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1,009)

“닥쳐, 아다 새끼야.”

웅성거리는 잡다한 소음 속에서 내 귀는 제대로 된 대화의 맥락을 짚어냈다. 멀티태스킹으로 음성을 분류하는 프로그램이 뇌에 깔리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다.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되서인가?’

세크메트 길드의 네페르티티도 숨어 있던 우리를 순식간에 찾아냈었다. 마나를 각성한 전사에게는 그렇게 난이도 높은 일도 아닌가 보다.

“흠. 저래서야 오늘은 일을 구하기 힘들겠군.”

겐트릭 할배가 혀를 내둘렀다. 이쪽 바닥에서 오래 굴렀을 사람이 저렇게 말할 지경이라니. 이러다가 오늘은 일도 못 나가는 거 아닐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런 시즌에는 새벽녘부터 나와야 하려나요?”

가만히 게시판을 지켜보던 프랑이 겐트릭에게 물었다.

“그렇지. 길드 접수원들이 의뢰를 종합해서 게시한 직후를 노리는 것이 빠르다네. 헌데 오늘은 아무래도 늦었나 봐. 수확 개시일이 작년보다 일찍 찾아온 듯 하니.”

프랑의 말에 겐트릭은 그렇게 대답하더니 팔짱을 꼈다.

“그래도 농번기 끝자락에는 의뢰가 없어서 굶을 일은 없으니 괜찮으이. 마침 이 무렵이면 딱 수확 도중일 터이니… 자네들도 해수 퇴치 의뢰를 받아 보는 것이 어떤가?”

“해수 퇴치? 농가의 유해조수 퇴치 얘기십니까?”

“그렇지. 이맘 때의 해수는 농사꾼들의 주적이거든.”

쓰읍. 해수라….

조금 난이도가 높은 의뢰에 나는 고민스러워졌다.

몬스터도 아니고 짐승을 상대로 뭘 쪼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이세계 그린 잼민이에 지나지 않는 고블린보다는 다 큰 멧돼지 쪽이 존나게 더 위험하다.

코볼트-고블린 라인으로 이어지는 좆밥몹은 아딱이들도 맞다이를 까서 이길 수 있는 놈들이다.

선공몹인데다 식용으로 못 써서 몬스터로 분류되지만 앵간해서는 들짐승보다 약하다.

고블린이 레벨 5 정도라고 치면 멧돼지는 15 정도.

상식적으로 잡몹들>짐승이었음 진작에 짐승들 씨가 다 말랐겠지. 몬스터들이 존나 잡아 쳐먹어서 멸종시켜 버렸을 것이다. 자연의 먹이사슬이란 다 그런 식으로 굴러가니까.

“해수 퇴치는 저희 같은 아이언 클래스들에게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게 그렇지도 않네. 사실 정말로 위험한 놈들은 경비대나 사냥꾼들이 미리 쫓아내거나 잡아주거든. 해 봤자 보노디어 같은 작은 짐승이 전부일 게야.”

보노디어는 또 뭐야. 시골 사람들만 아는 이상한 벌레나 뱀 같은 건가. 겐트릭은 말을 하면서 뻐근한 듯이 목을 돌려가며 목 근육을 풀었다.

“모험가들은 그냥 거기 가서 며칠 묵으면서 밭일이나 돕는 거지. 땅 많은 농부들이 자주 쓰는 방법일세. 싸울 일은 거의 없는데 실적은 토벌 의뢰로 들어가니, 농부도 모험가도 득 보는 의뢰라네.”

오호라. 약간 가라치는 느낌으로다가 받는 의뢰구나. 농부랑 모험가가 서로 윈윈하는 극적 타결을 맺은 것이었다. 누가 생각했는진 몰라도 꼼수 한 번 괜찮다. 이세계인들도 얕볼 게 못 되는군.

“괜찮아 보이네요. 그런데 경쟁률이 셀 것 같은데요.”

“전혀. 농가는 오는 일손을 사양하지는 않네. 많이 오면 그만큼 수확에 드는 시간이 줄고, 그렇게 되면 고용비도 줄지 않겠나.”

