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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화 〉#1.5 - 평온한 하루 (1) (12/162)



〈 12화 〉#1.5 - 평온한 하루 (1)

점점 높아지는 햇살이 눈가를 간질이는 오전. 레이아와 지나를 혼절할 때까지 범한 용사였지만, 용사라는 칭호를 딱지 쳐서 따낸게 아니라는 듯이 평소와 같은 멀쩡한 안색으로 일어났다.  엄청난 정력과 회복력이 다섯이나 되는 여자를 모두 만족시킨 비결이었다. 지금이야 여자들이 네토남들과 자주 어울리지만, 마왕의 저주를 받기 전엔 일반적인 하렘 관계였기 때문에 모두 용사가 직접 만족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이 먼저 나가떨어졌을 만큼 용사의 힘과 정력은 엄청났다.

거실에 나와보니 레이아와 지나가 여전히 알몸으로 소파에 퍼져 있었다. 지나야  시간 전에 실컷 범했으니 당연히 그럴 만하지만, 레이아가 아직도 죽은 듯 뻗어있는 것이… 어제 제법 흥분해서 평소보다 거칠게 다룬 듯하다. 침착한 아이를 이토록 흐트러지게 만드는건 생각보다 흥미로운 일이었다. 특히나 정신적 쾌감이 강하다.

긴 소파에  여자가 일자로 쭈욱 뻗어있으니 공간이 모자랄 법도 한데, 슬프게도 좁아 보이진 않았다. 뼈아픈 팩트를 늘어놓자면… 레이아와 지나는 다섯 여자  키가 제일 작은 사람,  다음으로 작은 사람이었다. 심지어 둘의 키 차이는 고작 0.5 센티미터라 사실상 똑같은 수준의 땅꼬마였다. 파티 대표 땅꼬마 둘이 아무리  뻗어봤자 한계가 있었고, 소파는 따닥따닥 붙어 앉으면 아홉 명은 앉을 수 있는 대형 롱소파였기에 둘의 발끝이 간신히 닿을락말락 하는게 전부였다.


사실 좀 귀여웠다. 그냥 빼빼 마른 꼬맹이도 아니고, 키를 제외하면 가슴과 골반도 잘 발달되어 있고 비율도 좋아서 엄청난 나이스 바디인데 말이지.


'놀리면 싫어하려나?'

레이아는 그냥 뚱한 표정을 지을 것 같고, 지나는 귀엽게 째려보며 앙탈을 부릴 것 같았다. 상상하니 나중에라도 놀리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용사는 입가에 잠시 장난기를 머금었다가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도착한 곳은 미라의 방이었다. 미라의 방은 이 집의 모든  중에서 가장 작았는데, 본인이 고른 방이었다. 너무 큰  별로고, 왠지 자기가 가장 많이 밖으로 나돌 것 같아 양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아예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 델렌이라는 강적이 출현했지만, '외출'을 가장 많이 하는 것은 미라가 맞긴 했다. 외출 사유는 대부분 연애였고.

가장 작은 방이라고 해도, 어지간한 40평대 아파트의 중간 사이즈  정도는 되었다. 애초에 이 집이 고가형 쉐어하우스를 목적으로 설계되어 2층까지 있는 커다란 단독주택이었고, 고작 여섯이 사는데 공간이 모자랄 수가 없었다. 가끔은 너무 넓어서 오히려 좁은 집이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했다. 집이 넓다보니 자연스레 사람과의 거리가 멀어지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몸을 부대끼고 사는 것도 괜찮지 않겠냐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현역 용사 시절, 가진 것 하나 없었던 초창기에는 어떻게든 돈을 아끼겠다고 저가형 숙소의 1인실에서 당시 파티 멤버였던 미라, 델렌, 지나, 용사 총 네 명이서 서로 낑기고 몸을 부대끼며 잤던 기억이 떠올랐다. 용사도 남자였기에, 비좁긴 했어도 기분은 아주 좋았었다. 게다가 당시엔 서로 호감만 있었지 연애하던 때가 아니라서…. 지금이야 품 안에 들어온 여자를 외간 남자한테 주는 신세지만, 그땐 손에 넣지 못한 여자들과 몸을 부비는 것이 그렇게 두근거리고 흥분될 수가 없었다. 적당한 여자들이었어야지, 다들 말이 안되는 얼굴과 몸매를 가진 미인들이었으니까.

