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긋나고 비틀린 마음
거리마다 인파가 가득했다. 사탕 앞에 개미 떼처럼 모여든 사람들은 길 한복판을 비워 두고 가장자리에만 조르르 서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렘과 기쁨이 차오른 얼굴들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는데, 단 한 사람만은 그렇지 못한 듯했다.
레이라는 기분이 언짢았다. 그녀가 가려는 사탕 가게는 저 인파를 뚫어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황성에서 부터 동문까지의 길목을 뺀 나머지 골목들을 전부 막고 있는 인파 덕분에 마차를 끌고 다닐 수가 없었다. 덕분에 레이라는 어쩔 수 없이 마차에서 내려 걷는 중이었다. 잔뜩 짜증 난 레이라의 붉은 입술이 로브 사이로 톡 튀어나왔다.
“뭐 그런 놈을 환영까지 한답시고 이렇게 몰려드는 거야.”
레이라의 말을 들었는지 흠칫거리던 남자 하나가 입을 달싹이다 언뜻 보이는 레이라의 머리칼을 보며 입을 꾹 닫았다. 분홍빛이 감도는 은발은 흔한 것이 아니었고 그 메르세데스를 싫어하는 제국민 또한 흔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후드를 입은 작은 영애 하나를 애써 모른 척하는 남자의 뒤통수가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레이라는 열심히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냥 도로 들어갈 걸 그랬나…….”
미간을 작게 구겨도 레이라의 얼굴은 앙증맞고 어여뻤다. 그녀는 오랜만에 머리까지 굴려 간신히 호위들을 따돌리고 나온 참이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레사가 수도로 귀환한다는 소식에 인파가 거리로 잔뜩 몰려들고 있었다.
레이라는 절대! 정말로! 레사를 보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탕을 사러 나온 참이었다.
한숨을 크게 내쉰 레이라가 손을 주머니 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주머니에 든 것을 조물조물 주무르던 그녀의 입가가 느슨하게 풀렸다. 어느새 겉으로 보아도 확연히 튀어나온 주머니는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모양새였다. 옆구리에 혹을 달랑달랑 흔들며 걷는 레이라는 욕심껏 씨앗을 주워 먹은 다람쥐 같았다.
티 나게 커진 주머니에 괜히 움찔한 레이라가 주위를 슥 둘러보며 살금살금 발걸음을 뗐다.
“곧 메르세데스 단장이 도착한답니다!”
“와아!”
레이라는 확연히 느려진 발걸음을 더 서서히 떼어 내면서 비워진 길목을 흘긋거렸다.
그때 저 멀리서 천장이 훤히 뚫린 마차와 기사단이 나타났다.
가만히 그것을 응시하던 그녀는 다시 주머니를 안을 매만졌다. 계속해서 만지다 말기를 반복하고 있는 덕분인지, 주머니에 든 그것은 이제 조금만 만져도 금세 커지곤 했다. 레이라는 미끈미끈해진 손을 문지르며 허탈하게 웃었다.
인파를 뚫고 도착한 사탕 가게 앞, 레이라를 기다리던 것은 달콤한 사탕이 아닌 잔뜩 굳은 표정의 레이라 전담 호위 기사들이었다. 사탕 한 알 입에 넣어 보지 못하고 잡혀갈 것 같은 분위기에 레이라는 질린 얼굴을 숨겼다.
단호하게 얼굴을 바꾼 그녀는 부러 당당하게 굴었다. 레이라는 제 목소리가 파르르 떨린다는 것을 모르는 듯 보였다.
“아니, 사탕도 못 사?”
꽤나 억울해 보이는 모습에 앞장서 나온 기사가 픽 웃었다.
“아가씨께서 물건을 구매하는 것을 말리려는 것이 아니라, 제발 외출하실 때는 저를 좀 데리고 다녀 주십사 하는 겁니다.”
“……귀찮게 할 거잖아? 특히 경이 그렇고.”
“제가 언제 아가씨를 귀찮게 했습니까, 걱정했으면 몰라도.”
빙긋 웃은 기사가 로브 사이로 삐져나온 레이라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익숙한 듯 손을 타고 있는 레이라의 모습을 보면 자주 있는 일인 듯했다.
“에틸, 다른 집 영애들은…….”
“그 영애분들과 아가씨께서 같습니까? 제가, 지키려는 사람은 레이라 녹스이지 다른 집 영애들이 아닙니다.”
“…….”
어이가 없는지 입을 떡 벌린 그녀가 에틸을 향해 픽 웃었다.
