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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02화 (202/313)

  

“키 얘길 하는 건 오랜만인 것 같네? 옛날 생각난다...”

  

키로 미유키를 처음 놀렸을 때가 카키고오리를 먹으러 가기 전이었지 아마?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그다지 오래 되지도 않아서 추억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냐?”

  

“응. 근데 따뜻한 옷은 챙겼어?”

  

“가방 빵빵하잖아. 네가 갖고 오라는 것들은 다 챙겼어.”

  

“잘했어. 얼른 들어가.”

  

“담임은 뭐하고 있길래 이걸 너한테 시키고 있냐?”

  

“담임 선생님.”

  

“그래, 선생님. 어쨌든 너나 들어가라. 깃발 내놓고.”

  

추운 날씨에 교대를 해주고 싶은 내 마음을 알아차렸을까?

미유키가 방긋 웃더니 자신이 껴입은 두꺼운 파카를 팡팡 두드렸다.

  

“난 괜찮은데? 따뜻해.”

  

“그러냐? 그럼 같이 서있든가.”

  

“그러지 뭐. 나야 좋지. 바보.”

  

오늘따라 미유키의 텐션이 상당히 높아 보인다.

여행의 설렘일까? 아니면 내가 몰래 예약한 방에서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에 대한 기대감일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다.

  

미유키의 목 뒤에 있는 후드를 올려 머리에 뒤집어씌운 나는, 깃발을 빼앗다시피 가져와 높게 들었다.

이후 폴짝폴짝 뛰며 내 팔을 낚아채려는 그녀와 장난을 치다가, 화장실에 다녀온 담임에게 깃발을 넘겨주고 버스에 올랐다.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는 학급생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며 뒷좌석으로 가던 나는, 중간에 테츠야가 곯아떨어져있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어제 밤새 게임이라도 했나? 입까지 벌린 채 쳐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죽통을 갈기고 싶어진다.

  

빵녀와 부반장의 자리 바로 뒤에 앉은 나는, 비닐 소리가 들리지 않게 조심조심 빵을 먹는 빵녀의 팔을 콕콕 찔렀다.

  

“야, 빵녀.”

  

“콜록.”

  

이젠 대답을 기침으로 하는구나.

근데 저번보다는 파워가 약하다고 해야 할까? 기침이 다소 심심하다.

서서히 적응되어가고 있는 건가 싶다.

  

“넌 여기서도 빵이냐?”

  

“켁...! 응... 먹을래...?”

  

빵 부스러기를 토해낸 빵녀가 자그마한 휴대용 가방에서 크림빵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얘는 집에 온갖 빵이 종류별로 다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왠지 가보고 싶어진다.

  

“난 됐다. 목은 안 막혀?”

  

“우유 가져왔어... 마실래...?”

  

“아니. 빵이랑 우유 말고 먹을 건 없어?”

  

“어, 없는데... 미안...”

  

“물어만 본 건데 뭘 미안해하고 그러냐? 젤리랑 사탕 먹을래?”

  

“콜록! 아니... 괜찮아...”

  

“그냥 줄게. 먹어.”

  

외투 주머니를 뒤적거린 나는 여러 간식을 손에 집히는 대로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빵녀에게 내밀었다.

  

“고, 고마워...”

  

고개를 꾸벅 숙이기까지 하는 빵녀에게 씨익 웃어보인 나는, 부반장이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오며 날 타박하자 코웃음을 쳤다.

  

“왜 우리 마사코를 괴롭혀? 못됐다 진짜.”

  

“진짜 못된 게 뭔지 보여줄까?”

  

“뭔데? 궁금하다.”

  

“안경 줘봐.”

  

“안경은 왜?”

  

“가운데에 자물쇠 채우려고.”

  

“우와... 최악이야...”

  

내가 부반장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인원파악을 끝낸 담임이 기사에게 무어라 말하더니 도쿄 역을 향해 버스를 출발시켰다.

  

홋카이도까지 가는 실질적인 이동수단은 신칸센이었다.

이동시간이 비행기에 비해 길긴 하지만 이 또한 여행의 묘미.

특히 오랜 시간동안 미유키와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일들을 할 수 있어서, 내겐 비행기보다 훨씬 나았다.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버스가 출발하자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온 미유키의 물음.

부반장이 내가 했던 말을 장난 식으로 고자질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창가 쪽으로 붙어 앉아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빨리 앉아. 과자 먹게.”

  

그러자 부반장과 깔깔거리던 미유키가 다소곳하게 자리에 앉더니 말했다.

  

“역에서 내리면 화장실 갈 시간이 15분 정도 있거든? 난 담임 선생님이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에키벤을 못 사. 그러니까 마츠다 군이 내 것까지 사줘.”

  

기차여행의 꽃은 에키벤이다.

각 지역의 터미널에서 파는, 특색이 잔뜩 묻어나오는 도시락을 먹는 건 필수코스 중 하나.

이걸 안 먹으면 기차여행을 했다고 할 수 없다.

