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7 - 한겨울의 후끈함
아키하바라 중앙에 떡하니 자리한 매장을 본 렌카가 머뭇거렸다.
“여긴 대체 왜 온 건데...?”
강제로 끌려온 것 같은 얼굴이다. 혼자 왔다면 헤벌쭉했겠지만, 내가 옆에 있어서 마음 놓고 덕질을 할 수 없으니까 저러는 거겠지. 렌카를 향해 히죽 웃어보인 내가 말했다.
“이미 들킨 마당인데 가식은 그만 떠는 게 어때요?”
“가식이 아니라... 올 이유도 없는데 굳이...”
“제가 사고 싶은 피규어가 있어서 그래요.”
“그럼 뭐... 가든가.”
“무슨 피규어인지는 안 물어봐요?”
“물어볼 이유가 없는데... 어차피 다 알게 될 거니까...”
“그건 그렇죠. 들어가요.”
그렇게 렌카와 함께 매장 안으로 들어간 나는, SD 피규어 코너에서 여러 캐릭터들을 구경했다. 이후 최근에 보았던 만화의 유명한 캐릭터가 진열대 중간에 있는 것을 보고, 점원을 불러 저 피규어의 새 제품을 달라고 말하려 했다. 그때, 렌카가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날 말렸다.
“저건 안 사는 게 좋겠는데...”
“왜요?”
“피규어 제작사가 좀... 저 업체는 완성도랑 마감이 엄청 떨어진다고 악명이 높은 곳이라...”
“아 그래요? 사면 어디 한 군데 부러질 수도 있어요?”
“그런 피해자들이 꽤 있어. 안 팔리는 데엔 이유가 있는 법이잖아. 대체제가 없는 곳도 아니라서 다른 업체 걸로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역시 전공이 전공이라 그런지 잘 아네. 하마터면 생돈을 날릴 뻔했다.
“그럼 부장이 하나 추천해줘봐요.”
“.... 일단은 고맙다고 말하는 게 정상 아니야? 사람이 뭐가 이렇게 삐딱해?”
“부장도 저한테 감사인사 안 하잖아요.”
“그래서 복수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농담이고, 고마워요.”
아이를 달래듯 우쭈쭈 하며 렌카의 등을 토닥여주자, 그녀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죽을래...!? 하지 마...!”
“왜요? 칭찬해주는 건데.”
“아 하지 말라고...!”
온몸을 홱홱 비틀어가며 내 손길을 거부하는 렌카. 다투다 삐쳐선 스킨십을 거부하는 여자친구 같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 민폐를 끼치지 싫었는지 최대한 절제하며 내 손길을 피하던 그녀는, 계속되는 스킨십 시도에 결국 한숨을 내쉬며 몸에 힘을 뺐다. 자포자기한 렌카에게 만족스런 미소를 흘린 내가 말했다.
“처음부터 가만히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요.”
“쓰레기.”
“배는 안 고파요?”
“어.”
“부장은 피규어 안 살 거예요?”
“돈 없어.”
“내가 하나 사줄까요?”
“닥쳐.”
“싫으면 말고요.”
틱틱대는 렌카의 등을 어루만지며, 나는 그녀와 함께 여러 피규어를 살폈다. 싫은 기색을 보여주던 렌카는 어느새 표정을 풀고 진열대를 구경하고 있었다. 사고 싶은 것이 많은 듯한 모습. 알바비를 받으면 곧바로 이곳에 달려오겠거니 싶다.
“저건 어느 만화에 나오는 로봇이에요?”
“만화가 아니라 TV판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기체야.”
“그래요?”
“어. 재미는 별로 없고, 기체 디자인이 잘 빠져서 수요가 조금 있어.”
“그럼 저 로봇은요?”
“라노벨 원작 SF, 로봇물이야. 고전 노벨이지만 지금도 인기가 엄청 많아. 코믹스랑 애니화는 물론이고 영화, 게임으로도 나왔어.”
내 질문에도 꼬박꼬박, 망설임 없이 대답해주는 모습이 웃기다. 부담감을 조금 내려놓은 건가? 아니면 피규어 구경에 집중하느라 본의 아니게 숨덕 기질이 옅어진 건가? 뭐가 됐든 보기 좋다.
“다 구경했어요? 성인만화 코너로 갈까요?”
“.... 나도 가야 돼? 그냥 혼자 다녀오지?”
