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네가 카페 알바로 바꿔달라고 했어?”
공손하던 태도가 확 바뀌는 게 웃기다.
“제가요? 아뇨.”
“어제 나한테 막 카페로 하라면서 문자로 강요했었잖아.”
“강요는 아니었는데... 어쨌든 이건 순전히 우연입니다. 전 억울해요.”
“진짜야?”
“예. 신기하죠?”
“.... 신기하긴 하네. 주에 며칠 일한다고 했어?”
“4일요. 부장은요?”
“5일.”
“오래 일하네요.”
“4일이나 5일이나 비슷하지 뭐.”
“그렇긴 한데... 부장.”
“뭐, 왜.”
“오늘 틱틱대는 게 평소보다 심하네요.”
“죽을래?”
눈에 쌍심지를 켜는 렌카.
그런 그녀에게 방긋 웃어보인 내가 말했다.
“농담이고, 잘해봐요.”
그러자 자신의 아랫입술을 안쪽으로 바짝 당긴 그녀가 기다란 콧바람을 내쉬더니,
“.... 그러든가.”
츤데레 같은 대답을 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방학 기간동안 여러 이벤트를 통해 렌카와의 추억을 쌓으려고 하는데, 그녀는 코미케 때의 사건으로 날 감시할 심산이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약간 동상이몽 같은 느낌이다.
벌써부터 설렌다. 하루하루가 즐거울 것 같아.
“수고 많으셨습니다!”
활기차게 인사를 하는 렌카와 나.
그 인사를 받아주는 사장의 표정은 아주 밝았다.
나와 렌카가 일을 만족스럽게 했다는 뜻이었다.
일이라고 해봐야 한산한 카페 안에서 여러 음료의 레시피와 단골들의 커스텀 메뉴를 익히고 만들어보느라 시간을 쏟은 것뿐이었지만, 그래도 좋은 점수를 딴 것 같아 다행이었다.
처음엔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외우나 싶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카페엔 각 음료마다 레시피가 있었다.
그대로 따라하기만 하면 되니 괜찮았고, 커스텀 메뉴 또한 포스기에 있는 메뉴를 추가하는 것뿐이라서 어렵지는 않았다.
진짜는 내일부터라고 할 수 있었다.
사장이 우리더러 일을 빠릿하게 잘 배우는데다 인사성도 밝다면서, 내일 둘이서 해보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장님이 사람을 쉽게 신용하는 느낌이네요. 이런 말을 하기엔 뭣하지만 조심성이 없어 보여요.”
터벅터벅 길을 걷던 내 말에, 렌카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내일부터 바로 실전에 들어가라고 하실 줄은 몰랐어.”
“내일 둘이서 잘해보죠.”
“그래.”
“오늘 일 배우면서 가장 만들기 어려웠던 메뉴가 뭐였어요? 저는 딸기 프라페가 좀 짜증나는 것 같던데.”
“음... 굳이 꼽자면 나는 초코칩 프라푸치노가 조금 어렵더라. 근데 너 어디 들를 데 있어? 전철역은 이쪽인데.”
전철과 떨어진 횡단보도에 선 날 향한 렌카의 물음.
옷에서 냄새가 나나 코를 킁킁거려본 내가 지나가듯 대답했다.
“자동차로 가야죠. 부장도 오세요. 태워줄게요.”
“뭐...? 너 차 가지고 왔어?”
“예.”
대수롭지 않은 듯한 내 태도에 어이가 없었을까?
한심하다는 눈으로 날 쳐다본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러면 말을 했어야지...! 직원 주차장도 있는데...”
“말할 타이밍을 잃어버려서요. 내일 말할 생각입니다.”
“우둔한 곰 같네. 그렇게 안 생겨가지고.”
“욕한 거예요? 멍청하다고?”
“그렇게 들리나봐?”
“흠.”
“그, 그거 하지 마!”
반사적으로 기겁을 하는 렌카.
한 번 까불어봤다가 본전도 못 찾고 쩔쩔매는 그녀의 반응에 속으로 킬킬거린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이상한 음모를 꾸미는 것 같잖아...!”