그는 항상 이보다 더 진지할 수 없다는 표정을 연기하면서 어울리지도 않는 달콤한 말을 잘도 뱉었다. 그래도 장난을 쳐 주는 걸 보니 화가 난 것은 아닌 듯 했다. 사탕을 핑계로 몰래 빠져나온 이유도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안도한 레이라는 몰래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에틸은 마음을 놓은 듯 풀어진 얼굴을 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레이라가 왜 몰래 나왔는지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굴고 있었다. 괜히 아픈 곳을 찔러 우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고 상처를 헤집는 짓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레사 메르세데스의 생각을 한 번이라도 더 하도록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에틸은 레이라 대신 가출의 이유을 내어 주고 냉큼 잡아가자 마음먹었다.
“사탕은 제가 대신 사 놨습니다. 딸기 맛, 커피 맛으로.”
“……막대 사탕도 샀어?”
“네, 박하 맛으로 샀습니다.”
귀여운 포장지로 감싸인 상자 하나를 행복하다는 듯 끌어안은 레이라가 에틸의 등쌀에 발걸음을 뗐다. 결국 사탕 가게 안으로는 발가락 하나도 넣어 보지 못했으나 원하던 게 그것은 아니었으니 아쉽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래도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주둥이를 쭉 내밀었다. 묘하게 아쉬운 눈빛으로 사탕 가게의 겉모습을 훑기도 했다.
애처로운 광경에 어이없이 웃던 에틸이 슬그머니 레이라를 재촉했다. 재차 이어지는 재촉에 레이라는 어미에게 뒷덜미를 잡힌 고양이처럼 얌전히 끌려가야 했다.
그녀가 타고 왔던 마차까지 사탕 가게 앞으로 옮겨다 놓은 에틸은 마차 위로 오르는 레이라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도토리를 끌어안은 다람쥐처럼 상자를 품에 안고 미소 짓는 레이라는 아주 사랑스러웠다. 오늘 가출을 빙자한 외출을 한 이유가 레사만 아니었다면 더 사랑스러웠을 것이다.
“에틸, 같이 타고 가. 나 심심해.”
“흐음, 알겠습니다.”
에틸이 마차 위로 올라타자 뒤쪽에서 그의 말이 시무룩하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라는 안락한 의자에 기대앉으며 말을 힐끔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니야.”
미안한 기색을 지운 그녀가 주머니 안에 손을 집어넣은 채 작아진 물건을 조몰락댔다. 이제는 거의 습관처럼 매만지는 것이 가히 중독이나 다름없었다.
“흐음……. 아가씨, 혹시 길에서 변태나 치한을 마주치셨습니까?”
“아니? 갑자기 왜?”
“아닙니다. ……액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조그맣게 중얼거린 에틸의 뒷말에 냉큼 주머니에서 손을 뺀 레이라가 식은땀을 닦았다.
‘개코야? 아, 소드 마스터는 다 그런 건가? 밖에서는 만지면 안 되나?’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레이라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자 에틸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
“……응? 아니야.”
그녀는 대충 얼버무리며 시선을 돌린 채 후드를 젖히고 머리카락을 빼냈다. 그러자 마차 안에 달콤한 향기가 차올랐다. 사탕보다 달달한 향기에 에틸은 숨을 멈추고 작은 창문을 열었다. 달콤한 체향에 술렁이는 제 감정이 드러날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제 표정마저 지워 버렸다. 지우개로 지워 버린 것처럼 예쁜 눈웃음과 입꼬리가 사라지자 제법 차가운 인상이 드러났다. 그런 그의 얼굴은 레이라에게 익숙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은 몇 번을 봐도 신기한 것이라, 그녀는 실례라는 것도 잊고 에틸의 얼굴을 빤히 구경했다. 시선을 느낀 그는 자연히 고개를 돌렸고 레이라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에틸은 거짓말처럼 다시 웃는 얼굴이 되었다.
잠시 멈칫거린 그녀도 배시시 따라 웃었다. 그녀는 그와 눈을 맞추고 전보다 더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
에틸 페르세나. 레이라의 눈앞에 앉아 예쁘게 미소 짓고 있는 훤칠한 미남은 제국에 딱 다섯뿐인 소드 마스터였다. 그는 그녀가 황제를 등에 업고 빈민 구제 사업인 척 빈민가를 뒤집어엎을 때 만났던 인연이었다.
그때의 레이라는 제 아버지인 녹스 공작의 뜻인 척 굴며 제 용돈으로 빈민가의 땅을 사들였다. 그녀는 그 땅에 번듯한 집을 지었고 평민들에게 무상으로 빌려주기도 했다. 또 온갖 봉사 활동을 다니며 기부를 통해 돈을 물 쓰듯이 쓰기 시작했다.