그런 건가. 10명이서 10일을 하든 100명이서 하루를 하든 농가 입장에서는 돈은 똑같이 드니까.

“거기다 모험가는 대부분이 농민 출신 아닌가. 진절머리 나는 농삿일을 하려 드는 놈은 드물다네.”

“흐흐. 그거 저희한테는 잘 된 일이군요.”

심정은 공감이 갔다. 나도 일일 대학원생 의뢰가 있으면 절대 받기 싫을 테니 말이다.

“프랑 넌 어떻게 생각해? 농삿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나름 괜찮지 않아?”

“일이 언제 있고, 또 며칠인가에 따라서 다르지 않을까? 여관비 손해도 계산해야지.”

“아. 진짜네.”

이 시발 멍청한 노르드 새끼. 대학물 먹은 새끼의 수치 같으니. 나는 프랑의 날카로운 지적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해수 퇴치 의뢰는 의뢰를 넣은 농경지 근처에서 묵는 의뢰였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묵는다는 것은 기껏 내둔 여관비를 1박 당 3쿠퍼 씩 손해보게 된단 뜻이었다.

보수가 얼마나 될 지는 모르겠지만 일당에서 3쿠퍼씩 빼도 될 정도로 높은 보수를 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여관에 돈을 내고 노숙하는 것도 빡치고 말이다.

“뭐야. 자네들 여관비를 몰아서 내나?”

우리 얘기를 듣던 겐트릭이 놀란 듯이 물었다. 나랑 프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요.”

“바보 같은 짓을 하는군. 앞으로는 매일 하루치씩 내도록 하게. 그렇지 않았다가는 일하러 나가서 본전도 못 찾아.”

“쓰읍…. 조언 감사합니다.”

그야말로 연륜의 지혜가 묻어 나오는 어드바이스였다.

사실 그렇게 대단한 발상은 아닌데 우리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밖에 나가서 오래 묵으면서 수행하는 의뢰는 적었기 때문이었다.

‘브람마톤 교수님의 책에도 여관비를 매일 내라는 얘기는 없었는데.’

나는 잠시 지난 시간을 후회했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브람마톤 교수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세상에 완벽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다.

“일단 의뢰가 있기는 한지 찾아 보고 마저 얘기합시다.”

“그러지.”

그렇게 우리의 의견은 의뢰를 받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난 인파를 가르고 게시판 앞쪽으로 갔다. 뚫기 힘들 만큼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나랑 힘으로 비빌 만한 모험가는 없었는지 발을 내딛자 인파가 옆으로 쑥쑥 밀려났다.

“실례합니다. 지나갑시다.”

“아 쫌! 밀지 마쇼! 댁만 의뢰 받소?!”

인파를 가르고 나아가자 징징대는 모험가들도 나왔지만 굳이 신경 쓸 것 없었다. 빼액대는 것들은 무시다. 모험가는 약육강식이란다.

그렇게 게시판 앞에 가서 해수 퇴치 의뢰를 찾아보았다. 그러자 정중앙에 떡 하니 의뢰서가 걸린 것이 눈에 들어왔다.

[농가 해수 퇴치-사르가디스 서문 앞 농지. 일당 5쿠퍼.]

“오, 5쿠퍼.”

“뭐? 5쿠퍼? 어디, 어디?”

옆에 있던 뉘신지 모를 모험가가 내 중얼거림에 반응했다. 난 대꾸 않고 손가락으로 의뢰서를 가리켰다. 그는 내 손끝을 따라갔다가 혀를 찼다.

“쯧. 뭐야, 해수 퇴치 아냐.”

“엉? 너 이게 뭔지 모르냐? 크큭. 그럼 한 번 쯤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것도 다 경험이야.”

새끼 말하는 것 보게. 존나 저딴 식의 미사여구로 치장된 일 중에서 멀쩡한 일이 없는데. 나는 약간 걱정하면서 일행 옆으로 돌아왔다.

“있더군요. 서문 앞 농지, 일당 5쿠퍼요.”

“서문 앞? 그쪽이면 자소작농(自小作農)인 호툴루실 씨의 경작지겠군. 그분 꽤 괜찮은 양반이지.”

“자소작농이요?”

