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3화 〉#4-2. 개입 (8) (73/162)



〈 73화 〉#4-2. 개입 (8)

"……."

성민은 당장이라도 마음 속에 있던 감탄과 극찬을 쏟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걸 말하는 순간,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리 누나에 대한 의리도 그렇고, 레이아와의 관계 역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게 분명했다. 소년의 입은, 본심과 다른 말을 억지로 내뱉는다.

"우리는… 이럴 관계가, 아니잖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성민은 참고 또 참으며 무겁게 말했다. 항상 냉정하고 침착한 레이아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감정이 떠올랐다. 왠지 슬퍼하는 듯한  표정에 성민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렇군요…."

힘없어 보이는 얼굴에 성민은 위로를 건네고 싶었으나, 이제와서 그러는 것도 좋지 않은 행동이었다. 레이아는 힘이 쭉 빠진 건지 터덜터덜 물러나, 침대 끝자락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전히 성민과 가까웠으나, 방금 전처럼 서로 손 뻗으면 닿는 거리는 아니었다. 레이아는 그렇게 애매한 거리에서 말했다.


"제가 왜 여기로 파견됐는지, 혹시 아십니까."

"그야…. 날 감시하기 위해서…."

"바보."

갑작스레 욕을 들은 성민이 말 그대로 바보처럼 벙찐 표정을 지었다.

"감시는 거실에 이미 있잖습니까."

"그럼…. 내가 자…위를 하는지 감독하고 보고하기 위해서…."

"제가 속이 터질 것 같군요. 그냥 이쪽에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어? 응… 그래…."

바가지 긁히는 남편처럼 쪼그라든 자세로 성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아는 마음이 상했는지 성민 쪽을 보지 않고, 허공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전 만약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파견됐습니다. 애인이 납치되어 강간당하고, 자신은 감금당해 꼼작도 못하고 그 참사를 지켜봐야 한다. 그런 상황이라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도 충분히 높으니까요. 사고가 터지면 이쪽 입장이 굉장히 난처해집니다. 아시다시피, 박민우 님은 뒤가 아주 아주 구리니까요."

"…."

"애인의 영상으로 자위? 솔직히  농간에 순진하게 넘어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건 박민우가 그냥 당신을 조롱한 겁니다. 약오르라고요. 만약 진짜로 자위하신다면… 어?  봐라. 진짜로 하네. 와, 진짜로 한다. 푸하하…. 대충 이런 의도였습니다."

잠자코 듣던 성민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조차 나지 않는 진귀한 경험을 하며 입을 벌렸다. 그 반응을 본 레이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렇게 순진하고 둔하시니, 직접적으로 말씀드려야 하겠군요. 제가 파견된 이유는 당신을 위로해주는 겁니다. 네, 여자로서요."

"……진짜로?"

아찔한 뒷말에 소년의 눈이 화등잔이 됐다. 레이아의 짜게 식은 눈빛은 마치 미련 곰탱이라고 매도하는 듯했다. 그러나 성민은 그녀의 말 하나하나에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큰 충격을받았기에, 민망해할 심적 여유가 없었다.


"제가 집안에서 하루 종일 꾸미고 있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레이아는 자기 옷을 강조하며 물었다. 듣고 보니 납득이 갔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도 예쁜 민소매 폴라티를 입고 있었고, 그 뒤에도 교복처럼 보이는 세일러복이라던가, 몸매가  드러나는 얇은 옷을 입기도 했고, 지금은 오프숄더로 어깨가  드러나 있었다. 아래로는 맨다리에 짧은 스커트만 입은 상태였다. 얼굴 역시 진하진 않지만 화장기가  있었다.

여자가 치장에 얼마나 신경쓰는지 대충 알고 있었기에, 성민은 레이아가 집에만 있으면서 굳이 그런 수고를 해온 이유가 궁금했었다. 설마, 그게 자신을 유혹하는 것이었을 줄이야….

"박민우는 지저분한 만큼 뒤처리가 깔끔한 스타일입니다.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잘 쓰지요. 채찍보단 당근을 많이 쓰는데, 보통은 '향락'이라는 '당근'으로 뒤처리를 합니다. 목표가 남자일 경우, 남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술과 여자를 베풀어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겁니다. 얼추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뭐, 그렇지."

민성에게서 친구들이 전부 박민우 쪽으로 넘어갔음을 들었기에, 성민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처리 대상에는, 당신 역시 포함돼 있습니다."

"어?나? ……잠깐. 설마."

술과 여자. 여기에 술은 없으니 소거하면, 하나가 남는다. 성민은 레이아를 마주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내가 생각하는게 맞냐고 눈빛으로 물었다.


"네. 지금 생각하신게 맞습니다. 제가, 당신을 달래줄 '당근'입니다."

"…."

충격적인 진실.


침묵이, 이어졌다.



시간은 빠르게 가기도, 느리게 가기도 한다. 성민은 마치 몇십 분을 침묵 속에서 보낸 느낌을 받았으나, 실제로는  분도 되지 않았다. 가슴이 무거웠고, 그와 동시에 묘한 기분이었다.

여러 가지 질문을 했고, 레이아는 모두 대답해줬다.

