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화 〉#1.5 - 평온한 하루 (2) (13/162)



〈 13화 〉#1.5 - 평온한 하루 (2)

약속 장소에 거의 도착한 아리는 이번엔 다른 의미로 얼굴이 빨개졌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의 만남. 게다가 최근 며칠 동안 보지 못했던 탓에, 말은 못해도 내심 외로움을 느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사귀었던 남자였지만, 그는 지금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설렘의 대상이었다.

"아!"

아리의 안색이 밝아지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전직 용사, 현직… 현직… 백수? 아무튼, 그녀가 가장 사랑하고 가장 존경하는 사람. 둘의 거리가 좁아졌다. 용사는 진작에 알아채고는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채, 도도도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아리를 표정으로 환영하고 있었다.

"정인!"

정인(情人). 아리에게 허락된 용사의 호칭이다. 그녀의 고향에서 쓰는 말을 이쪽에 맞게 바꾼 건데, 여보나 자기 같은 말과 비슷한 뜻이란다.


꼬옥!

아리가 안겨들자, 용사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적나라한 가슴살과 브래지어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옷차림이 바람직하네."

"으읏…."

만나자마자 수치심 +1. 아리가 양팔을 교차하여 가슴 윗부분을 가리며 부끄러워했다.

'참 귀엽단 말이지.'

용사는 아리에게서만 볼 수 있는 풋풋한 모습을 보며 매력을 느꼈다. 새침하고 당당한 미라, 맨날 소녀처럼 헤헤 웃지만 사실은 능구렁이인 지나, 말 그대로 인형 같은 레이아, 그리고 부끄러움 따윈 모르고 살아온 델렌. 각자 매력이 달랐지만, 풋풋함 만큼은 오직 아리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었다. 오직 아리만이 이런 귀여운 모습을 보여준다. 항상 그런건 아니라서 아쉽지만.


뭐랄까, 아리를 만날 때마다 '여자애'를 만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키가 170이 넘는 장신에다가 몸은 단련되어 탄탄하고 가슴은 무려 E컵인 상여자(?)였지만, 내면은 순수하고 부끄러움이 많았다. 그래서 이렇게 아리와 일대일로 '데이트'를 할 때마다 지구의 평범한 연애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으으…."

"귀엽긴."

용사가 손을 내밀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머리를 막 만져서 아주 헝클어뜨리면 스타일이 망가져서 싫어하니까, 작은 동물을대한다는 느낌으로 살살 조심스럽게 만진다. 사실 키가 커서, 땅꼬마들을(레이아, 지나, 그리고 억울하겠지만 미라까지.) 쓰다듬을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팔을 거의 수평으로 뻗어야 한다. 아리는 쓰다듬는 손길이 싫지 않은지, 처음엔 애 취급 받는 것 같다며 불만 어린 목소리를 냈으나 지금은 얌전히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실, 아리가 항상 이렇게 여자애 같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엔 좀 재미없는 고지식한 성격이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러냐? 상황을  조성해 놓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의 수치심을 자극했다.



현역 시절의 용사와 은퇴하고 백수가 된 지금의 용사가 다르듯이, 예전의 아리스와 지금의 한아리 역시 많은 차이점이 있었다. 검객 아리스는 항상 침착했고, 집중력이 좋았으며 순발력이 엄청났다. 인식 - 판단 - 행동의 3단계가 신속하게 이뤄지는게 전투에선 정말 중요한데, 그녀는 세 가지 능력 모두 최상급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날아다니는 파리를 칼로 벨 정도였다. 그 엄청난 능력의 뿌리에는 침착함이 있었다. 모든 것을 침착하게 보고 느끼는, 그녀의 고향에서는 '심안(心眼)'이라 부르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그래서, 지구로 귀환한 후에도, 저주가 발동된 직후에도 아리는 침착했다. 오래 가지 못한 것이 문제였지. 현실은 냉혹했다. 한 번 경지에 오르면, 아무 조건도 없이 실력을 유지한다? 그것은 무협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지구는 판타지 세계와는 정반대로 상당히 평화로운 세계였다. 전투를 하겠다면야 중동 내전 지역이라도 가든지 해서 어떻게든 할 수야 있겠지만, 간신히 얻어낸 용사의 옆자리를 떠날 생각이 없었던 아리는 사랑을 선택했고, 그에 따라 칼질할 여건은 완전히 사라졌다. 판타지 세계에서 거의 매일 같이 이뤄지는 실전 전투로 실력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던 아리는 점차 감각이 무뎌지고 퇴화하여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심안의 경지를 유지하지 못했다. 물론 아리는 일말의 후회조차 없었다.


