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4화 〉#4-2. 개입 - 에필로그 (2) (94/162)



〈 94화 〉#4-2. 개입 - 에필로그 (2)

--아리스--

아리스, 한아리. 171센티에 달하는 우월한 신장과 모델 비율. 전체적으로 쭉쭉 뻗은 늘씬한 체형.  발달된 가슴과 골반. 이목구비 역시 아주 우월하고, 몸도 잘 관리되어 탄탄하고 탄력있다.  클래스 연예인들과 같이 서있어도 밀리기는 커녕  돋보일 정도. 말 그대로 최고의 여자였다. 거리를 돌아다니면 남자들이 마치 꽃으로 향하는 벌처럼 꼬여든다.

그런 그녀는 현재, 며칠째 집에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을 않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무아지경] 스킬을 사용했기에 잠시 휴식기를 갖는 것이었다. [무아지경] 스킬은 한 번 사용하면 차곡차곡 모아놓은 '기'를 모두 증발시켰기에, 이후 한 달 정도는 사용하지 못한다. 그런 상태에서 함부로 밖에 돌아다니다가 박민우 같은 놈에게  잡히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 조심도  겸,  시간을 남자들에게 시달렸으니 휴식도 할 겸 해서 아리스는 용사와 함께 집에 머물고 있었다. 앞으로도한동안은 집에 얌전히 있거나, 돌아다녀도 용사나 다른 동료와 함께 움직일 계획이었다.


나름 육체파인 그녀는 좀 답답하긴 했으나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사실 몸이 찌뿌둥하긴 하지만, 사소한불만을 압도하는 훨씬 큰 이득이 있었다. 용사를 독점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지금 다른 여자들은 네토 플레이를 하느라 부재중이었고, 용사의 옆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아리스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용사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원래는 레이아도 같이 있어야 했으나, 그녀는 할 일이 있다며 어딘가로 떠났다. 하루만 갔다 오겠다고 했으니 오늘 중엔  것이고, 아리스는 만 하루 하고도 반나절 동안 용사를 독점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쪼옥, 쪽.

"아리스, 애 같아."

"헤헤헤, 정인…. 으으응…."

평소엔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그녀였으나, 보는 눈이 없는 상태에서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용사와  둘이 있으니 마치 엄마한테 껌딱지처럼 달라 붙은 애 같이 굴었다. 용사는 귀엽다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번이고 뽀뽀해줬다. 아기처럼 환하게 웃는 표정만 봐도 그녀가얼마나 행복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거의 2주일은 되는 시간 동안 다른 남자들에게 마구 범해졌던 아리스는 당분간은 섹스할 마음이 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용사와의 잠자리는 예외였다. 몸이 아니라 마음에 농도 짙은 쾌감이 마구마구 쏟아지니까. 게다가 모처럼 용사를 독점할 기회가 왔기에 섹스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둘이서 온종일 엉겨붙을 기회는 결코 흔하지 않았다.

더럽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농후하게, 그리고 수없이 돌림빵 당했던 별장에서의 나날은 짐승의 교미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짐승이 더 깔끔할 정도였다. 사실 그런 섹스를 아리스는 딱히 싫어하진 않지만, 너무 정도가 지나쳐서 힘들었다. 튼튼한 몸을 가진 마나 유저인 아리스는 주먹이나 몽둥이로 마구 두들겨 맞는 것보다 그때처럼 쾌락에 몇날 며칠을 시달리는 것이 더 힘들고 혼이 쏙 빠지는 일이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의 섹스는 뱀이 얽혀 교미하는 것처럼 끈적하고 느릿하고 여유로웠다. 아리스는 목구멍과 앞구멍 뒷구멍에 하루 종일 박혔던 것에 은근히 익숙해져서 놀고 있는 다른 구멍들이 허전하다는 느낌마저 받았지만, 그래도 역시 정인과 사랑을 나누는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몸만 혼자 좋아했던 별장에서의 난교와는 확실히 달랐다. 마음도 편안했고, 그러면서도 사랑으로 몸과 머리가 뜨끈뜨끈했다. 눈과 코, 입, 귀, 살갗까지.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감각에서 사랑과 쾌감을 얻을 수 있었다. 용사를 보기만 해도 좋고, 그의 향기도 감미로웠고, 입으로 용사의 입이나 피부를 맛보는 것도 좋았다. 귓가를 간지럽히듯 파고드는 낮은 미성과 연인의 신음소리, 촉감으로 느끼는 모든 감촉들.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기분 좋았다.


