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6 - 물오른 씹덕력
“이건 어떻게 풀이하는 게 좋냐면... 테츠야 군, 듣고 있어?”
멍하니 수학책을 보고 있던 테츠야가 미유키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 응. 듣고 있었어.”
내가 미유키의 집에 자주 들락날락 거린다는 사실을 알고 기분이 다운된 모양이다. 지가 우유부단하게 굴어놓고 왜 저러는지 내 머리론 잘 모르겠지만, 테츠야는 범인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는 놈이니까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내가 뭐라고 했게?”
“어... 인수분해를 하는 게 좋다고?”
“그런 말은 한 적 없어.”
“그, 그래...?”
“아까부터 집중도 못하고 왜 그래? 혹시 공부하기 싫은 거야?”
“절대 아냐. 내가 왜 너랑 공부하는 걸 싫어하겠어?”
손사래까지 치며 말하는 꼬라지가 마음에 안 든다. 식탁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턱을 괴고 있던 나는, 식탁보 아래에 가려져있는 다리를 슬쩍 뻗어 미유키의 허벅지 안쪽으로 들이밀었다.
움찔.
과감하다고 할 수 있는 내 행동에, 어깨를 미세하게 달싹인 미유키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 그럼 다시 시작할까...?”
말은 테츠야에게 하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날 향해있다. 지금 뭐하는 거냐고 나무라는 듯한 눈빛. 그것을 무시한 나는 공부가 귀찮은 듯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미유키가 예민해하는 부위를 톡톡 건드렸다.
그러자 미유키의 얼굴이 빠르게 불그스름해졌다. 이대론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손을 내린 그녀가 내 발등을 아주 세게 꼬집었다. 그에 따갑기 그지없는 고통을 느낀 내가 다리를 꿈틀하면서 미유키의 가랑이 사이를 꾸욱 누르자,
“힉...!”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깐 채로 태연한 척을 하고 있던 그녀의 입에서 다소 높은 톤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흐흠...! 흠...”
재빨리 헛기침을 하며 상황을 무마하는 그녀.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는 테츠야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인 그녀가 말했다.
“필기 준비할래? 공식 알려줄게.”
“아, 응. 근데 너 어디 아파? 감기 걸렸어?”
“아니? 왜...?”
“기침을 조금 심하게 하길래.”
“사레가 들린 것뿐이야.”
“그래? 물이라도 마셔봐.”
역시 눈치 없는 놉답게,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르고 있다. 미유키가 상상이상으로 곤란해 하는 것 같으니까 여기까지만 하자. 다음에는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서 하자고 들이대야지.
나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내 발을 빼내고, 얌전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후...”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는 미유키. 눈앞에 놓인 주스를 크게 들이켠 그녀는, 날 원망스런 눈으로 한 차례 쏘아본 후 멍청한 테츠야에게 공식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
“틀렸어. 방금 알려준 공식을 대입하기만 하면 되는 건데 기억 안 나?”
미유키의 엄한 목소리에, 테츠야가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깜박했어.”
“평소 테츠야 군의 실력에 비하면 오늘 오답 횟수가 많은데... 혹시 컨디션이 별로 안 좋은 거야?”
“그, 그런가...?”
“그래 보여.”
“면목이 없네.”
“괜찮아. 그래도 풀이 자체는 열심히 한 게 보이니까. 마츠다 군은 정답. 중간에 풀이를 헷갈려서 시간을 한참 쏟긴 했지만, 이 정도면 넘어가줄 수 있어.”
수 시간동안 미유키의 문제 폭탄을 넘기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 정신이 지쳤으니 육체로 보상을 받아야 마땅하겠지? 찌뿌둥한 몸을 풀 겸 기지개를 쭉 편 내가 희망찬 투로 물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냐?”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될 것 같아. 오늘 수고했고, 둘 다 잘했어.”
테츠야는 잘했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는데... 역시 착한 미유키답게 놈에게도 치하를 해주는구나. 뻣뻣한 목을 이리저리 꺾고 있는 날 보며 픽 하는 실소를 터뜨린 미유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나 화장실 다녀올게. 다녀와서 과일 깎아줄 테니까 먹으면서 쉬다가 가.”
그러자 테츠야가 머리를 감싸쥐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오늘 못해서 미안. 돌아가면 복습할게.”
“아냐. 컨디션이 안 좋으면 그냥 푹 쉬는 게 나아. 둘이서 산책이라도 하고 있어.”