'그때 새벽에 몰래 나가서 한  뺀 건 들켰으려나?'

용사가 생각하다가 피식했다. 웃기게 들려도 어쩔 수 없었다. 잠을 자야 하는데 '초'자가 붙을 만한 미녀들과 앞뒤로 몸을 부비고 있자니 똘똘이가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냄새나는 화장실로 최대한 조용히 가서 상황을 해결했어야만 했다. 남자 입장에선 불가항력이었다. 아마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여자들과의 관계를 쌓아나갔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좀 미안하군. 역시 집은 넓은 것이 최고다.

"안녕, 자기."

침대 헤드 쪽에 등을 기대 앉은 자세로 스마트폰을 만지던 미라가 녹색 빛이 예쁘게 도는 눈동자만 살짝 들어 인사를 했다. 용사의 여자들 중에선 가장 새침하고 건방진 편에 속하는 미라. 하지만 워낙 예쁘다 보니 그런 모습도 좋은 의미에서 비싸 보였고, 저런 새침한 태도가 오히려 남자의 정복 욕구를 자극한다. 어떻게 보면 밀당을 잘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신비종족인 엘프의 피가 섞여서 그런지 한껏 오른 고고하고 도도한 분위기는 어떤 남자라도 다가가서 쟁취하고 싶게 만드는 마성의 매력이 있음이 분명했다.



미라는 간단하게 인사를 건네곤 쉼없이 손가락을 움직이며 핸드폰을 했다. 게임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데, 아마 메신저를 하는  같았다. 네톡인가?

"바빠 보이네."

"아, 사람 하나 해고하느라고."

"해고?"

미라가 여전히 핸드폰에 시선을  채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저번에 자기가 본  남자. 나도 좀 별로인  같아서. 헤어지자고 하니까 좀 질척거리네."

"아."

저번에 들렀던 미라의 남자를 말하는 것이다. 미라의 애널을 노리는 변태적인 취향은 마음에 들었지만, 전체적으로 단조롭고 재미가 없었다. 너무 흔한 스타일이라서 거의 흥미가 일지 않았다. 남자를 보낸  미라가 약간 벌어져 벌름거리는 애널을 들이밀며 꼴리는 유혹을 하지 않았다면 전혀 자극이 없었을 것이다. 평소엔 거의 하지도 않는 애교로 상황을 수습한 미라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미라도 스스로가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이다.



여러모로 아쉬운 플레이긴 했다. 미라도 김이 많이 샜을 것이다. 6개월을 넘도록 사귄 그 시간이 아까울 것 같다. 용사는 애초에 미라가 컨셉을 잘못 잡아 남자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튼 결과는 '해고'였다.

"아쉽긴 하네."

"응? 뭐야? 헤어지지 말라는 거야?"

"아니. 시간이 아깝다고. 오래 만났다며."

"200일이면 딱히 오래 만난 것도 아니지.  허무하긴 하지만."

미라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말하며 계속 핸드폰을 만졌다. 중간중간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집으로 찾아오는 귀찮은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찾아온다면, 미라가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대주는 플레이를….



'흠흠.'

망상이 좀 심하군. 사실 이미 한 번 봤던 거라 크게 흥미가 동하지도 않았다. 그냥, 좋은게 좋은 거니까. 바지춤이 살짝 불룩해진 것은 넘어가도록 하자. 말 안듣는 존슨을 데리고 사는건 남자라는 생물의 슬픈 숙명이다.



