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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화 〉#6. 미라의 여행 (37) (162/162)



〈 162화 〉#6. 미라의 여행 (37)

인생 최고의 2주일.


지우는 미라와 보낸 시간을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평가했다. 그리고,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는 어차피 찾아올 미래를 신경쓰느라 현재에 소홀한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기에 순간순간에 아주 충실했지만, 마지막 날은 그도 어쩔 수 없이 다운되어 있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지우가 살짝 잠긴 목소리로 놀리듯이 물었다.

"너, 롱패딩 안에  입은거 처음 아냐?"

"헤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엉?"

점심을 먹은 후 씻고 나서, 캐리어에 짐까지 모두 싸고 출발할 준비를 마친 그녀는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지우는 첫만남 이후로 꼬박꼬박 존대했던 미라의 반말에 당황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제대로 존대해줬잖아. 이젠 좀 편하게 말할래."

"뭐, 이제 마지막이니 상관없지."

지우는 미라의 반말이 오히려 그녀의 도도한 매력을 돋보이게 해주는 것 같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까지 새로운 재미를 선사해주는 미라가 고마운지 지우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존댓말을 하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좋은 추억을 만들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나도 정말 재밌었어. 고마웠어. 앞으로도  지내고!"

쪽.

미라가 자연스레 까치발을 들어 입술을 맞췄다. 쪽 소리가 나고 바로 떨어지는 가벼운 뽀뽀였지만, 그녀의 입맞춤은 여전히 남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코에 그녀의 상큼한 향이 옅게 남아 맴돌았다.


-이별의 순간은 짧을수록 좋다.

미라와 지우 둘 다 같은 지론을 갖고 있었다. 지우는 더 붙잡지 않았고, 미라도 더 이상 끌지 않고 신발을 신었다.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제안은 미라가 거절했다. 애초에 신발 신고 나와서 배웅하지도 말라고 강하게 말을 해놓았다.


"사진이랑 동영상 보내주는거, 절대 까먹지 말고?"

"네, 네. 한동안 작업하느라 바쁘겠네요. 몸도  힘든데, 어휴. 아주 일복이 터졌네 터졌어."

"엄살부리는 것 치고는 너무 활짝 웃는데?"

둘이 동시에 웃었다.


미라는 숙식 제공을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대가로 받지 않았다. 돈은 물론이고 선물조차도. 다만 롱패딩은 이번 '플레이'의 상징 같은 느낌이어서 그런지 순순히 받아 입었다.

그녀가 요구한 대가는 단 하나. 그동안 촬영한 사진과 영상, 그리고 그가 그동안 업로드했던 게시물의 주소였다. 지우는 참 그녀답다는 생각을 하며 당연히 주겠다고 했다.

"그럼, 진짜 갈게.  있어."

"네. 안녕히 가세요."

"굿 바이~."

끼익, 쿵.

미라는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묵직한 소리가 지우의 가슴을 때린다.

….

"후우…."

너무나도 맛있는 음식을 맛보면 다른 음식들이 맛없게 느껴진다. 너무나도 달콤한 꿈을 꾸면 현실이 덧없게 느껴진다.

그런 간극을 메꿔주는 것이 바로 망각이다.


아무리 맛있는걸 먹어도 그 맛이 영원히 입 안에 남아있지는 않는다. 꿈도 대부분은 금세 잊혀진다. 사람은 망각하기 때문에 삶을 이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녀와의 추억은… 정말로, 영원히 잊고 싶지 않다. 영원히 생생했으면 좋겠다.


'…너무 감성적인가?'

해가 중천에 떠있는 점심 시간대임에도 새벽 감성이 드는 듯한 기분. 지우는 푹 가라앉으려던 마음을 붙잡고, 한숨을 푹 내쉬며 발길을 돌렸다.

일단 청소할 거리가 산더미였다. 침대 시트, 이불, 방 바닥이 온갖 체액으로 난리였고, 집안의 냄새도 말이 아니었다. 그녀가 생활한 흔적들도 치워야 한다. 그녀가 자기 편한대로 배치한 온갖 물건들을 지우가 다시 자기 스타일대로 되돌려놓고….

