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4-2. 개입 - 에필로그 (3)
--개입--
"흥 흐흥~."
한 명의 소녀가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고등학생 쯤 되어보이는 앳된 외모는 이제 막 꽃봉오리를 맺고있었다. 아이에서 소녀로 자라면서 미모가 활짝 피어나고, 몸은 여성으로서 무르익을 준비를 한다. 피부는 몽글몽글 부드럽고 젖살이 완전히 빠지지 않아 아기처럼 귀여운 얼굴이지만, 몸은 골격과 근육이 들어차면서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탄력 있는 여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소녀는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면서도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순수한 아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눈동자. 그녀의 눈동자는, 눈빛은 그 누구보다도 오만했다. 남을 깔보거나 무시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자기가 얼마나 특출난지 잘 알고 있는 모습. 겸손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마치 사회성 없는 천재를 보는 듯했다.
그녀의 이름은 카이사.
그녀는 인간이 아닌 이계의 존재이며,
최상위 차원인 '알 두 마르'의 대(大)군주 중 하나.
용사와 판타지 세계의 사람들은 그들을 이렇게 부른다.
'마왕.'
그러나 그녀는 용사가 물리쳤던 마왕과는 사뭇 다른 외모였다.
용사가 경험했던 그 마왕은 3미터가 넘는 거구에 강철도 막아내는 단단한 피부를 가졌다. 이마에는 장인의 걸작보다도 단단하고 날카로운 뿔이 있었고, 무려 네 개의 팔로 무기 혹은 무기나 다름 없는 주먹을 휘둘렀다. 맨손으로 철근 다발을 부러뜨릴 만큼 힘이 강했으며, 날아오는 화살을 피할 정도로 감각이 예리하고 몸이 날랬다. 그런 신체 능력에 더해서 마왕 특유의 마나인 마기까지 두르고 있었으니, 놈은 그 누구도 막지 못할 괴물 중의 괴물이자 살아있는 재앙이었다.
반면 카이사는, 마치 빚어낸 인형처럼 완벽한 소녀의 외모였다. 완전히 꽃을 피우지 못했음에도 예술 작품을 보는 듯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 감탄을 자아낸다. 피부는 모찌처럼 몽글몽글 부드러워서 함부로 만지면 멍이 들 것처럼 연약해 보이기도 했다. 작고 섬세한 소녀. 강인함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었기에, 그녀의 외모를 보고 긴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외모야말로 카이사의 예리한 무기였다. 어딜 가나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그녀는, 외모로 불러온 아주 찰나의 방심을 놓치지 않고 수많은 강자들의 숨통을 눈 깜짝할 새에 끊어왔다. 카이사에게 당한 이들 중 열에 아홉은 자신의 죽음을 인지조차 못한 멍한 표정이었고, 그녀는 그 표정을 썩 좋아했다.
"히히힛~."
소녀의 외모를 한 괴물이 천진하게 웃었다. 그래도 그녀의 장점을 꼽자면, 성격이 폭력적이지 않다는 점이었다. 또한 기분파여서 기분이 좋을 때에는 상당히 너그러운 편이었다. 마왕 치고는.
침대에 앉아 있던 소녀가 배시시 웃으면서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웠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생머리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공중에 떠올랐다가 사르르 내려앉는다. 위쪽은 분홍색, 아래쪽으로 내려올수록 보라색으로 짙어지는 투 톤 컬러가 개성 있게 그녀의 매력을 더해줬다. 엎어진 자세에서 그대로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본다. 카이사가 바라보는 시선의 도착지에는 진보랏빛 단발머리의 여자가 있었다. 레이아였다.
"아유, 귀여워라."
쪽쪽.
마치 아기를 토닥이듯, 카이사는 눈을 감고 곤히 잠들어 있는 레이아의 얼굴 이곳저곳에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너무 예뻐서 어쩔 줄을 모르는게 눈에 보였다.
"그 아이가 그렇게 좋은가?"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카이사와 레이아 단 둘만 있는 방에 울렸다. 그러나 카이사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어? 어, 당연하지! 근데 아줌마 퇴근했어? 쉴 거야?"
"그래."
대답과 함께 허공에 빛무리가 번쩍이더니 한 여자의 형상을 이뤘다. 크고 늘씬한 체형과 성숙한 외모, 표정 없는 얼굴, 그리고 길게 기른 하늘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여자였다.