물론 지금의 아리 역시 꽤나 침착한 편이지만, 심안이 없는 아리는 여성으로서의 강렬한 수치심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반응을 보니  말을 잘 들었나보네?"

"…몰라요."

아리가 고개를  숙이며, 원망하듯 용사를 툭 쳤다. 힘은 거의 들어가있지 않아서, 고양이가 발톱을 세우지 않고 냥냥펀치를 하는 수준이었다.

용사는 아리에게 한 가지 미션을 줬다. 약속 장소에 오기 전에 수행해야 하는 미션. 물론 에로한 미션이다. 내용은 '오는 남자 막지 않기'였다. 즉 대쉬하는 남자에게 원하는 것을 내어주라는 것이다. 번호를 원하면 번호를 주고, 몸을 달라면 몸을 준다. 식사나 영화 등등의 시간이 걸리는 요구 사항들은 용사를 만나야 하므로 당연히 거절했다.

결과를 말하자면, 아리가 약속 장소에 오는 35분 동안 9명의 남자가 말을 걸었고, 5명의 남자에게 번호를 줬으며, 3명의 남자는 밥이나 영화 등을 제안해서 거절했고, 1명의 남자와 근처의 으슥한 곳에서 섹스를 했다. 섹스한 남자도 끝나고 번호를 요구해서 줬다. 하지만 와이셔츠 단추를 뜯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탓에 그 남자는 뭘 하든 탈락이 확정이다.


"한 번이라. 음, 그런 것치곤 분위기가…."

용사가 아리를 스윽 보며 말했다. 한 명과 섹스한  치곤  많이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것 같기도 했다. 아리는 어느 순간부터 동료를 제외한 일반인 여자들을좀 어려워했는데, 아마 이번에도 동성에게서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다. 비슷한 상황을  번 보아서 알 수 있었다.


"저… 이, 이런건 이젠…."

"뭐? 큭큭…."

용사가 아리를 보며 킥킥 웃었다. 남이  때는 비웃음 같았으나, 사실은 놀리는 거였다. 잠시 아리를 보던 용사가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으래? 좋아. 그럼 난 더이상 네게 뭔가를 '시키지' 않을게."

"아…."

용사는 분명 긍정적인 말을 했으나, 표정과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기류를 느낀 아리가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걱정은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그럼, 아리야. 나 잠깐 화장실좀 다녀올게?"

"네? 그, 그런…."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

"응?"

"…네."

아리의 풀죽은 대답에 용사는 빙긋 웃으며 진짜로 떠나버렸다. 그가 향한 방향은 확실히 화장실 쪽이 아니었고, 이내 아리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너무해…."

용사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아리가 작은 원망을 쏘아보냈다.



5분 조금 못되는 시간이 흐른 후, 용사가 돌아왔다. 그리고 예상대로, 아리는 작업 거는 남자를 떨쳐내지 못하고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션은 용사를 만나면서 끝났기 때문에 번호를 주거나 하진 않았지만, 들러붙는 놈팽이를 차마 거절 못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역시.'

왕년엔 날아다니는 파리도 베어버리는 절정 고수 검객이었던 그녀가 저렇게나 쩔쩔매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저주 때문이다.

아리스의 저주 스킬은 [외강내유]. 이름을 들으면 알  있듯이, 지금의 한아리는 과거의 검객 아리스와는 다르게 내면이 유해졌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상대가 들이댈 때 그걸 잘 쳐내지 못한다. 거절을  못한다고도 할 수 있고, 노골적으로 표현한다면… 대달라고 조르면 대주는 성격인 것이다. 인터넷을 보니까, '자동문'이라는 아주아주 짓궂고 좀 너무하다 싶은 단어가 쓰이던데…. 아리한테 말하면 엄청 상처받겠지. 상처 받아서 울먹거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가학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참기로 했다.


침착, 침착, 침착. 아리에게 침착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는데, 이제와서 말하면 설득력 없어 보이지만 아리는 정말로 침착한 성격이다. 스킬로 비유하자면 '외강내유' 중 '외강'이 바로 그녀의 침착함일 것이다. 하지만 고작 침착한 성격 따위를 어떻게 못할 저주가 아니었다. 그녀의 침착함은 파도를 마주한 모래성처럼 쉽게 허물어졌고, 그 결과 남은 것은 '내유'에 해당하는 자동문…이 아니라 오는 남자  막는 저 성격이었다.