“노예가 주인이랑 떨어지면 쓰나요?”
“개소리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주인이라는 단어에 면역이라도 생겼는지 콧방귀를 끼는 그녀. 그런 그녀와 함께, 나는 성인만화가 즐비한 층으로 올라갔다.
“뭐 사려고? 아사가오 씨 그거는 2편 안 나왔잖아.”
묵묵히 날 따라오던 렌카의 물음. 노골적인 표지에 눈길을 주지 못하고 있는데, 창피한 것 같다.
“그냥 보는 거예요.”
“무슨 장르를 보고 싶은 건데...?”
“조교물.”
“.... 조교물?”
“예.”
“저번에도 조교물을 찾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되게 일관된 취향이네...?”
“그렇죠.”
“봐서 뭐하려고...?”
뭐하긴, 거기서 나온 여러 플레이들을 너한테 써먹으려고 하는 거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렌카가 자신의 눈을 데굴 굴리는 것을 바라보며, 내가 대답했다.
“하긴 뭘 해요? 취향이니까 보는 거지.”
미래를 예감이라도 한 걸까? 눈을 질근 감았다 뜬 렌카의 표정이 표독스러워졌다. 절대 무너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데, 그게 네 마음대로 될지 두고보자.
그녀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은 나는, 코너 한켠에 있는 책을 가리켰다.
“이거 재미있어 보이네요.”
[황녀 출신 노예가 살아남는 법]이라는 제목의 책. 표지에는 금발벽안의 예쁜 여자가 드레스를 입은 채 혀를 내빼고 있었다. 그 적나라한 그림을 본 렌카의 목젖이 크게 꿀렁거렸다.
“살 거야...?”
“그러려고요. 다 보고 빌려줘요?”
“아니...?”
“그러면 같이 보는 거예요?”
“무, 뭐래...! 대체 내 말을 어떻게 이해하면 그런 얘기가 나와...?”
“아님 말고요.”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인 나는 책을 집고 계산대로 갔다. 그 사이 렌카는 계단을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같이 계산하는 건 도저히 못하겠는가보다.
그런 렌카의 수줍은 태도에 피식하며 계산을 마친 나는, 내게서 떨어져 걸으려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는 그녀를 반쯤 억지로 내 옆에 오도록 한 뒤,
“내, 내가 직접 보폭 맞춰서 걸을 테니까 이거 좀 놔...!”
당혹스러워하는 그녀의 투정 아닌 투정을 들으며 함께 가게를 나왔다. 이후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허기를 때울 가게를 찾다가, 모던한 샌드위치 가게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갔다.
“뭐 드실래요?”
“.... 햄 치즈 파니니.”
“음료는요?”
“딸기 라떼.”
배가 많이 고팠나보다. 안 먹겠다고 자존심을 세울 줄 알았는데 순순히 대답하는 걸 보면. 그리고 메뉴 선택이 굉장히 귀여웠다.
커피나 홍차 같은 도도한 이미지의 음식이 아니라 치나미가 고를 법한 것들을 얘기하는데, 약간 초딩 입맛을 지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렌카 또한 나와 비스무리한 생각을 했는지, 얼굴에 홍조가 감돌고 있었다.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음에도 괜히 찔려 하는 렌카를 보며 실소를 터뜨린 나는, 그녀를 놀리지 않고 내가 먹을 메뉴를 포장 주문했다. 그러자 내가 주문을 다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렌카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포장해? 안 먹고 가?”
“거리 돌아다니면서 먹으려고요.”
“아, 그래...?”
“왜요? 싫어요?”
“난 싫다고 한 적 없는데...”
“그럼 됐고요.”
말을 마친 나는 아까처럼 렌카의 손목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내 행동을 예상한 듯한 렌카가 자신의 팔을 위로 홱 들자 미수에 그쳤다.
이런 쪽으로는 쓸데없이 눈치가 빠르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나는, 회피에 성공한 렌카가 코웃음을 치는 걸 보며 이를 악물었다. 무척 사소한 일로 뿌듯해하는 그녀가 웃겨서였다.
이러다가 렌카한테 퐁당 빠져버리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
“파니니 한 입만요.”
길을 걷던 내가 렌카가 먹고 있는 파니니를 가리키자, 그녀가 흔쾌히 자신의 입이 닿지 않았던 부분을 떼어주려고 했다. 그에 인상을 살짝 찌푸린 내가 말을 이었다.
