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5. 델렌과 흑백 (14)
[오빠살려줘]
델렌으로부터 정확히 다섯 글자의 문자가 왔다.
원래는 차단되어 있었지만, 핸드폰 기기를 바꾸면서 차단이 전부 풀린 바람에 이런 해프닝이 벌어졌다.
기묘한 우연이었다. 톡이었다면 서버에 설정이 저장되니까 기기와 상관없이 차단됐을 것이고, 전화를 걸어왔다면 차단이 풀린 것을 깨닫고 수신 거부한 후 다시 차단했을 것이다. 하필이면 핸드폰에 기본으로 탑재된 문자 메세지로 오는 바람에 서준은델렌의 문자를 읽게 됐고, 다시금 델렌과 연을 잇게 됐다.
성질 같아선 그냥 죽으라고 답장하고 차단하고 싶었지만, 정말 다급해 보이는 문자를 보고 차마 냉정하게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델렌의 집으로 향했다. 운전대를 잡은 그는 아주 능숙하고 익숙하게 길을 찾아가는 자신의 모습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번화가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오피스텔. 그중에서도 월세가 가장 비싼 건물. 생각해보니 변변한 직업도 없는 주제에 계속 이런 비싼 곳에서 살고 있었다. 월세를 자기 돈으로 낸 적은 있는 건지….
델렌의 집 현관문에 서자 안쪽에서 여러 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로운 목소리와 벽에 물건 혹은 사람의 몸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 분명 몸싸움을 하는 소리였고, 평범한 가정집에서 날 법한 소음은 절대 아니었다. 강도라도 들었나 생각이 들자 다급해진 서준은 재빨리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풀고 문을 벌컥 열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오, 오빠!"
"뭐, 뭐야 이 새끼는."
웬 시커먼 놈이 델렌을 벽에 몰아붙이고 꾹 짓누르고 있었다. 억지로 범하려 들었던 건지 델렌의 윗도리가 쭈욱 늘어나 한쪽 어깨를 다 드러내고 있었고, 한쪽 뺨에 빨간 손자국이 보였다. 그녀의 눈가엔 굵은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달려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서준은 이성을 잃었다. 아무리 바람 핀 썅년이라지만 한때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가 웬 놈에게 강간을 당하기 직전이었으니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야 이 개새끼야!"
서준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
….
델렌을 덮친 괴한은 나이 든 왜소한 중년이었고, 서준은 키 크고 건장한 젊은 남자였다. 괴한은 이성을 잃고 살벌하게 달려드는 서준을 보고는 상대가 안 된다는 판단에 후다닥 도망쳤고, 서준은 그를 쫓는 대신 현관문을 쾅 닫고 델렌에게로 다가갔다. 신변의 위협에서 벗어난 델렌은 패닉 상태였는지 구석에서 얼굴을감싸고 흐느낄 뿐이었다.
사귀는 동안에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델렌의 눈물. 서준은 분명 델렌을 싫어했으나, 그녀가 우는게 마치 자신의 방치로 인한 결과인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목이 메였다.
"…괜찮아?"
…그 잠깐의 동정심과 자책감으로 인해, 서준은 델렌과의 끔찍한 악연을 이어가게 된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야."
"흐윽, 흑, 오빠, 오빠아…."
델렌은 한동안 그렇게 울었고, 서준이 전말을 듣게 된 것은 거의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빚.
그놈의 사치를 고치지 못한 델렌은 서준이라는 강력하고 유일한 자금줄을 잃었음에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소비 활동을 했다. 물론 서준이 없는 그녀에겐 돈이 거의 없었고, 결국 돈을 빌리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 경제적 기반이 없는 델렌에게 은행이 많은 돈을 대출해줄 리 없었고, 쳐다봐서도 안 될 사채에 손을 댄 것이었다. 망할 씀씀이좀 줄였어야지 하고 책망하는 서준에게 델렌은 울상을 지으며 엄청 많이 절약했다고 말했다.
기가 막힌 서준은 이마에 손을 짚었다.
"하…."
예전부터 느꼈지만, 정말 답이 없는 여자였다. 이렇게 철이 없으니, 자신이 이대로 떠나면 앞으로 무슨 꼴을 당할지 불보듯 뻔했다.
"씨발, 씨발…."