카이사는 또다른 인물이 허공에서 나오거나 말거나 레이아를 마구 만졌다. 어린 아기를 다루는 듯한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손놀림이 점차 끈적하게 변했다. 입술을 천천히 엄지로 만지다가 입 안에 손가락을 넣어 혀를 톡톡 건들고 희롱한다. 다른 손은 아래로 내려가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레이아의 맨가슴을 만졌다. 카이사는 자기도 가지고 있는 젖가슴의 감촉이 기분 좋았는지, 헤실거리는 얼굴로 가슴을 만지고 주물렀다.
"한~참 후배를 보는 기분이랄까. 나는 마법을 다루는 마왕이고, 흑마법사는 내 마법을 흉내내는 애들이니까. 애기들이 어른 흉내 내는 것 같아서 너무 귀여워. 날 따라하는게 기특하기도 하고. 쉽지 않은 길이었을 텐데 말이지."
여자가 최초로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어가며, 카이사는 레이아에게 애정을 쏟아붓듯이 애무에 가까운 터치를 이어갔다. 여자는 진득한 행위를 보고도 덤덤한 표정으로 방의 저편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고선 그녀의 몸통 만큼이나 크고 두꺼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카이사와 여자의 대화는 거기서 뚝 끊겼고, 방 안은 침묵으로 채워졌다. 살 만지는 소리와 무언가를 핥고 빠는 소리가 중간중간 고요한 방 안의 분위기를 끈적하게 만들었다.
"하아, 하아. 얘, 네가 올라타 볼래?"
카이사의 말에 잠든 것처럼 미동도 않던 레이아가 눈을 뜨고는 벌렁 누운 카이사의 위에 탔다. 그러나 평소 총명하게 반짝였던 자색 눈동자는 마치 약에 취한 듯 흐리멍텅해서,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레이아는 의식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깨어 있으나 뇌가 아무 정보도 처리하지 않는 중이었다. 스스로의 근육과 에너지를 사용해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녀는 어떤 감각도, 어떤 생각도 없이 마치 기계처럼 움직이는 중이었다. 당연히 여기서 겪은 일을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최면 마법. 레이아가 지구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용했었던 그 마법을, 지금은 본인이 당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카이사의 말대로 흑마법사는 마왕의 마법을 흉내내는 존재. 마왕이 사용하는 진정한 흑마법에 레이아가 당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이내 하얗고 예쁜 두 쌍의 다리가 엉켜들었다. 소위 말하는 가위치기 자세로 둘은 서로의 여성기를 비비며 첩첩 거리는 끈적한 물소리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어때?"
카이사의 물음. 레이아에게 던지는 질문은 아니었다. 흔들의자에 앉아있던 여자는 얼마간 대답이 없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적절해."
"내 일처리가 잘 됐다는 거지? 오케이. 좋아."
둘의 대화는 또다시 끊겼다. 너무나도 간결해서 목적조차 찾아낼 수 없는 암호 같은 대화. 그러나 의사소통의 부족함이라고 보기엔 둘의 태도가 미련 없이 너무나도 깔끔했다. 대화가 적다기보단, 적은 대화로도 완벽하게 의사소통을 한다고 보는게 더 정확해 보였다.
잠시 후, 레이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카이사도 쾌감을 느꼈는지 몸을 몇 차례 파르르 떨고는, 절정의 여운으로 할딱거리는 레이아를 밀어 침대에 눕혔다.
"적어도 오늘 중엔 내보내. 오래 있으면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 거야."
신경도 쓰지 않던 여자가 건조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중에? 지금 나갈 건데."
"흠."
마치 네가 웬 일이냐 라고 묻는 듯한 콧소리에 카이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슬슬 박고 싶어서. 얘 머리도 좀 만져줘야 되고."
대답은 없었다.레이아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아든 카이사가 씨익 웃으며 잠깐의 헤어짐을 선언한다.
"그럼, 나중에 뵙죠."
모든 피조물의 정점에 서서 홀로 위대한 마왕. 그런 마왕이, 여자에게 가볍게 목례하며 예를 표한다.
"시공의 수호자시여."
…
--몇 주 전--
마왕 카이사. 그녀는 마법을 끝내주게 잘 다루는 마법사 계열의 마왕이었다. 찰나의 정신 집중을 통해 자연계 마법을 발현하면 지진, 홍수, 허리케인 등의 자연 재해도 일으킬 수 있었고, 정신계 마법을 발현하면 사람의 인생을 말 그대로 가지고 놀 수도 있었다. 레이아가 사용하는 귀여운 흑마법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스케일이었다.