"헤헤…."

바보처럼 헤헤 웃기만 하는 아리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했다.

….

띠릭. 삑삑삑삑….


"레이아."

마나를 거두고 있던 아리스와는 달리 예리한 감각을 유지하던 용사는 도어락을 열고 들어온 사람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맞혔다. 굳이 감지할 것도 없이, 지금 집에 문 열고 들어올 사람이 레이아밖에 없긴 했다.


"아…."

용사와 함께 서로를 끌어안고 평온하게 낮잠을 잔 아리스는 천국 같은 시간이 끝나면서 아주 조금 아쉬운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충분히 즐겁고 행복했기에 이내 쿨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옷을 대충 입었다. 한쪽 어깨가 다 보이는 목 늘어난 흰색 반팔 티셔츠와, 용사가 말은 안 해도 은근히 좋아하는 검은색의 돌핀 팬츠. 슬슬 패딩 입고 다니는 싸늘한 바깥 날씨와 어울리는 복장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눈호강은 보장되는 차림이었다.


그렇게 입고 나간 아리스는 현관에  레이아와 눈이 마주쳤다.

"저… 레이아…?"

항상 착 가라앉은 레이아의 보랏빛 눈동자. 그러나 그 진한 색의 눈동자는, 오늘따라 유독 어두워 보였다.



--레이아--

"하아…."

깊은 한숨. 레이아는 꼬인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짐작도 가지 않아 막막함을 느꼈다.


….


하루 동안의 기억이 없었다. 분명 남성민에서부터 별장, 박민우까지 뒷처리를 끝낸 후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피곤해서 금방 잠들었는데, 깨어나고 보니 낯선 공간에 누워 있었다. 시간은 하루가 지나고도 더 가서 점심 시간대였다.


몽롱하던 정신이 화들짝 놀라 깨어났고, 이내 이 공간이 모텔의 어느 객실임을   있었다. 몸의 감각이 돌아오며 자각한 것은 뱃속에 들어있는 뜨끈뜨끈한 액체의 감촉이었다. 사정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정액이 꿀렁꿀렁, 그녀의 자궁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니?'

레이아는 당황스러웠다. 분명 집에서 잠들었는데, 깨고 보니 낯선 모텔에 누워 있었고 뱃속엔 낯선 정액이 자리잡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쏴아아….


문득 들려오는 물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닫힌 욕실문 너머에서 샤워기가 물을 뿜는 소리가 들렸다. 중간중간 물소리 사이로 새어나오는 흥얼거리는 남자의 콧노래 소리를 캐치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레이아는 샤워를 끝내고 나온 남자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평범한 얼굴에 평범한 체격. 30대 초반  되보이는, 딱 봐도 월급쟁이 직장인 같은 인상. 그는 레이아와 눈을 마주치자 음흉하게 실실거렸다.


"아, 일어났니? 자고 있길래 안 깨웠어. 근데 슬슬 퇴실해야 하는데 빨리 씻는게…."

"저기."

"…응?"

….


쏴아아….


짧은 대화 후 레이아는 남자의 권유대로 샤워를 하며 곰곰이 생각했다. 네톡으로 용사에게 연락해보니, 어제 자기가 하루 동안  일이 있다고 말하고 나갔단다. 분명 그런 기억은 없었다.


머리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으나 몸은 충실하게 할 일을 했다. 몸을 깨끗이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은 후에 남자와 함께 퇴실했다.


주물럭, 주물럭.

남자는 몸을 섞은 관계여서 그런지 서슴없이 손을 뻗어 엉덩이를 주물렀다. 그러나 이내 자신을 차갑게 응시하는 레이아를 보곤 흠칫하며 손을 거두고 눈치를 봤다. 태워줄까 묻는 남자를 보던 레이아는 짧은 생각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창밖을 응시하던 레이아의 다리 위로 다시금 손이 올라왔다. 짧은 스커트와 밴드 스타킹 사이에 있는 맨다리를 쓰다듬고 주무른다. 한 번 눈치를 줬음에도 이러는 것이 어지간히 미련이 남는 모양이다. 레이아는 냉랭하게 쳐내는 대신 묵묵히 손길을 받으며 남자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어떻게 만났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남자는 의아해 하다가 어제 술에 취했었나보다 하고 속으로 지레짐작하며 물음에 성실히 대답했다.