아니 시발, 그것보다 호툴루실이란 게 이름이야? 세상에 사람 이름이 어떻게 저렇담. 키타이 사람인가?

“자소작농이란 영주님의 농경지랑 개인 농경지를 같이 경작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네. 영주님한테 신임받는 뛰어난 농사꾼들을 골라 경작을 맡기고 일부 수확물을 나눠주는 게지. 나도 소싯적에는 거기에 뽑히기도 했었는데….”

마지막에 살짝 옛날 추억에 잠겼던 겐트릭은 짧은 한숨 한 번으로 지나간 영광을 털어버리고 클클거렸다.

“크흐흐. 어쨌든 노르드 자네가 일감을 찾아와 줬으니 이 늙은이는 접수처에 가기만 하면 되겠군. 덕분에 살았네.”

“아니, 머라고요? 세상에, 저 이용당한 겁니까?”

“이용이라니? 도움받은 대신 좋은 의뢰를 추천해 주지 않았는가. 나중에 현지에서 볼 수 있기를 바라겠네. 허허허.”

노련한 프로 아딱이 할배는 그렇게 말하고는 접수처로 가 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프랑이 옆에서 쿡쿡 웃었다.

“노르, 당해버렸네?”

“뭐, 아무렴 어때. 어차피 의뢰는 보러 가야 했잖아.”

나는 혀를 빼무는 프랑에게 그리 대답했다.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겐트릭 할배한테는 저번 의뢰 때 신세를 진 것도 있으니까.

팔짱을 낀 나는 여관비를 냈던 날을 떠올리면서 물었다.

“아무튼 프랑? 너, 여관 비용은 어때? 나는 내일이 갱신일인데.”

“나두 그래. 그러니까 우리 오늘은 딴 의뢰를 하고, 해수 퇴치는 내일부터 가는 편이 낫겠다.”

“그럴까?”

우리는 상의 끝에 오늘까지만 여관에서 자기로 했다. 해수 퇴치는 수확 시기 내내 이어지는 의뢰다. 단기 알바랑 비슷하니까 나중에 가도 늦지 않는다.

“아, 맞다. 프랑? 우리 여관도 하나로 통일할래? 방까지 합칠지는 생각을 좀 해 보더라도, 여관은 같은 곳으로 하는 편이 낫잖아. 매번 얼굴 보러 왔다갔다 하기도 힘들고.”

내가 그렇게 말했더니 프랑은 생각을 하다가 대답했다.

“으음…. 그 얘기는 나중에 천천히 다시 얘기하자. 여관을 옮기게 된다면 베이냐 씨한테도 인사드려야 하고, 어느 쪽 여관이 더 나은지 비교도 해 봐야 되니까.”

“알겠어. 그럼 이제는… 오늘 할 의뢰나 찾아보자.”

존나 시발 다시 원점이네. 내가 어깨를 떨구자 프랑이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그 뒤로 나랑 프랑은 게시판의 의뢰를 선별해서 약초 채취 의뢰를 받았다. 마법사 길드에 정기적으로 납품하는 의뢰였다. 내가 캔 약초가 티르시네 랩실로 갈지도 모르겠다.

의뢰는 내가 프랑의 산나물 채취 능력에 버스를 타는 느낌으로 진행되었다.

프랑은 거의 베어 그릴스 뺨치게 숲을 누벼대며 약초와 여러가지 산나물을 캐냈다. 우리 여친님 혹시 진짜로 엘프 반 드워프 반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노르! 이것 봐! 앙베리 버섯이야! 이거 구워먹으면 엄청 달고 맛있다?”

“버섯이 달다고? 대체 왜 그런 버섯이 존재하는 것이지?”

아무튼 약초 채취 의뢰는 트러블도 없었고 데이트 느낌이 나서 꽤 즐거웠다.

시종 날벌레가 날아들어서 살짝 귀찮기는 했지만 말이다.

다음날 아침에 나랑 프랑은 의뢰를 받아 길을 나섰다.

해수 퇴치 의뢰에 나선 모험가는 4명이었다. 나랑 프랑, 그리고 아재랑 젊은 남자로 구성된 파티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나서서 인사를 했다. 원래 아딱이들이 퇴치 의뢰를 나갈 때는 브론즈 클래스 모험가가 파티장을 맡아야 하지만, 일의 특성 상 오늘은 없다.

