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56화
문자에 있는 식사라는 단어를 보자 배가 더 고파졌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참아 보는 게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왜냐면 차은아의 문자에서 그녀가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나도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지금까지 네 명의 여자를 영입했지만, 아직 섹스를 하지 못한 것은 그녀뿐이다.
그래서 나는 답장을 보냈다.
- 미안해요. 낮잠을 자느라 전화를 못 받았네요 ^^; 혹시 아직 저녁 안 먹었으면 저랑 같이 드실래요?
나는 그녀가 빨리 답장을 하기를 바랐다.
함께 식사하든 혼자 식사를 하든 빨리 이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싶었으니까.
마치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차은아에게는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답장이 왔다.
- 네! 저도 파티장님이랑 같이 식사하고 싶어요 ^^
아, 잘 됐다.
나는 차은아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해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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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은아를 만나러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즉석식품을 사 먹었다.
삼각김밥을 세 개 먹고, 소시지를 네 개 먹었는데 이 정도로는 배가 전혀 차지 않았다.
헌터가 일반인보다 많이 먹는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까지 일반인일 때와 차이를 못 느끼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허기짐은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이런 점도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등급이 올지 모른다는 내 막연한 예상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다.
삼각김밥과 소시지를 너무 허겁지겁 먹은 탓에 입에서 냄새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어차피 차은아와 만나서 할 일이 밥을 먹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에티켓을 위해서 조그만 가글을 사서 입을 헹군 다음에 남은 병을 주머니에 넣었다.
뭐랄까?
이런 행동들 하나하나가 과거 15년간 데이트를 하지 못했던 보상이 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이토록 설레는 기분을 느껴본 게 언제였던가?
던전 공략을 하면서, 파티 운영을 하면서 느낀 보람도 처음 몇 년이 전부였다.
등급이 오르지 않으면서 모든 상황이 점점 악화되기만 했던 것이다.
꿈이라는 것을 생각해본 지도 정말 오래되었다.
하지만 나는 요즘 다시 살아있음을 느꼈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포부들이 날개를 달고 솟구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차은아는나와 데이트를 한다는 기분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며칠 전에 가입한 파티의 장과 만나는데, 그것을 데이트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우니까.
그래도 그녀는 보통의 파티장을 만나는 것과 나를 만나러 나오는 것에 심정적인 차이를 느끼기는 할 것이었다.
그 감정을 본인이 알아채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약속시간보다 상당히 일찍 나온 것은 여자를 기다리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빨리 배를 채우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여유가 있어서 편의점에 들렀지만, 삼각김밥과 소시지를 해치운 속도도 정말 빨랐다.
솔직히 전자레인지에 대충 돌려서 먹은 탓에 소시지는 차갑기까지 했다.
그래서 여전히 약속시간이 되기까지 10분이나 남아 있었는데, 놀랍게도 멀리서 차은아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사귄 지 얼마 안 된 남자 친구를 만나러 오는 것처럼 밝았다.
'이게 바로 성숙한 여자구나!'
차은미, 김소희, 그리고 세라와 엘린에게는 미안하지만 차은아를 보자마자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그녀의 신장은 일반인 여자들보다도 더 큰 편이었다.
거기 더해 온몸으로 성숙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어떻게 차은미와 그녀가 자매 지간인지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두 딸이 서로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어서 부모님은 키우는 입장에서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두 여자와 섹스를 하게된 나로서도 벅찬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파티장님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니요. 볼 일이 있어서 조금 빨리 나왔을 뿐이에요."
그 볼 일이란 다름 아닌 편의점에 들러서 극렬한 허기짐을 누르는것이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은아씨가 잘못한 게 아닌데요. 오히려 너무 빨리 나오신 거 아니세요?"
차은아는 약속시간보다 10분 일찍 나온 것임으로 그녀의 잘못은 전혀 아니었다.
차은아 같은 미녀가 나를 만나는 데 10분이나 일찍 나왔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훈훈함을 자아냈다.
물론 이제 막 가입한 파티장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것은 파티원의 당연한 마음가짐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파티원에게 그런 대접을 받아 본 게 정말 오래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차은아 고유의 성품,그리고 그녀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나에 대한 호감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터.
"밥 먹으러 가요."
나는 차은아를 재촉했다.
"네, 저도 배가 많이 고파요. 파티장님."
