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녹스 공녀가 공을 들였다는 동쪽 시가지는 그야말로 반짝반짝했다.
깨끗하게 닦인 거리는 편평하게 다진 돌바닥이 깔려 있었고 건물들 모두 튼튼한 석조 건물이었다. 2, 3층이 기본인 높은 건물들 사이로 환히 웃는 사람들이 보였다.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얼굴. 여자는 녹스 공녀에 대한 찬송이 계속되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는 이들의 구원자이리라. 그러니 저와 제 주인의 구원자가 되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여자는 발걸음을 재촉해 보육원을 향했다. 5년 전 왔을 때와 비교조차 되지 않도록 깨끗해진 건물에 그녀의 입꼬리가 절로 솟았다.
사람을 좋아하고 아이들은 더 좋아하는 여자는 늘 수도에 오면 보육원부터 찾곤 했다. 밝은 웃음소리와 해맑은 얼굴은 근심을 절로 앗아 가기에 충분했으니까. 아이들의 눈높이만큼 낮은 담장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듯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머, 릴리스 아니에요?”
“아, 알아보시는군요. 오랜만이에요. 원장님.”
릴리스를 알아본 보육원 원장이 그녀의 손을 답삭 잡아 흔들었다. 올 때마다 간식이며 옷가지를 바리바리 챙겨 오던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아이들을 보러 오신 것 맞죠? 너무 오랜만이라, 거의 다른 아이들이긴 하지만 몇몇은 남아 있어요.”
원장은 릴리스의 손을 잡아끌며 안으로 재촉했다.
릴리스는 방긋 웃으며 원장을 따라 걸었다. 원장은 릴리스를 원장실로 안내해 차와 다과를 내어 주었다. 바스러지기 직전의 컵에 밍밍한 물을 건네주던 어느 날이 떠올라 릴리스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맴돌았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봉사 오신 거죠? 전에 비하면 시설이 아주 좋아져서 놀랐을 것 같은데. 맞나요?”
“네. 조금 그랬어요. 전부 녹스 공녀의 덕분이라죠?”
“그럼요! 어찌나 예쁘고 착하신지 몰라요. 아이들을 위해 달마다 마차 스무 개 만큼의 지원을 해 주시기도 하고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릴리스는 원장의 수다를 한참이나 들어주어야 했다. 점심시간이 되어 원장과 함께 점심까지 먹고서야 그녀는 드디어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깨끗하고 모난 곳 없는 옷을 입은 아이들은 전부 행복해 보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수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고 드문드문 보이는 봉사자들도 많았다. 릴리스는 봉사자들의 틈에 끼어 아이들이 낮잠을 잘 수 있도록 돕고 깨어난 아이들을 위해 동화책을 읽어 주기로 했다.
“맨날 읽던 것 지겨운데! 릴리스 님! 다른 이야기는 없어요?”
“맞아, 맞아. 공녀님이 이런 동화책보다 현실을 보라고 했어요!”
“재미있는 이야기 해 주세요!”
“재미있는 이야기?”
“네!”
중간에 낀 이상한 말이 신경 쓰였으나 릴리스는 웃는 낯을 유지하며 재미있는 이야기에 대해 떠올렸다. 마계에서 온 그녀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란…….
“흐음.”
“없어요?”
“들키지 않고 복수하는 법! 돈 버는 법! 공부 잘하는 법! 이런 것도 좋아요!”
잠시 말문이 막힌 릴리스는 입을 딱 벌렸다. 좋은 사람이라 명성이 자자한 공녀님은 조금 특이한 사람인 것 같았다.
아이들은 계속해서 저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고 릴리스는 마지못해 제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했다. 이것도 들키지 않고 복수하는 법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럼 저주에 걸린 공녀님 이야기는 어떠니?”
“으엑, 공녀님은 저주에 걸리시면 안 되는데!”
“맞아요!”
“음, 그럼, 저주에 걸려도 행복한 공녀님 이야기를 하자.”
당황한 릴리스는 금세 제 말을 바꾸었다. 아이들은 떨떠름하지만 그나마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이고 있었다.
릴리스는 헛웃음을 흘리며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얼른요!”
“그, 그래. 저기 먼 마계에는 아주아주 무서운 악마가 살고 있었는데 그 악마에게는 칼리라는 귀여운 딸이 있었다고 해.”
아이들은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릴리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릴리스는 조그맣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칼리는 무서운 악마를 위해 꽃을 따다 주고 맛있는 고기를 요리해 주기도 했어. 그녀는 제 아버지인 악마를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좋아했거든. 악마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칼리를 무척 소중히 여겼어.”
“칼리는 아빠가 악마인데도 좋아했다고요?”
“그럼.”
릴리스가 고개를 크게 주억였다. 아이들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으나 저들끼리 금방 이유를 만들어 붙였다.
“악마가 엄청 다정했나 봐.”
“아냐 그냥 칼리가 착한 거일 수도 있어!”
“조용히 좀 해!”
이야기를 이어 달라는 눈빛에 릴리스의 입술이 달싹였다.
“악마와 그의 딸 칼리는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어. 슬픈 날도 기쁜 날도 있었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험한 마계를 버텼지. 그런데 어느 날 칼리는 아버지를 위해 꽃을 따러 나섰다가 용사를 만나 버렸어. 용사는 멋진 칼을 뽑아 칼리에게 휘두르며 말했지.”
