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11 - 비오는 날, 나무 아래 #2
“세상에... 세상에...! 비가 어쩜 이렇게나 많이 올 수가 있을까요...! 3학년 첫날부터 재수가 옴 붙은 느낌이에요...!”
호들갑을 떨며 빨래를 걷는 치나미. 그녀가 건네주는 도복을 받던 내가 말했다.
“제습기를 틀어놓고 돌아가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내일 등교하면 가장 먼저 와서 빨래를 해야겠어요.”
“그럼 스승님이 빨래하고, 제가 쉬는 시간에 나가서 널고 오면 되겠네요.”
“그 짧은 시간에 빨래를 널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차라리 점심시간에 끝나도록 예약으로 돌려놓는 것이 낫겠어요.”
“그럴래요? 알겠습니다. 그럼 점심에 같이 널어놓는 걸로 해요.”
“그래요. 저는 신입 부원들의 지원을 받아야하니 후배님께서는 쉬고 계시겠어요?”
“아뇨. 책상 옮겨줄게요.”
“앗, 넷...!”
기뻐하는 치나미와 함께 건조실 문을 연 나는, 부실 구석에 있는 책상을 들고 입구 옆에 옮겨놓았다. 그러자 치나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그곳에 놓으시는 건가요?”
“예. 신입생들이 부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바로 스승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아하. 그렇다면 문에서 조금 뒤쪽에다 놓아주시겠어요? 문을 열고 한걸음 들어오면 바로 마주볼 수 있도록이요.”
“그렇게 되면 신입생이 깜짝 놀랄 것 같은데요.”
“어째서일까요?”
“그야... 문을 열었는데 사람이 아주 가까이에서 자신을 마주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까요?”
“흐으음... 일 리 있는 말씀이로군요. 비가 오는 날에 신입생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건 드문 일이라서 제가 서툴렀네요. 역시 후배님이 있어야 안심이 되어요.”
내 등허리를 토닥토닥 두드린 치나미가 손으로 어떠한 제스처를 취했다. 커다란 역삼각형을 허공에 그리고, 내게 엄지를 치켜세운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듬직하다고 칭찬하는 것 같다.
신선한 애정표현을 받은 듯한 기분이라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피식한 나는 책상을 위치에 옮겨놓고, 미리 준비해둔 신입생들의 인적사항을 기입할 종이를 위에다 올려놓았다.
히요리도 검도부에 입부하면 좋겠지만 이건 그저 희망사항. 오리엔테이션 기간에 여러 팜플렛을 받아보았고, 수영부와 궁도부에 관심을 보이긴 했어도 몸을 쓰는 동아리보단 미술부나 패션디자인부 같은 예술계 쪽으로 갈 거다. 그러니 괜한 기대감은 품지 말자.
“자, 저는 여기 있을 테니 후배님은 쉬도록 하세요. 휴게실로 가셔서 드르렁거리며 주무셔도 좋아요.”
책상을 조용히 두드린 치나미의 말. 휴식 내용이 구체적이구나. 시종일관 엉뚱해서 귀엽다.
“저는 코 안 골아요.”
“무후후... 그것은 거짓말이에요.”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네, 넷...?”
무언가 알고 있다는 웃음을 짓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선 고개를 수그리는 그녀. 저번에 호텔에서 치나미가 샤워를 하는 동안 깜박 잠에 들었었는데, 그때 내가 코를 고는 모습을 봐서 저런 말을 했나보다.
“아닙니다. 스승님의 말씀이니까 맞겠죠.”
“그, 그래요... 어서 쉬세요.”
신입 부원,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 부원을 살펴보고 싶지만 뭐... 비도 오고 꿀꿀하니 그냥 퍼질러 자야겠다.
“알겠습니다.”