한아리는 오는 남자 못 막는다. 한아리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은 엄청난 미인이다. 남자는 예쁜 여자에게 다가간다.  한아리는 자동문… 아니, 이제 심한 말은 그만하도록 하자. 입에 착착 달라붙긴 하지만, 여자를 울리면 안된다. 용사는 슬슬 구해주자는 생각을 하곤 쩔쩔매는 아리의 팔을 잡았다.

"아리야."

"아…."

곤란한 표정을 짓던 아리의 안색이 밝아졌다. 한창 작업을 치던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용사를 노려봤다.



"뭐야, 당신?"

"남친이다, 새끼야."

아리의 눈을 마주보며 안도감을 심어준 용사는 자신을 꼬나보는 남자를 향해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허억!"

1초컷. 작업남은 바로 꼬리를 내리고는 물러났다. 마나 유저와 일반인은 겉보기에나 비슷하게 생겼지 사실 호랑이와 고양이 만큼이나 체급 차이가 크다. 게다가 용사는 그런 마나 유저 중에서도 정상에 위치한 최강자였으니, 방금의 구도는 최강의 호랑이와 평범한 고양이의 기싸움이라고도 할  있다. 잠시나마 용사의 기세를 받아낸 작업남의 심장에 무리가 없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사실 다른 남자가 작업을 걸어봤자 용사에게 딱히 나쁠건 없었다. 오히려 용사가 남자 좀 끌어들이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니까. 그럼에도 귀한 손님(?)을 내쫓은 것은 오늘이 아리와 데이트 약속을 잡은 날이기 때문이다.


데이트.


용사와 여자들 모두 네토 플레이를 지극히 즐긴다. 그것은 술, 담배 만큼이나 중독성 있고 쾌감을 주는 행위라서 끊기도 어렵고 끊을 생각도 딱히 없다. 하지만 사람이 빵만 먹고 살지 못하듯이, 용사와 여자들도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내내 네토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용사와 여자들은 서로의 몸과 마음을 깊게 사랑하는 관계이며, 정신적으로 아주 견고한 연결 고리가 걸려 있고, [강인한 자]와 [씨받이] 스킬로 한 차례 더 튼튼하게 연결되어 있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러니 하루  잡고 데이트를 하는 것은, 사실 전혀 이상할  없는 평범한 형태의 관계인 것이다. 다만, 여자들도 그렇지만 특히 용사가 점점 더 네토 플레이에 빠져들어 이런 기회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다른  명의 동료이자 경쟁자가 있는 여자들에겐 특히나 데이트가 귀할 수밖에 없었다. 용사도 그걸 알았기에, 데이트 만큼은 진지하게 임했다.

"가자."

"네."

오랜만에 보는 용사의 박력에 아리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반한 포인트가 바로 용사의 이런 우월한 수컷 같은 모습이었다. 누구보다도 강하고,당당하고, 박력있다. 낯선 대륙에서 세상 물정 몰라 갖은 고초를 겪으며 아득바득 살아남던 시절에, 자신을 구속하던 모든 것들을  방에 때려부수고 구출해준 온통 새빨간 남자를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콩닥거렸다. 비록 이런 상황을 유도한 것도 용사고, 애초에 데이트 전에 이름도 모르는 남자한테 대주게 된 것도 용사의 부탁 때문이었으나 아리는 그런 사소한 것(?)은 쿨하게 잊기로 했다.

'정인, 너무 멋있어요….'

불쌍한 아리.








저벅 저벅….

"후후후…."

아리가 작게 웃으며 용사에게 팔짱을 꼈다. 선선한 가을 바람이 한 쌍의 커플을 훑고 지나갔다. 용사의 든든한 팔뚝을 끌어안고 가슴을 밀착시킨 아리는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이것도 나쁘지 않군.'

용사가 아리에게 속도를 맞춰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공원을 산책하고 싶어요.'

데이트 코스를 짜오긴 했지만, 혹시 하고 싶은게 있냐는 용사의 질문에 아리는 의외의 것을 요구했다. 여자들에게 있어 데이트는 정말 드문 이벤트와 같았다. 그래서 모두들 가장 첫 번째로 원하는 것을 용사에게 요구했고, 용사는 데이트날 만큼은 모든 말을  들어주는 착한 남자친구가 되어줬다.