그는 칼리에게 무어라 말했을까. 릴리스는 아직도 그것이 궁금했다.
“릴리스 님?”
“아. 용사는 칼리에게 말했어. ‘죽어라! 마수!’ ……칼리는, 억울했어. 마수는 맞지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으니까.”
슬픔이 담긴 릴리스의 붉은 눈동자에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아이들은 슬픔에 동화되어 금세 눈망울을 떨고 있었다. 릴리스는 다급히 눈가를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용사의 소임은 그것이 분명했으니 그의 칼날은 칼리를 향할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칼리는 용사의 칼에 정화되어 하늘의 별이 되어 버렸어.”
“어, 너무해. 칼리는 그냥 꽃을 따려고 했던 것뿐이잖아요!”
“맞아요! 용사님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억울하다는 듯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화를 내는 아이들이 얼마나 어여쁜지.
릴리스는 다시 웃음을 찾을 수 있었다. 따스하게 녹은 마음에 작은 행복과 감동이 차올랐다.
“그건 우리는 칼리가 착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용사님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너희도 외양만 보고 함부로 사람을 재단하면 안 된단다.”
“아……. 그렇구나.”
“용사에게 칼리를 잃은 악마는 너무나 슬펐어. 하나뿐인 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야. 악마는 너무너무 화가 나서 용사에게 저주를 걸어 버렸어. 그것은 용사의 소중한 것을 빼앗고 돌려주지 않는 저주였지.”
“헉.”
“뭐가 헉이야. 용사도 악마의 소중한 것을 빼앗았으니 당연하다고 봐야지!”
평소 야무지다는 평을 듣곤 하는 베리의 말에 아이들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그런가?”
“그래! 공녀님이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때려 주라고 했어!”
헛웃음을 흘린 릴리스는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대체 공녀는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한 걸까.
“릴리스 님! 그래서요?”
“아, 용사의 소중한 것은 안타깝게도 공녀님이었어. 그러니 빼앗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악마는 공녀에게도 저주를 걸기로 했지.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잊게 되고, 공녀는 한 남자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저주였어.”
“고, 공녀님이 바람둥이가 되어 버렸다는 말이에요?”
“그, 렇다고 할 수 있지.”
“너무 좋아!”
손뼉을 짝짝 치며 황홀하다는 듯 몽롱한 눈을 한 베리를 향해 릴리스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고민했다.
릴리스는 짜게 식으려는 표정을 다시 갈무리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용사는 좌절했고 공녀는 다른 사람을 만났어. 용사보다 더 공녀를 사랑하고 있던 남자, 음, 봄바람보다 더 다정한 남자, 세상에서 최고로 강인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지.”
릴리스는 강렬한 시선으로 숫제 저를 째려보는 베리의 눈빛을 느끼며 뒷덜미를 훑었다. 베리는 무언가를 기대하듯 이글이글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 그러다 공녀는 제가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
“역시, 공녀님은 똑똑하셔!”
바로 그거라는 듯 베리가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릴리스는 저도 모르게 허허 웃어 버렸다.
“하아, 그녀는 용사를 찾아갔어. 슬픔에 빠져 있던 용사를 안아 준 공녀님은 아직도 용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그런데 그것을 지켜보던 악마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힘들게 세워 둔 계획이 어긋날 것 같았기 때문이야.”
“헐, 안 돼! 공녀님을 슬프게 하면 안 돼요!”
“맞아요! 너무해!”
“이미 벌을 받았잖아요!”
“드디어 만났는데!”
아이들의 등쌀에 릴리스는 다시 이야기를 꾸며 내기 시작했다.
절대 베리가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그, 그렇게 악마는 공녀를 죽이러 찾아가는데 그만 그녀에게 한눈에 반해 버렸어. 차마 반한 사람을 죽일 수 없어서 악마는 그녀에게 절절히 고백을 늘어놓기 시작했지. 마음씨 착한 공녀는 악마의 사연에 깊이 공감해 주었어. 악마는 공녀의 마음씨에 악의가 사르르 녹아 버렸고…….”
“역시. 그럼 서로 사과도 했겠네.”
“그렇지?”
베리와 베리 옆에 앉아 눈을 초롱초롱 뜨고 있던 나나가 서로를 향해 긍정을 내뱉기 시작했다. 릴리스는 다시 그들의 요청에 화답하듯 이야기를 비틀었다.
“두 사람이 잘 알고 있네. 악마는 뒤늦게 용사에게 사과하게 돼. 용사는 자신에게 저주를 걸었던 이유를 듣고 함께 악마에게 사과하게 되지.”
더듬더듬 말을 다 내뱉은 릴리스가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요즘 애들은 너무 무서웠다.
“그럼 공녀님은 누구랑 결혼해요?”
“응?”
“아까 말씀하셨던 세 남자를 버린 건 아니죠? 악마랑 용사는요?”
“아, 그, 그게.”
“공녀님 정도면 다섯 명은 만나야지!”
“맞아.”
“행복해지신 건 맞죠?”
“그럼! 공녀님은 다섯 남자 모두와 행복하고 오래오래 살았다는 이야기였어!”
하하하, 인위적인 웃음을 매단 릴리스의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려왔다. 그녀는 제 말이 씨가 되었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본인도 모르는 예언의 능력을 갖춘 릴리스는 그렇게 3주 뒤, 레사 메르세데스에게 저주를 걸고 목숨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