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4-2. 개입 (6)
"……."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파묻은 성민이 등을 보인 레이아에게 힘없이 말했다.
"약속은… 지켜… 꼭…."
"걱정 마십시오."
끼익, 쿵.
문이 닫히고, 밀폐된 방 안에는 자괴감과 현자타임으로 침몰한 성민만이 혼자 남게 됐다.
지금 무엇보다도 그를 괴롭히는 것은 죄악감이었다. 동영상은 맨 처음 받았던 것에비하면 훨씬 얌전한 수위였지만, 단순히 분노하기만 했던 처음과는 달리 이번에는… 그 영상으로 자위를 해야만 했다. 첫 영상을 받고 자신을 철저히 짓밟는 박민우의 극악무도함에 치를 떨었는데, 그걸로 자위를하란다. 놈의 잔인함은 끝을 몰랐다.
"하아, 하아…."
성민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눈물은 놀라울 정도로 나오지 않았다. 마치 공범이 된 듯한 기분 때문이었다. 아무리 놈에게 피임약으로 협박을 받아서 방법이 없었다지만, 누나가 남자들에게 강제로 당하는 영상을 보고 자위하는 것은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누나를 배신하는 것만 같았고, 자신 또한 누나를 범하는 놈들과 다를게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영상의 내용은… 일종의 수면 플레이였다. 자연스럽게 누나와 처음 맺어진 그날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마치 마법처럼 정체 모를 미지의 힘에 조종 당하는 듯한 아찔한 기분을 느끼면서도,내심 원했던 대로 무방비하게 잠든 누나를 덮쳤고, 범했다.
그날 처음으로 누나의 몸을 이용해 사정했었다. 지금도 그 황홀한 감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누나와의 잠자리는 어떤 말로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극상의 피부와 감춰져 있었던 속살, 콧속으로 파고드는 여인의 향기, 찌부러트릴 기세로 조여오는 엄청난 구멍의 압박.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이 황홀해졌다. 그리고 그만큼 지극한 불쾌감이 뒤이어 올라왔다.
"시발."
이젠 다른 남자들이 누나의 몸으로 그 황홀한 쾌감을 느끼겠지.
….
'만약에, 만약에. 혹시라도….'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불쾌한 상상.
아리 누나는, 잠든 사이에 자기를 범한 강간범을 자비롭게 용서해줬다. 그리고는 오히려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며 며칠 내내 진득하게 즐겼다. 따지고 보면 지금 상황도 그림이 아주 다르진 않았다.
만약에라도, 만에 하나라도 누나가 자신을 강간한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준다면…. 그땐 어떡하지?
어떡하긴, 쓰레기 새끼야!
성민은 속으로 자신에게 윽박질렀다. 무심결에 상상조차 해선 안 될 불쾌한 미래를 떠올렸다.
"시발… 씨발."
그는 사람이 얼마나 간사하고 이기적인지를 실감하는 중이었다. 정신적으로 구석에 바짝 몰리자, 무의식 깊은 곳에서 수많은 방어 기제들이 솟아나와 성민을 보호하려 들었다. 문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누나가 임신하건 말건, 당장 내가 죽겠으니 그냥 다 잊어버리자는 생각은 그나마 귀여운 축에 속했다. 방금 전처럼 저도 모르게 누나를 아무 남자하고 자도 상관 없는 음탕한 여자로 몰아가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분명 누나를 사랑함에도, 다른 여자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정말 쓰레기 같지만, 새로운 여자인 레이아를 떠올릴 때마다 힘든 시간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처음엔 죄책감 때문에 억지로 레이아를 머릿속에서 흩어 버렸지만, 점점 생각을 통제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럴 때면 빛을 더 밝은 빛으로 가리듯이 아리 누나를 떠올렸으나, 요즘은 내성이 생기기라도 했는지 효과가 시원찮다. 원인은 대충 짐작이 갔다. 레이아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외모를 가졌다는 점이 문제일 것이다.
레이아…. 그래봤자, 걔가 아무리 예뻐도 아리 누나에 비하면….
비하면….
…딱히 꿀리진 않잖아?
까맣게 타버린성민의 마음이 순식간에 보랏빛으로 가득찼다. 지친 소년은 홀린 듯이 유일한 위로감인 보랏빛 여자애를 떠올렸다.
'그건 그래.'
아무리 생각해봐도, 레이아. 그 여자애는 좀….
돌처럼 보기엔 너무나도 빛나는 여자였다.
한아리. 아리 누나를 처음 본 순간, 자기 인생에 있어 가장 예쁜 여자를 보았노라고 확신하고 또 확신했다.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이상적인 미녀조차 가볍게 뛰어넘는 그 얼굴과 몸매, 그리고 목소리와 향기까지. 오감을 전부 만족시키는, 모든 것이 완벽한 여자는 생전 처음이었다. 대학교 축제를 구경 갔을 때 실물로 봤던 아이돌은 아리 누나에 비하면 일반인 수준에 불과했다. 심지어 누나는 별로 꾸미지도 않는 수수한 스타일임에도 그 정도였다.
아리 누나 같은 여자는 죽는 날까지 절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지금은 분명 흔들리고 있었다.