정말 성질 같아선 델렌이 뭔 꼴을 당하든 내버려두고 떠나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가 잘 알았다. 방금 전 델렌을 덮쳤던 놈은 돈을 한 푼도 못 갚고 있는 델렌에게 이자를 일부 변제해주겠다며 성관계를 강요한 빚쟁이였다. 즉 언제든 다시 델렌을 찾아올 놈이다. 지금 생각해도 머리 끝까지 열이 뻗쳐 오르는 방금 전의 그 장면을 떠올리자 서준은 성질이고 뭐고 더 이상 델렌을 내버려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헤어진 사이였고, 그것도 무척 안 좋게 헤어졌기에 더 이상 연인으로서의 감정은 없었다. 델렌이 어떤 놈팽이랑 붙어먹건 말건 상관없었다. 그 빨간 머리랑 떡치는걸 상상하면 당연히 불쾌했지만, 그건 배신감 때문이지 연애 감정 때문은 아니었다.
'그날'을 떠올린 과거의 서준은 기분이 더 나빠지기 전에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어찌됐건, 델렌은 절대 자력으로 빚더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불과 몇 달 만에 가난한 사람은 평생 못 만져볼 정도로 큰돈을 빚졌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딱 하나. 몸을 써서 갚는 수밖에…. 돈 버는 능력은 형편 없을게 뻔하지만, 일단 그녀의 외모는 반반한 수준을 넘어서 엄청나니까.
금수저인 서준은 노는 물이 달라서 유명한 연예인도 여럿 실물로 봤지만, 델렌만큼 완벽한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화장기 없이도 눈이 부시는 얼굴과 세팅 안 해도 비단결처럼 보드라운 머릿결, 그리고 여자 맛을 아는 남자일수록 환장하는 그 쫀득쫀득한 몸…. 두 손을 다 써도 완전히 못 가리는 끝내주는 가슴과 전체적으로 아주 이상적으로 글래머러스한 몸을 떠올리자 이 와중에도 서준의 물건이 옷 속에서 단단하게 일어섰다.
많이 겪어 익숙할 뿐더러 지금은 그녀를 미워하는 자신조차 이 정도니, 그녀의 몸은 분명 남자들을 미치게 만들 것이다. 설령 온갖 좋은 여자를 다 겪어본, 돈과 지위가 있는 상류층이라 할지라도.
쓴맛을 보여주고 싶은 미운 여자를 창녀로 만들 생각을 하자 서준의 눈빛이 흥미와 가학심, 그리고 복수심으로 번들거렸다.
일단 지옥의 불구덩이에선 꺼내주겠지만, 대신 더러운 진흙탕에 처넣어주지.
'골든 비치.'
아버지의 음지의 사업장 중 하나. '일'을 배우며 맡게 된 업소 중 가장 괜찮은 곳.
뒤틀린 미소를 짓던 서준의 비틀린 입이 열렸다.
"야."
서준이 어떤 생각을 하건 델렌에겐 선택지가 없었고, 그녀는 서준의 계획대로 철없는 아가씨에서 한낱 창녀로 전락하게 됐다.
…
장면이 또다시 바뀌었다. 몇달 간의 시간이 지났고, 서준은 본격적으로 골든 비치의 사장으로서 일하는 중이었다. 요즘은 다른 사업장보다도 골든 비치가 훨씬 중요했다. 놀랄 정도로 엄청난 순이익을 갖다주고 있었으니. 요즘 서준은 거의 하루 종일 골든 비치의 사장실에 있었다.
'황당하군.'
서준은 그런 감정을 느끼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기분이 복잡했다. 델렌의 완전한 파멸을 바라진 않았지만, 적어도 인생의 쓴맛 정도는 볼 것이라 생각하고는 그녀를 업소녀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델렌은 지금 골든 비치의 역대 최고의 에이스다.
"하…."
진심으로 사랑하고진지하게 결혼할 생각도 했던 여자가 창녀짓에 천재적인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그기분을, 사람들은 절대 모를 것이다. 심지어 자신은 골든 비치의 사장, 즉 그녀의 포주였으니. 기분이 복잡하고 씁쓸했다.
사귀는 동안 적어도 수천 번은 지적한 그녀의 사치. 그것은 주제 넘게 많은 돈을 물쓰듯 펑펑 써대는 것에 대한 경고였다. 당연히, 자기 능력보다 더 돈을 써대면 안 되니까. 그런데 지금에 와선 그녀가 사치를 한다고 말하기도 모호해졌다.
델렌이 과거에 서준에게서 받아갔던 거금의 용돈보다, 그녀가 골든 비치에서 일하며 서준에게 안겨다준 매출이 더 크다. 그것도 아주 진작에 그랬다. 이제는 서준이 델렌에게 아쉬운 입장이었다. 빚은 이미 예전에 다 갚았고, 지금은 열심히 일하며 서준에게 계속해서 황금알을 낳아주고 있었으니.