“번거롭게 그러지 말고 통째로 줘요. 한 입만 먹게.”
“.... 싫어.”
“왜? 침 묻을까봐 싫어요?”
“그것도 그거지만 한 입이라고 말하면서 반 이상 쳐먹을 것 같아.”
“주인한테 쳐먹는다가 뭡니까? 말 예쁘게 안 해요?”
“.....”
뚱한 얼굴로 말을 무시한 렌카가 파니니를 먹기 좋은 크기로 떼어 내게 주었다. 겉은 삐딱하지만 속내는 참 고와요.
그렇게 렌카와 투닥거리면서 거리를 쏘다니며 이런저런 것들을 구경하고 즐기던 나는, 시간이 꽤 늦어지자 차로 돌아갔다.
“오늘 재미있었어요.”
“어.”
“부장은 어땠어요?”
“난 뭐... 그럭저럭.”
“오늘 산 만화는 모레까지 다 보고 부장 빌려줄게요.”
“비, 빌려줄 필요 없거든...?”
“보고 싶잖아요.”
“아니야...! 안 보고 싶어...!”
“그래요? 그럼 저 혼자 봅니다?”
“그러든가 말든가...”
꿍얼거리는 것도 귀엽게 하네. 키스 마렵게. 킥킥거린 나는 차 안에 있는 물티슈로 손을 깨끗이 닦아내고, 글러브 박스에서 블루베리 맛 사탕을 꺼내 포장지를 까서 렌카의 입가 가까이에 가져다대었다.
“자, 오늘 치 사탕.”
“.... 먹기 싫은데...”
“먹어요.”
“그럼 그냥 줘. 내가 먹게...”
“팔 아파지려고 하니까 얼른 먹어요.”
“.....”
망설이는 기색으로 사탕과 나를 번갈아 차다보던 그녀는, 내게 트집을 잡히기 싫었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벌리고 내민 사탕을 먹었다. 그리고는 내가 손가락을 집어넣을 수 없도록 재빨리 입술을 닫아버렸다.
저렇게 해도 야릇한 스킨십을 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데... 쓸데없는 짓하기는. 소심한 반항을 하는 렌카에게 입꼬리를 올려보인 나는, 그녀의 입술에 엄지를 가져다대고 꾸욱 누르면서 옆으로 쓸었다.
“읍...!?”
예상치 못한 내 행동에 눈을 크게 뜨는 렌카. 손가락에서부터 전해져오는 그녀의 탱글탱글한 입술 감촉을 느낀 나는,
“오늘 부장은 말도 잘 듣고 예쁘네요. 잘했습니다.”
나긋한 투로 칭찬의 말을 건네며 엄지를 떼어내고는, 렌카의 턱을 살포시 감싸쥐었다. 얼굴이 워낙 작아서 그런지 갸름한 턱이 거의 다 잡힌다. 그 상태로 렌카의 목과 턱선이 이어진 부근을 위아래로 살살 쓰다듬자,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날 욕했다.
“미, 미친놈아...! 갑자기 무슨 짓이야...!”
“틴트 안 번졌어요.”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왜 사람을...”
“시끄럽고, 내일 퇴근하면 같이 영화 봐요.”
“시, 싫어...! 안 봐...!”
“이거 부탁 아닌데.”
“.....”
“내일 약속 비워놔요. 알았죠?”
최대한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정색까지 하며 재차 재촉을 하니, 렌카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가는 게 보였다. 살짝만 더 밀어붙이면 될 것 같다.
“알았죠?.”
“.....”
“대답.”
“아, 알았어... 비워놓을게... 비워놓으면 되잖아... 그러니까 손 좀...”
자신이 직접 내 손을 밀어낼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고 있다.
손길이 마음에 든 건지, 아니면 보복을 당할까봐 두려워서 가만히 있는 건지, 둘 다인 건지는 모르겠다만... 이런 뜬금없는 터치에도 반발이 크지 않은 걸 보니 충분히 무르익었다는 것만큼은 알겠다.
내일 영화관에서 사고 한 번 쳐야지. 관객이 별로 없을만한 영화로 예매해야겠다.
그리 다짐한 나는 렌카의 기다란 목 전체를 쓰다듬는 것을 마지막으로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다소 거칠어진 숨을 내쉬며 호흡을 고르고 있는 렌카를 한 차례 쓰윽 쳐다본 뒤, 차에 시동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