"흐응…."

"왜 그래?"

묘한 표정을 짓던 미라가 이내 묘한 웃음기를 띄웠다. 묘묘 거리니까 고양이가 떠오른다. 그리고 여자들 중 가장 고양이 같은 미라도 떠오른다. 나도 내가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 남자, 재밌을 것 같아."

"…?"

영문을 모르는 용사의 눈 앞으로 미라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화면 안에는, 애송이 티가 팍팍 나는 군바리가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병 천광석



==Alis, Ari

촤악!

예리한  차례의 섬광. 깔끔한 칼질에 피분수를 흩뿌리며 허물어지는 몬스터, 마물, 마족.

"후우."

끝이다. 호흡을 한 차례 가다듬고, 반대편을 보았다.



두근.


시선을 돌리자마자 타오르는 듯한 시뻘건 눈동자와 마주쳤다.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집채만큼이나 커다란 레드 드래곤의 차가운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보다도 더한 전율. 더 없이 든든한 동료이자 리더,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임에도… 그 엄청난 기세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든다.


"용사님."

검객,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정인'을 불렀다. 마족의 더러운 피가 묻어 온통 새빨갛게 물든 자신과는 다르게, 타오르는 화염의 검으로 태워버렸기에 까만 재를 뒤집어  모습. 용사는 자신이 맡은 마족을 진작에 처리하고, 묵묵히 아리스의 활약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바로 개입할 준비를 마친 채로.


"수고했어."

"…네. 당신도."

그들의 주변엔, 수백 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

….

….


한아리.

레이아나 델렌이 그랬던 것처럼 아리스 한으로 하려다가, 아리라는 이름이 묘하게 마음에 들어서 한아리로 이름을 바꿨다. 용사가 어감이 귀엽다고 한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용사와 동료들에겐 여전히 아리스지만, 이 세계의 사람과 어울릴 땐 한아리라는 두 번째 이름을 쓴다.

"하아… 하아…."

달뜬 숨을 내쉰 그녀는, 물때가 잔뜩 낀 지저분한 거울을 보며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마족의 피로 시뻘겋게 물들었던 현역 시절의 나, 검객 아리스. 그리고, 남자의 액체로 허옇게 물든 지금의 나, 한아리. 철과 피로 가득했던 과거를 뒤로한 채, 지금은 한 명의 음란한 여자가 되어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정사를 치르고 난 후 뒷처리를 하고 있었다. 관리도 제대로 안 된 지저분한 여자화장실에서….

꿀꺽.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정액을 손가락으로 훑어 입안에 넣었다. 비릿하고 역하기만 했던 남자의 액체는, 이제는 맛있다고 착각할 만큼 익숙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윗입으로 먹어도, 아랫입으로 먹어도 맛있다.


….



입맛을 다시며, 저도 모르게 꿀떡 넘긴 정액의 향을 음미하던 아리는 잠시 감았던 눈을 뜨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낯선 남자에게 풀어헤쳐진 브래지어의 프론트 후크를 잠그고, 뜯겨지듯 풀어진 와이셔츠를 고쳐입었다.



'아, 싫다.'

제발 좀 조심하라니까. 결국  단추 세 개가 뜯어져 온데간데 없었다. 이래서 아무 남자 막 붙잡고 하는  좋지 않았다. 흥분해서 막 달려들고선, 뒷처리는 커녕 사고만 치고 그냥 떠나버리니까.



"후우…."

