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310화 (309/313)

Chapter 310 - 비오는 날, 나무 아래

“거기 학생! 잠깐 이쪽으로 오세요!”

교문 앞에 있는 미유키가 분주하게 신입생들을 부르고 있다. 겨울 학기 때 경험을 했어서인지 꽤나 자연스럽게 그들을 다루는데, 은근한 위엄이 느껴진다.

이제야 미유키가 진짜 학생회답다고 생각한 나는, 교문을 지키는 다른 학생회에게 검사를 받고 아카데미 안으로 진입했다.

주차를 마치고 교정을 가로질러가면서 교문 밖을 면밀히 살피고 있는데,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히요리가 미호와 함께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찰거머리처럼 항상 붙어있구나. 두 사람 모두 표정에 생기가 감돌고 있다. 아카데미 생활이 기대되나보다. 바삐 움직이는 미유키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거리를 두고 교문 쪽으로 다가간 나는,

“아사히나!”

히요리를 발견한 미유키가 다급하게 그녀를 부르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넹?”

언제나처럼 밝게 대답하는 히요리. 왠지 겨울 학기 초의 데자뷰 같다. 미유키가 히요리의 이름을 아는 것만 빼고.

“치마 길이 때문이에요?”

히요리의 물음에, 미유키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겨울에 보기는 했는데 혹시나 해서...”

“안 잊어버리고 계셨네요?”

“그거 걸린 사람이 한 명밖에 없으니까.”

“아, 그래요...?”

무안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히요리가 왜 저리도 예쁘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으음...”

히요리의 제복 치마를 유심히 살펴본 미유키의 감탄사. 분명히 무릎을 살짝만 넘겼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듯, 눈을 가라앉힌 채로 치맛자락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한동안 히요리의 제복을 검사하던 미유키의 고개가 결국 끄덕여졌다.

“아슬아슬하긴 한데...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네.”

그에 방긋 웃은 히요리가 물었다.

“고맙습니당. 이제 가 봐도 돼요?”

“응.”

“저 찍힌 건 아니죠?”

“저번이랑 똑같은 말을 하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긴 한데, 아냐. 오늘 확인했으니까 이제 걱정할 필요 없어.”

“아 그래요?”

히요리의 표정이 굉장히 의미심장해졌다. 미유키의 말에서 빈틈을 발견한 것 같은 눈빛. 그러나 미유키는 다른 학생들을 신경 쓰느라, 히요리의 그 빛나는 눈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수고하세요.”

히요리가 미호와 함께 허리를 숙이자, 미유키가 인사를 보는 둥 마는 둥하며 대답했다.

“그래. 잘 가. 첫 수업 열심히 듣고.”

“넹.”

그렇게 교문 안으로 들어온 히요리가 미호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그리고 미호는, 히요리의 말을 듣고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못 말리겠다는... 그런 얼굴로 말이다.

무언가 가벼운 사고를 칠 것 같은데... 궁금하다. 무난하던 생활에 긴장감이 가미되는 느낌이라서 두근거리기도 한다.

아침에 일어난 해프닝을 보고 궁금증을 머리에 남겨둔 채 교실로 돌아가려던 나는, 저 앞에서 가고 있는 렌카를 발견했다. 두 어깨에 작은 가방을 맨 채로 걸어가고 있는 렌카에게 몰래 가까이 다가간 내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

“부장.”

“으익...!”

인기척을 느꼈음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걸음을 빨리 하는 렌카. 그 상큼한 행동에 킥킥거린 나는, 언성을 조금 높여 앞서가려는 그녀를 불렀다.

“야.”

그러자 렌카의 발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뿐, 그녀는 화를 내지도 않고 재차 빠른 걸음으로 내게서 멀어졌다. 그냥 못 들은 척을 하기로 했나보다.

나한테 하도 휘둘려서 그런가? 아니면 요새 스팽킹에 흠뻑 물이 들어서 그런가? 방학 때도 은근히 무시를 하더니,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 와중에도 잠자리 전후, 그리고 이노쨩으로는 자주 까불던데 참 알기 쉽다.

성큼성큼 발을 놀려 렌카를 쫓아간 내가 물었다.

“자꾸 이렇게 무시할 거예요?”

“.....”

“엉덩이 또 맞을래?”

“아이 씨...! 조용히 좀 해...!”

그제야 고개를 돌리더니 내게 따지는 그녀. 곤란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기까지 한 그녀가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날숨을 내뱉었다.

“하아... 왜 부르고 난리야.”

“뭐하냐고요.”

“교실 가잖아. 보면 몰라?”

“스승님은?”

“부실에 잠깐 일이 있다고 했어.”

“들렀다가 온대요?”

“어.”

“부장은 왜 여기 있는데? 같이 가지.”

“물어봤는데 내가 할 건 없다고 했어. 이제 됐지? 저리 떨어져. 그리고 나한테 말 걸지 마. 저번 주에 멍든 거 아직도 안 나았어.”

그리 말한 렌카가 자신의 왼쪽 둔부를 쓰다듬었다. 저건 내게 하도 맞다보니 어떻게든 빠져나오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

멍이 들 정도로 때리지 않은 건 나도 알고, 렌카도 알고, 하늘조차도 아는데 어디서 엄살을 피우는지. 혀를 끌끌 찬 내가 렌카를 협박했다.

“그런 식으로 상황을 넘기려고 하면 진짜 멍들 정도로 때려줄게요.”

“무, 무슨...”

“앉기도 힘들 정도로...”

