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5 - 내가 빼앗은 위치
잠들어있는 미유키의 쇄골에 빨간 자국이 있다. 내 목에도 비슷하긴 하지만 색이 더 진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어제 단둘이 시간을 보내면서 만든 키스마크였다.
미유키보다 먼저 일어난 나는, 깊게 잠든 그녀가 입고 있는 내 트레이닝 바지 안으로 손을 스윽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중지를 살짝 꺾어, 그녀의 은밀한 부위를 살살, 스치듯 간지럽혔다.
“우응...”
그러자 미유키가 짤막한 신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허벅지를 잔뜩 오므리며 내 손을 꽉 쥐는 건 덤. 간질간질한 쾌락이 살살 올라왔나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뒤척이던 미유키가 자신의 손을 아래로 내려, 내 손가락을 꼬옥 쥐며 눈을 떴다. 부스스한 눈을 한 차례 깜박이며 나를 바라본 그녀의 입이 열렸다.
“뭐해...?”
“일어나라고.”
“지금 몇 시야...?”
“9시.”
“아 뭐야...! 시간 많잖아...”
“아침 먹어야지. 어제도 그러더니 왜 이렇게 잠이 많아졌냐?”
“그건 마츠다 군이...”
말끝을 흐린 미유키가 베개에 얼굴을 포옥 묻었다. 어제 있었던 일을 제 입으로 말하기가 부끄러운 듯했다. 고개만 살짝 돌리며 한쪽 눈으로만 날 쳐다본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나 아파. 주물러줘.”
“어디가 아픈데.”
“아래...”
“아래 어디? 여기?”
능청스런 투로 모른 척을 하며 아까 만졌던 부위를 톡 건드리자, 움찔한 미유키의 고개가 마구 저어졌다. 교태 섞인 행동이 무척이나 귀엽다고 생각한 나는, 짓궂은 장난을 그만두고 얌전히 미유키의 안쪽 허벅지를 주물러주었다.
“후으...”
그에 미유키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기다란 콧바람을 내쉬었다. 나른한 느낌이 좋은 모양. 꽤나 오랜 시간동안 미유키의 다리를 만지작거리던 나는, 그녀의 허벅지 바깥쪽을 토닥이는 것으로 마사지를 마무리했다.
“이제 일어나.”
“응. 공부 어디서 할 거야?”
“너네 집에서 하자며. 다른 데로 가?”
“아니.”
“됐네 그럼. 얼른 일어나.”
“응.”
대답은 꼬박꼬박 잘 하면서 일어날 생각조차 없는 그녀. 내 게으름이 옮겨 붙은 듯 누워선 빈둥거리고 있는 게 웃기다.
허탈한 실소를 터뜨린 나는 결국 다시 미유키의 옆에 누웠다. 이후 미유키의 따스하고 말랑말랑한 살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사이좋게 밥을 먹고 준비를 끝낸 뒤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차에서 내린 우리가 현관문을 열려고 할 무렵,
“미유키!”
저 멀리서부터 테츠야가 큰소리로 미유키를 부르며 이리로 뛰어오는 게 보였다. 타이밍이 조금 별로다. 미유키가 내 차에서 같이 내리는 모습을 저놈이 봤었어야하는 건데.
“테츠야 군!”
밝게 손을 흔들며 소꿉친구를 맞이하는 미유키. 그에 헤벌쭉한 낯으로 마주 손을 흔든 테츠야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게도 인사를 건넸다.
“안녕, 마츠다. 오랜만이다. 방금 도착한 거야?”
말하는 투를 들어보니 미유키가 집에 계속 있었던 줄 아는 것 같다. 그녀가 방금까지 어디 있었는지 알면 얼굴색이 흙빛으로 변하겠군. 근데 어디서 친한 척이야, 뺨 마렵게.
“좀 전에. 근데 너 살 빠졌다?”
그 말에 테츠야가 힘 빠진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빵한, 그리고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면상... 여전히 재수 없다.
“아, 응. 요새 운동하고 있거든.”