그런 그녀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몇 가지 있었으니, 그중 1순위는 시간을 조작하는 것이었고, 2순위는 미래를 예지하는 것이었다. 시간은 마왕에게조차 금지된 영역이었다.
미래 예지. 신 혹은 그에 필적한 존재에게만 허락된 권능.
최근 카이사는, 그 권능의 혜택을 잠깐이나마 누릴 수 있었다.
"…진짜야?"
시공의 수호자의 전언. 카이사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가 말을 집어삼켰다. 감히 그녀의 권능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시공의 수호자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속이고자 한다면 카이사는 속아줘야 하는 위치였다. 한낱 마왕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냐. 알겠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카이사에게 '어떠한 것'이 파고들었다. 카이사는 눈앞이 환하게 빛나는 느낌을 받았다.
….
….
….
으엉엉엉! 흐어엉!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 장례식장에서나 들릴 법한 곡소리였다.
시공의 수호자의 '미래 예지'. 그녀는 자기가 본 미래를 마왕 카이사에게 '주입'했고, 카이사는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을 직접 목격하는 중이었다.
다들 비슷한 표정이었다. 넋이 나갔거나,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오열하거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거나. 특이한 점이라면 어린 학생들이 꽤 많다는 점과….
특이한 인물이 한 명 있다는 점이었다. 마왕을 격퇴한 용사 파티의 멤버 중 하나.
아리스.
장례식장의 한 구석에 자리잡은 아리스는 혼자 왔는지 일행도 없이 조용히 슬픔을 감내하고 있었다. 앉은 채로 무릎을 세워 그 안에 얼굴을 파묻고는 소리 죽여 우는 모습. 수없는 죽음을 목격하고, 직접 그 죽음을 수천, 수만의 생명에게 선사했을 냉랭한 검사가 눈물을 펑펑 쏟는 모습은 직접 보지 않고선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누가 보면가족이나 연인이 죽은 것으로 오해할 정도로 그녀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식장의 정면에는 두 개의 영정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어린 티를 완전히 벗지 못한 고등학생 소년 두 명이 죽기 전에 찍은 사진이었다. 입구 쪽에 두 소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故 남성민]
[故 한민성]
시공의 수호자가 들여다 본 미래는 상당히 암울했다. 아리스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이 하나같이 최악으로 이어졌다. 최악이 겹치고 겹쳐서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어두운 미래가 펼쳐졌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남성민은 아리스, 아니 한아리를 자기 집으로 끌어들였다. 한아리는 네토 플레이를 위해 자주자주 섹스 어필을 했으나 표현이 노골적이라기보단 은근한 편이었기에, 소년은 확신을 가질수 없어 소극적으로 굴었다. 그렇게 둘은 직접적으로 이어질 계기를 찾지 못했다. 둘의 관계가 수렁에 빠진듯 지지부진하던 사이 사건이 벌어졌다. 성민의 친구들 중 하나인 준식이 박민우를 건드렸고, 박민우는 평소에도 자주 어울렸던 떡대들을 고용해서 준식과 성민의 친구들을족쳤다. 그 과정에서 민성의 휴대폰을 통해 박민우가 한아리의 존재를 알게 됐다. 결국, 한아리는 박민우에게 납치되어 여자로서의 수모를 겪게 된다. 끔찍한 수모를.
그로 인해 남성민은 크나큰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자신과 관련된 일에 괜히 아리 누나가 얽혀들어서 자기 대신 끔찍한 일을 당하고 있었다.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민성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더 끔찍한 기분이었다. 본의 아니게 친구 대신 엄한 여자를 끌어들였고, 그녀는 지금…. 결국 아무 상관도 없는 선량한 여자를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로 밀어넣은 꼴이었다.
박민우는 잔인하게도 한아리가 마구 따먹히는 사진과 동영상을 보내왔다. 한아리의 핸드폰으로 전송했기에 차단할 수도 없었다. 혹시 그녀에게서 연락이 올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그럴 일은 없었다.