그 소식을 접한 황제는 녹스가가 드디어 빈민 구제 활동을 시작했다며 치하하곤 냉큼 판을 벌였다. 돈만으로도 제국 전부를 살 수 있는 대단한 재력을 갖춘 녹스가였으니 앞뒤 잴 것도 없다는 태도였다. 작은 구제 활동이 국가적 사업으로 커지자, 수도 동쪽의 빈민가는 번쩍번쩍하게 광이 나기 시작했다.
레이라는 석조 건물로 무조건 이층집 이상을 고집했기에 투자된 금덩이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높은 석조 건물은 한 집에 여러 가구가 들어가 살아도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크기가 크고 공동 주택 형태였기에 기존 빈민가 주민들이 들어가고도 오히려 많은 건물이 비어 있었다.
이에 당연하다는 듯 웃음 지은 그녀는 제가 콕 집은 구역 전부를 상업지로 만들겠다고 했다. 황제는 그 뜻을 쉽게 받아들였고 레이라는 그곳 일부를 냉큼 구매해 수도 동부를 번쩍번쩍한 상업지로 탈바꿈시켰다.
작은 고양이 같던 열여섯 살 레이라에게는 낡은 판자촌을 잡음 하나 없이 튼튼한 석조 건물 거리로 뒤바꿀 수완이 있었다. 하릴없이 놀고먹거나 아픈 이들을 데려다 교육하고 치료하며 사람 구실 하게 만들어 놓을 인정도 있었다.
또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고 뛰어난 인재를 발굴해 낼 안목과 반발 하나 없이 제 입맛에 맞는 상업지를 만들어 낼 눈치도 있었다. 그리고 제국 전부를 사들여도 일언반구 하지 않을 무시무시한 재력을 갖춘 아버지까지 있었다.
그러니 황제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 노른자 땅을 레이라에게 탈탈 털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나 버린 뒤였다. 빈민 사업은 레이라의 입맛에 맞는 거리를 만들기 위해 꾸며 낸 사기극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구매한 땅에 으리으리한 오페라 하우스를 지었을 때야 탄로가 났다. 그러나 황제는 허탈하게 웃으며 공작은 명석하고 어여쁜 딸을 두어 참 좋겠다는 말을 건넸을 뿐이었다.
레이라는 그때 찾아낸 인재들을 고용해 구매한 건물로 대놓고 상업을 주도했다. 벌어들인 수익 대부분을 기부나 봉사에 쓰며 빈민 구제에 힘쓰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황제가 그녀를 탓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더불어 녹스가의 재산으로 제국 동부에 위치하던 평민 수천 명의 일자리에, 주거지까지 만들어 냈으니 무얼 탓할 수 있었으랴.
아무것도 모르는 평민들은 돈 많은 녹스 가문이 가난한 평민들의 삶마저 돌본다며 입을 모아 칭송했다. 매번 봉사 활동을 빙자해 인재를 구하러 다니는 레이라를 ‘금의 여신’으로 칭하기도 했다. 그것은 돈이나 골드를 뜻하는 금이 아닌 그저 그녀 자체가 금덩이라는 말로 일맥상통하는 별명이었다.
에틸은 그때 심심풀이로 빈민가를 제패한 양아치였다. 삶의 의미도 무엇도 없이 살던 그에게 그녀는 행복하게 해 주겠다 약속하며 며칠을 쫓아다녔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 에틸은 기사단에 던져졌다.
그는 저를 꼬여 악의 소굴에 빠트린 후 방치하는 그녀를 원망해야 했다. 원망의 힘이었을까. 에틸의 재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미지의 것이었다.
에틸은 기사단에 들어간 지 2년 만에 소드 마스터가 되는 기염을 토해 낸 불세출의 천재였다. 훗날 그는 그녀에게 제 무엇을 보고 기사단에 보냈느냐 물었지만 레이라에게 제대로 된 답을 받을 수는 없었다.
아무튼 이미 소드 마스터이고 백작 작위까지 얻은 에틸이지만, 그는 아직도 녹스가에서 그녀의 호위를 도맡아 했다. 작위와 영지, 그리고 으리으리한 저택까지 있는 그가 녹스가에 남아 있는 것은 누가 보아도 그녀에게 단단히 반한 이의 태도였으나 레이라만 몰랐다.
은발에 심해처럼 검푸른 눈동자를 가진 차가운 인상의 미남.