실제 상황이라 믿었던 것 중 많은 것이 하나의 농락에 불과했다. 한아리의 동영상으로 자위를 하라는 것은, 일종의 조롱이었다. 피임약은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 당연히 주는 것이었고, 자위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예쁜 레이아가 눈에 들어올테니 그녀를 안을 것이라는게 박민우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공범이 되면, 남성민도 별  없을 테니 나중에 귀찮게 굴 수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레이아가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자초하긴 했다. 그녀는 괜한 자존심에 박민우의 명령을 몇 가지 무시했다고 한다. 원래 레이아의 역할은 단순히 자위를 도와주는게 아니라, '사정'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두 말은 실제로 들으면 뉘앙스가 크게 달라서, 레이아가 명령대로 말을 했다면 다소 둔하게 굴었던 성민도 무슨 뜻인지 눈치챘을 것이다. 또한 성민을 유혹하라는 명령도 수행하지 않았다. 레이아는  말을 하면서도, 설마 성민이 넘어오지 않을 줄은 몰랐다고 고백했다.

'죄송합니다. 제 잘못인데 괜히 화풀이를 했군요. 이렇게 딱딱하게만 굴어놓고 여자로 보이길 바랐다니, 제가 바보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레이아를, 성민은 이번에도 위로하지 못했다. 레이아가  사이에 있었던 선을 훌쩍 넘어왔기에, 조금도 움직일  없었다. 만약 움직인다면… 이제까지 참아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것 같았다. 소년은 아리의 얼굴을 억지로 떠올리며 눈앞의 소녀를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설마 이렇게 일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정적이 깨지고, 레이아가 말했다. 그녀는 독백하듯,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저는 명령받은 것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군요. 결국, 당신을 유혹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애초에 유혹하는 역할은 제게 어울리지 않았어요."

"…으음."

성민은 애써 말을 삼켰다. 아니라고, 사실 엄청난 유혹이었고, 조금만  있었다면 넘어갔을 거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동안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이만…."

"자, 잠깐."

갑자기 꾸벅 인사를 하는 레이아. 그녀의 행동에 당황한 성민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붙잡았다. 이번에는 성민의 그 잘난 인내력이 작용하지 못했다.

"가는 거야?"

"네. 저는 당신을 유혹하는 목적으로파견된 건데, 실패했으니 돌아가야죠. 저는 가지만, 아마 다른 여자가 파견될 겁니다. 저보다 훨씬 대담하고 노골적이겠죠."

"…너는, 어떻게 되는데."

그녀에게서 책임이니 뭐니 하는 말을 들었기에, 성민은 레이아의 처사가 궁금해졌다. 레이아는 씁쓸함과 더불어 약간의 원망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마치 네가 쫓아내놓고 뭘 묻느냐는 듯했다.

"불이익이 있겠죠. 비서 역할도 제대로 못 한다면, 제게 뭐가 남겠습니까. 어쩌면, 저도 당신에게 보내진 영상 속에 나올 수도 있겠네요."

성민은 불현듯 영상에서 본 다른 여자들이 떠올랐다. 아리 누나의 주변에서 벌어졌던 난교. 레이아의 뒷말이 암시하는 것을 눈치채자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했다.

"…레이아, 잠깐만. 잠깐 거기 앉아 봐."

이건 아니야.

처음엔 레이아가 괘씸했다. 박민우의 수족으로 행세하며 무력해진자신을 조롱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안쓰럽기도 했다. 이렇게 예쁜 외모에, 나이도 어려 보이는 애가 지저분한 박민우의 밑에서 일하는게 불쌍했다. 상처를 건드릴 수도 있었기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물어보진 못했지만, 적어도 편안하진 않았을 것이다.


불이익.


덤덤하게 말했지만, 박민우가 해왔던 짓을 보면 절대 단순한 불이익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성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보지 않았는가. 놈이 여자를 얼마나 험하게 다루는지. 너무 아름다워서 경외심마저 드는 한아리도 놈의 성격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반항한다는 이유로 뺨이나 배를 맞기도 하고, 성적인 괴롭힘으로 여자로서의 자존심을 짓밟기도 했다. 한아리가 그랬듯, 레이아 역시 놈의 손속을 피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이건… 아니야."

성민은 생각했었다.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은 본인이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리 누나는 자기 때문에 끔찍한 일을 겪었고,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었다. 만약 민성에게 아리 누나의 사진을 보내지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까지되진 않았을 것이다. 자랑하려는 그 마음을 조금만 억눌렀다면… 미래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레이아도 마찬가지다. 이대로 그녀를 보낸다면… 그녀에게 일어날 일은 불보듯 뻔했다. 그녀의 임무는 자신을 유혹하고, 입막음을 하는 것이다. 박민우에게 있어선 나름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실패한 그녀는, 여자로서 끔찍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겠지.

더 이상 남이, 특히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자신으로 인해 고초를 겪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레이아가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유혹했다면, 성민은 모질게 마음을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리 누나가 처한 상황을 끝없이 되새기면서, 음란한 유혹을 극복해냈겠지. 그러나 레이아가 보여준 모습은 좀 특이하긴 하지만 그녀를 하나의 사람으로, 인격체로 보이게 만들었다.