“내,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회초리까지 준비해서...”

“죽을래? 장난하지 마.”

“장난 같아요?”

“.....”

꿀꺽.

계속되는 무거운 목소리에, 렌카의 목젖이 크게 꿀렁거렸다. 두려움과 동시에 기대감을 느낀 건가? 표정이 의외로 나쁘지 않다.

“거짓말했죠?”

이어지는 물음에 반 발자국 뒷걸음질을 친 렌카의 입이 우물거렸다.

“난...”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예, 아니오로만 대답해요. 거짓말했죠?”

“.... 마, 맞아.”

“그럼 뭐라고 해야 돼?”

“그... 미안해...?”

“그렇죠. 잘했어요.”

렌카의 낯이 치욕스러움으로 물들었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여태 가벼운 조교를 끊임없이 해왔던 터라,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있는 것 같다.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지 않을까. 저번에 사둔 꼬리 플러그... 아직 잘 있는데.

아니다, 렌카에게 가장 시급한 건 봉사교육이다. 다음은 플러그가 아니라 펠라로 해야겠다. 둘 다 할 수 있으면 더 좋고.

이런저런 능욕 방법을 고민해보던 내가 말했다.

“사탕 줄까요?”

“사탕...? 지금...?”

“예. 싫으면 이따가 주고.”

“어... 싫어. 이따가 주든지 해...”

“그래요 그럼.”

“.... 근데 미뤘다고 벌 주는 건 아니지...?”

아아... 이런 반응을 보여주면서 내 지배욕을 마구마구 채워주는데, 어떻게 렌카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는 거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들어가 봐요.”

“무, 뭐라는... 힛...!?”

발끈해서 따지려던 렌카가 움찔했다. 내가 그녀의 허리를 남들 몰래 콕 찔렀기 때문. 물이 오를 대로 오른 렌카의 노예기질을 만족스런 눈으로 쳐다본 나는, 나중에 보자고 말하며 그녀를 앞서갔다.

음음... 봄 학기 첫날부터 마음이 싱그럽다. 아주 마음에 들어.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야.

**

쏴아아아-!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빗줄기, 먹구름으로 가려진 하늘 때문에 어둑한 교실. 오전 수업부터 내린 폭우는 점심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내가 비오는 날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렇게 하늘에 구멍이 난 듯 쏟아지는 건 별론데... 아까의 싱그럽던 마음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기분이라 꿀꿀해진다.

“봄비가 좀... 심하네.”

앞에 앉아있던 부반장의 중얼거림. 격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이럴 때 미유키가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본격적인 2학년 첫 학기라고 학생회 일 때문에 바빠 자리에 없는 게 서운하다.

힘없이 의자에 앉아 어깨를 추욱 늘어뜨린 나는, 앞에서 오물오물 빵을 먹고 있는 빵녀를 불렀다.

“야, 빵녀.”

“콜록.”

“나도 하나 줘봐.”

“케헥!”

“빨리.”

싫다는 빵녀에게 눈을 부라리자, 찔끔한 그녀가 새 크림빵을 하나 꺼내 우유와 함께 내밀었다. 무슨 돈이라도 뜯는 느낌이라 왠지 모르게 미안해진다.

“됐어. 농담이야.”

“.... 콜록?”

“배 안 고프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빵녀에게 빵을 돌려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게?”

그러자 옆자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테츠야의 질문이 들려왔다. 요새 주제를 알고 쭈구리처럼 조용히 있어서 마음에 드는데, 대답은 해줘도 되겠지.

“그냥 돌아다니려고.”

“아, 그래? 알았어.”

눈빛이 별로다. 뭔가 스산해 보여. 아니다. 테츠야는 원래 저런 눈이었으니 신경 쓰지 말자.

그나저나 비실비실하던 놈이 지금은 덩치가 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도 복싱을 다니고 있는 건가? 정말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다. 소꿉친구가 내게 홀라당 넘어갔다는 계기가 꽤나 컸나보지?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얼빵한 놈이라 위협은커녕 거슬리기만 한데... 전학 같은 거 안 가나? 나 같으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미유키의 곁을 떠나려고 하겠다.

교실을 나온 나는 매점이라도 갈까 고민하다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이내 생각을 접었다. 심심해서 나왔는데 할 게 없다. 1학년 복도라도 가볼까? 그래야겠다.

스토커 같지만 뭐 어떠한가. 다른 사람들만 그렇게 느끼지 않게끔 하면 되지. 잠깐 위험한 생각을 한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교무실에 용무가 있는 척 복도를 가로질러가며 1-C반의 창문을 곁눈질하니, 중앙 책상에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는 게 보였다. 남녀 학생들 사이로 얼핏 보이는 금발. 보고만 있어도 레몬즙이 톡 터질 것 같은 히요리였다.

미호와 함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첫날이라 어색할 만도 한데, 히요리의 주변엔 남녀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이 많구나. 히요리가 붙임성 좋게 이들에게 인사를 했나보다.

벌써부터 인기를 몰고 다니다니... 화이트 데이가 지나간 후라서 다행이다. 지나가기 전이었다면 분명히 선물 폭탄을 받았겠지.

어쨌거나 시간이 지나면 히요리는 지금보다 훨씬 인기가 많아질 거다. 주위에는 항상 남자들이 들러붙어서 더러운 꼬리를 흔들 테고. 그 전에 히요리와의 관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게 첫 목표다. 히요리가 나에게만 관심을 쏟을 수 있도록 말이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