말을 마친 미유키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 우릴 가르치는 게 진심으로 즐거운 듯한 걸음걸이.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쉰 나는,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테츠야를 놔두고 거실 밖에 있는 작은 정원으로 향했다.
그렇게 잘 관리된 화단을 보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마츠다,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테츠야의 듣기 싫은 목소리가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스트레칭.”
“같이 할까?”
“마음대로 해라.”
“그래.”
내 옆으로 다가와선 허리를 좌우로 꺾는 테츠야. 말없이 그러고 있던 놈이 정원 구석에 자리한, 가지에 달린 푸르스름한 턱잎 위로 네다섯 개의 이파리가 듬성듬성 니있는 관목을 가리켰다.
“나무 예쁘지 않아?”
“예쁘다고? 꽃도 안 피었는데?”
“아, 너한테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어렸을 때 미유키랑 같이 심은 거라서 내 눈에는 예뻐 보이거든.”
설마 자랑을 하고 있는 건가?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미유키의 집에서 여러 추억을 쌓았다고? 아니겠지. 테츠야가 찌질한 놈인 건 맞지만, 그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게 믿는다. 만약 자랑이 맞다면 슬슬 놈이 무서워질 것 같아.
“꽃 피면 예쁘긴 하겠네. 여름엔 핀 걸 못 봤는데 혹시 봄꽃인가?”
“맞아. 영산홍.”
저놈이랑 꽃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니 기분이 상당히 더러워진다. 다른 화제로 돌려야지.
“복싱은 어때? 할 만하냐?”
“그냥저냥. 관장님이 좋게 봐주시더라고.”
“진짜? 관장이 그럴 정도면 복싱에 재능이 있는 거 아니야?”
“기술적인 면이 아니라 근성만 좋게 봐주신다는 뜻이었어.”
“겸손 떨기는. 요즘도 초보한테는 계속 줄넘기만 하라고 하나?”
“아니. 요새는 그렇게 하면 관원들이 다 떨어져나가서, 줄넘기는 준비운동으로 넘기고 바로 원투를 가르쳐줘. 그러고 보니 너도 옛날에 운동 했다가 그만두지 않았어? 미유키한테 들었던 것 같은데...”
예전에 미유키에게 운동을 하다가 접었다고 한 적이 있긴 했다. 지나가듯 말했었던 건데 그것마저도 기억하고 있었나? 역시 우리 미유키다. 칭찬도장도 찍어줄 겸 목덜미에 키스마크를 아주 진하게 남겨줘야지.
하지만 테츠야에게 이 얘길한 건 조금 그렇다. 아무리 그때의 우리가 사귀기 전이라지만, 내 얘길 폐기물 테츠야에게 공유했으니 벌점 감. 두 사람이 비밀이 없던 소꿉친구인 걸 감안하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으니까... 이건 엉덩이 때찌로 봐줘야겠다.
“하긴 했지.”
“종목이 뭐였는데?”
“이것저것 해서 하나 꼽기가 애매하네. 꼬치꼬치 캐묻지는 마라.”
“알았어. 미안.”
“근데 글러브랑 복싱화 이런 건 별도구매 아닌가?”
“그렇지.”
“넌 다 샀고?”
“샀어.”
“진심으로 해볼 생각인가보네.”
“일단은 그래볼 생각이야.”
“배워서 어디다 써먹게? 나 때리려고?”
“에이... 사람 때리려고 운동을 하는 건 아니지.”
예전의 양아치였던 날 비꼬는 듯한 말투인 것 같은데 착각인가? 아니, 테츠야라면 그럴 의도로 지껄일 놈이다. 근데 왜 기분이 나쁘지 않고 가소롭기만 할까? 아마 놈의 찌질함에 적응이 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말하는 꼬라지를 보아하니 조만간 까불 것 같은데... 그때 스파링을 하도록 유도해볼 수 있을까 싶다.
“마츠다 군! 테츠야 군! 이리 와서 과일 먹어!”
영양가가 단 하나도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미유키가 큰소리로 우릴 불렀다. 거실로 가보니 언제 왔는지 카나가 자리에 앉아 포크를 집고 있었다.
어느새 잘 정리된 식탁에 앉은 내가 카나에게 물었다.
“누나는 언제 왔어요?”
“방금. 왜?”
“왠지 먹을 때만 보는 느낌이네요.”
“나 돼지 아닌데? 뱃살 보여줄까?”
도대체 어떻게 내 말을 받아들였으면 저런 대답이 나오지? 카나도 은근히 엉뚱한 구석이 있다. 그래도 뱃살은 보고 싶긴 하다. 미유키처럼 뽀얗고 매끈할 것 같아.