레이아. 걔는 뭐랄까, 말로는 도저히 설명을 못할 마성의 매력이 있었다. 물론 외모가 완벽했기에 그렇게나 강하게 남자를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아리 누나는 동양과 서양의 장점을 모아놓은 듯한 완벽한 혼혈 미인 같은 느낌을 줬는데, 레이아도 따지고 보면 완벽한 혼혈 미인 느낌이었다. 물론 둘의 스타일은많이 달랐다. 아리 누나는 키나 가슴 등 몸 쪽이 육감적인 서양인 같았고, 레이아는 동양 미소녀의 외모에다가 서양의 색을 잘 입힌 듯했다. 그 인형 같은 얼굴은, 아무리봐도 좀만 덜 딱딱했으면 상당히 귀여웠을게 분명했다.
비유하자면 아리 누나는 태양 같았고, 레이아는 달 같았다. 완전히 다른 매력을 가진 둘을 비교하는건 불가능할 뿐더러 의미도 없었다.
보랏빛. 달.
표정도 항상 차분하고 생각이 많아 보였으며, 말투도 흔들림 없이 청아하고 또박또박하다. 얼굴은 조각한 것처럼 세밀하고 부드러운 선을 그렸으며, 사실 몸매도 비교 대상이 아리 누나여서 그렇지 상당히 잘 발달되어 있었다. 어디서 빠지는 몸매가 절대 아니었다. 과하지 않고 조화로운 선에서 최대치로 발달된 느낌이었다. 키는 여자 평균보다 작긴 하지만 모델처럼 완벽한 비율과 몸매를 가졌기에 전혀 작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 자위하라고 재촉하며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자지를 주물럭 거렸을때, 사실 좀… 두근두근 하면서 꼴렸다. 이성의 성기를 앞에 두고도 덤덤한 무기질적인 태도에서 오히려 퇴폐미가 느껴졌다. 아리 누나에게선 느낄 수 없었던 어두운 색감의 매력이었다. 성민은 그 특이한 매력에 끌리지 않았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레이아….'
소년은 결국 또 한 가지를 스스로에게 고백하게 되었다. 무의식적으로 떠올랐던 생각을 아까는 억지로 수면 밑으로 눌러버렸지만, 지금은 왠지 생각해도 상관 없을 것 같았다. 갈라진 틈으로 물이 빠져나가듯이, 균열이 생긴 마음은 빠르게 공허해져 갔다. 뭐라도 채워넣고 싶었다. 그게 설령 나쁜 마음이라 할지라도.
그래, 맞아. 성민은 홧김에 인정해 버렸다.
사실 아까 아리 누나의 영상을 보고 자위할 때, 레이아가 신경쓰였다. 꼴렸다기보단, 시야 언저리에 걸쳐있음에도 줄어들지 않는 그 존재감이 자꾸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상식적으로, 고추를 흔들며 자위하는걸 여자애가 떡하니 서서 보고 있는데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성애(性愛) 이외에도 사람으로서 순수한 관심이 갔다. 쟤는 정말로 개의치 않는 걸까. 의식이 되지 않는 건가. 이런 일이 익숙한 거야?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슨 사연이 있을까 등등….
'여차하면 자위하는걸 도와주겠다.'
툭 던지듯 가볍게 레이아가 건넨 말. 그 말이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항상 진지한 표정 때문에 빈말인지 진심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말의 의도가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하기야, 그녀는 첫 만남부터 쭈욱 신경 쓰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인정한다.
"후우…."
대체 뭐가 뭔지.
박민우는 저런 예쁜 애를 도대체 왜 여기로 보낸 건지. 함정인가 싶기도 했다. 진짜로 레이아에게 도움을 받으면 어떤 불이익이라도 받는 건가. 근데 여기서 상황이 더 나빠질 수가 있나? 사랑하는 아리 누나는 놈들에게 강제로 범해지고 있었고, 자신은 자유를 잃고 감금당해서 누나의 영상으로 자위해야 하는 비참한 상황.
"하, 시발. 모르겠다…."
성민은 한숨과 함께 독백한 후, 사정 후의 피로감에 휩쓸려 생각을 그만뒀다. 정신적으로 많이 피곤했다. 몸이 늘어지고 눈이 저절로 감긴다. 드디어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성민은 내심 기뻐서, 잠드는 와중에 무의식적으로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
성민의 무의식에 내재된 방어기제는 음울한 괴로움을 몰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방법을 모색했고, 마침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레이아라는 여자를 계속해서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레이아에 대한 생각은 점점 퍼져나갔고, 머릿속에서 한아리의 비중을 조금씩 줄여나갔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레이아가 건 마법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법은 그저 가능성만을, 여지만을 남겨줬을 뿐이다. 성민이 레이아에게 별 생각이 없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납치된 한아리를 두고 새로운 여자에게 신경이 쏠린다. 그게 나쁜 건지, 남자로서 자연스러운 건지에 대한 양심의 잣대는 차치한다고 쳐도, 소년의 겉과 속은 점점 괴리가 심화되고 있었다. 범죄까지 저지른 자신을 받아들여준 자애로운 한아리에 대한 의리와, 이 괴로운 시간을 알게 모르게 잊게 해주는 레이아에 대한 관심. 소년은 외면적으로도 한아리 때문에 괴로워 하다가, 어느 순간 멍하니 앉아 레이아를 생각하고 있는 이중적인 행동을 보였다.
감정 없이 결과만 기계적으로 도출한다면, 성민이 느끼는 극심한 괴로움은 확실히 반감되는 면이 있었다. 레이아가 없었다면 남성민은 한아리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비롯된 극심한 스트레스를 온전히 다받았을 것이고, 그것은 확실히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을 것이다.
소년의 생각이 어찌됐건, 결국 모양새는 여자로 여자를 잊는꼴이었다.
그러나 성민은, 그사실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외면했다. 아직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