별 것 없었다. 그냥 평범한 매춘이었다. 특이사항이라면 음지의, 어둠의 SNS를 통해 만났다는 것 정도. 저번에 지나가 라이브 방송을 했던  앱이었다.

레이아는 SNS는 커녕 핸드폰조차 만져본 기억이 없었다. 남자의 말을 듣고 핸드백을 뒤져보니 화대가 들어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열, 열 하나,  둘… 스물, 스물 하나….


자그마치 세 자릿수에 달하는 현금. 레이아의 외모를 생각해보면  정도로도 모자라겠지만, 그녀는 비싼 돈으로 몸을 판 적이 없었다. 돈을 받는건 창녀 같은 기분을 느끼는,  다크한 플레이 요소일 뿐이었으므로. 다른 여자들 역시 그랬다. 끽해봐야 미라가 '남친'에게 받는 용돈 정도가 큰 돈이었다.


"저기…."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굳이 집의 위치를 알려줄 필요는 없었기에 레이아는 근처의 번화가를 말했었다. 거리에는 딱 봐도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점심 시간을 맞아 밖으로 나온 직장인들, 휴강인지 벌써부터 돌아다니는 대학생들…. '젊은 도시'라는 모토답게 이 도시는 수도권이 아닌데도 젊은 세대들이 유독 많았다. 그만큼 여러가지 놀거리와 유흥거리도 많았다. 남자들의 이목 역시 여자들에게 뜨겁게 쏟아졌다. 그게 여기서 사는 이유이긴 했지만, 지금은 이곳에 내렸을때 쏟아지는 관심이 썩 달갑지 않았다.


"내릴 거야?"

"아니. 잠깐 여기 있어도 돼?"

"여기서? 누구 기다려?"

"아니. 잠깐이면 돼. 잠깐만."

그냥 빨리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레이아는 남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SNS 앱을 조사해보니 메세지로 만남이 성사된 시간은 저녁이었다. 그럼 해 떠있는 동안엔 뭘 했을까….

그건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 레이아는 남자에게 작별을 고하고 차에서 내렸다. 연락처를 교환하자는 제안은 당연히 거절했다. 지금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하아…."

속이 꼬인 것처럼 답답했다.





그리고 현재.

레이아는 어제의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용사와 아리스에게 알려줬다. 느긋하게 여유를 만끽하려던 아리스는 순식간에 진지한 표정이 되어 같이 고민했다. 딱히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고민을 함께 해주려는 그녀의 마음씨에 레이아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반면 용사는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다. 레이아 만큼이나 진지하게 집중하며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중간중간 레이아를 흘끗거렸다. 두 여자는 그런 용사의 모습에 조용히 있으며 말도 걸지 않았다. 현역 시절, 용사는 저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항상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항상 똑똑한 머리로 활약하던 레이아조차 수 접고 용사의 말을 기대했다. 두 여자의 시선에도 가만히 있던 용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레이아."

"응, 마스터."

"너…."

용사의 입에서, 상상도 못한 질문이 나왔다.

"큐피드. 그거고장난 거야?"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레이아는 잠시 뜻을 파악하느라 멈칫했고, 그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휙 돌려 자신의 큐피드를 쳐다봤다. 만든지 얼마 되지도 않은 회심의 걸작이었기에 고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확신했으나, 그녀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큐피드를 점검했다.

이내, 레이아가 놀라 숨을 들이킨다.

"어, 어째서…."

그녀의 큐피드는, 투명해지는 은폐 기능과 대상을 따라다니는 비행 기능만이 남아있을  제 기능을 온전히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상 촬영 기능과 녹화 기능이 완전히 먹통이 됐다. 주기적으로 컴퓨터에 자료가 백업되기 때문에 그동안의 모든 영상들이 날아가진 않았으나, 적어도 어제 일어난 일은 알  없게 됐다.

"…."

"…."

무거운 침묵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