“무슨 운동?”
“근처에 복싱 체육관이 있어서... 한 번 배워보고 있어.”
복싱이라... 더럽게 안 어울린다.
“복싱? 진짜? 나랑 톡할 땐 그런 얘기 없었잖아. 게다가 격투기 쪽엔 관심도 없지 않았어?”
눈을 동그랗게 뜬 미유키의 물음에, 테츠야가 무안한 듯 자신의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뭐... 이참에 관심 좀 붙여보려고.”
“그래? 지금 상상해봤는데 은근히 잘 어울리는 것 같네?”
“고마워. 같이 배워볼래?”
같이 배워볼래는 뭐야 이 개새끼가.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
“아니. 나는 안 할래.”
온화하지만 단호한 미유키의 거절에, 테츠야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같이 다니면 재미있을 텐데...”
“테츠야 군도 알다시피 나 몸 쓰는 걸 잘 못하잖아.”
네가 몸을 얼마나 잘 쓰는데.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미유키... 안타깝다. 자신이 얼마나 유연한지 자각할 수 있도록 오늘은 기승위로만 해달라고 해야겠다.
“들어가자.”
이어지는 미유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테츠야. 미유키의 꽁무니에 찰싹 달라붙으려 하는 꼬라지가 역겹다. 복싱 좀 배웠다고 까불면 스파링 하자고 해야지.
“근데 미유키, 혹시 어디 아파? 왜 다리를 저는 것 같지?”
앞서 가던 미유키가 테츠야의 걱정어린 목소리를 듣고는 흠칫했다. 자신의 허벅지 안쪽을 만지작거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인 그녀가 핑계를 대었다.
“그, 그냥 어제 요가를 하다가 삐끗해서...”
“요가? 너 요가도 해?”
“TV에 나오길래 한 번 따라해본 거야. 근데 안 되겠더라구.”
“그래? 조심하지... 걷는 데엔 문제없어?”
“응, 없어. 괜찮아.”
애써 상황을 넘긴 미유키는 테츠야의 뒤에 있는 날 한 차례 흘겨보더니 현관문을 열었다.
**
“마츠다 군은 꼭 우리가 말을 해야 오니? 자주 좀 들렀으면 좋겠네?”
“면목이 없네요.”
“농담이야. 잘 지냈지?”
“그럼요. 선물이라도 들고 왔어야 하는 건데 빈손이라서 죄송합니다.”
“선물은 무슨 선물이니? 그건 됐으니까 얼굴만 좀 자주 비춰주면 좋겠네?”
아아... 저 하해와도 같은 인자함을 보라. 가슴에 비례하는 인성을 지닌 미도리에게 사육당하고 싶다. 그 반대여도 좋고.
자꾸 나쁜 마음을 먹는 내가 원망스럽지만, 저 얼굴과 몸매, 그리고 나긋나긋한 성격을 보니 욕구가 마구 샘솟는다. 혹시 와타루에게 네토라세 취향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 나는, 2층에서 카나가 내려오자 한손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누나.”
“안녕, 마츠다 군. 선물 사왔어?”
“아뇨.”
“왜?”
“제가 왔으니까요?”
“와... 대사 엄청 느끼하네...? 미유키한테도 그래?”
“글쎄요.”
“앞으로 말 걸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그 정도로 싫었어요?”
“농담이야. 테츠야 군도 왔네? 안녕?”
까르르 거리며 테츠야에게도 손을 흔들어준 카나가 오렌지를 하나 들고 다시 제 방으로 올라갔다.
이어서 와타루와도 인사를 나눈 내가 테츠야를 흘끗 곁눈질해보니, 어안이 벙벙한 낯으로 나와 미유키의 가족들을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멍청하게 아가리를 쳐벌린 모습을 보아하니 서로에게 살갑게 구는 우리가 어지간히 놀라웠나보다.
테츠야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건 절대 아니지만, 속내를 한 번 보고 싶기는 하다. 그리 생각한 내가 미유키에게 물었다.