제 아가씨를 사랑하지만 단 한 번도 티를 낸 적 없는 그는, 레이라에게 있어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뭐가?”
“새삼 반하시기라도 하셨습니까?”
“……뭐래.”
어이없다는 듯이 허탈해진 레이라의 얼굴에 에틸이 매끈한 턱을 쓰다듬으며 꽃처럼 웃었다.
“곤란하니 사랑싸움은 다 끝내고 오시죠. 아가씨.”
“무슨 사랑싸움이야! 헤어졌다니까!”
연극처럼 휙 뒤바뀐 그의 표정이 슬픔에 잔뜩 일그러졌다. 마음이 아프다는 듯 가슴에 손까지 얹은 표정이 퍽 심각했다.
“아가씨가 그 미친새……, 아니, 그 공자가 너무! 좋다고, 사랑! 한다고, 둘도 없는 반려라 하시며, 그를 따라 가출하다 담벼락에서 제게 잡혔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에이씨! 진짜!”
미간을 구기고 입술이 톡 삐져나온 레이라의 표정은 마치 병아리 같았다. 흑역사를 들췄다는 분노에 파들파들 떨리는 어깨가 안쓰러워진 에틸이 귀여운 것을 보듯 소리 내 웃었다.
“오늘 제 눈을 피해 도망간 벌이라 생각하시고, 토라지지는 말아 주십시오.”
“……참나.”
“그 사탕, 제 돈으로 샀습니다.”
“치사하게! 줬다 뺏으려고!”
“사과의 선물 정도로 생각해 주시죠. 이미 받으셨으니까 반품은 안 됩니다.”
흥, 소리를 내며 저를 흘겨보는 뾰족한 눈에도 빙글빙글 웃는 에틸이 얼마나 얄미운지. 레이라는 상자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저런 건 줍는 게 아니었는데……. 심지어 이제 꽤나 거물이라 함부로 할 수도 없잖아.’
그녀는 괜히 그에게 심술을 부렸다.
레이라는 이상하게 에틸에게만 어린아이처럼 굴곤 했다. 그것이 다 그의 과보호 때문인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싫지만은 않아 따지고 들기도 애매했다.
“어휴, 에틸은 영지 관리 안 해? 집에 좀 가.”
“거길 제가 왜 가겠습니까. 아가씨께 배운 대로 대리인을 고용했는데.”
“그런 건, 배우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막상 제가 없으면 제일 아쉬워하실 분이 왜 말을 그리하십니까.”
맞는 말이라 입을 앙다문 레이라가 괜스레 딴청을 피웠다. 꼬물거리는 손가락을 응시하던 에틸이 눈을 더 곱게 접었다.
‘저 손가락을 만지고 싶다 하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에틸은 떠오르는 생각을 꾸역꾸역 삼키며 더 나긋이 웃어 보였다. 사납게 튀어나오려는 감정을 웃음으로 감추는 일은 이제 숨 쉬듯 쉬운 일이었다.
그는 레이라의 목소리가 더 듣고 싶어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딱 그 정도가 그가 그어놓은 선인 것처럼 에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아가씨, 정말 가게를 전부 점장들에게 넘기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전부는 아니야.”
“그러면…….”
“사탕 가게랑 오페라 하우스는 내가 가지고 있어야지. 그리고 그 구두 가게 점장, 좀 음흉하지 않아?”
“데이브인지, 데이비드인지 하는 그 작자 말이십니까?”
“응. 왠지 모르게 촉이 좋지 않은 사람 같아. 보면 볼수록 정이 떨어지는 게…….”
간이라도 내어 줄 듯 애절하게 굴던 버터 같은 얼굴. 그것을 떠올리는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이 된 레이라를 보며 에틸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그 새끼는 제 주제도 모르고 있었지.’
철근 같은 인내심으로 레이라를 바라만 보는 에틸은 저와 비슷한 눈빛을 가진 이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언제고 몰래 슥삭 지워 버리려 했으나 제 눈치 빠른 주인은 금세 그를 쫓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에틸은 해사하게 웃었다.
“조사해 보라 이르겠습니다.”
“응, 그 사람만 빼면 전부 팔아도 될 것 같아.”
만족했다는 듯 배시시 웃는 레이라의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에틸은 아직도 신기했다. 사랑스럽기만 한 작은 소녀가 일으킨 신기한 기적이. 그리고 그만큼이나 사랑스러운 그녀의 마음씨가.
그저 돈 많은 집에 태어나 곱고 귀하게 자란 아가씨이니, 저 배부르면 그만이란 생각을 가지고 살 법도 한데 레이라는 항상 특별했다. 그녀는 에틸이 본 그 어떤 이보다 마음씨가 어여쁜 사람이었고 심지어는 능력도 대단했다.
