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4-2. 개입 (22)
용사의 등장. 아리스는 혼곤한 와중에도 반가운 얼굴을 보고 정신적인 오르가즘을 느끼며 활짝 웃었다. 정말 보고 싶었지만, 차마 '플레이'를 깰 수 없어서 애가 탔는데 기적처럼 눈앞에 등장하니 다시 한번 또 그에게 반해버렸다. 사실 맨날 봐도 맨날 반한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항상 그랬다. 아리스는 용사의 연인이자 열렬 팬인 다섯 명의 여자들 중에서도 콩깍지가 가장 세게 낀 여자였다.
레이아가 내면의 변화를 겪은 후 바뀌어가고 있는 것처럼, 아리스 역시 처음으로 이런 강렬한 경험을 하며 예전과 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변화가 꼭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까지의 생각과 관점, 행동을 부정하는 일이었으므로 마냥 기쁜 마음을 갖기는 힘들었다. 그저 들이대면 벌려주는 선에서 끝났던 그녀는, 이제는 더 나아가서 남자들에게 아양을 떨고 자지를 애원하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섹스가 끝난 후엔 이래도 되나 하는 마음이 들어 불안했고, 힘이 있음에도 없는 것처럼 얌전히 당해줘야 하는게 답답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눈치 없이 올라오는 쾌감과 달아오르는 몸은… 오히려 마음을 더 혼란스럽게 할 뿐이었다.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확신이었다.
마치 바다 위에 표류한 채 파도가 떠미는 대로 흘러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무섭고 불안한 감정도 있었다. 다만 같은 편 한 명 없이 혼자 있었기에, 약한 모습 만큼은 절대 보이지 않으려고 불안감을 참았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키는 가장 나쁜 선택지였으니까. 아리스는 워낙 심지가 강한 여자다보니 마음 고생이 극심했다고 말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용사가 많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용사를 다시 만나면서 느낀 감정은 쾌락에 가까운 안정감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감정을 느낀 아리스는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지극한 사랑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죽도록 반갑게 끌어안았다. 감정을 다 표현할 엄두가 나지 않아 비맞은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는 소리도 냈다. 용사는 귀여웠는지 슥슥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스윽, 스윽.
한 차례의 격렬한 정사를 마친 연인은 매트 바닥에 같이 누워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비록 매트 위는 여전히 온갖 체액과 체액이 말라붙은 허연 자국으로 가득했지만, 둘 다 그리 신경쓰지않는 모양새였다. 여러 경험 덕분에 비위가 좋은 둘은 이 정도 쯤은 별로 찝찝하지도 않을 뿐더러, 몇몇 정액 줄기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아리가 흘린 땀과 애액이었기 때문에 용사는 특히나 그게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스러웠고, 이게 현재 상황에 어울리는 무대라는 생각마저 했다.
"……."
"……."
둘은 옆으로 마주보고 누운 채 서로의 눈을 보면서 여러 얘기를 했다.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내용이었으므로 혹시 누가 들을 것을 염려해 속삭이는 것보다도 더 작게 말했다. 물론 마나 유저인 둘은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남성민, 한아리, 그리고 박민우. 세 명의 주역을 포함한 이 일련의 사건들은 일진들 끼리의 다툼 같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다. 폭행, 협박, 납치, 감금, 강간… 하나만으로도 뉴스 감인 커다란 사건이 모이고 모여서 거대한 죄악이 되었다.
아리스는 이번 일이 자신의 손을 떠났음을 진작부터 인지하고 인정했다. 레이아의 개입에 반감이 들기는 커녕 오히려 반가웠다. 일이 너무 커져서 이걸 조용히 수습하려면 마법이 필요했으니까. 경찰 조사나 법원 출석 같은 피곤한 일은 녀석들에게 강간 당했던 것보다도 더 거부감이 들었다.
'이게 뭐람.'