'참 대단한 창녀 납셨군.'
연인이었을 적에 서준이 느꼈던 델렌의 매력은 당연히 외모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성격에도 큰 매력을 느꼈다. 철없어 보일 정도로 밝은 성격이 안 그래도 예쁜 그녀를 더 반짝반짝 빛나게 만든다. 그 좋은 성격은 창녀가 되면서도 바뀌지 않았고, 그녀의 매력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푹 빠진 고객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게, 델렌은 창녀답지 않게 순수하고 해맑아서 좋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재능은 단순히 좋은 성격 뿐만이 아니었다. 여자로서의, 아니 암컷으로서의 재능 역시 아주 출중했다. 그것은 서준도 몰랐던 재능이었다.왜냐하면 서준은 델렌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그녀를 소중히 다뤘고 잠자리에서도 상당히 배려를 했으니까. 하드한 플레이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델렌은 남자에게, 수컷에게 거칠게 다뤄질 때 진가를 발휘했다.
목을 조르면 아랫 조임이 끝내준다, 엉덩이를 세게 때릴수록 흥분해서 바짝 조여온다, 후장 구멍이 아주 그냥 제대로 살아있다, 배빵을 때리면 씹물을 찌익 쏜다 등등….
과거에 사귀었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고 다니진 않았기에 서준은 고객이나 직원들로부터 델렌의 얘기를 필터링 없이 그대로 들을 수 있었고, 자기도 몰랐던 사실을 다른 남자를 통해 알게 되니 기분이 언짢았다. 그래서 델렌을 마주할 때면 서준은 항상 얼굴을 굳히거나 찡그렸고, 직원들은 사장님이 델렌 군기 잡는다며 뒤에서 수근거리거나 대놓고 농담조로 말하곤 했다.
"윽, 흠흠…."
이제는 이쪽이 불편해서 만남을 꺼리는 신세였다. 델렌은 마치 강아지처럼 사람을 좋아해서 모두에게 귀엽게 굴었고, 특히 남자들에게 예쁨을 받았다. 그녀는 심지어 서준에게도 똑같이 살갑게 굴었다. 자기를 창녀로 만든 장본인임에도, 오히려 마치 은인을 대하는 것처럼 어떻게든 잘해주려는 태도가 눈에 보였다.
지금도 델렌은 복도에서 서준을 만나자 인상을 활짝 펴며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업소 내에선 사장이 최고이니, 마치 높은 상사를 대하는 것처럼 예의를 차리는 것이다.
"헤헤, 잘 지내셨어요?요즘 바쁘신가? 얼굴 보기가 좀 힘드네요, 힝…."
자연스러운 애교. 거의 명치 부분까지 훤히 드러나는 배꼽티를 입은 델렌이 헤실거렸다. 서준은 델렌의 드러난 복부를 볼 수밖에 없었고, 마음이 썩 불편했다. 델렌을 창녀로 만들면서, 마치 그녀를 더럽히는 것처럼 배꼽 옆에 문신을 새겼다. 배꼽 왼쪽 부분을 시계방향으로 두르고 있는 꽃과 나비 문신. 하지만 그 손바닥만한 문신은 새하얀 피부와 조화롭게 어우러졌고, 최초의 의도대로 델렌을 더럽히기는 커녕 오히려 서준의 마음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그녀가 빛날수록 서준은 불편했다. 그리고 그녀는 언제나 빛이 났다.
'이게 아닌데.'
진흙탕에 뒹구는 델렌을 비웃는 자신. 그리고 세상이 무섭다는걸 깨닫고 울상을 짓는 델렌.
그런 상상을 했으나, 마치 어림도 없다는 듯이 델렌은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연꽃처럼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아이러니했다. 관계가 파탄날 각오를 하고 그녀를 골든 비치라는 흙탕물에 밀어넣었건만, 오히려 지금은 관계가 더 나아지고 있었다. 델렌은 누가 봐도 서준에게 살갑게 잘 대했고, 서준 역시 헤어진 직후에 비하면 분노나 배신감이 많이 희석된 상태였다. 포주와 창녀 관계만 아니었으면 다시 사귈 수도 있을 정도로, 델렌을 향한 서준의 감정은 점차 순화되고 있었다.
….
얼마 후, 서준은 다시 한 번 악연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