철없는 아가씨를 연기하며 돌아다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녀는 몹시 계산적으로 행동했다. 그것을 처음 느꼈을 때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냥 저의 물욕을 위해 남을 돕는 것이라 칭하지만, 에틸이 보기에 그녀의 욕심이란 세상 모든 이가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그만큼 커다랗고 끝이 없으며 채울 수 없는 욕심은 없을 테지만, 이처럼 사랑스럽고 동화 같은 순수한 욕심이 또 어디 있을 수 있을까. 에틸은 그녀를 볼 때마다, 그녀를 보면 볼수록 점점 더 사랑스러워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대체 그 소공자 새끼는 어떻게 레이라를 놓아 줄 수 있었을까. 제 손안에 있었다면 가둬서라도 놓치지 않았을 텐데.
마음을 억지로 접었더니 헤어졌다는 소식이 들렸었다. 이가 갈렸으나 울고 또 울던 레이라를 보며 꾹 참아낸 에틸이었다. 그는 눈이 마주친 그녀를 향해 다시 빙긋 웃어 주며 제 욕심을 숨겼다.
‘아직도 그놈이 보고 싶은 걸까.’
외출의 이유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쉰 그는 차마 그녀를 탓하지는 못했다. 여전히 레이라가 안타깝고 서러운 사랑을 잇는다는 것이 마뜩잖아도 그것을 표현할 수 없었다.
감정을 닫고 숨긴다는 것은 그런 거였다. 에틸은 작은 어깨에 얹은 이별의 무게를 오늘도 바라만 보았다.
공작저에 도착한 레이라는 녹스 공작에게 뒷덜미를 잡혀 응접실로 끌려 들어갔다. 또 호위를 떼어 낸 채 밖을 나돌아 다닌 것에 잔뜩 화가 난 공작의 고성이 쩌렁쩌렁했다.
“내 그토록 애원했는데! 너는 네 아비의 부탁이 그리 쉽게 잊히더냐!”
“…….”
“메르세데스, 그치가 또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혼자 나돌아 다니는 것이야!”
“설마, 저를 건드시진 않으시겠죠. 그래도…….”
“저 화난다고, 소드 마스터씩이나 되는 놈이 상단 기사단을 털어 오라며 친위대까지 보냈다! 그런 작자를 어찌 믿어!”
“…….”
입을 꽉 다문 레이라가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레이라의 뒤에 서 있던 에틸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어 보였다.
“아버지도 에틸을 보내시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그놈들은 다 죽었지. 살아 숨 쉬고 있겠느냐.”
“하긴…….”
에틸을 흘긋 바라본 녹스 공작의 마음이 약간 누그러졌다. 딸이 주워 온 비리비리했던 청년은 저토록 근사하게 자랐다. 그딴 망나니는 내버려 두고 차라리 에틸과 만났더라면 호쾌하게 허락 했을 터인데.
아들이 없는 녹스가는 데릴사위를 들이거나, 방계 사람을 들여 후계를 정해야 했기에 녹스 공작은 에틸을 고려하던 중이었다. 도중에 사고를 쳐도 단단히 친 제 딸내미가 그 계획을 파투 내긴 했지만.
아쉽다는 눈으로 에틸을 바라보는 공작을 내버려 둔 레이라가 시종을 불러 차를 내오라 시켰다.
“아버지.”
“말하거라.”
“화 많이 나셨어요?”
“……무사히 돌아왔으니 됐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공작의 목소리와 함께 응접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녹스 공작 대신 레이라가 답하자 더듬더듬 열리는 문 틈새로 집사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꼭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려주고 싶지 않은 이에게 해야 하는 사람처럼 핼쑥한 표정이었다.
‘오늘따라 저치가 왜 저러지?’
“무슨 일이냐.”
답지 않게 당황한 인상의 집사를 보며 녹스 공작이 재빠르게 물었다.
“각하, 저……, 손님이 오셨사온데…….”
집사가 눈을 굴려 레이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누군데 안색이 그 모양, 이야……, 설마.”
“메, 메르세데스 소공자께서 뵙기를 청하시고 계십니다.”
“내 당장 그 새끼를!”
푹신한 소파에서 단박에 튀어 오른 공작이 씩씩대며 이를 갈았다.
어이가 없어 픽 웃던 레이라가 문득 벗어 놓은 제 로브 주머니를 쓰다듬었다.