모처럼 마음 먹고 네토 플레이를 하다가 엄청난 사건에 휘말렸다. 억울하기도 했지만 책임감도 들었다. 가장 큰 원인은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마구 엉켜버린 실타래를 푸는 일은 레이아가 맡게 됐다. 오직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아리스는 현역 시절 최고의 검객으로서 이름을 날렸으나, 지구에선 철과 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리고 설령 유혈 사태로 해결할 수 있었더라도 검을 뽑진 않았을 것이다. 그토록 원했던 평화로운 일상을 얻었는데 이까짓 일로 손에 피를 묻히긴 싫었다. 이건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레이아에게 미안한 만큼,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하기로 했다. 용사의 말에 의하면, 레이아는 불안정한 성민을 진정시키고 기억을 조작하겠다고 했다. 그때까지 해줘야 할 일은, 성민과 레이아에게 불똥이 튀지 않도록 이곳에 얌전히 있는 것이었다. 모든 관심을 자신에게 집중시켜야 한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정신적으로 좀 부담이 되긴 했지만, 용사와 만나고 힐링한 그녀에겐 무서울게 없었다. 남자들에게 시달릴 생각을 하면 좀 피곤하긴 했지만, 막 다뤄지는게 처음도 아니고 콜로세움 시절에 비하면 귀여웠다. 육체적 부담은 처음부터 큰 문제가 아니었다.
유일한 육체적 부담이라면 쾌감일 것이다. 수십 번의 오르가즘 때문에 허리가 빠질 것 같은 느낌을 받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쾌감이니까 좋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는 자신의 역할을 인지하고 다시금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정인….'
마음을 다시금 다잡은 그녀는 자신의 우상이자 연인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냥, 너무 좋아서 볼 때마다 어쩔 줄을 모른다. 설령 그가 봐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
이곳에서 용사의 신분은 따로 있었다.
한영수. 박민우의 친구. 박민우가 물어온 여자들 중 역대급이라는 말을 듣고 한아리를 따먹으러 호다닥 달려온 녀석. 그런 설정이었다. 레이아의 적절한 도움으로 만들어진 위조 신분이었다. 이 별장에 계속 죽치고 있어도 의심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용사가 아리스를 직접 구출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저 옆에서 지켜봐주고 그녀에게 힘이 되어줄 뿐. 그의 말에 의하면 원래는 이렇게 찾아올 생각도 없었다고 한다. 큐피드로 관음하면 되니까. 하지만 레이아가 밀어붙였고, 위조 신분까지 만들어주자 어쩔 수 없이 왔다고 한다. 아리스는 레이아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여자여서 그런지 자기 마음을 잘 알아주는 레이아가 너무 예쁘고 고마웠다. 어차피 남의 도움으로 일을 끝맺을 생각은 없었기에, 용사의 관망에 대한 섭섭한 마음은 전혀 없었다.
쪽.
두 입술이 맞닿아 소리를 냈다. 야하고 진득한 키스 만큼이나 감미로운 버드 키스. 둘의 눈이 다시 한 번 마주쳤고, 잔잔한 수면에 파문이 일어난 것처럼 서로의 눈동자에 사랑이 퍼져가는 것을 보았다. 사랑이 가득한 한 차례의 눈빛 교환.
그리고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둘의 행동이 갈렸다. 아리스는 그대로 매트에 누웠고, 반대로 용사는 일어났다. 둘이 떨어진 직후, 묵직하게 울리는여러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끼익.
"영수야. 슬슬 교대하자. 우리도 좀 박아야지."
"어. 그래."
"얘 진짜 개쩔지 않냐? 이렇게 박아도 아직도 콱 조이잖아."
"좋을 때 존나 박아주자고. 이러다가도 갑자기 헐어버릴 수 있으니까."
"좋은 시간 보내라."
"엉. 가서 쉬어."
남자들이 아리에게 가까워졌다. 문쪽으로 움직이던 용사는 그들을 지나친 후, 고개를 살짝 돌려 아리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네토라세의 쾌감을 기대하는 용사의 탁한 눈동자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둡고 탁하고 음습한 욕망으로 시커멓게 물들어 있는 눈빛. 평범한 여자였다면 그 이질적인 눈빛에 놀라, 설령 연인이라 할지라도 본능적으로 기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용사 만큼이나 탁하고 지저분한 욕망에 휩싸인 아리는, 마찬가지로 음습한 욕망에 휩싸인 눈빛을 자신의 연인에게 보냈다. 어둡고 탁한 한쌍의 남녀의 욕망이 교차한다.
모순적이게도, 지금 둘은 서로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