정신적 스트레스도 극심했지만, 육체적 스트레스 역시 절정이었다. 박민우가 감시 역할로 남겨놓은 남자들은 말 그대로 짐승 같은 놈들이었다. 섹스 아니면 폭력으로 살아가는 놈들. 그들은 아리스를 따먹지 못한다는 아쉬움을 폭력으로 달랬다. 몸이 근질근질할 때마다 성민과 민성을 세워놓고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많이 때려본 놈들이었는지, 소년들은 죽도록 아프기만 할 뿐 심각한 부상은 입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몸이 약해져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스트레스, 스트레스, 그리고 스트레스. 사람을 죽이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마치 이래도 안 죽을 거냐고 물어보는 듯한 악마의 속삭임에 성민이 먼저 넘어갔다. 아리 누나의 인생을 망쳤다는 죄책감. 심지어 누나와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고 단순히 같이 살고 있을 뿐이었는데, 아직은 남남 관계였는데…. 핸드폰에 전송되는 누나의 사진은 하나 같이 괴로워 보였다. 그걸 볼 때마다 마음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거기에 더해 계속되는 떡대들의 구타에 몸도 점점 약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몸이 약해져서 마음도 약해지고, 마음이 약해져서 몸도 약해진다. 끝날 줄 모르는 악순환은 더없이 잔인했고, 더없이 고통스러웠다.
결국 성민은 남자들의 감시를 피해, 조용한 새벽 시간대에… 자살했다.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민성이었다. 성민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챈 민성은 신경 써서 녀석을 지켜봤으나 24시간 내내 눈 안에 둘 수는 없었다. 민성 역시 계속되는 스트레스와 폭행으로 몸이 좋지 않았고, 기절하듯 잠든 사이 일이 벌어졌다.
두근, 두근, 두근.
민성은 더 이상 깨어날 일 없는 성민을 보며 자신의 고요한 심장박동을 느꼈다. 의외로 죽을 듯이 슬프지는 않았다. 덤덤했다. 요 며칠 동안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소년의 친구는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같은 날, 민성 역시 성민과 같은 곳으로 떠났다.
….
박민우의 악행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두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한 여자를 납치, 강간한 죄. 어린 나이에 막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소악마였으나, 권력으로 덮기엔 죄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공권력의 힘보단 뉴스와 기사를 보고 성난 여론이 더 무서웠다. 녀석도 설마 자살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떡대들에게 민성과 성민을 때리라고 지시한 적은 없었기에. 심지어 떡대들은 시신 유기까지 시도하다가 집안에 들이닥친 경찰들에게 전부 들켜버렸다. 세상에 죄목이 하나하나 공개될수록 비난과 질타는 눈덩이처럼 빠르게 불어났고, 박민우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가능성은 사실상 없어졌다.
하지만 소악마가 좆되는 것은 떠나버린 두 소년에게 그 어떤 위로도 되지 못했다. 그들은 이제 세상과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아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흑, 끄흑, 으우우…."
다시금 눈물을 쏟으며 오열하는 아리스. 딱 봐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고작 '플레이' 때문에 무고한 두 어린 생명을 희생시켰다는 죄책감이 그녀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항상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정의의 검사. 악인을 상대할 땐 악인보다도 더 잔인하고 차갑지만, 선한 자들에겐 천사 만큼이나 너그러운게 아리스였다. 특히나 순수함을 품고 있는 어린 아이들에겐 더더욱 잘해줬다. 그래서 성민과 민성의 죽음이 아리스에겐 보다 더 지독한 죄악감으로 돌아왔다. 지켜도 모자랄 아이들을 죽인 것이나 다름 없는 상황. 심지어 박민우에게 진짜로 감금되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여차 하면 '무아지경' 스킬로 빠져나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리스는 두 소년의 상황을 몰랐고, '플레이'를 즐기며 자신을 기다리는 끔찍한 소식을 알지 못한 채로 짐승마냥 헐떡이고 있을 뿐이었다.
"흐으으, 으극…."
아리스는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입은 마음의 상처는 너무나도 크고 깊어서 치명적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강인하다 할지라도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우웅… 화아악!
….
진동음과 빛무리가 솟구치며 배경이 바뀌었다. 시간은 보다 더 미래였으며, 공간은 장례식장이 아닌 야외였다.
이번에는 카이사가 등장인물 중 하나였다. 홀로 고고하게 서있는 마왕 카이사. 그리고 그와 대치하고 있는 용사 파티. 용사, 미라, 델렌, 지나, 레이아까지 총 다섯 명.
아리스는 없었다.
그게 장면의 끝이었다. 빛무리는 간결한 내용의 미래를 보여준 후, 다시 한 번 번쩍여 카이사를 현실로 돌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