‘혹시 이게 진짜 레사 건가? 자기 거 돌려 달라고 찾아온 건 아니겠지?’
레이라가 로브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본 에틸은 이상함을 느꼈지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공작을 우선으로 해야 했다. 진정하시라며 공작을 다독여 자리에 다시 앉힌 에틸이 제 턱을 쓰다듬었다.
‘이제 와 아쉽기라도 한가? 멍청한 놈.’
“왜 왔고, 누구를 보자던가?”
“아가씨를 뵙고 싶다 하셨고, 왜 오셨는지는…….”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누굴 내놓으라는 것이야! 당장 쫓아내게. 내 그놈 이름만 들어도 짜증이 치솟으니!”
분노로 얼굴이 시뻘게진 공작이 노성을 내질렀다. 조금 전 레이라에게 윽박지르던 것은 애교인 듯 힘찬 음성은 응접실 밖을 타고 나가 저택을 쩌렁쩌렁 울렸다. 몹시 격하게 말을 알아들은 집사가 문을 열고 나서려 했을 때였다.
“들어오라고 해요.”
한마디도 없이 앉아 차를 홀짝이던 레이라의 말에, 놀란 세 남자의 눈이 콕콕 박혀 들었다.
“아가씨? 대체 그자를 왜 만나려 하십니까?”
“뭐 할 이야기가 있으니 왔겠지. 일단 들어나 보게 이리 오라고 해요.”
제 반대편 소파를 가리킨 레이라의 손짓에 집사가 고개를 주억이며 나갔고 공작과 에틸은 눈이 동그래졌다.
“아버지, 에틸, 나가지 말고 그대로 있어요. 아니다, 에틸은 내 옆에 앉을래?”
단호한 말씨에 고개를 주억인 공작이 소파 팔걸이를 힘주어 쥐며 결연하게 눈을 홉떴다. 전투태세였다. 어색하게 웃은 에틸이 레이라가 톡톡 두드리고 있는 자리에 슬그머니 앉았다. 그녀는 에틸에게 찰싹 붙어 앉으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음, 오늘 따라 기사단 정복을 입고 있는 게 조금 아쉽지만. 뭐, 이것도 잘 어울리니까.’
“에틸, 팔짱 좀 낄게. 내 연인인 척 굴어 줘. 대충 한 번씩 저 자식 말도 좀 끊어 주고. 스킨십은, 음, 볼 뽀뽀 정도 어때?”
“……음,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인사 말고는 그냥 듣고만 계세요. 신호 줄 때까지는 입도 벙긋하지 마시고. 화난 티 내지 마시고, 오히려 헤어져서 후련하다는 듯이. 뭔지 아시죠?”
“알았다.”
두 남자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재미있어지겠군.’
천년처럼 기다렸던 노크 소리가 울리자 화들짝 놀란 공작이 말을 더듬으며 들어오라 명했다. 제 아비를 슬쩍 흘겨본 레이라의 눈이 똑바로 하라는 듯 매서웠다.
고개를 주억인 공작이 팔걸이 한쪽에 팔을 척 걸치며 느슨하게 앉았다.
레이라는 다 식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인 뒤 열린 문에는 관심 없다는 듯 내려놓았다. 그리고 텅 빈 손을 들어 에틸의 턱을 슬며시 쓰다듬었다. 급하게 짠 판이라, 찻잔이 하나였다. 레이라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에틸, 그러지 말고 차 한잔해요.”
“괜찮습니다. 마시고 싶으면 그걸 마시면 되니까.”
“아이, 참.”
에틸의 튼튼한 가슴팍을 귀여운 주먹으로 콩콩 치고 있는 레이라의 눈에 입이 떡 벌어진 레사의 얼굴이 들어왔다. 기가 막힌다는 듯 얼굴을 구긴 레사가 제 표정을 슥 지우며 공작에게 예를 올렸다.
레이라는 레사의 표정에 절로 풀리려는 입가를 가려야 했다. 그녀는 되는 대로 에틸의 손을 끌어왔다. 덕분에 에틸은 제 손바닥에 레이라의 입술을 찧게 되어 마찬가지로 얼굴이 풀려 버렸다. 그는 황급히 레이라를 향해 사랑스럽다는 눈빛을 보냈다.
의도되지 않았던 희극은 두 사람을 풋풋한 커플처럼 보이게 했다. 서로를 향해 마주 웃는 두 사람을 보며 레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네.’
“각……, 후, 각하, 미처 계신지 몰라 인사가 늦었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다지 반갑지는 않지만, 이왕 왔으니 앉게.”
“감사합니다.”