차은아가 배시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정말로 데이트하는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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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은아와 함께 온 식당은 아침에 김소희와 갔던 국밥집과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나도 언제 이런 곳에 와 봤나 싶을 만큼 고급스러운 식당이다.
이곳으로 예약한 것은 김소희였다.
연장자에게 악의적으로 뜯어내려는 마음이 있어서 이런 곳에 예약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냥 그녀에게는 저녁 약속을 잡는데 이런 곳이 익숙한 거겠지.
차은미도 겪어보았지만, 이 두 자매는 적어도 빈곤함이 익숙한인생을 산 것 같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풍족한 환경에서 자라나 젊은 나이에 각성을 했다.
나처럼 불운한 인생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자매가 함께 큰 행운을 맞은 인생도 있는 것이다.
당연히 내게는 불만을 갖거나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아름다운 자매 둘이 모두 내 파티원이 된 거니까.
나는 이 둘 모두와 섹스할 것이다.
누가 더 운 좋은 인생을 사느냐 하는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나는 요즘 내 인생 처음으로 금전적인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식당에 왔는데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차은아를 통해 이런 곳을 알게 된 것이 좋았다.
앞으로 럭셔리한 세계에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으니까.
"오늘 저녁은 제가 살게요. 저를 파티원으로 받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뜻으로요."
차은아가 말했다.
이것으로 그녀가 나를 뜯어먹을 생각으로 이렇게 비싼 식당에서 만나자고 한 게 아니라는 것이 더 확실해졌다.
물론 헌터가 길드나 클랜에 들어가면서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내가 운영하는 이 작은 파티, 게다가 안 좋은 일까지 있어서 대외적으로 이미지가 나쁜 파티에 들
어오면서 파티 장에게 식사 대접을 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 일이었다.
이런 자연스럽지 않은 일을 시스템이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다.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요. 오늘 저녁은 제가 살게요. 차은아씨처럼 유능한 분이 파티에 들어와 주셔서 저야말로 정말 기쁜걸요."
"아......"
차은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감사합니다......"
이런 식당에서 연하의 여자에게 얻어먹게 되면 원하는 만큼 음식을 주문할 수 없게 된다.
나는 편의점에서 즉석식품을 흡입하고 온 상태이기는 하지만 비정상적인 허기짐을 여전히 느끼고 있었으므로, 음식을 많이 주문하고 싶었다.
차은아가 돈을 내게 되면 마음껏 주문할 수 없지 않겠는가?
내 말은 그런 의도까지 내포된 것이었다.
나는 메뉴판을 보았다.
'진짜 비싸구나......'
만약 예전의 나였다면 이쯤에서 메뉴판을 덮고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관심사는 메뉴가 얼마나 맛이 있고, 또 양이 얼마나 많냐 하는 것뿐이었다.
차은아에게 맡기면 좀 부족하게 주문하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메뉴판 가장 마지막에 있는 코스 메뉴를 찍었다.
5~6인이 먹을 수 있는 양이라고 적어져 있었지만, 솔직히 나는 이걸로도 내 허기짐을 다 채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걸로 주문할까요?"
차은아는가격 때문인지 양 때문인지 몰라도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요."
그녀는 메뉴판을 앞으로 넘기면서 물었다.
"파티장님 혹시 와인 좋아하세요?"
여자와 고급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와인을 마시는 것은 이제껏 내 인생에서 거의 없었던 일이다.
하지만 그녀의 제안은 나로서도 무척 반길 만한 것이었다.
나는 당연히 그녀와 식사만 할 생각이 아니었으니까.
식사가 자연스럽게 섹스로 이어지게 하기위해서는 술만큼 좋은 게 없지 않겠는가?
차은아와의 식사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음식은 비싼 가격에 걸맞게-사실 여전히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내 돈 주고 먹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맛이 있었고, 걱정과는 달리 5~6인분이라는 양이 적지 않아서 내 배는 빠르게 채워졌다.
음식 양이 부족하지않을 수 있었던 것은 차은아가 적극적으로 그것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아무리 여자라고 해도 헌터는 일반인보다 많이 먹는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게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곧 그녀가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호감도가 높은 남자가 맞은편에서 식사하고 있는데 평소처럼 마구 먹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접시가 빠르게 비워지는 것에 비해 그녀 접시 위에 있는 음식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오전에 김소희를 만나서 더 대비되는 것이겠지만, 차은아는 정말 여성스러웠다.
뭔가 품위가 몸에 밴 것 같은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