“뭔 감탄사 한 번 터뜨렸다고 음모에요? 만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닙니까?”
“읏...!”
찔리지? 실제로 너무 많이 봐서?
약간 흑막 같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나는, 내게서 일정부분 거리를 두고 있는 렌카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했다.
“오세요. 거기서 뭐하는데.”
“.....”
조심조심 오른발을 내미는 렌카.
천천히 가까이 오는 모습이 마치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새끼고양이 같다.
“야...”
“왜요.”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겠는데... 그런 거 아니야...”
이거 여자가 바람을 피웠을 때 남자에게 하는 첫 마디 아닌가?
“뭐가요.”
“.....”
모른 체를 하는 내가 얄미웠는지, 렌카가 인상을 팍 썼다.
때마침 초록불로 점등하는 신호등.
그것을 본 내가 천진난만한 투로 말했다.
“가죠.”
“.... 미치겠네.”
요즘 혼잣말이 부쩍 늘었는데, 다 들리는 거 알긴 아니?
그냥 속으로만 생각해라. 보는 내가 다 안쓰럽다.
**
고풍스런 분위기가 풍기는 렌카의 집 앞에 우두커니 서있는 현대식 차량.
그 안에 있던 나는, 자신의 집 정문만을 빤히 바라보며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 렌카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콕콕 건드렸다.
“부장, 안 내릴 거예요?”
그러자 어깨를 움찔 떤 렌카가 날 쳐다보았다.
“.... 야.”
“예.”
“너 혹시... 인터넷 같은 데에서... 아, 아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어떤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얼버무린 그녀가 조수석 문을 열고 말을 이었다.
“내일 보자.”
“감사인사.”
“태워다줘서 고맙지 않아.”
“청개구리 같네요.”
“마음대로 생각해. 갈게. 사고 내지 마.”
조심히 가라는 말을 돌려 말하는 모습이 웃기다.
빠른 걸음으로 차에서 멀어지는 렌카를 보며 실소를 터뜨린 나는, 집으로 돌아와 난방기를 켜놓고 샤워를 했다.
이후 요에 벌러덩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TV를 켜려고 하는데, 깔아놓은 애니쉐어 어플에 알림이 하나 와있는 것을 발견했다.
뭔가 싶어 들어가 보니 개인 쪽지가 와있었다.
렌카의 분신인 달려라 이노쨩에게서 말이다.
[저기요, MK님.]
인터넷 상의 렌카와 대화를 나누는 건 오랜만인가?
색다른 기분을 느낀 나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다리를 올려놓은 편한 자세로 화면을 두드렸다.
[안녕하세요, 달려라 이노쨩 님. 추천해준 만화는 읽어봤어요?]
[아뇨. 할 말이 있어요.]
곧바로 온 답장.
날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뭡니까?]
[님은 왜 그렇게 예의가 없어요?]
갑자기 저런 말을 한다고?
물론 렌카에게 리뷰를 남길 때나, 개인쪽지를 보낼 때 싸가지 없게 굴긴 했지만 시기가 너무 쌩뚱맞다.
한참 차단해놨다가 뜬금없이 공격적인 쪽지라니...
렌카가 왜 저럴까 잠깐 생각에 잠긴 나는,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자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실험을 해볼 생각이구나.’
렌카는 떡밥을 던졌다고 볼 수 있었다.
시비를 건 뒤, 다음 날 나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어제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화가 난다.’ 라는 식의 말이 나오면 MK와 동일인인 것이 드러나니까.
이런 식으로 대조를 해볼 생각인 거다.
아까 차에서 인터넷을 운운한 건 이것 때문인 모양.
근데 이건 너무 운에 맡기는 소심한 실험 아닌가?
[제가요?]
[네.]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합니다.]
[사과는 됐고요, 어디 사세요?]
[내 개인정보를 모르는 사람한테 왜 알려줘야 하죠?]
[도쿄에 사세요?]
[글쎄요. 어디 살까요?]
[남자에요? 몇 살이에요?]
집착이 심하잖아.
이러다 현피라도 뜨자고 들이대면서 날 낚으려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무섭게 왜 이러세요.]