  

갑자기 어린아이가 된 기분을 느낀 나는, 남들 몰래 미유키의 다리에 손을 얹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테츠야는 쏙 빠져버린, 나와 미유키만의 추억거리를 또 하나 만들 생각에 벌써부터 설렌다.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온 사람들이 우리 아카데미만 있는 건 아닌 터라, 도쿄 역은 여러 아카데미 학생들로 붐볐다.

특히 에키벤 판매점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었는데, 나는 발 디딜 틈 없는 그들 사이를 뚫고 겨우겨우 2개를 구매할 수 있었다.

내가 산 에키벤 중 하나는 일본식 솥밥인 가마메시였다.

소고기와 메추리알, 죽순, 버섯, 밤 등이 올라간... 건강과 맛 사이에서 타협을 한 것만 같은.

나머지 하나는 무난한 장어덮밥이었고 말이다.

집합장소로 향한 나는 담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미유키의 앞에 가만히 앉아있다가, 그녀가 다가오자 에키벤 두 개를 내밀었다.

“골라.”

“음... 난 장어로 먹을래.”

“왜.”

“왜냐니...? 고르라며. 혹시 이거 먹으려고 했어?”

“아니. 농담이었어.”

“그래? 테츠야 군 도시락은 뭐야?”

때마침 에키벤을 사고 온 테츠야를 향한 미유키의 물음.

자신의 것과 미유키의 것을 비교해본 놈의 면상에 화색이 돌았다.

“나도 미유키 너랑 똑같은 거야.”

커플 도시락 같은 느낌이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속이 안 좋아진다.

놈의 에키벤에 내 위장에서 나온 부산물로 가니쉬를 올려주고 싶어져.

급속도로 꾸리꾸리해지는 청춘의 냄새... 좆같다.

약속시간이 되어감에 따라 속속들이 모이기 시작한 학생들.

그들의 손에 들려있는 에키벤을 본 담임이 픽 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모든 학생들이 에키벤을 사서 웃기기도 하고, 청춘의 감성이 느껴지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밥이 있다고 말해도 기어코 에키벤을 사는구나. 다들 두 줄로 서라.”

그렇게 인원파악을 끝낸 우린 열차에 올랐다.

중간에 테츠야가 미유키보고 같이 앉자며 칭얼댈 줄 알았지만, 놈은 의외로 마음이 맞는 친구와 함께 앉은 상태였다.

그리고 놈의 표정은, 내가 미유키와 함께 좌석을 차지하자 싸악 굳어갔다.

대놓고 옆에 앉을 줄은 예상치 못한 듯했다.

속이 아마 타들어갈 테지? 근데 뭐 어쩌냐.

미유키와 뭘 해볼 용기마저도 없고, 심지어는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으면서도 렌카가 조금만 잘해주니까 헤벌레하는 주제에 자업자득이지.

차라리 나처럼 당당하게 문어발 태도를 취하든가.

열차를 타는 동안에는 놈에게 신경을 끄기로 한 나는, 창가 쪽에 앉은 미유키가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흔들자 물었다.

“뭐하냐?”

“마츠다 군 덩치가 너무 커서 자리가 좁아.”

“그래서 불편해?”

“그건 아냐. 이렇게 하면 되니까.”

내 허벅지 위에 다리를 올려놓는 미유키.

그래놓고 옆자리 눈치를 보며 은근슬쩍 자세를 고치는 모습이 귀엽다.

오늘따라 애교가 많은 그녀의 행동에 피식한 나는 테이블을 펼쳐 에키벤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미유키가 에키벤 밑에 있는 실을 톡톡 건드렸다.

“발열 도시락이야?”

“어. 근데 너 내 거랑 바꾸자.”

“왜?”

“그게 더 맛있어 보여.”

“같이 먹으면 되지.”

“그런가?”

“응. 근데 난 맛없는 거 먹으라는 얘기야?”

“내 게 건강에 더 좋으니까 챙겨주려고 그러는 거지.”

“말은 잘하네. 그...”

말끝을 흐린 미유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내 쪽으로 상체를 약간 수그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예약했어...?”

“했지.”

“응... 잘했어.”

‘잘했다’라는 말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미유키가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바닥에 내려놓은 자신의 가방을 열었다.

“마츠다 군 가방도 열어봐.”

“뭐하려고?”

“.... 옷이랑 세면도구 옮겨놓을 거야.”

“옷이랑 세면도구?”

“거기서 쓸 거... 빨리 가방 열어...”

오늘 밤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아는 듯 목소리에 쑥스러움이 가득하다.

그녀는 곧 여분의 속옷과 일회용 샴푸, 그리고 바디워시가 들어있는 파우치까지 꺼내 내 가방에 옮겨놓기 시작했다.

모범생이 야해지면 어떻게 되는가.

그에 대한 답은 미유키에게 있는 것 같다.

준비성이 철저한 미유키답다.

재빨리 물건들을 옮겨놓은 미유키가 한층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내 팔을 톡톡 건드렸다.

“좌석 돌리자.”

“지금?”

“응.”

“돌릴 거면 앉기 전에 미리 했어야지.”

