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5. 델렌과 흑백 (15)
델렌의 첫 휴가. 골든 비치에 소속된 후 몇달 만에 허락된 첫 휴가.
현재 골든 비치의 에이스건 뭐건 간에 그녀는 여러 제약에 묶인 처지였다. 애초에 계약서를 쓸 때 델렌은 빚을 싹 갚아주는 조건으로 불리한 계약을 했다. 물론 밑바닥의 진짜 불공정 계약이랑 비교한다면 실례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자기 가치에 비해 받는 대우가 그리 좋지 못했다. 자유롭게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골든 비치의 숙소에서 살아야 했다. 누구에겐 감옥 살이나 다름없는 답답한 생활이었지만, 다행히 델렌은 그리 개의치 않았다.
또 하나의 불합리한 대우를 꼽자면, 휴가를 나가서도 그닥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어디서뭘 하는지를 보고해야 했고, 그걸로도 모자라 위치 추적기가 달린 초커까지 목에 차야 했다. 억지로 벗으려고 하면 경고 신호가 가기 때문에 함부로 만져서도 안 됐다.
사실 골든 비치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이 모두 이런 대우를 받는건 전혀 아니었다. 비밀 엄수를 위해 일정 부분 불편한 점을 감내하는 경우는 있어도 사생활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진 않는다. 그냥 델렌이 특이한 케이스였다. 시작부터 사장인 서준이 직접 데려와서 직원들도 당황할 정도로 나쁜 조건을 들이밀었고, 심지어 델렌은 그걸 순순히 받아들였다. 현재에 이르러서도 델렌은 계약의 부당함에 전혀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서준도 오로지 복수심에 의해서, 오로지 델렌의 신세를 망치고자 그런 조건을 내민건 아니었다. 부당 계약은 사적 감정이 잔뜩 들어간게 맞았지만, 위치 추적기 등의 과도한 조치는 사실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에게는 풀어야 할 궁금증이 있었고, 그것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이다.
그 새끼.
빨간 머리.
분명 석연치 않았다. 델렌을 골든 비치에 묶어둔 이후로는 사실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철저한 보안과 감시가 있었기에 내버려둬도 큰 문제가 일어날 리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연찮게 델렌의 통화를 듣고 난 이후로 생각이 바뀌었다. 최근 서준은 델렌에게 통보할 일이 있어서 오랜만에 상태도 좀 볼 겸 델렌의 숙소 방문 앞까지 갔었는데, 노크하기 직전 델렌이 아양을 떠는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왔다. 원체 애교가 많은 그녀는 룸메이트인 나나에게도 종종 애교를 부렸지만, 그것과는 분명 달랐다. 서준이 들었던 그 목소리는 마치 룸에서 VIP를 대접하는 것처럼 교태와 아양이 잔뜩 담겨 있었다. 자세히 귀 기울여 들으니 델렌은 전화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고객과의 사적인 연락은 분명 금지 사항이었다. 골든 비치는 자기들끼리 만나 붙어먹으라고 만든 소개팅 업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껏 델렌은 마치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부당한 규칙도 잘 지켜왔고, 그런 그녀가 감시를 받는 골든 비치 숙소에서 다른 고객과 개인적으로 연락을 할 것 같진 않았다.
"아이잉~."
남자에게 예쁨 받고 싶어서 안달이 난 듯한 비음 가득한 말투. VIP를 상대할 때보다 더 열심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보기 드문 '진심'을 느낀 서준은확신을 가졌다.
'그놈이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서준은 문을 박차고 들어가는 대신 슬그머니 손을 내려놓았다. 요즘 좀 얌전해서 마음에 들었는데…. 문 너머에서 까르르 웃는 델렌의 목소리가 다시금 마음에 들지 않게 됐다.
'….'
그런데….
'난 왜 화가 나는 거냐.'
서준은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델렌이 그놈과 붙어먹었기에 헤어진 거고, 그녀는 지금 한낱 창녀일 뿐이었다. 하찮고 더러운 년이 어떻게 지내든 뭔 상관인가. 골든 비치를 빛내는 에이스라 해도 결국은 몸 파는 여자에 불과했고, 서준은 '가업'을 물려받을 '회장'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둘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설마, 저 더러운 년에게 내가 미련이 남았다는 건가?'
갑자기 불쾌해진 서준은 빠른 걸음으로 숙소를 벗어나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후우."
으리으리한 집무실. 골든 비치는 귀한 손님이 올 때면 사장이 직접 맞이했기에, 응접실을 겸하는 사장의 집무실은 VIP룸 이상으로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공간이었다. 비싸고 좋은 명품들이 눈을 즐겁게 했다. 조금 기분이 나아진 서준은 자신이 있어야 할 높은 자리에서 다시금 델렌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바로 내일이 델렌의 휴가였다. 휴가 전날 어떤 남자와 진득하게 통화하는 델렌. 그녀의 마음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그년을 신경쓰고 있다고? 이 내가? 골든 비치의 사장이?'