"거 참, 할일도 많구만…."

스륵, 스윽.

일단 문을 열어 환기하고 이불을 치우면서 그는 지금 느끼는 감정을 최대한 외면했다.

하지만, 가슴이  뚫린 것 같은 공허함과 외로움은 쉽게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본인이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미라는  쿨한 성격으로 금세 지우를 잊었다. 그녀 입장에선 크게 아쉬울 것도 없는 사이였고, 그저 하나의 놀이를 끝낸 것뿐이니 쉽게 잊는게 이상한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에겐 진실된 연인이 있으니까.

지우가 미라에게 껌뻑 죽고 아쉬운 입장인 것처럼, 미라도 용사에게 껌뻑 죽고 아쉬운 입장이다.


용사 - 지우 - 네토남으로 이어지는 이중 네토라세. 특이하고도 재밌는 이번 '플레이'의 사진과 영상이 한가득 생길 것이다. 미라는 그걸로 한동안 용사의 관심을 독차지할 생각에 싱글벙글했다.

….

터미널에 가서 고속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그녀는 정확히 12번의 대시를 받았다. 그  세 명은 꽤 질척거려서 정색하고 차갑게 잘라냈다. 기분이 좋아서 얼굴을 가리지 않으니 남자가 평소보다 훨씬 많이 꼬였다.


사실 귀찮게 굴지만 않으면 싫진 않았다. 여자는 끊임없이 확신을 요구하는 동물이고, 남자들의 접근은 곧 그녀의 미모를 칭찬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실제로 미라는 12번의 대시를 모두 시큰둥한 얼굴로 쳐냈지만,  한 번도 인상을 쓰지 않았다.  놈이 질척거렸을 때조차 눈썹은 가만히 있고, 그저 차가운 눈으로 잘라냈을 뿐 짜증 한  없었다.

다만, 이건 혼자 있을 때의 얘기였다. 다른 여자들과 같이 있거나 용사와 같이 있을 때 만큼은, 남자들은 반갑지 않은 불청객에 불과했다.

일단 다른 여자들과 함께 있을 때는, 마치 여자들 사이에 승패가 정해지는  같아서 승자나 패자나 둘 다 기분이 별로다. 특히 승자 쪽은 이겨도 딱히 기분이 좋지도 않은데 패자 쪽의 눈치까지 봐야 하니 그 누구도 승리를 원치 않았다. 어차피 여자들끼리는 서로의 뛰어난 외모를 인정한지 오래였고, 그저 취향 차이일 뿐이니까 승패의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승패를 정하고자 했다면, 다른 남자가 아니라 용사가 승패를 정할 것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리고 용사와 함께 있을 때. 사실, 용사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네토 취향이니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여자 쪽이 싫어한다. 한 남자를 다섯 여자가 사랑하는 만큼, 시간 내기 어려운 용사와 함께 있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니까. 일분 일초가 귀하고 소중한 시간이다. 서로 순수한 사랑만 나누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데, 하필 그때 네토가 끼어들면……. 여자들은 아마 하나같이 지금 말고 나중에 오라고 속으로  것이다. 남자가 있는대도 들이대는 놈들은 그 뻔뻔함 만큼이나 끈질겨서 더더욱 싫었다.


"…아!"

그 달갑지 않은 상황들을 떠올리며 눈썹을 찌푸렸던 미라는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얼굴을 활짝 폈다. 집에 거의  왔다.

'무려 2주만에 집에 오는 거니 웃으며 반겨주겠지?'

택시에서 내린 미라는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가며, 떠날 때보다 오히려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을 위한 2주일이었던 것처럼, 가슴이 점점 빨리 뛰기 시작한다.

한 걸음,  걸음.

사실 지금 집에 누가 있는지는 모른다. 용사가 누군가랑 꽁냥대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보다 오랫동안 자기를 못 본 여자는 없으니까!'

당당하게 연인에게 안겨들  있겠지. 정말 오래 참았으니까, 눈치 보지 않을 거야!

미라는 상상만해도 짜릿한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

그리웠던 용사의 집.


대문을 열고,

마당을 지나서,

현관문을 열면….


