 사러 갔는데, 거기서 렌카를 만났다는 말씀이신가요?”
“정확해요.”
“.... 흠흠.”
어딘가 못마땅한 구석이 있는 듯, 연신 헛기침을 하는 치나미.
자신과 같이 가지 않아서 어딘지 모르게 서운해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무릎을 굽혀 치나미와 눈을 맞추었다.
“스승님.”
“네.”
조금 냉랭해진 목소리를 보아하니 내 예상이 맞구나.
우리 치나미... 벌써부터 이렇게 질투 비스무리한 것을 하면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잖니.
그녀에게 방긋 미소를 지은 내가 말했다.
“호구는 수련용, 그리고 경기용으로 두 벌이 있어야 좋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요. 흠. 다만 호구는 비싼 장비이니만큼, 상대적으로 소모가 빠른 호완만 두 개씩 구비해서 사용하는 경우도 많아요. 흠.”
마디마다 언짢은 감탄사를 섞는데,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깜찍하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낸 나는 부드러운 말투로 치나미를 달랬다.
“이번에 구매한 호구는 수련용인데, 경기용으로도 하나 사고 싶거든요?”
“네, 그래서요?”
“괜찮다면 스승님과 같이 가서 사고 싶습니다. 그리고 죽도는 안 샀어요. 스승님과 함께 사려고요. 상단세를 배우는 입장으로서, 그에 맞는 죽도를 함께 고르는 건 당연하잖아요?”
“흐흠...!”
이번엔 긍정적인 감탄사를 내뱉는구나.
참 알기 쉬워서 좋다.
“하늘처럼 모셔 받들겠다는 스승은 쏘옥 빼버리고, 하나자와 후배님, 그리고 렌카와 함께 오손도손 호구를 구매한 후배님을 제자로 계속 두어야할지 의문이 들었는데... 흠흠...”
“제자와 의절까지 할 정도로 극단적인 생각을 했다는 말씀인가요?”
충격을 받은 척 경악을 하자, 치나미가 흠칫하더니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어허...! 저는 후배님이 제자인 것이 무척 좋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아주 야아아악간의 의문만 생겼다가 금세 사라졌으니까 너무 실망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행이네요. 저도 스승님이 제 스승인 것이 좋습니다.”
좋다는 말이 듣기 좋았을까?
치나미의 얼굴이 약간 빨개졌다.
훅훅 콧바람을 내뱉은 그녀는, 보관실에 있는 호구들을 바라보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면 슬슬 호구 청소를 시작해볼까요?”
“조금만 쉬었다가 해요. 오늘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머리가 아픕니다.”
“앗...! 저도 오늘 이동수업이 많아서 힘들었는데, 그러면 잠깐 앉아서 쉬도록 해요. 자, 이리 오세요.”
보관실 구석으로 가 앉더니, 옆자리를 팡팡 두드리는 그녀.
어서 날 잡아 잡수라고 하는 것 같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치나미의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얇고 뽀얀 발목을 잡아 내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엇...!?”
당혹스러워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발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름이 약간 져있는 아주 새하얀 발바닥이 무척 앙증맞다.
부실을 꼼꼼하게, 매일 청소해서 그런지, 맨발로 수련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때가 전혀 묻지 않아서, 핥고 싶은 마음마저도 든다.
“스승님께서 다리가 아프다는데, 제자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나요?”
“넷...? 그게 무슨...”
“발 마사지 좋아해요?”
“하,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데요...”
“그럼 이참에 해드릴까요?”
그 말에 치나미가 움찔하더니, 자신의 발가락을 잔뜩 오므렸다.
사람 발이 어떻게 이렇게 생겼지?
정말 예쁘고 귀여워서 페티시라도 생길 지경이다.
“저, 저는 됐어요... 마음만 받을게요.”
“음...”
치나미의 말을 무시한 나는, 그녀의 자그마한 엄지발가락 끝을 집게손가락으로 집어 꾸욱 눌렀다.
“므햑!”
그러자 감전이라도 된 사람마냥 바르르 떨며 간드러지는 웃음소리를 내뱉는 그녀.
쏙 빠지려는 그녀의 얇은 발목을 다소 강하게 움켜쥐어 고정시킨 내가 말했다.
“스승님.”
“흐엣...?”
“내일이나 모레쯤에 시간 돼요?”
“내, 내일이나 모레...? 왜요...?”
“죽도랑 호구 보러 가야죠. 같이 아이스크림도 먹고.”
나는 이번엔 발바닥 중앙의 움푹 들어간 발아치를 지그시 눌렀다.
꾸욱...
그러자,
“히이익!”
치나미가 귀신이라도 본 사람마냥 짧게 발작을 하더니, 양팔을 갈비뼈에 딱 붙이고 온몸을 푸들푸들 떨어댔다.
발 쪽은 간지럼을 잘 타는구나. 이해했다.
“같이 갈 거죠?”
꾸욱. 꾹. 꾹.
연신 발아치를 마사지해주며 부드러운 투로 제안을 하자, 치나미의 고개가 허겁지겁 끄덕여졌다.
“으햐악...! 가, 갈게요...!”
“가요?”
“네헷...! 가요...! 그러니까 그거 멈춰...!”
꾸우욱... 꾸욱.
“아, 안 됏...! 안 돼요...! 후배님...! 그마안...!! 간다고 했잖아요...!!”
왠지 모르게 야릇한 대사를 치는 치나미의 얼굴이 복숭아처럼 물드는 것을 보면서, 나는 묵묵히 마사지를 표방한 애무를 해나갔다.
이제 슬슬 날짜를 잡아 봐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