"흠흠흠~."

그렇게 좋은 거야? 낮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아리를 보고 있자니 귀여웠다. 가장 키가 크고, 성숙해 보이고, 실제로도 성숙한 성격이지만 이렇게 종종 보여주는 풋풋한 여자애 같은 모습은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는 평범한 생각도 들었지만,  평화로운 얼굴을 보니 좀 괴롭혀주고 싶다는 못된 생각도 들었다. 성적인 의미와는 별개로, 아리는 거의 독보적으로 놀리는 맛이 있는 여자였다.


아마 지구로 귀환한 후 가장 많이 변한 사람을 투표한다면, 1위는 용사일 것이고 2위는 아리일 것이다. 새침한 미라나 앙큼한 지나, 인형 같은 레이아, 몽실몽실한 델렌. 나머지 사람들은 성격 면에선 거의 달라진게 없었다. 용사는 사실 좀 억울할 수도 있다. 원래 이런 성격이고, 판타지 세계에선 어쩔 수 없이 그러한 날선 성격이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여자들은 거의 다 그런 모습에 반했기 때문에, 지구로 와서 프리하고 널널해진 용사가 변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성격도 변하고 살도 좀 찌긴 했다.

아무튼, 아리의 얘기로 넘어가면 이제는  특유의 침착함이 많이 사라졌다. 그녀도 용사 못지않게 날카로운 감이 많이 무뎌지고, 좀 더 부드러워졌다. 나쁘게 말하면 유하다거나 수동적이라거나 우유부단하다거나,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다. 거기에 더해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게 성격까지 변하게 만드는 [외강내유] 스킬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은 결과, 지금의 아리는 여러 의미로 건드리는 재미가 있는 여자가 된 것이다.

"…."

용사는 말없이 아리의 부드러운 미소를 보았다. 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용사 역시 여자들의 외모와 성격을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가끔이나마 예전의 검객 아리스가 떠오르는 차분한 모습을 보면 묘하게 마음이 동했다. 끌린다고나 할까, 희소성이 좀  커졌기에 이런 순간순간이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

….


오 분이 십 분이 되고, 한 시간이 됐다. 평일 오후의 시민 공원은 적당하게 사람들이 차있어 적당히 소란스러웠고 평화로웠다. 발발발 뛰어다니는 어린 아이들, 그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애엄마들, 정자를 차지한 노인들, 데이트를 하는 몇몇 커플들, 백수로 보이는 여러 나이대의 한량들이 용사와 아리의 눈에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지구는 정말로 평화로운 곳이다.


'좋군.'

공원의 풍경을 보며 용사가 생각했다. 이런 것이 진정한 평화다.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던 판타지 세계의 사람들이 갈망하던 이상향, 종착점. 이런 풍경을 쟁취하기 위해 용사가 소환된 것이고, 수많은 영웅들이 칼을 뽑은 것이다. 미라, 지나, 레이아, 아리스, 델렌 모두 역시 이런 세상에서 살고자 목숨을 걸고 나선 것이고, 온몸에 피를 뒤집어 써가며 싸웠던 것이다.

스윽스윽.



아까부터 충동을 참았던 용사가 결국 아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가 망가지지 않으면서도 기분 좋게 쓰다듬는 손길은 용사의 특기로, 여자들은 모두 좋아했다.

"헤…."

늘어지는 아리의 웃음소리. 왜 바로 공원을 오자고 했는지  것 같았다. 아리도 이런 따뜻한 평화 속에서 용사와 함께 있고 싶었던 것이다. 진한 남색의 긴 생머리가 찰랑거렸다. 비단결 같은 머릿결을 만지작거리니 촉감이 좋았다. 깊은 관계의 연인으로서 서로에 대한 스킨십은 더없이 자연스러웠고, 언제 어디서든 노골적인 부분을 만질 수 있는 관계이기도 했지만 용사는 일부러 그런 분위기를 만들지 않았다.몸이야 평소에도 넘치도록 탐할 수 있었으니, 지금은 잘 마련된 평화와 사랑을 즐기고 싶었다.


….



다른 여자들과의 데이트도 여기서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벤치에 앉은 용사는 자기 어깨에 머리를 기댄 아리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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