성민을 지탱하는  안 되는 심적 자원인 '이타심'이, 굳건하게 정상에 자리잡고 있던 한아리와의 '의리'를 점차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레이아를 여자로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는데, 그녀를 외면해 버리면 그녀는 끔찍한 일을 당할 것이다.


마음의 저울이 냉정하게 두 마음을 측량했다. 레이아를 외면하고 아리 누나와의 의리를 지키면 무엇이 남는가. 나중에 누나가 돌아왔을 때, 누나를 조금 더 당당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겠지. 레이아를 받아들인다면. 적어도, 한 사람을 진흙탕에 빠트리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심지어, 그녀에게 마음도 조금 있었다.

"후우우…."

마음을 결정한 성민이 호흡을 길게 내쉬었다. 레이아를 살린다고 생각하자. 자신이 인내심이 조금 모자라서 넘어갔다고 생각하자.


'모르겠다.'

저도 모르게 떠오른 한아리를, 처음으로 머릿속에서 걷어내면서 성민은 결의에  눈빛으로 레이아를 응시했다. 그녀는 더 이상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는데, 꽤나 우울한 분위기였다. 이제까지 했던 얘기로 보아, 실패로 인한 자존심의 상처와 미래에 대한 암담함이 마음을 무겁게 했으리라.

"레이아."

"…네."

"너는 어때?"

"뭐가요."

"나를 유혹하는 역할이라며. 싫거나, 그러진 않아?"

레이아는 잠시 말이 없다가, 굳이 그걸 묻느냐는 투로 답했다.


"제가 왜 여기있겠습니까. 그나마  길이 제게 최선입니다. '별장'의 여자들이 어떤 처지인지는, 대충 아실 텐데요. 사실 즐기는 여자들이  많긴 하지만, 저는 그렇지 못해서."

"…그렇구나."

성민이 본 레이아는 성격은 좀 특이하긴 하지만,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여자애였다. 그런 정신없는 난교 파티에 제정신으로 어울리진 못할 것이다.

왠지 자신감이생긴 성민은 대담하게 질문했다.

"나도 너한테 하나만 질문해도 될까?"

"네."

"너는 내가 어떻게 보여? 남자로서 말이야."

"…."

둘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레이아의 눈빛은 분명 방금 전에 비해 활기가 돌았다. 성민처럼 눈치가 아주 없는게 아니었기에, 그가 말하는게 무엇을 암시하는지 알아챈 것이었다. 그녀의 안색이 조금 밝아지자 성민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일단 첫인상은, 평범합니다."

"……나쁘진, 않다는 거네."

묘한 기분이 들었으나 성민은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근데 눈치가 좀 없으시고, 은근히 우유부단하시죠. 여자 입장에선 피곤한 스타일입니다."

이어지는 연타에, 성민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레이아는 씨익 웃으며, 이전과는 다른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성격은 자상하신 것 같고, 사람에 대한 의리도 강한 편이십니다. 인간적으로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하체가 튼실해서, 남자로선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성민의 하반신을 전부 보았던 레이아는, 모처럼 솔직한 마음으로 얘기했다. 야한 얘기를 하는 것 치고는 담담한 말투에, 오히려 성민이 뒤늦게 얼굴을 붉혔다.


다소 분위기가 풀어지자 성민이 결심한듯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레이아. 지금이라도…."

"잠깐만요."

어느새 다시 거리를 좁힌 레이아가 성민의 입을 막았다. 중요한 말을 하려다 끊긴 성민의 표정에 레이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게 '임무'를 완수할 기회를 주시면 안될까요?"

"임무?"

"…유혹 말입니다."

그녀와 굉장히 안 어울리는 두 글자. 성민은 오랜만에 편한 마음으로 피식, 작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얼굴은 새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 것처럼 여전히 하얬으나, 말끝을 흐리고 시선도 피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 부끄러워 하는  같았다. 지금의 분위기와 그녀의 엄청난 외모를 생각해보면, 남자를 먼저 유혹한게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그래, 좋아."

"그럼…. 눈을 감아주십시오."

성민은 레이아의 주문대로 눈을 감았다. 스윽, 스윽. 침대에 전해지는 무게감을 통해 그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소년은 마치 첫사랑을 맞이하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움직임이 멈추고, 소년의 얼굴을 작고 섬세한 손이 천천히 감쌌다.두근두근두근.

요동치는 심장박동을 몇십 번 정도 느낀 후, 성민은 입술을 덮는 따뜻하고 촉촉한 감촉을 느꼈다.

쪼옥.

그의 입술을 꾹 누른 레이아의 입술이 잠시 떼어졌다가, 다시 꾹 눌러왔다. 이번엔 입술을 완전히 겹치는 뽀뽀가 아니라 대각선으로 파고들어오는….


츕, 츕, 츕….

달콤한 키스였다.


성민은 레이아의 어색한 유혹에, 단단히 넘어가 버렸다. 소년의 세계에 남은 것은 현재진행형으로 입술과  안을 끈적하게 유혹하는 레이아의 말캉한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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