[무서워요?]
[예. 제가 할 일이 있어서 그런데 쪽지는 이만하죠. 여자친구 조교일지 보고 리뷰 남겨줘요.]
[보기 싫은데요. (。•̀ ᴖ •́。)]
저 이모티콘은 왜 붙이는 건데?
화난 걸 표현하려는 건가?
귀엽긴 한데 굉장히... 하찮아보여서 긴장이 확 풀린다.
[그래요 그럼. 보지 마세요.]
내 메시지를 읽었다는 표시가 떴음에도, 달려라 이노쨩에게서는 잠깐 답이 없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라 당황한 것 같다.
갑자기 이러한 장면이 그려진다.
MK와 내가 동일인물임을 눈치챈 렌카가, 현실에서 내게 치인 것에 대한 소심한 복수로 MK에게 욕 쪽지를 갈기는 모습...
내가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줄 알고 화풀이를 하는 모습...
왜 꼴리지? 요즘 이상성욕증이 확 터진 느낌이다.
[죄송해요. 제가 오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랬어요. 한 번 보고 리뷰 남길게요.]
방법을 바꿨나? 이번엔 다음 대화의 여지를 남겨두고 꼬리를 마는구나.
그녀의 속이 훤히 보이는 줄다리기가 재미있다고 생각한 나는, 마침 치나미에게서 연락이 오자 쪽지를 씹고 메시지 어플을 켰다.
[후배님, 원하시는 사진이 이런 건가요?]
저런 메시지와 함께, 모모님 잠옷과 나이트캡을 쓴 치나미가 밝게 웃고 있는 사진이 동시에 전송되었다.
거울로 셀카를 찍은 사진이었는데, 가슴 노출은 없지만 잠옷 밑 단추가 두 개 풀려있어 뽀얀 복부가 드러나있는...
배꼽도 보일락 말락 하는, 은근히 야릇한 사진이었다.
의도적으로 한 건가? 어떻게 이런 꼴림 포인트를 아는 거지?
역시 치나미는 천성이 변태다.
[아주 만족스럽네요.]
[다행이군요. 고민한 보람이 있네요. 참, 렌카에게 들었는데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시게 되었다면서요?]
그 사이 보고를 했나보다.
렌카도 은근히 시간을 알뜰하게 잘 쓴단 말이지.
역시 나와 닮았다.
[그렇게 됐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나 걱정스러웠었는데, 정말 잘됐어요. 이참에 많이많이 친해지셨으면 좋겠군요.]
[스승님의 말씀대로 많이많이 친해질게요.]
[네. 그럼 저는 꿈나라로 떠나보도록 하겠어요.]
[다른 사진은 없나요?]
[앗, 내일 또 보내드릴게요.]
[그래요. 잘 자요.]
[후배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복숭아 캐릭터가 고개를 꾸벅 숙이는 이모티콘을 보내는 치나미.
그 캐릭터의 완만하게 둔덕이 진 핑크빛 얼굴이 치나미의 엉덩이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녀와의 대화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창문을 열어보니, 미유키가 큼지막한 비닐봉투를 든 채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장을 보고 온 모양이다.
슬리퍼를 신고 그녀에게 다가가 비닐봉투를 빼앗듯 가져온 내가 말했다.
“연락하지 왜 그냥 오냐?”
“오늘 바로 일한다길래 힘들까봐... 내가 연락하면 데리러 왔을 거잖아.”
“뭐 얼마나 걸린다고... 오늘 자고 갈 거냐?”
“응. 근데 내일 일찍 나가봐야 돼.”
“어디 가게.”
“아빠가 정원 새로 꾸민대. 마츠다 군은 내일 또 일해?”
“어. 오전에.”
“아쉽다. 같이 꾸몄으면 좋았을 텐데.”
나도 아쉽다.
내 흔적을 미유키의 집, 그것도 눈에 보이는 곳에 남길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미유키의 방도 내 취향으로 개조를 해야 하는데...
휴일에 날짜를 한 번 잡아봐야겠다.
“머리에 뭐 바르지 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