'근데 진짜로 그놈이랑… 아직도? 잠깐, 오해일 수도 있잖아.'
'아니, 창녀랑 그 빨간 놈이랑 붙어먹든 말든 내가 뭔 상관이?'
'아무튼 직접적인 증거는 없잖아? 아무 관계가 아닐 수도 있지… 않나?'
'아, 왜 자꾸 생각나는 건데! 이제 나랑 상관 없는 일이잖아!'
그렇게 자기자신을 세뇌하려 애쓰던 서준은 결국….
….
….
부우웅.
"씨발."
홀린듯 델렌을 미행하고 있었다. 다음날, 서준은 홀로 나와 차를 몰고 그녀가 탄 택시를 쫓아가는 중이었다. 도심의 북적이는 도로에서 특정 차량을 미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서준의 차는 도로 위에선 상종조차 하기 싫은 고급 외제차였고, 다른 차들이 알아서 피하고 양보하는 덕분에 그는 미행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시와 시를 넘어, 점차 한적해지는 거주 구역까지 쫓아가자 주택 단지가 나타났다. 그 안쪽까지 깊숙히 따라 들어가면 미행이 들킬 것 같아서 고민하던 차에 델렌이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주택 단지 입구쪽에 위치한 카페에 들어갔다.
요즘은 통유리로 된 카페가 많았으나, 하필 이 카페는 그렇지 않았다. 밖에서 안을 보기가 힘들었다.혹시 몰라 챙겨온 후드티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준은 정장 재킷을 벗은 후 와이셔츠 위로 티를 입고 후드를 푹 눌러쓴 채 차에서 내렸다.
다행히 카페 안에는 집에서 편한 차림으로 나온 건지 추리닝 바지에 후드티를 푹 눌러쓴 여자가 있었고, 서준은 그녀처럼 후드를 푹 눌러쓴 자신이 크게 이상해 보이진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을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오래 있을 것도 없이, 델렌이 누구와 있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짤랑짤랑.
문에 달린 작은 종이 청명하게 울렸다. 서준은 그 소리조차 신경쓰였고, 후드를 더 깊게 눌러쓰며 카운터로 향했다. 고개를 숙이다 보니 심플한 후드티 아래로 말끔하게 다려진 고급스러운 정장 바지와 반짝이는 비싼 구두가 보였다. 그가 가져온 것은 윗도리 뿐이었다.
'바보 같은….'
위 아래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이질적인 옷차림이니 조그마한 동작도 반드시 눈에 띌 것이다.
괜히 제 발 저려 마음이 급해진 서준은 카운터에서 시야에 가장 먼저 보인메뉴를 대충 주문한 후, 카운터 앞에서 기다리는 척 카페 안을 스윽 스캔했다.
카페 안은 기본적으로 개방되어 있었으나 몇몇 자리에는 칸막이가 있었고, 잘 안 보이는 안쪽에는 두어 개의 룸도 있었다. 그는 개방된 자리를 훑었고, 화장실을 가는 척하면서 칸막이 쪽도 다 보았다. 하지만 아무 성과가 없었다.
남은 것은 곁눈질로는 보기 힘든 안쪽의 룸이었다.
'어떻게 하지?'
안전하게? 아니면 대담하게?
카페의 구조는 심플했지만, 룸 쪽은 마치 처음부터 그런 용도인 것처럼 외부와 단절된 공간이었다. 보려면 얼마든지 볼 수 있겠지만, 카페 안쪽 깊숙히 들어가 창문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행동은 누가 봐도 의심스러울 것이다.
안전한 방법은 카페 밖으로 나가서 차 안에 들어가, 마치 잠복근무하는 형사들처럼 델렌이 나오길 기다리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언제 나올지 몰랐다. 여자가 작정하고 수다를 떤다면 몇 시간은 거뜬하다. 심지어 델렌은 오랜만의 휴가잖는가. 이야기 보따리가 그 말랑말랑한 볼따구 속에 한가득 들어있겠지.
무엇보다도, 그녀를 조심스럽게 피하는 꼴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때마침 점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빠르고 정확하게 룸의 창문을 통해 스윽 안쪽을 보고 자연스럽게 카운터로 가면 된다. 생각을 마친 서준은 대담하게 룸을 향해 발을 옮겼다.
하지만, 하필이면….
끼익.
"……."
"…어?"
나오는 두 사람과 마주쳤다.
금발의 델렌.
그리고, 뒤따라 나오는 또 한 사람.
빨간 머리.
"씨발…."
놀라서 동그랗게 커지는 델렌의 갈색 눈동자. 서준은 나직이 욕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