의외의 취급에 제 목덜미를 한번 쓸어내린 레사가 레이라의 맞은편에 앉았다. 눈치 있게 식은 차를 내어 준 집사가 응접실 문을 닫고 나가자, 정적이 맴돌았다.
“인간형 마수가 나타나 토벌에 나가신 것 아니었나요?”
관심 없는 척, 모르는 척. 레이라는 레사와 눈도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며 팔짱을 낀 에틸 쪽으로 몸을 더 숙였다. 간단한 드레스 차림인 레이라 때문에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뭉클한 가슴이 에틸의 팔에 부드럽게 닿아왔다.
귀 끝이 발개진 에틸이 어깨에 폭 기댄 레이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 놀란 척 손을 떼어 냈다. 레사는 명연기를 보며 기립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비릿하게 웃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닌 걸 알아도 보고 있기가 힘든 탓이었다.
“오늘, 돌아오는 참입니다.”
“그렇군요. 제게 할 말은요?”
“……자리를 좀 물려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느긋하게 차를 홀짝이던 공작이 탁 소리를 내며 찻잔을 집어던지듯 내려놓았다. 레사가 흘긋 바라보자 공작은 흐뭇한 눈으로 레이라와 에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꼭, 짜증이 났지만 두 사람을 보자 화가 누그러졌다는 뉘앙스처럼 보였다. 레사의 눈이 날카로운 빛을 띠며 레이라에게 향했다.
‘뭐지, 이 분위기는?’
“그건 곤란해요. 제 사랑스러운 약혼자께서 불편해하실 것 같으니.”
에틸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대던 레이라가 퍽 곤란하다는 얼굴로 눈썹을 늘어트렸다. 파르르 떨리는 레사의 속눈썹이 고스란히 느껴지자 녹스 공작이 대놓고 피식 웃는 것이 보였다.
“약혼……자요?”
“그렇습니다. 아직 발표하진 않았습니다만.”
“하. 그렇군요.”
에틸에게 쏘아진 선득한 시선이 레이라를 향하자 봄날처럼 따사롭게 바뀌었다. 그것이 기가 막혀 에틸이 소리 없이 혀를 쯧 찼다.
‘저 새끼 저거, 빡쳤네.’
에틸이 보란 듯 흘러내려 온 레이라의 은발을 쓸어 넘겼다. 빛을 받아 반짝이던 은발이 그림자와 만나 분홍빛으로 물드는 것이 재미있었다.
“꼭 둘이서 해야 할 이야기인가요?”
에틸의 손장난을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보다 싱긋 웃은 레이라가 그의 팔을 더 끌어당겼다. 가슴에 폭 파묻히다 튕겨 나온 팔을 지그시 응시하던 레사의 눈빛이 한층 가라앉았다. 에틸은 부러 헤실헤실 웃으며 레사를 바라보았다.
“……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할 말이 없겠네요.”
이를 악문 레사를 보면서 얄밉게 차를 호로록 마신 레이라는 찻잔을 에틸에게 건네기까지 했다. 에틸은 아무렇지 않게 레이라의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켜며 싱긋 웃었다.
제 눈앞에서 꽁냥 대는 두 사람을 짙은 눈길로 바라보던 레사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사는 눈을 꼭 감았다 뜨고, 자세를 바로 했다.
“레이라, 내가 다 잘못했어. 미안해……. 이제, 그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
“…….”
“경어를 써 주십시오, 메르세데스 공자.”
“하…….”
이러지 말라는 듯 애처롭게 레이라를 바라보는 레사의 눈빛에도 그녀는 말이 없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레이라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제 표정을 지워 냈다는 것은 머리를 열심히 돌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걸 알고 있는 세 남자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레이라를 기다렸다. 에틸은 얌전히 그녀의 손을 다독였고 공작은 약속대로 입을 다물었으며 레사는 뭐라 말하고 싶은지 입술만 달싹였다.
레이라는 콧대 높게 굴며 제 속을 긁어놓기 바쁘던 레사가 왜 저를 찾아와 사과를 하는 건지 궁금했다. 그래, 별거지만 별거 아닌 일로 싸웠다. 그 정도는 사과 몇 마디 나누고 서로 그럴 수 있는 일이라 여길 법도 했다. 서로 아버지의 일로 싸운 것이니, 이해도 쉽게 했을 터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싸우고 헤어진 뒤가 문제였다. 레이라는 울었다. 울고, 울고 또 울었다. 그때 레사는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쏘다녔고, 웃으며 일을 했고, 밥을 먹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관계를 되돌려 보려 찾아갔던 연무장에서 아무렇지 않게 기사들과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던 레사를 보았을 때, 레이라는 그 어느 때보다 충격을 받았다. 그도 자신처럼 힘들어 할 줄 알았다. 제 마음만큼은 아닐지라도 저렇게 뻔뻔하게 웃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보지 못했다.