“공부는 어디서 해?”
“식탁에서.”
“식탁? 네 방에서는 안 하고?”
“거긴 좁잖아. 책상도 작고.”
“아주머니랑 아저씨도 계신데?”
“이따가 나갈 거래.”
“카나 누나는?”
“언니는 집에 있을 거야.”
그러고 보니 카나도 미유키처럼 머리가 좋겠지? 성적 지식은 전무하겠지만, 알려주면 미유키만큼이나 쏙쏙 습득할 것 같다.
“누나가 심심해하겠다.”
“심심하면 내려와서 같이 공부할 걸? 아, 그리고 언니가 이상한 거 물어보면 대답해주지 마.”
“무슨 이상한 거?”
“그냥 평범하지 않은 거. 음료수 줄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책 가지고 올게.”
자연스럽게 나와 대화를 나눈 미유키가 깨끗한 컵에 오렌지 주스를 따르더니 식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2층으로 후다닥 올라갔다.
그 사이 식탁에 앉아 주스를 홀짝 마신 나는, 우두커니 서선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쳐다보고 있는 테츠야를 불렀다.
“야, 너도 와서 앉아.”
그러자 정전기라도 오른 사람마냥 머리를 부르르 떨며 정신을 차린 테츠야가 헛기침을 하더니 자리에 앉았다. 안절부절 못하는 꼴을 보아하니 멘탈이 바사삭 갈리는가보다.
주스를 마시는 둥 마는 둥하며 유리 아래에 깔린 식탁보와 날 번갈아 쳐다보던 놈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했는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게 질문을 건넸다.
“너... 미유키네 집에 자주 와봤어?”
“자주는 아니고, 가끔.”
“그래...? 언제부터?”
“여름방학 때부터.”
“여, 여름방학...? 엄청 오래 됐잖아...?”
설마설마 했는데 진심으로 몰랐던 눈치다. 정말 어지간하구나. 감탄이 나올 정도다. 병신이라는 비속어는 테츠야라는 단어로 재정립해야한다고 본다.
헌데 겨울방학 전이나 직후에 미유키네 가족, 그리고 테츠야의 가족끼리 식사를 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테츠야가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식사 자리에서 내 얘기가 나오지 않았다는 뜻인데... 하긴, 테츠야의 가족들 입장에서 보면 나는 3자일뿐인데, 구태여 언급할 필요는 없지.
“마츠다 군...! 계단에 책 떨어졌는데 주워줄래?”
테츠야가 거의 기절할 정도로 놀라는 사이, 미유키가 날 불렀다. 책을 한아름 든 채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그녀.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런 미유키에게 다가가, 그녀가 들고 있는 책을 죄다 빼앗다시피 가져왔다. 이후 계단에 떨어진 책까지 주워들고 미간을 구겼다.
“뭘 이렇게 많이 들고 오냐? 언제까지 하려고?”
“오래 해야지. 저번에 쉬었으니까.”
“적당히 하자. 적당히.”
“마츠다 군이 배웠던 걸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결정할게.”
“하... 벌써부터 지친다.”
“엄살 피우지 마. 바보야.”
애정어린 투로 타박을 하는 미유키와 시시덕거리며 주방으로 눈을 돌린 나는, 테츠야가 일어난 것도 아니고 앉아있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걸 보았다. 도와주려고 일어났으나 미유키가 테츠야 자신이 아닌 내게 도움을 요청했기에 저런 우스꽝스런 모습이 나온 모양이었다.
“바로 공부할 거니? 과일 잘라주고 나갈까?”
안방에서 나온 미도리의 물음. 고개를 가로저은 미유키가 대답했다.
“내가 알아서 자를게.”
“그러렴.”
그렇게 모든 준비를 끝마친 미유키가 상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리고는 손뼉을 한 차례 짝! 하고 쳤다.
“시작할까?”
일단은 열심히 해야지. 그러다 미도리와 와타루가 나가면, 테츠야 몰래 미유키를 만지면서 시간을 때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