나는 치나미가 마실 물을 놓아두고 부실 구석을 가로질러 휴게실로 향하며, 오와 열을 맞추어 훈련을 하는 부원들 사이를 지나다니며 구령을 내리는 렌카를 지켜보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여전히 엄하다. 부장으로서의 위엄이 있다. 내 앞에선 센 척을 하는 신경쇠약 강아지일 뿐이지만 말이다.
“.... 마츠다! 너도 할 일 없으면 죽도 가지고 와서 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눈빛을 알아차린 렌카가 냉랭한 투로 날 불렀다. 딱 보니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날 몰아붙일 심산인가보다. 이런 공개적인 자리, 그리고 애니쉐어에서만 허용된 복수를 하려는 모양인데, 넘어가주지 말자.
“전 잠깐 휴식하려고요.”
“뭘 했다고 휴식이야?”
“청소요.”
“그런 걸로 쉬겠...”
“열심히 했어요.”
“.....”
억울한 제스처를 취했으나 눈빛만큼은 가라앉아있는 내 모습을 본 렌카가 살짝 쫄았는지 시선을 피했다. 더 이상 하면 보복을 당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여태 여러 경험을 해서인지, 날 자극하는 나름의 기준이 세워진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쉬어.”
이어지는 렌카의 다소 소심해진 말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낸 나는 휴게실 문을 열었다. 사람은 없었지만 남자 냄새가 나서 기분이 더럽다. 여자 휴게실에서 자고 싶다. 여자 부원들도 좋아할 텐데... 하지만 고로가 알면 기함을 할 게 뻔하니까, 나중에 감독이 없는 날 도전해봐야겠다.
**
“훗훗후...”
신청서 뭉텅이를 들고 음산한 웃음을 터뜨리며 감독실로 향하는 치나미. 첫날부터 입부를 희망하는 학생들이 우수수 쏟아져 기분이 좋나보다.
“비가 흐물흐물해졌군요.”
내게로 다가온 치나미의 기세가 줄어든 빗줄기에 대한 묘사. 그녀의 말마따나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긴 했지만, 아까처럼 쏟아지고 있지는 않았다.
“여전히 많이 오긴 하지만 기세가 많이 줄었네요. 오늘 안엔 그칠 것 같습니다.”
“그것은 모르는 일이에요. 날씨는 참으로 변덕스러우니까요.”
“맞는 말씀입니다. 오늘 몇 명이나 왔어요?”
“스물일곱 명이나 되는 새싹들이 검도부에 들러주셨어요.”
나와 테츠야가 입부할 당시의 총원과 비슷한 수치 같다. 겨울학기 때 있었던 일이 일부 도움 된 건가? 뭐든 치나미가 좋아하면 된 거지.
“다행이네요. 비도 오는데 부장이랑 같이 집까지 태워줄까요?”
“하나자와 후배님은요?”
“학생회 일이 있다고 늦게 끝날 것 같대요. 먼저 가라는데 두고 갈 수는 없어서 기다리려고 합니다.”
“앗, 그러면 시간이 비게 되는군요?”
“그렇죠.”
“그렇다면 염치불구하고 태워 달라 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감독님과 함께 오랜 시간동안 회의를 해야 해요.”
“신입 부원 때문이죠?”
“네. 그 뒤엔 렌카와 함께 복숭아 쇼핑을 하기로 했어요.”
복숭아 쇼핑은 뭐지? 마트에 들어오는 복숭아를 보는 건가? 물어보고 싶지만 왠지 경매 같은... 그런 상식 밖의 대답이 들려올 것 같아 두렵다. 그러니 괜히 알려고 들지는 말자.
“저도 감독실에 있어야할까요?”
“그러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물론 후배님께서 원하신다면 계셔도 되어요.”
비도 와서 축 늘어진 상태인데, 감독의 호탕한 목소리를 들으면 진이 더욱 빠질 것 같다. 어차피 내일도 입부 신청서를 받으니까, 그때 회의에 참가하든지 해야겠다.
“그럼 전 불참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내일 봬요.”