카나가 티셔츠를 걷으려는 돌발행동을 하려고 하자, 기겁한 미유키가 재빨리 그녀를 막았다.
“아 언니...! 이상한 짓 좀 하지 마...!”
“왜? 인증을 해야 마츠다 군이 날 못 놀리지.”
“마츠다 군은 언니를 놀린 게 아니잖아...! 혹시 머리 다쳤어?”
음음... 투닥거리고 있는 자매들이 보기 좋다. 침대로 데려가고 싶어지는 기분이야. 억지를 부리며 우기는 카나, 그런 그녀를 말리는 미유키를 쳐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은 나는,
“지, 진정들 하시고... 저희 과일 먹을까요?”
애써 대화에 끼어들려는 테츠야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사과를 하나 집어먹었다.
**
그날 저녁, 렌카의 집 앞.
“너 목에 그거 뭐야?”
약속시간에 딱 맞춰 나와 차에 올라탄 렌카의 물음에, 목을 쓰다듬은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요?”
“빨갛잖아. 벌레 물렸어?”
“어디?”
“아래쪽 목. 조금 오른쪽.”
미유키가 새긴 키스마크를 봤구나. 이런 걸 본 경험이 없어서 모르는가보다.
“이거? 나중에 알게 될 거예요.”
“나중에?”
내가 직접, 잘 가르쳐줄게요. 라는 말을 삼킨 나는 화제를 돌렸다.
“오늘 뭐할래요?”
“네가 미리 정한 거 아니었어?”
“안 정했는데. 그럼 그냥 주변 둘러보다가 놀만한 곳 있으면 갈까요?”
“뭐가 이렇게 즉흥적이야? 계획 같은 거 없어?”
“노예랑 노는데 계획이 필요한가?”
“야!”
“알았어요. 화내지 마.”
“넌 반말하지 마...!”
“그래, 그래.”
천연덕스럽게 대꾸를 하는 내가 얄미웠을까?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날 노려본 그녀는, 더 이상의 대화를 하기가 싫어졌는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침묵이 감돌게 된 차 안에서 묵묵히 운전을 하며 갈만한 곳을 찾아보고 있는데, 침묵이 감도는 분위기가 조금 껄끄러웠는지 렌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다음 검도대회에는 나갈 거지? 부원들이랑 얘기해봤어?”
“검도대회?”
“본선 나가게 됐잖아. 저번에 이겨서. 설마 이것도 기억 못하는 거야?”
“기억은 하죠. 근데 굳이 나갈 필요가 있을까요?”
“선발 멤버로 나갔는데 다음 대회도 당연히 참가해야하는 거 아니야?”
“보상이 없으니까 나가기가 좀 그러네요.”
그 말에 렌카가 한심함이 잔뜩 묻어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에 재미 붙였다고 했었잖아. 대회에 나가고 싶다며?”
“그랬나요? 기억이 잘 안 나네.”
“거짓말하지 마.”
“지금 생각해보니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네요. 근데 방학까지 나가는 건 좀...”
“왜 이렇게 의욕이 없어? 넌 검도를 왜 배우려고 하는 거야? 그냥 취미로?”
“전집중호흡 중에서...”
“번개의 호흡을 배운다고 말하려는 거면 죽을 줄 알아.”
“알겠습니다. 그럼 비천어검류를 배우고 싶어서라고 할게요.”
고전 액션만화에 나오는 기술 이름을 언급하자, 렌카가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뭐라는 거야... 비천어검류는 일인전승이라서... 아...”
재잘재잘 거리다가 낭패감이 깃든 탄성을 터뜨리는 렌카. 아는 분야가 나와 아는 체를 하려다, 자신이 무슨 실책을 저질렀는지 자각한 모양이었다. 속으로 대소를 터뜨린 나는, 눈을 좌우로 빠르게 굴리고 있는 그녀에게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일인전승이라서 일반 검도부 같은 데선 못 배운다고 농담하려 했던 거예요?”
“아, 아니...?”
누가 봐도 맞구만 아니긴 무슨.
“맞죠?”
“아닌데...?”
“맞는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
“이쪽에 조예가 아주 깊으시네요. 혹시 부장의 스승님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지?”
“.... 나는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국어책을 읽듯 균일한 목소리 톤으로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하려는 모습이 웃기고도 안쓰럽다. 오늘 렌카의 씹덕력이 물오른 것 같으니까, 서브컬처와 관련된 매장에 가서 시간을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