해수 퇴치 의뢰는 단기 알바처럼 매일 여러 모험가들이 들어갔다가 나갔다가 하는 식이다. 아마 브로즈 클래스 한 사람이 대표격으로 농경지에 대기 중일 것이었다.

“어차피 가서 일하다 보면 얼굴 볼 일도 별로 없을 테니, 자기소개는 생략하는 게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내 말에 중년 남자랑 짧은 머리 청년이 동의했다.

까놓고 말해버리면 오늘 우리는 파티라고 하기도 뭣한 사이였다. 택배 포장 알바를 나가서 오늘 하루 같이 일하는 사람이랑 매번 통성명을 하지는 않잖은가.

서로 목숨을 맡길 사이도 아니니까 얼굴만 알고 넘어가기로 했다. 우리 4명 외에도 농경지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 다른 아딱이들도 있을 거다. 자기소개는 무의미하다.

우리는 대충 인사만 나누고 곧장 농경지를 향했다.

이세계에서 농지는 성벽 밖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성벽으로 농지까지 둘러싸기에는 돈이 많이 들어서 그렇다.

“아이언 클래스 모험가 일행? 지나가시오.”

언제나처럼 문을 지키는 경비병에게 보고를 때리고 서쪽의 성문을 통해서 바깥으로 이동한다.

우리 파티는 대열조차 갖추지 않고 산책하듯이 걸었다. 성문 근처에서 트러블이 벌어질까 무서워 할 정도로 쫄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쏴아아아─.

서문 바깥으로 나오자 멀지 않은 곳에 밀밭이 보였다. 꼭 돌담과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황금색 초원 같았다. 거의 지평선 근처에까지 뻗을 정도로 큰 농경지였다.

“와…. 여기 논밭 참 넓다.”

프랑이 농지 옆에 트인 길을 걸으면서 말했다. 나는 프랑의 놀라는 얼굴을 즐겁게 관찰하면서 대답했다.

“그러게. 이렇게나 넓어서는 농노들 수십 명한테 시켜도 수확에만 몇 주는 걸리겠다.”

수확철 안에 전부 수확하기 위해서는 농노를 백 명 단위로 굴려야 할 판이었다. 수확 시기 때마다 단기 알바를 쓸 만도 했다.

휘이잉─.

가을바람이 불자 프랑이 추운 것처럼 목을 움츠렸다. 내가 손을 내밀자 프랑이 내 손을 잡았다.

손을 잡은 우리는 실실대며 밀밭 옆 길을 걸었다. 앞장 서서 걷던 중년 아재가 눈꼴 시렵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좆도 개의치 않았다. 커플이란 원래 공공장소에서 미풍양속을 해치는 유해조수의 일종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아무튼 여기처럼 무지막지하게 넓은 밭을 보니까 약간 고향 생각이 났다.

‘농부인가.’

21세기의 사람들에게 농부란 어떤 이미지일까.

까놓고 말해서 그다지 대단한 직업이라는 인상은 없을 것이었다. 맞선 상대의 직업이 농부라면 여자 측은 별로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고, 남자도 그걸 알기에 약간 움츠러들면서 자기소개를 하겠지.

하지만 농부는 대단한 직업이었다.

일도 고되고 매년 풍작 흉작에 수입이 좌우되는 빡센 직장이지만, 그래도 농부 분들은 나라에 쌀을 공급해주는 중요한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나는 농민 여러분들을 늘 존중했다. 절대로 우리 친가가 농삿일을 해서 그러는 건 아니고.

아무튼 이렇듯 농부 분들을 존경하는 나이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농장이라는 곳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커다란 농장은 진짜로 존나 크다. 아예 스케일이 다르다.

비닐하우스가 늘어선 토지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웅장해진다. 아예 미국 중부처럼 땅덩이 넓고 축복받은 농경지는 농경지 면적이 한국 영토보다 넓다고도 하니까.