“넷.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렇게 부실에서 나온 나는 뭘 할까 고민해보았다. 짧게 머리를 굴린 끝에 나온 결론은, 할 게 없다는 것이었다.
렌카와 치나미는 따로 복숭아 쇼핑인지 뭔지를 하러 갈 테고, 히요리는 벌써 갔을 터. 미유키는 아직 학생회에 있어서 만날 수가 없다. 아주 외롭구나. 빵녀나 부반장한테 연락해서 잠깐 시간을 때울까 싶다.
투둑, 툭.
우산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노래삼아 주차장으로 가던 나는, 먹구름으로 인해 어스름한 운동장 너머의 한 큼지막한 나무 아래에 누군가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멀리 있어서 제대로 분간할 수는 없지만, 허리보다 더욱 길게 내려오는 금발머리만큼은 확실하게 알겠다. 이런 특징을 지닌 사람은 아카데미 내에 딱 한 명밖에는 없었다.
‘히요리구나.’
돌아간 줄 알았던 히요리가 여기 있을 줄이야... 굉장한 호재다. 역시 주인공의 주변에선 이런 이벤트가 일어나야 맞아. 순식간에 들뜨여지는 마음을 억지로 억누르며,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히요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인다.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그녀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꽃피워져 있었다. 약간 어쩔 수 없는 듯한... 그럼에도 기분이 좋은 것 같은, 그런 아리송한 미소였다.
무슨 의미일까? 혹시 히요리도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건가? 도키아카를 플레이할 땐 그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잘 모르겠다. 지금 저 미소만 보면 비에 대한 거부감은 크게 없는 것 같은데... 한 번 물어봐야겠다.
‘미호는 어디 있지?’
우산을 사러 갔나? 아니면 따로 할 일이 있어서? 뭐가 됐든 지금이 히요리와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는 기회다.
헌데... 히요리의 치마가 무척이나 짧다. 교문에서 봤던 길이와 전혀 다르다. 그새 줄였을 리는 없을 테고, 겨울 학기 때 입었던 걸 가져온 건가보다.
미유키나 다른 학생회에게 들키면 어쩌려고 저러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오늘 아침에 교문에서 보여줬던 미소가 이와 관련된 건가?
들킬 경우 미유키가 교문에서 ‘오늘은 확인했으니 이제 걱정할 필요 없다’라는 말을 들먹이면서 억울한 척을 하려나 싶다. 가능성은 높다고 본다. 히요리라면 충분히 할 법한 생각이니까.
비바람이 옆으로 몰아치면서, 히요리의 치마가 살랑거린다. 치맛자락 아래로 보이는 새하얀 허벅지. 굳이 치마를 줄이지 않아도 다리가 예쁜 건 누구나 알 수 있는데... 남들이 본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개방적이야. 그런 모습은 나와 미유키, 렌카, 그리고 치나미에게만 보여주면 된단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우리 히요리에겐 심기체의 기(技) 교육이 필요하겠다.
“아사...”
히요리의 성씨를 부르려던 나는 멈칫했다. 그녀의 제복 상의 안쪽의 속살이 어렴풋이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고 있는 가디건도 빗물을 머금어 색이 조금 진해져있다. 나뭇잎이 머금은 빗물이 쏟아졌던 것 같았다.
저벅저벅,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히요리의 시선이 정확히 내게 향했다. 날씨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 처음엔 날 알아보지 못하던 그녀는,
“어?”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자, 눈을 게슴츠레 뜬 채로 흐릿한 날씨 속에서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반가운 기색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마츠다 선배!”
활기찬 인사와 더불어 아름다운 웃음까지 보니 꿀꿀한 날씨가 걷히면서 밝아지는 것 같다. 레몬 향마저도 스며들어오는 듯한 기분.
히요리가 입은 검은 속옷이 비쳐 시선을 끌지만, 어떻게든 모른 척하자. 다짐을 마치고 히요리에게로 다가간 내가 물었다.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우산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