"자기이!"

문을 열면서 미라가 사랑하는 연인을 불렀다. 집안 전체에 울릴 정도로 크게.

"미라."

"아아!"

놀랍게도, 용사는 현관문 바로 앞에 있었다. 마치 미라를 기다렸던 것처럼.


미라가 활짝 웃으며 용사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여유롭게 생긋 웃거나, 장난스럽게 씨익 웃는 경우는 많아도 이렇게 웃음꽃이 만개하는건, 용사조차도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그동안 내색을 안 했을 뿐, 미라가 얼마나 연인을 그리워했는지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잘 왔어."

"헤헤, 자기. 내가 뭐 하고 왔는지 알려줄까? 으음, 처음부터 다 꺼내들면 재미없으니가 하나씩 천천히…."

용사에게 안겨든 미라가 발로 톡톡 신발을 벗어내고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신나서 소녀처럼 재잘거리던 그녀는…….


"…으응?"

문득,무언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일단. 용사의 표정.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억지로 웃고 있는 것이다.


"자… 자기?"

용사가 이제  이상 미라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그럴 리가 없다.

그나마 합리적인 추측은, 웃어줄 기분이 아닌데 웃는 척이라도 하는 것. 활짝 웃는 미라 앞에서 정색할 수는 없으니까.


…즉, 웃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

"어어…."

만개하는 꽃처럼 활짝 미소를 짓던 그녀의 입꼬리가 점점 내려갔다. 반달 모양으로 휘어져 눈웃음치던 그녀의 눈매가 다시 동그랗게 돌아왔다.

너무 신나서였을까.


눈치채지 못했다.

"………."

지구에 온 이후로, 집안의 공기가 이토록 무거운 적이 없었는데….

"무, 무슨 일이야…."

미라가 고개를 돌리자, 세 사람이 보였다.

지나, 아리스, 델렌.


보통은 집에 여자가   넘게 있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특히,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 지나와 델렌이  다 있다는 것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다들 눈치를 보는 건지 미라의 말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용사 역시 아까부터 계속 침묵하고 있었다. 여자들 중 용사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던 미라는, 그가 기분이 굉장히 안 좋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무거운 침묵. 아리스가 마지못해 눈을 마주친 미라에게 눈짓을 보냈다. 아리스의 눈짓을 따라가보니, 그곳에는….

"레이아? 왜 그러고 있는 거…."

레이아가 있었다. 거실의 구석진 곳에서, 레이아는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모은 자세로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그래도 키도 덩치도 작은 애가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으니 눈에 쉽게 들어올 리가 없었다.


미라의 시선이 향한 순간, 레이아의 어깨가 두어번 들썩였다. 그 모습은 마치….

"…너, 울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무반응이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미라는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깨닫고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안 그래도 큰 눈이 정말 화등잔처럼 커졌다.


미라는 레이아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없었다.  손에… 아니 세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심지어  중 두 번은 기쁨의 눈물이어서 울었다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세상에…."

적당한 해프닝이었다면 미라는 툴툴대면서 얼굴에 철판을 깔고 용사에게 안겨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몸에 화살이 박혀도 그저 인상만 팍 쓰던 레이아가 저렇게 울고 있으니… 그녀 역시 화들짝 놀라면서 레이아를 걱정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엔 불만이 피어났다.


'왜 하필 오늘….'

하루만 더 늦었다면. 용사와 조금이라도 회포를 풀었다면 좋았을 텐데.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미라는 용사에게 많이 갈증을 느끼는 상황이었다. 도도하고 자존심 강한 미라가 이런 철없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녀의 사랑과 그리움이 컸던 것이다.

"하아…."

결국 나오는건 한숨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미라도 지금 상황에 쿨하게 대처했겠지만, 지금 그녀는 용사에 대한 욕망으로 반쯤 이성이 날아간 상태였으니까.

"분위기 왜 이래…."

철없는 투정 같은 그녀의 혼잣말. 하지만 다들 이해하는 건지 별 타박은 없었고, 그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


무겁던 용사의 입이 열린 것은, 시간이 좀 더 흐른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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