그게 아니어도 최저 임금으로 월 200 버는 나랑은 비교도 안 되게 부자인 농민도 많다. 우리 친할아버지도 꽤 넓은 집에서 풍족하게 사시던 걸로 기억하니까.

세계에서 가장 스케일이 큰 미국의 농민들은 어지간한 사업체보다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

그런 사람들은 농기계도 개쩐다. 존나 크고 멋진 것이 거의 농사용 탱크다. 아마 좀비사태가 터져서 아메리칸 카우보이 좀비가 창궐해도 트랙터로 밀어서 사태를 종식시키는 것이 가능하겠지.

같은 이치로 이곳 이세계에서도 넓은 농경지를 가진 사람은 상응하는 권력자였다.

사르가디스는 유적이 많이 출토되는 점을 빼고 보면 평범한 영지다. 주요 수입원이 농업이었으므로 땅부자이자 부동산 부자인 농사꾼들은 이세계판 건물주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농장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넓은 경작지의 농장주는 살찐 귀족처럼 생겼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농장주랍시고 나타난 새끼는 무려 엘프였다.

“농사꾼인 호툴루실이다.”

짤막하게 지 이름만 읊고서 자기 소개를 퉁쳐버리는 수컷 엘프.

나는 얼탱이가 없어서 뭐라 반응하지도 못했다. 아니 시발, 대체 왜 엘프가 농삿일이나 하고 있는데. 엘프란 새끼들은 자연을 사랑하고 애끼는 게 국룰 아니었나?

농삿일은 풀떼기를 길러서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 엘프에게 농사는 살인이다. 아니면 키타이 쪽 엘프라서 자연존중 따위 개무시 해 버리는 것인가?

“자기소개는 굳이 하지 않아도 좋다. 상세한 의뢰 내용은 의뢰서에 적은대로다. 다만, 돌아가기 전날 저녁까지는 복귀할 거라고 보고를 해 줘야 한다. 이 점을 명심하지 않으면 당일 임금 지불 절차에 지장이 있으니니 유의하도록.”

담담하게 업무 설명을 하는 호툴루실.

대갈통에는 큼지막한 밀집모자를 쓰고 민소매 조끼만 입고 있다. 그야말로 밀집모자 좆프.

훤칠하게 생긴 놈이 밀밭을 뒤로 하고 그렇게 서 있으니 나름 잘 어울리기는 했다.

엘프란 족속이 얼굴천재 종족이긴 하다. 와꾸 원툴만 믿고 살아가도 굶어 뒤지지는 않을 법한 놈들 말이다.

그치만 호툴루실은 찰랑거리는 금색 생머리랑 울끈불끈한 팔근육의 미스매치가 실로 쌉게이 같았다.

게이 혐오 발언은 아니다. 내가 단발 여자한테는 편견이 없는데 장발 남자한테는 편견이 좀 있긴 한데, 이건 저 새끼가 엘프로 태어난 것이 잘못이다.

존나 등에 맨 막대는 또 뭐지? 노예들을 학대할 때 쓰는 회초리인가?

“오늘 너희들을 고용한 이유는 농작물을 파헤치는 해수를 퇴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기하는 시간 동안에는 농삿일을 도와주면 고맙겠군.”

호툴루실이 말했다. ‘도와준다면 고맙겠다’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농삿일을 안 돕고 해수 퇴치만 하려고 들었다가는 의뢰비를 못 받는댄다.

왜냐하면 도시 근처까지 유해조수가 농작물을 조지러 오는 일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모험가가 의뢰 대상인 유해조수를 잡지 못하면 농장주는 이런 핑계가 가능해진다.

─그래서? 부탁했던 해수는 잡았슴? 못 잡았자너. 그럼 의뢰비 못 주는뎅.

존나 틀린 말은 아니라서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

농장 경비 의뢰였다면 하루 종일 가만히 서 있기만 했어도 돈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해수 퇴치’ 의뢰였다.

퇴치 의뢰를 받아놓고 아무 것도 못 잡았으니 의뢰 보수를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참고로 딴 데서 해수를 잡아와서 의뢰를 수행했다고 주장해도 안 통한다.

─농작물을 망치는 새끼들을 잡아달랬지 누가 숲에 있는 놈을 잡아 달랫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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