뭇 남자들의 시선을 한껏 모으는 D컵 가슴이 반쯤 드러났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하늘색 브래지어마저 직접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딱 붙는 하얀색 와이셔츠인데 윗섬까지 풀어지니, 원치도 않는 남자들의 지저분한 시선과 여자들의 따끔한 시선을 잔뜩 받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짜증이 났다. 그나마 남자들은 가끔씩 '플레이'에 동원하기도 하고 겉으로나마 떠받들어주니 마냥 싫기만 한건 아닌데, 여자들의 경멸 어린 시선은 기분도 나쁠 뿐더러 아리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대륙에서 온 신기한 검술을 사용하는 검객. 하필이면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 용사를 만나기 전까진 고생을 좀 많이 했으나, 용사의 마왕 토벌 파티에 합류한 이후로는 천재적인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있었고, 짓밟혔던 자존심과 자존감을 회복했다. 그 후로도 아리의 인생은 쭉 오르막길이었다.



무희인 지나가 남자들에게 인기 많은 스타일이었다면, 검객 아리스는 동성인 여자들에게 인기 많은 스타일이었다. 여자에게선 보기 드문 늠름함과 듬직함, 무사의 신념으로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항상 선두로 나서는 용맹한 모습은 어지간한 남성 영웅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어서 동경의 대상이 된 것이다. 물론 한 마리 야생마처럼 늘씬하고 탄탄한 몸매와, 다른 대륙의 색다른 매력을 가진 아름다운 얼굴이 인기에 많이 기여하긴 했다. 아무튼 뭇 여성들의 우상이었던 그녀가, 지구로 온 후에는 여자의 공공의 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으니 기분이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아리는 머리를 만졌다. 옷도 옷이지만, 머리 역시 한 번 헝클어지면 피곤하다. 손이나 빗으로 헝클어진걸 복구하고 다시 모양을 내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다행히 머리는 크게 망가지지 않았다.

"…."

거울을 계속 보고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방금 정사를 치른 자신의 얼굴은, 완전히 식지 않아서 묘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내가 이런 표정이구나. 그럼 한창 하고 있을 때는 어떤 표정일까, 하는 야릇한 궁금증이 떠오르며 저도 모르게 자신의 야한 모습을 상상했다.


검은 색으로 자주 착각받는 진한 남색의 생머리와 침착한 검은 눈동자. 얼굴은 하나하나 뜯어보면 오밀조밀해서 섬세한 인형 같았으나, 하나로 조합하면 의외로 우아하고 성숙했다. 검객 특유의 분위기와 아리스의 성격이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몸매는 늘씬하면서도, 어느 부위도 늘어진 살 하나 없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어 요즘 들어 점점 인기가 많아지는 탄탄한 피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키가 커서 말라 보이는 인상이 강하지만, 가슴과 골반 만큼은 풍만하여 남자들의 시선을 독점하는 사기적인 몸매를 완성시킨다. 이런 여자가 흥분하여 흐트러진 표정을 짓는다면, 어떤 남자라도 발정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일 것이다. 그것은 제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아리 본인도 동의하는 바….

끼익.

"흣!"

부끄러운 상상을 꾸짖기라도 하는 것처럼, 타이밍 좋게 화장실 문이 열렸다. 깜짝 놀라 새된 소리를 낸 아리는 거울로 자신을 보는 척하며 안으로 들어오는 여자를 흘끗 보았다. 들어온 여자 역시 무심한 척 지나가면서 눈알을 빠르게 굴려 아리를 위아래로 훑었다. 벗겨졌던 옷은 진작에 고쳐 입었음에도, 아리는 마치 발가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사 직후에 몸에 깃든 미미한 색기와 암컷의 냄새를 감지한 여자는 뜯어진 가슴팍을 스윽 보더니 경멸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눈빛을 띄웠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리는 손가락질 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찌릿.

마치 나쁜 일을 하다 걸린 것처럼, 가슴 속을 따끔한 것이 뜨겁게 휘젓는 느낌이었다.


'이젠, 여자가 제일 불편해….'

과거라면 상상조차 못할 상황. 하지만 그것이  앞에 놓인 현실이었다. 여자의 시선이 마치 뱀처럼 느껴져 오싹했다. 도망치듯 화장실 밖으로 나온 아리는 수치심을 느낀 탓에 빨개진 얼굴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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