그녀는 눈물을 가득 매달고 공작저로 돌아왔다.
생명줄을 잡듯 치맛자락을 얼마나 꽉 쥐고 눈물을 참았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손톱이 박혀 들어간 손바닥은 핏물이 흥건했고 제 방에 들어서자마자 터진 눈물은 밤을 새우고 또 새워도 그칠 줄 몰랐다.
아, 나는 이렇게 아픈데. 당신은 아무렇지 않은 거였구나. 레이라를 더 힘들게 한 것은 그런 생각들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랑했던 사람에게 자신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 이처럼 쉽게 잊혀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떼어 내 버릴 수 있었다는 것.
레이라는 이를 악물고 레사를 미워했다. 그러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레사가 싫어하던 이와 팔짱을 끼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그가 싫어하던 색의 옷을 입고, 그가 싫어하던 모든 행동을 했다. 그러자 관심도 없어 보이던 레사도 마찬가지로 행동했다. 그렇게 둘은 남들이 보았을 때 유치하기까지 한 행동을 하고 다녔다.
여태껏 말 한마디 없이 제 속만 긁어 놓던 레사가 이제 와서 사과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도 화를 풀어 달라는 말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화가 난 게 아니라, 헤어진 건데. 그래, 우리는 싸운 것이 아니라 헤어졌는데. 레사에게 그것은 그저 장난이었나? 내 사랑이, 마음이 장난 같았나.
주먹을 꽉 말아 쥔 레이라의 손을 느낀 에틸이 제 손으로 그것을 부드럽게 감쌌다. 따뜻한 온기를 느낀 레이라가 에틸과 눈동자를 마주했다. 울음 섞인 눈으로도 배시시 웃은 레이라는 벗어 놓은 로브 주머니에 들어 있을 그것을 떠올렸다.
‘그래, 이것 때문이겠지.’
확실하게 레사의 것이라는 확증이 필요했다. 레이라의 분홍빛 속눈썹이 들어 올려졌다. 은빛으로 바뀐 속눈썹에 숨어 있던 루비 같은 눈동자가 새초롬히 빛나며 침묵을 깨트렸다.
“이만 돌아가세요. 오늘은 이쯤 하는 게 좋겠어요.”
“…….”
“이야기는 다음에 들을게요. 오늘은 제가 좀 피곤하네요.”
“……알겠습니다.”
내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주억인 레사가 공작에게 인사를 건네고 휙 떠나갔다. 레사의 뒷모습을 꼬시다는 듯 콧방귀를 뀐 채 지켜보던 공작이 픽픽 웃었다.
귀를 쫑긋대며 발소리를 주의 깊게 듣던 레이라가 제 로브를 챙겼다.
“잠시만 여기 계세요. 에틸, 너도.”
“어딜 가려고 그러느냐!”
“안 가요. 그리고 안 만나요.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요.”
응접실 문을 박차고 나간 레이라가 빠르게 뛰어 정문 쪽으로 나 있는 창문에 달라붙었다. 이제 막 저택을 나서는 레사의 뒷모습이 보이자 레이라는 로브 주머니 속으로 손을 쏙 집어넣었다. 온기가 닿자 움찔 떨린 남근이 도망치지 못한 채 레이라의 손안으로 들어왔다.
하루 종일 만지작댔던지라 남근은 몇 번 아래위로 쓸어 주자 금세 크기를 키웠다. 레이라는 그것을 계속 자극하며 레사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다. 레이라는 예민한 귀두 끝을 손톱으로 살짝 긁었다. 멀쩡하게 걷던 레사가 걸음을 뚝 멈추는 것이 보였다.
오호라, 아랫입술을 앙 문 레이라가 방울방울 새어 나오는 액을 펴 바르듯 살살 문질렀다. 귀두를 힘주어 꾹 누르다 빠르게 문질렀다. 멈춰 서서 당황하던 레사가 허리를 확 꺾어 앞으로 접으며 제 무릎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맞네.”
해사하게 웃은 레이라는 밖에서 제가 보이지 않도록 몸을 숨겼다. 마침 레사가 뒤를 돌아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자극이 멈추자 더듬더듬 걸으면서도 빠르게 공작저를 빠져나갔다. 레이라는 악마처럼 웃으며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진짜, 레사 네 것이라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