“돌리자. 얼른 일어나봐.”

내 허벅지를 애정이 섞여있는 손길로 찰싹찰싹 때린 미유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우리 좌석을 회전시켰다.

그러니 바로 뒤의 빵녀, 부반장과 함께 마주보는 형태가 되었다.

“안녕?”

발랄하게 인사를 건네는 부반장, 그리고 소심하게 한손을 흔드는 빵녀.

그리고 여자 세 명 사이에 낀 주인공인 나... 꼴린다, 꼴려.

이제야 청춘의 냄새가 다시 향긋해지는 것 같다.

열차 안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하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열차가 철로를 따라 출발하기 시작하니 다들 마음이 들떠선 떠들어대기 시작했고, 우리 반이 있는 칸은 금세 왁자지껄해졌다.

아침을 먹고 오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열차에서는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겼다.

우리 좌석도 마찬가지. 출발하자마자 발열 실을 잡아당겨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에키벤을 먹었다.

자신의 몫인 장어를 몇 개 집어 내 솥밥 위에 올려주는 미유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눈꼴 시리다는 듯 인상을 구기는 부반장과,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갈 때마다 쿨럭거리는 빵녀.

왠지 평화로운 느낌이다.

그렇게 도시락을 먹고 열심히 깔깔거리며 대화를 하던 미유키와 일행들은, 금세 진이 빠졌는지 말수가 적어졌다.

이후 그녀들은 차장의 방송에 따라 창밖의 수려한 배경을 보며 감탄을 하다가, 곧 하나하나씩 졸기 시작했다.

우리 외에도 대다수의 학생들이 그랬다.

아침부터 들뜬 채로 재잘거렸으니 그럴 수밖에.

빵녀와 부반장이 잠든 것을 지켜보며 나와 틈틈이 대화를 하던 미유키 또한 기다랗게 하품을 하더니,

“나 좀 잘게...”

흐리멍덩해진 눈을 끔벅거리며 좌석 가운데의 팔걸이를 올리고는 자신의 얼굴을 내 어깨에 기댔고, 이내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잠에 들었다.

다른 학생들이 볼 수 있음에도 대놓고 내 몸을 빌린 미유키의 몸에 외투를 덮어준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솔솔 내리는 숲길 사이로 지나가고 있는 열차,

조용해진 칸, 그리고 특유의 자두 향을 풍기며 수마에 빠진 미유키.

힐링물에서나 볼 법한 그림이다. 이렇게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네.

**

우리 아카데미가 예약한 숙소는 온천이 있는 료칸이었다.

비싼 축에 드는 곳이었는데, 명문 아카데미답게 통이 크다.

홋카이도에 도착하여 마중을 나와 있는 버스에 타고 숙소까지 움직인 우린, 미유키와 부반장의 안내에 따라 숙소 열쇠를 나눠받았다.

“나갈 땐 접수대에 열쇠 맡기고 나가야 돼. 명심하고 잃어버리지 마. 짐 풀고 1시간 뒤에 이쪽으로 다시 모이면 돼.”

내게도 열쇠를 내주며 친절한 설명을 하는 미유키.

그녀와 눈빛을 교환한 내가 조용히 말했다.

“너 룸메이트는 누구야?”

“미호.”

“그건 또 누군데.”

“반 애들 이름도 몰라? 어쨌든 그... 남은 건 마츠다 군이 알아서 해. 여분 열쇠는 자유시간에 나한테 줘.”

“알았다.”

미유키에게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인 나는 무언가 물어보는 척 카운터로 가서, 따로 예약한 방의 열쇠를 받았다.

이후 가짜로 묵게 될 방에 들어갔다.

내 룸메이트는 자리를 바꾸기 전에 앞에서 훌륭한 방패가 되어주던 퉁퉁이였다.

미리 들어와 있는 그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넨 나는, 가방을 휙 던져놓고 간단하게 씻었다.

이후 다다미 위에 벌러덩 누워 퉁퉁이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치나미와 톡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집합시간이 가까워지자 로비로 나왔다.

로비에 마련된 홋카이도 관광 팜플렛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는 테츠야에게로 다가간 내가 물었다.

“뭐하냐?”

“그냥 볼 거 있나 확인해보고 있었어. 넌 오늘 뭐할 거야? 바로 자유시간이라는데.”

“자유시간은 얼마나 준다는데?”

“저녁 전까지니까... 한 세 시간 남았네.”

“그래? 그럼 그냥 주변 돌아다니거나 온천에서 몸이나 녹여야겠다. 넌 뭐할 거냐?”

“나? 가까운 곳에 경치 좋은 전망대가 있다길래 가보려고.”

그리 말한 테츠야가 숙소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는 미유키를 흘끗거렸다.

친구들과 웃는 낯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녀.

옷을 꼼꼼하게 껴입고 비니까지 쓴 모습이 꽤나 귀엽게 보인다.

“그러냐? 알았다.”

“내일은 스키장 간다는데... 미유키가 스키 엄청 잘 타는 거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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